www.youtube.com/watch?v=ibZ0wpPG3nM
◈시험은 기회다 약1:1~5 19.12.16. 출처
삶은 시험의 연속입니다. 시험이 없으면 좋겠는데..
시험을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시험은 불청객입니다. 원하지 않는데 계속 우리 삶에 찾아오는 불청객!
오늘 본문에 보면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약1:2
여기서 ‘시험’은 temptation(유혹)이 아니고 trail (시련)입니다.
즉 시련, 고난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여러 가지 시련을 만나거든..’ 이란 뜻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디아스포라)에게 *약1:1
그 초기에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핍박이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핍박이 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 그 순간부터 난관을 예상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시험(시련)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요즘 같이 기독교인들이 점점 희소해져가는 젊은이들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학교, 직장, 각종 모임에서 불이익을 당하기 쉽고
여러 손해를 볼 때가 많습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우리 인생은 그 본질이 광야길입니다.
광야는 시련 투성이입니다. 위기가 늘 다가오고, 광야는 살기가 까다로운 곳입니다.
거칠고 하루를 버텨내기 어려운 곳이 광야입니다. 우리 인생이 광야와 같습니다.
약1:2 ‘여러 가지 시험’이라고 했습니다.
각양각색의 시험이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마치 색깔이 다양한 것처럼, 우리가 당하는 시련의 형태도 가지각색입니다.
▲성경은 시험을 없애주겠다는 약속을 한 적이 없습니다.
문제는 이 시험(시련을 의미)이 어떤 사람에게는 축복이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똑같은 시험이 불행이 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눈 여겨 볼 것은, 시험을 당할 때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여러 가지 시련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1:2
시련을 당할 때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말씀은 참 이해하기 힘듭니다.
‘온전히’라는 말은 ‘기뻐하려고 애를 쓰는 척하는’ 정도가 아니고
정말 진심으로 기뻐하라는 뜻입니다.
왜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시련을 기쁘게 여길 수 있을까요?
1:3~4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시험을 통과하고 난 다음에 주어질 결과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1:4
축약하면 ‘시련을 이겨내면 우리로 성화에 이르게 한다’입니다.
‘온전하고 구비하여 부족함이 없는’ 상태는,
다시 말하면 ‘시련을 통과해서 성화에 이른다’는 말입니다.
‘성숙 mature’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 ‘온전’의 헬라어 teleios가 온전 perfect, 성숙 mature 이란 의미를 모두 가집니다.)
이것이 성화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입니다.
영적으로 성화에 이르면, 우리의 삶에 많은 (자기 미숙함과 범죄의 결과로서의) 문제들이 해결됩니다.
우리가 왜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느냐면
어떤 영적인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주님은 우리를 시련 가운데로 몰아넣느냐?
성화의 삶이 시련을 통과하면서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냥 편안하게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고생하는 많은 일들은
이 성화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들이 그렇습니다.
육체적으로 어리니까 늘 넘어지고, 무릎이 깨지고 그럽니다.
그런 아이들이 성장하고 난 다음에는 잘 걸려 넘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아기들은 쌀쌀한 날씨에 바깥에 내놓으면 금방 감기에 걸립니다.
아직 어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화를 온전히 이루면, 우리에게 찾아오는 어떤 문제도 녹여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성화의 힘은 대단합니다.
그것을 우리가 구체적으로 바울에게서 그런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는 초월적 삶을 살았습니다.
빌4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어떤 경제적 형편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그 모든 형편과 상황을 이겨내는 힘을 가집니다.’ 빌4:11~13
이것이 성숙한 성화의 단계에 이르렀을 때 일어납니다.
물질의 어려움이 있든지/ 없든지 상관없이
그것이 내 삶에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이미 성숙한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물질의 세계를 초월해내는 초월적 삶이 그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이란, 단순히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삶속에 주어지는 수많은 시련을 통하여, 그 과정을 통과하면서
내 믿음이 정금같이 빚어지면서, 점점 더 성화에 이르러
영적인 깊은 고지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일례로, 올챙이가 일평생 올챙이로만 있으면 물에서 헤엄치는 자기 세계 밖에 모를 것입니다.
자기가 개구리가 되어서 높이 점프해서 뛰어다니는 그 세계가 있는 줄 알아야 되는데요..
올챙이는 지금은 물속을 헤엄치고 있지만, 언젠가는 높이 점프하는 개구리가 되는 것을 꿈꾸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 영적인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역시, 지금의 나와 전혀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짐작하기 힘들더라도, 꿈꾸고 기대하고 기다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상태..(약1:4)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영적 성숙의 마지막 목표 goal 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그 수준에 도달하는 길은.. 바로 고난이라는 거죠.
그래서 너희는 여러 가지 시련을 만나지만 온전히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그 성화와 온전의 단계에 도달하라고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시련을 허락하십니다.
시련이 없으면 좋겠는데,
시련이 없으면 우리는 성화의 과정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고 산다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의 시련을 통해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삶으로 인도해 가십니다.
마치 땅 위를 기는 애벌레가 나비가 되어 하늘을 날아 오르는 것 같은..
여러분, 땅바닥에서 기어다닐 때는 막 흙이나 돌에 부딪히지만
비행기가 하늘을 날듯이 나비가 되어 날아오르면 걸리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하늘 구름 위로 비행기가 날아오르면 전봇대도 없고 신호등도 없습니다.
이 땅 위로 다니는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세계입니다.
성화와 영적 성숙의 단계가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시험이 들고 이런 시련, 저런 시련이 끊이지 않는 것은
아직도 내가 상황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누가 내게 한 마디 툭 던지면, 집에 와서 막 앓아 눕고, 잠이 안 오고...
그게 뭐에요? 아직도 내가 환경과 상황에 지배를 받고,
주위 사람에 지배를 받고, 말에 휘둘린다는 뜻입니다.
또 이 시대의 문화에 지배를 받아서 고통을 당하기도 하고
가치관에 지배를 받아서 (안 받아도 될) 시련을 당하기도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과 같은 가치관, 문화, 생각을 하고 살아가니까
기독교인으로서의 그 신앙적 갈등과 시련을 이겨낼 길이 없는 것입니다.
신앙이 아직 바닥에서 기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면서도!
우리에게 고통을 주고 어렵게 만드는 일은
우리가 아직도 날아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적 성숙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신비한 그 세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그 신비함을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신앙의 성숙의 길로 가는 길에 시험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현실적으로 우리가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다는 겁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우리에게 이런 요구를 하는 거죠.
약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여기라 consider, count’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이 단어의 헬라어 어원(헤게오마이)은 ‘주도하다’입니다.
우리가 잘 쓰는 헤게모니(주도권) 라는 단어가 나왔죠.
행렬이 막 이어져 갈 때, 가장 앞에서 이끄는 사람을 일컬을 때
‘헤게모니를 가졌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러니까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말씀의 뜻은 :2
그 기쁨이 우리의 모든 생각을 주장하고, 이끌도록 하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행위 이전에 생각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시련을 당할 때 온전히 기뻐하는 그) 생각이 우리를 주도하고 이끌어가게 해야 합니다.
오늘 이 설교의 중요한 키워드는 ‘생각’입니다.
여러분, 생각이 중요한데 이 생각에 영향을 주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생각에 영향을 미칩니다.
사실 생각(사고)의 변화가 진짜 변화입니다.
교회는 10~20년 다녔는데, 생각이 변하지 않은 사람은
계속 우리는 세상의 낮은 차원에서 영향을 받고, 세속적인 영향 안에서 머물러 있게 됩니다.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영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먼저 생각(가치, 믿음)이 변해야 되는 것입니다.
생각이 내 삶을 주도해 나가는 것입니다.
일례로 ‘시련을 당해도 기쁘게 여기는 것’입니다.
기쁨이 내 삶을 이끌어 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참 힘든 게 뭐냐면, 생각이 잘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기는 하겠는데, 생각(신앙적 가치관)이 바뀌는 것은 어렵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이 왜 잘 바뀌지 않는가 하면,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그 생각, 가치관들은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50대라면, 50년 동안 형성된 견고한 세상 문화와 가치관이 있습니다.
그건 아주 강력한 진지와 같습니다.
나이가 많아질수록, 그 생각이 더욱 견고하게 굳어진 철옹성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내 삶도, 자세히 보면 어제까지의 내 생각, 가치관의 결과입니다.
이게 헤게모니입니다. 내 생각이 내 삶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내 행동을 끌고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에 어떤 학력, 능력, 조건에 따라 결정되지 않고
그보다 더 중요한 요인은 ‘생각’입니다.
생각이 신앙적 가치관으로 바뀌면 인생이 바뀌어집니다.
그래서 우리 삶에 일어난 문제, 여건, 환경보다
사실 우리 삶을 더욱 더 큰 능력으로 지배하는 것은 내 생각(믿음의 생각)입니다.
내 (믿음의) 생각에 따라 사건이나 문제를 전혀 다르게 펼쳐지게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요즘 보면, 우리가 육체적 장애도 불편하지만
어떤 면에서 육체적 장애보다 정신적인 장애가 훨씬 더 자기 삶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여러분, 생각의 힘이 중요한데!
믿음 생활은 생각을 바꾸는 것이고, 신앙적 생각의 힘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의 생각으로 어려움을 이겨내게 만드는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하는 모든 행위 속에
우리 생각 안에 변화가 일어나고,
우리 생각 안에 믿음이 작동되고,
이 생각은 우리의 관점과도 연관됩니다.
어떤 관점을 가지느냐에 따라 생각이 달라지는 거거든요.
생각의 전환을 해야, 시험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이 변화는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요?
믿음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생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믿음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평범한 사람들과의 차이는, 딴 게 아니라 생각의 차이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다소 엉뚱하게, 허황되고, 미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믿음의 생각을 가져서 그랬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보는 관점으로는 미친 사람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진실한 신자들은 전부 미친 사람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이 밤에 잠도 안 자고 와서 밤새워 기도하는 사람들이.. 정상적으로 안 보이는 거죠.
아니면 ‘철야하면 교회에서 뭐 주나?’ 이렇게 물어봅니다.
관점의 차이입니다.
초대교회에서 예수 믿었던 사람들은 그 시대의 미친 사람들이었습니다.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그런 판단이 나오는 거죠.
▲여러분, 믿음으로 생각이 변한다는 것은.. 시련을 만나도 긍정적인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싸움은 여기에서부터 일어납니다.
이것을 의도적으로 신앙 훈련을 해야 됩니다.
우리 안에는 세속적, 부정적인 사고들이 굉장히 많기 때문입니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굉장히 부정적, 비관적 생각들이 굉장히 많이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믿음을 얘기해도, 내 안에서 의심하고, 두려워하고,
폐쇄적이고 부정적이고 시니컬하고...
링컨의 어머니가 그랬다고 합니다.
‘부정적인 사람과는 상종하지 말라. 그들은 병균이다’
부정적인 생각이 주는 치명적인 영향을 그가 보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람들마다 생각의 틀이 잡혀져 있습니다.
틀 frame 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이게 잘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5병2어 때 수많은 무리들이 운집해서 말씀을 듣고 난 후에
해가 질 때 배가 고픈 저녁 시간입니다.
그때 빌립이 본 것은 ‘아무 것도 먹을 게 없다’는 현실입니다.
그리고 불가능함을 확신하기 위해서 그는 계산에 충실했습니다.
계산해보니 2백 데나리온의 떡이 있어야 되는데, 현실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제자 안드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 아이가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가져왔지만 ‘이게 이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되겠습니까!’
두 제자 모두 비관적, 절망적, 부정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우리 인생에 가장 절망적인 것은, 우리의 절망적인 생각입니다.
절망적인 상황이 아닙니다.
절망적인 상황이 절망적인게 아니고, 절망적인 생각이 절망적입니다.
▲12제자를 부르신 것을 보면, 하나 같이 문제와 부족 투성이였고
연약한 사람들이었고, 예수님의 눈에 그런 인간적인 모습이 보이지 않았을 리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절망하지 않고, 그들을 통한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사실은 마태복음 마지막에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고 말씀하실 때
그 제자들의 상태는 정말 볼품없는 제자들이었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 볼품없는 제자들, 실수투성이인 제자들, 소수의 그 제자들을 통해서
모든 민족이 예수를 믿고 제자가 되는 환상을 보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관점입니다.
그 관점 안에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믿음의 훈련이 뭐냐?
99%의 불가능보다는, 1%의 가능성을 보려고 하는 태도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제자들을 대하신 태도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매일 우리가 믿음으로 생각하는 훈련을 통하여
‘관점’(생각, 가치관)을 바꾸는 은혜가 있어야 됩니다.
말씀을 들을 때, 잘 듣고 아멘으로 반응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게 우리의 생각을 계속해서 바꾸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거든요.
(생각의 변화는) 한 순간에 일어나는 게 절대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는 그 어둠이,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했던 실패의 생각들이
그리고 우리 삶에 어려움을 겪었던 많은 경험들이
우리 속에서 나를 옭아매고 부정적, 소극적으로 만들고, 비관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믿음의 생각으로 바꿔놓는 작업들,
▲여러분 목회도 보면, 1백명을 목회하는 것이 어려울까요,
1천명 목회가 어려울까요, 아니면 1만명 목회하는 것이 어려울까요?
저는 다 똑같다고 봅니다.
왜냐면 어차피 목회는 내 힘으로 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힘으로 하면, 인간의 힘으로 하면, 백 명도 어렵고, 30명도 힘듭니다.
그러니 1천 명은 아주 힘듭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하면, 1백명이나 1천명이나 1만명이나 똑같습니다.
믿음의 관점에서 보느냐, 아니면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의 관점! ‘하나님, 이 밤에 믿음의 관점을 가지게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관점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가 생겼을 때는, 염려에 빠지지 말고, 믿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됩니다.
그래서 철야기도회에 와서 딴 것 없습니다.
믿음이 일어나고, 활성화되고, 우리 안에 더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내 속에서 일어나면, 자동적으로 염려는 사라지는 거죠.
여러분, 믿음을 키우는 것이 딴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여러분, 성경속에는 우리 믿음을 북돋아주는 말씀 구절들이 수두룩하게 나옵니다.
그래서 요즘 우리 교우들이 카드를 만들어 성경암송을 하는데요,
365구절, 1천구절 암송을 할 터인데,
그런 구절들이 다 우리에게 힘을 주는 말씀들이거든요.
그 말씀을 암송, 묵상, 선포하면.. 거기서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약1:3절입니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는 줄을 너희가 앎이라’
믿으면 시련이 생기게 됩니다.
그 시련을 통해서 인내를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시련을 통하여 우리는 인내를 배워야 됩니다.
인내는 경험해보기 전에는,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인내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다는 거죠.
그냥 내가 깡으로 이겨낼 수 있는 게 아니라 믿음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시련 속에서 더 빛이 나게 된다는 거죠.
여러분, 이렇게 믿음이 증대될 때 일어나는 현상은
사건이나 어떤 문제보다, 하나님을 더 온전히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바라보면 모든 게 편안해 집니다. 이유가 뭡니까?
안경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바라보는 것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관점이 달라지니 해석이 달라지고,
해석이 달라지니 내 마음에 이전과 다른 평안이 찾아오고...
두려움이 사라지고, 염려가 사라지고...
관점이 달라진다는 것은 하나님이 바라볼 때, 우리 안에 하나님이 이루실 것을
미리 바라보는 것이죠.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승리는, 이미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이 좋을 때는 말씀을 읽고 들을 때 의심이 일어나지 않고
전부 있는 그대로 믿어집니다. 믿음이 좋을 때 놀라운, 이 상승작용이 일어납니다.
믿음으로 성경을 읽으니까 팍팍팍 들어오고 이해되고 믿어지고 아멘이 나옵니다.
그냥 말씀이 살아 꿈틀거리고...
믿음이 없으면, 성경을 읽으면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습니다.
재미가 없습니다. 또 이해도 안 됩니다. ‘야, 이해 안 되네...’ 합니다.
믿음이 없으니 현실 상황이 제대로 이해되지도 않고, 감사가 될 리도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우리의 관점이 달라지면, 시험을 다르게 봅니다.
시험이 와도, 그 시련 때문에 걱정하지 않습니다.
막연한 불안감, 부정적 생각이 사라집니다.
전혀 다르게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가지게 되는 거죠.
여러분, 믿음은 문제의 한 가운데서도 전혀 다르게 살아가는 역사를 허락하십니다.
믿음으로 장애물에 대한 생각과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장애물을 만나면 뛰어넘습니다. 장애물 자체가 문제가 아니거든요.
여러분의 인생에 중요한 것은, 예측불허의 장애물들이 나타는 것입니다.
잘 달리는 것도 좋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장애물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넘어가면 상이고, 넘지 못하면 실패입니다. 장애물 경기와 같습니다.
오늘 우리 삶에 끊임없이 장애물들이 밀려오고 또 밀려오는데
평소에는 신앙이 좋게 보이다가도,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은
신앙이 좋은 게 사실 아닙니다. 뛰어넘는 사람이 진짜 믿음의 사람입니다.
공부는 잘 하는데, 시험보면 점수가 안 나온다는 학생이 있습니다.
사실 그는 공부 못하는 학생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늘 재수했습니다. 늘 유급이었습니다.
광야라는 장애물을 통과하지 못하는 거죠.
그들은 늘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그것은 상황을 뛰어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상황을 뛰어넘으면 감사가 나오거든요.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를 오해하고, 다르게 해석한 것입니다.
최선의 인도를 최악의 상황으로 오해한 것입니다.
◑‘사람’으로 인한 장애물도 있습니다.
힘든 환경도 우리를 가로막을 때가 있지만
때로는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우리 인생에 장애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 시련을 기회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능히 통과했습니다.
성경은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지 않지만, 요셉은 시험을 대하는 관점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기회로 보았다는 거죠. 그 시련을 믿음의 눈으로 볼 줄 알았다는 거죠.
믿음의 눈으로 보면, 시련과 장애물을 태클이나 장애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도약의 기회로 봅니다. 내 성화의 도약!
요셉의 형들은 자기를 애굽의 노예로 팔아넘긴 자들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눈으로 보니까 형들은 애굽의 유학길을 열어 준 은인들이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자기가 노예로 고생하고 사는 게 아니고
그 이역만리에서 먹고 살 수 있도록 보살펴 준 집인 것입니다.
큰 문제를 일으키긴 했지만, 보디발보다 자기를 더 보살펴 주었던 보디발의 아내,
그 때문에 감옥에 가게 되었지만 그 감옥은 관직 등용을 위한 특별대기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에게 피해를 입혔던 그 한 사람 한 사람, 사건 하나가 모두
요셉이 총리가 되는데 있어서 빠져서는 안 될 일등공신들이었어요.
본인들은 그런 생각을 하고서 저지른 일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은인들이 된 셈입니다.
▲여러분, 지금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 혹은 환경이 있습니까?
남들이 잘 경험하지 않는 일들로 고통받고 계십니까?
지금이야 말로 무엇을 할 때 입니까? 감사해야 할 때입니다.
굉장히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감사하십시오.
그 일로 감사헌금도 드려 보십시오. 그게 이기는 길이니까요!
교인들이 감사헌금 드리는 내역은, 생일 감사, 주택 감사, 무사히 여행 마침 감사,
건강 주셔서 감사, 승진 감사.. 등등입니다. 이런 제목도 좋죠.
그런데 이런 감사도 해 보세요. ‘하나님 원수가 한 명 생겨서 감사드립니다.’
‘지속적으로 모함을 받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기기 위해서입니다.
‘사업체가 계속 적자가 되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하는 일마다 다 막히고 악화됨으로 인해 감사드립니다.’
‘더 이상 내려갈 길이 없을 정도로 나를 낮추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 각자의 삶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있습니다.
그 시련, 고난, 장애물은 그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져가는 과정의 일부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장애물을 통과하는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믿음은 시련을 겪게 되고, 그 과정에서 믿음은 더 정금같이 됩니다.
우리의 생각과 반응을 통하여 우리를 단련시켜 가시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물을 만들어 가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어렵게 만드는 문제, 나를 어렵게 하는 사람,
감사하십시오!
한 달이 아니고, 몇 년 동안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건 나를 굉장한 인물로 만들 가능성이 큽니다.
보통은 한 달 나타났다가 사라지는데, 몇 년이 지속되니까 그렇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그건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증거가 됩니다.
하나님이 나에 대한 놀라운 계획이 있으신 것입니다.
보통 사람은 그렇게 오래 동안 지속적으로 힘들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환란과 고통은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시는 통로입니다. 약1:4
우리는 부인하고 싶지만, 우리에겐 불순물이 많습니다.
그 불순물, 노폐물이 우리 영혼에 깊이 배여 있어서 쉽게 빠지지 않습니다.
이게 그냥 쉽게 벗겨지면 시련이 사실 필요 없습니다.
용광로가 왜 필요합니까?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서이죠.
그런 것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를 쓰실 수 없는 거죠.
우리가 온전해지기 전에는, 축복을 받으면 오히려 그 축복이
나를 넘어지게 하는 계기가 됩니다. 축복이 축복이 아닌 결과를 가져오는 거죠.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는 광야가 필요한 것입니다. 불가피한 것입니다.
쉽게 성화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성숙은 한 순간의 기적으로 되지 않아요.
나를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한다고만 되지도 않습니다.
반드시 성화의 과정이 필요한데, 시련을 통해서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을 힘들게 하는 환경이나 사람에 대해서 원망 불평하지 마십시오.
그 속에 하나님의 계획이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큰 그림을 보는 눈을 가지십시오.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큰 장애물을 뛰어넘는 경험을 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어떤 장애물이라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 문제를 통과하면 또 다른 문제가 또 옵니다.
괴롭히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피하면
다른 곳에 가면 그런 사람을 또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번에는 더 험한 사람을 만납니다.
이 구역에서 저 구역으로 옮겼는데, 거기 가보니 더 놀라운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도 여호와 이레입니다.
여러분, 피한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거기서 승리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광야가 40년 동안 계속 지속될 것입니다. 돌고 도니까요.
계속 한 자리에서 뺑뺑이를 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장애물을 내게 허락하시는 것은 걸려 넘어지라고 주신 게 아닙니다.
뛰어넘고 극복해서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반복해 나가면서 결국 성화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웬만한 장애물을 만나게 되어도 걱정도 안 합니다. 안달하지 않습니다.
‘넉넉히 이기느니라’ 믿음의 성숙에 이르는 것입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을 때, 우리가 해야 될 일은
그 사람에게 시선을 집중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자주 실수하는 것은, 나를 힘들게 하는 상황,
나를 힘들게 하는 그 사람에게 내 시선을 고정시키는 일입니다.
아픔을 주는 그 현실에 내 눈을 고정하고 있으면,
이길 장사가 없습니다.
우울증이나 불면증에 걸린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의 특징이 뭐냐면 한 가지 문제에 계속 집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것을 전혀 보지 않고, 꼼짝도 하지 않고 하루종일
그 일에만 고정하고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면서
시선을 오직 그 한 곳에만 고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울증이 도적처럼 찾아오는 것입니다.
시선을 하나님께로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아픔이 있으면 그 아픔을 계기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어려운 환경이 닥칠 때, 그 일을 계기로 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가능한 빨리 우리 시선을 하나님께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가 뭡니까? 하나님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언제까지 해야 됩니까? 어려운 환경이나 사람이
나의 시선을 사로잡지 않을 때까지 계속해야 됩니다.
하나님께 시선을 집중할 때까지!
왜 성경을 읽습니까? 하나님께 집중하기 위해서입니다.
믿음이 뭡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내게 닥치는 모든 시련을
믿음의 시각으로 해석하여, 축복으로 바꾸는 그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십시다.
이렇게 성화되고 성숙된 요셉이 총리가 되었을 때,
양식을 구하러 애굽에 내려온 형들을 보았을 때, 반쯤 죽여놓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용서합니다. 이것이 정금같이 빚어진 인격입니다.
닥치는 고난을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통과한 결과입니다.
요셉은 그 고난에 피해자가 되지 않고, 고난의 상처의 진물을 빨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승화시키고,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되어서
원수 같은 자기 형들을 넉넉히 품고, 그 가족까지 다 불러서 고센 땅에 정작하여
히브리 민족의 태동케했던.. 그 놀라운 구원의 역사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와 시련이 닥치면, 이번에는 그 놀라운 기회를
꼭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시련을 통해 인내를 온전히 이룰 때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은혜가 약1:4
여러분들께 임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