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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중언어 심리패턴 눅8:13 2020.10.25. 출처
눅8:13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
<나의 이중언어 심리패턴>이란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함께 나눕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이 돌밭은 ‘이중언어 bilingual 심리패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비유는, 하나님 말씀에 반응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예수님께서 패턴화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설교시간에나 듣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기억속에서 늘 듣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이 말씀은
바꾸어 말하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추구하라는 말씀입니다.
<나>는 몸으로 만나는 이 <세상의 상황>과
그리고 <말씀>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
이렇게 삼각관계 안에 놓여 있습니다. *나 -세상 상황 -말씀 의 삼각관계
이 삼각관계 안에서 영이신 하나님이 실제로 거하시는 장소는
‘말씀’입니다.
소설가의 글 속에 소설가의 정신이 들어있듯이
영이신 하나님, Spirit으로서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할 때, 나와 거하시게 됩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사람들의 마음이 반응하는 심리상태를
예수님은 네 가지로 패턴화 하셨습니다. *씨뿌리는 비유의 네 가지 밭
우리 심리상태를 이렇게 네 가지로 분류해서 패턴화 하신 이유는 뭘까요?
우리의 심리상태를 늘 우리 스스로가 감시 감독하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길가 밭 같은 사람이라도 왜 감시해야 되냐면
영구히 길가 밭일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얼마든지 지금 현재 길가 밭이라 하더라도 옥토로 바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감시하는 것입니다.
▲내가 내 마음을 감시한다는게 무슨 뜻인가요?
롬7장에 바울은 ‘내가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안에서 하나의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나를 내 지체안에 있는 죄의 법에 포로로 잡아가는 것을 본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자기가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감시(감독)’이란 이런 것입니다.
지금 나의 심리상태에 휩싸여 버리는 게 아니라
심리상태를 바깥에서 객관화시켜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나는 지금 몹시 두려워’ 하는 것과
‘아 내가 지금 몹시 두려워하고 있구나’ 하는 것은 다릅니다.
‘내가 몹시 두렵다’는 것은 두려운 심리상태에 휩쓸려버린 것이고
‘내가 두려워하는 구나’하는 것은, 내가 지금 두려워하고 있는 것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또는 ‘나는 정말 기뻐’ 하는 것과
‘아 내가 정말로 기뻐하고 있구나’라는 것과는 약간 다릅니다.
이렇게 나를 객관화시켜서 늘 감시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매 상황에서, 그 현실을 보지 말고, 말씀을 묵상하라는 것입니다.
지금의 나 -- 돈 없는(몸 아픈, 자녀 문제인) 현실 -- 말씀의 삼각관계 속에서
내가 -- 말씀과 짝을 이루어야지 (이 사람은 옥토)
내가 -- 현실과 짝을 이루면 (이 사람은 길가, 돌밭, 가시밭) 결실을 맺지 못합니다.
예를 들면, ‘아, 내가 돈이 없다고 이렇게까지 불안해 하는구나! 말씀에 뭐라고 되어있지?’
‘아, 내가 승진했다고.. 승진이라고 하는 것이 내게는 이 정도까지 기쁨이 되는 구나, 말씀에 뭐라고 나오지?'
라는 것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내가 현실이 아니라, 말씀과 짝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마음 밭이, 말씀이 떨어져 열매맺는 옥토가 점점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문제가 주어지더라도
그 문제 옆에 항상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거하시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면서
그 문제에 대해서 내 마음이 (세상적으로) 반응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어떠한 문제에 닥치더라도
<내 마음>이
<그 문제>에 대해서 반응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반응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 – 문제 – 말씀의 삼각관계 속에서
‘그래서 내가 돈이 없다고 불안하다, 나는 지금 돈이 없어서 불안하다’ 라는 상태와
‘내가 지금 돈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이렇게 불안해하는 구나’라는
이 관찰, 감시만 잘 해도 문제가 절반은 해결 되는 셈입니다.
그리고 얼른 하나님의 말씀을 암송하고 묵상하는 겁니다.
'말씀에 뭐라고 했지?' '빌4:6절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그럼 하나님의 평강이 주장한다 라고 했지'
여러분도 한 번 해 보세요.
‘내가 지금 자녀 문제 때문에 이렇게 괴로워하는 심리 상태를 보이고 있구나’
이렇게 감시, 관찰만 잘 해도 절반이 해결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삼각관계에서, 내가 문제와 짝하지 않고, 말씀과 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답입니다.
▲(여기서부터 본론) 두 번째 밭인 돌밭을 봅니다.
첫 번째 길가밭은 이 세상 것이 너무 좋습니다.
그런데 그 세상을 좋아하는 의미체계가 너무 단단하고 견고해서
하나님이 최고로 좋다.. 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올 틈이 손톱만큼도 없습니다.
딱딱하게 굳어진 길가밭입니다.
두 번째 밭인 돌밭은 팔레스틴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지질학적 특징입니다.
돌밭은, 자갈밭이 아니고, 넓게 형성된 석회암의 지반 위에 형성된 얇은 흙으로 덮힌 밭입니다.
해가 뜨면 그 바위가 열을 머금고 있기 때문에,
이 땅은 다른 곳에 비해서 온도가 조금 높습니다.
그럼 이 땅에 떨어진 씨앗들은 빨리 싹이 납니다.
그래서 ‘(잠시) 기쁨으로 받아들인다’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눅8:13
그런데 싹이 아무리 빨리 났다 하더라도
뿌리를 내리려 하면, 석회암 암반 층을 만나면서, 더 이상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말라 죽게 됩니다.
이런 팔레스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질학적 특징을
예수님께서 염두에 두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얇은 흙으로 이루어진 지층과
그 밑에 석회암 암반으로 된 두 개의 지층이 만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얇은 흙과 석회암 층, 두 개의 지층은
두 개의 언어를 말씀하시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에게 두 개의 언어 사용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한국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영어에도 능통하다 그러면
이중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서는 안 좋은 뜻으로 이중 언어)
지금 하나님 말씀(씨앗)에 대해서
바로 이 ‘돌밭’이 비유하는 것은,
2가지 지층, 2가지 언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즉 돌밭 사람은 종교적인 언어가 있고,
실제 삶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갖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두 언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래 믿은 사람에게 자주 나타나는 일인데
교회 와서 쓰는 종교적 차원에서의 언어가 있고,
또 그와는 다른 측면에서, 실제 삶에서 사용되는 언어체계가
돌밭 사람에겐 따로 있습니다.
돌밭은.. 이 세상이 너무 좋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좋아서 세상 것을 얻고 해결하려고
초월자, 절대자를 동원하려는 시도가 바로 일반적으로 종교를 믿는 사람의 심리이고, 돌밭입니다.
그러다가 이 종교인이 '하나님이 최고로 좋은 분'이라는 이 비밀을 담은
복음, 즉 하나님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렇지만 돌밭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종교적인 언어로만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예를 들어 창조, 타락, 죄, 구원, 회개, 천국, 지옥, 최후의 심판,
부활, 거룩함, 아가페의 사랑..
이런 단어들은 실제 삶의 현장에서 80년을 살아도
실제 삶에서는 단 한 번도 입에서 거론할 필요가 없는 단어들이 됩니다.
그저 교회에서 종교활동을 할 때만 사용하는 언어가 됩니다.
이런 말들은, 실제 삶에서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아도
자기에게 아무 상관이 없는 말들입니다.
그러다가 진정한 복음, '하나님이 최고 유일한 기쁨'이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머리로는 잠시 공감합니다. 동의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이 최고라는 취지를 담고 있는 설교도 좋아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님이 최고로 좋다는 것이,
자기 실제 삶과는 분리되어 있는 종교적인 영역에서 사용하는 언어로서는 받아들여지는데
그 하나님의 좋으심을 실제 삶으로까지 갖고 가는데는 .. 불가능합니다.
여기서 차단이 되어버립니다.
왜냐면 실제 삶에서는 내가 최고로 좋다고 믿는 것이 따로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으로 나가서 실제 삶을 살 때는
종교적인 차원에서 사용하던 모든 언어가 일단 중지되고
전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언어와 가치관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그 언어와 그 가치관 안에서 동화되는 삶을 살아갑니다.
말씀이 전혀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조금 깊이 들어가면 그 아래가 돌밭이라서!
그런데 그 종교적인 영역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이 최고로 좋다는 사실이
실제 자기 삶에 와서, 자꾸 실제 삶에서 하나님이 최고로 좋은 분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설교자가, 성경이) 요구하게 됩니다.
그러면 못 받아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최고로 좋든지 어떻든지 간에
어쨌든 종교적인 영역안에 머물러 있어야 되고
종교적인 영역안에 있을 때 사용하는 언어속에서 하나님이 최고로 좋은 분으로 납득이 가지,
자기 현실의 실제 삶을 살 때에 의미있게 하나님의 좋으심, 선하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최고로 좋은 것으로 여기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세상 것들입니다.
마치 미국에 이민 간 가정에 어린이들이 기가 막히게 학교에서는 영어만 사용하고,
집에서는 한국어만 사용합니다. 구분을 명확하게 합니다. (*아이가 한국말을 잘 하는 경우)
아주 정확하게 이중언어를 사용합니다. (여기서는 안 좋은 뜻)
이런 이중언어 체계가 그대로 신앙적 차원에서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보면,
그가 영광의 하나님을 만났는데, 즉 마음에 하나님이 좋은 분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만약 종교의 하나님으로 믿었다면,
그가 고향 본토친척 아비집을 떠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종교의 하나님이 할 일은, 종교의 영역에 머무시면서
실제 삶에서 내가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필요한 도움만 주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를 찾아 오셔셔 고향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돌밭이 아니었고, 옥토 였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하나님을 선하신 분으로 여겼고,
그래서 하나님이 그렇게 실제로 좋다면
고향 본토 친척 아비집, 그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는 조건이었던
고향 본토 친척 집을 과감히 떠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기독교가 많이들 종교화 되면서
고향친척아비집이라는,
즉 내 마음에 안정된 삶이라는 가장 좋은 조건에 내 마음을 붙이고 있으면서
하나님이 최고로 좋다는 말씀은 아무리 들어도.. 종교 영역 안에서, 종교적 언어로만 듣게 되고
그리고 실제로 내 마음이 실제로 좋아하는 것이 고향친척아비 집이다 보니까
하나님이 최고로 좋다는 복음은, 마치 길가밭처럼, 튕겨버리고 듣지 않습니다.
또는 돌밭처럼 처음에 잠시 뿌리를 내리다가, 이내 말라죽고 맙니다.
하나님을 믿은 것을 종교의 언어 속으로 가두어 버립니다.
그러다가 이제 웬만큼 살게 되면, 그런 능력조차도 필요없어지니까
이제 기독교 라는 것이 고사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다 예배당을 떠납니다. 필요가 없게 됩니다.
사회에서 열심히 돈 벌고, 또 사회복지가 주어지고, 돈도 많아지고 하면서
굳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종교영역에 갇혀 있는 신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면서
종교가 말라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선진국의 예에서 보듯이요.
만약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고향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하셨는데
그가 '제 아내 사라, 아들 이삭.. 이것 만은 못 버리죠, 하나님!' 했으면
마치 돌밭처럼, 아브라함의 마음이 얇은 흙 아래 단단한 석회암 층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사라도 마찬가지고, 이삭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자 이삭을 바쳐야 했을 때 '그것 만은 안 됩니다' 했다면
그건 그들이 석회암 돌밭 층을 이루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최고라는 것은 말로는 인정을 하지만
실제 내 삶의 영역에서는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저 자기 삶에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는 그런 수준의 신앙이 되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이 최고로 좋으신 분인 것은
삶의 현장에서, 내 건강 대신에 최고로 좋으신 분이심을 받아들이고,
삶의 현장에서, 나의 전 재산 대신에 최고로 좋으신 분으로 받아들이고,
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내 자식 대신에
하나님이 최고로 좋은 분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걸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체계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절대로 이 두 개의 언어를 둘 다 붙들고 있습니다. 이중언어, 즉 이중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본래 참 기독교 신앙은, 참 믿음은, 진정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이 최고로 좋으신 분이시다... 이 최고로 좋으신 분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나의 아버지로 가질 수 있습니다.
성경은 전부 이 말이고, 우리 십자가 복음방송도 이게 대 주제입니다.
그런데 이 방송을 들으시고, 어떤 분은 처음에는 너무너무 좋아하십니다.
제가 그런 분을 보고 어떤 마음이 드냐하면
'내가 그렇게 설교를 잘한 것일까?' 라는 마음이 들 정도로
처음에는 제 설교를 아주 좋아하십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서 떠나십니다. 완전히 연락두절이 됩니다.
이런 경우를 제가 너무 여러 번 겪었습니다.
십자가 복음 방송이 새롭게 공감된다고 잠깐 표현을 했지만 (잠시 기쁨으로 받으나)
이 말씀이 종교차원의 언어에 갇히지 않고,
실제 자기 삶에서 자기에게 최고로 좋다고 하는 것이 되려면
끊임없이 돌밭 층, 석회 암반층을 깨부수고, 십자가에 못 박고, 내버려야 됩니다.
이 일에는... 시간이 좀 걸립니다. 그건 두고 봐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세상에서 좋아하는 것들을 그대로 갖고 있도록
제 설교는, 여러분들을 가만 놔 두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종교적 차원에 머물고 싶어하는 그 심리상태를
저는 깨부수고 들어갑니다. 복음이 그걸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조금 시간이 지나가면, 이 말씀을 받는 성도들의 본색이 드러납니다.
이 설교는 '아 결국은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이 세상 것들을 까부수려고 하는 것이구나'
하는 위협을 느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좋아하던 세상 것들은 전부 다 없어져야 됩니다.
그래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좋아해서, 내가 그 분을 아버지로 가질 수 있으니까요.
가장 치명적인 문제가 뭐냐면,
'하나님이 내게 최고로 좋다' 라고 하는 취지의 말씀을 들으면서 기뻐하고 공감하는데..
그저 종교적인 언어 안에서 말로써 기쁨의 언어 표현을 하는 정도인 것이지,
그 의미가 뜻하는 대로, 실제로 하나님의 좋으심을 눈곱만큼도 경험 못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분들은 '하나님이 최고로 좋으시다'는 말씀을 듣고
그 최고로 좋은 하나님을 가지기 위해서 십자가를 생활화 합니다.
그래서 석회암층을 이루고 있던 이 세상에서 좋은 것들을 까 부쉽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의 최고 좋으심을 계속 느끼면서 삽니다.
그 다음날에도 자아 죽음의 십자가를 붙잡고, 석회 암반 층을 깨 부수고
'하나님이 최고로 좋으시다'는 말이 새롭게 들리고 믿어집니다.
그러면서 정말 하나님을 가지고서 살게 됩니다.
그런데 한 달을 듣고, 설교를 일년을 들어도
실제로 십자가로 석회암 층(돌밭)을 이루고 있는 것들,
즉 내가 이 세상에서 좋다고 여기고 있는 세상 가치들, 이런 것들이 깨부숴지지 않는 한,
내 마음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 않는 한,
'하나님이 최고로 좋다'는 말은 그저 종교 언어로만 들립니다.
매일 태목사 설교는 매일 똑같은 말만 공허하게 반복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하나님이 최고로 좋으신 분이라는 것을, 정말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실제로 누리는 사람은
그 하나님의 최고로 좋으심을 매일 더 새롭게 누리는 반면에,
이것을 실제로 종교적인 언어로만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이 최고로 좋다'라는 것을 논리와 언어의 세계로만 가두어버리고
실제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세상 것들로 그대로 유지하는 사람에게는 (즉 '돌밭' 에게는)
십자가 복음방송을 1년, 2년 아무리 계속 들어도.. 공허한 메아리의 반복으로만 들립니다.
▲저는 저희 집사람을 아직도 이름을 직접 부릅니다.
제가 1982년에 결혼했으니까, 지난 38년 동안 저희 집사람 이름을 몇 번 불렀을까요?
그렇지만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제가 식상하지 않고 질리지 않는 이유는
이름을 부르면 부르는 대로 집사람이 대답을 하고 내 앞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을 아마 좀 과장해서 백만 번 불렀다고 칩시다.
백만번 불렀는데 백만번 나타납니다.
백만번 불러도 질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최고로 좋다는 이 말씀, 정말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에게는
백일이 지나고, 1년이 지나고 매일 계속 들어도 늘 새롭습니다. 질리지 않습니다.
매일 자아 죽음의 십자가를 생활화 하면서
정말 하나님의 좋으심을 새롭게 느끼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더 매일 새롭게 느끼는 사람에게는
즉 돌밭, 석회암 암반층이 깨어진 사람, 좋은 밭에게는
'하나님이 최고로 좋다'는 이 말이 지루하게 들리지 않습니다.
마치 돈을 1천만원 번 사람이 또 1천만원 더 벌기 원하는 것처럼,
그는 하나님을 더 알고, 더 가지고, 더 벌기 원합니다.
하나님이 벌리는 것이(돈 버는 것에 비유해서) 체험된 사람에게는,
지루하기는 커녕, 하나님을 더 벌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현상은, 하나님이 최고로 좋은 분이라는 것을 처음에는 기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최고로 좋으신 분을, 십자가를 생활화하면, 내가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공감하고 동의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다른 말슴을 찾고, 다른 이론을 찾고, 다른 방식을 찾고,
다른 패턴을 찾는 성도님도 계십니다.
왜 그럴까요? 최고로 좋으신 분을,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 가질 수 있다는데...
공감하고 동의는 합니다. 그런데 왜 다른 이론이 필요하고, 다른 방식이 필요하고,
다른 말씀이 필요할까요?
다른 말씀을 찾고, 새로운 이론을 찾고, 다른 방식을 찾아 헤매는 순례자(여기는 안 좋은 뜻)의 길은
언제까지 계속 방황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최고로 좋으신 분이라는 것을 실제로 가지고, 느끼고, 체험하게 되기 전까지는
그런 방황(순례)이 계속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가졌다고 입술로 말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다른 방식을 찾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실은, 여전히 하나님이 최고로 좋다는 것을, 거의 종교적 영역에만 가두어 두고,
실제로 자기 마음에 최고로 좋다는 것은, 이 세상의 딴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끊임없이 새로운 설교를 찾아다니고, 새로운 이론을 찾아 다닙니다.
새로운 신학을 찾아다닙니다. 그게 그분들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돌다가 돌더라도 다시 돌아오면 다행인데,
아무리 아무리 돌아다녀봐도 하나님이 최고로 좋다.. 그 최고로 좋은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가질 수 있다.. 이 외에 다른 말씀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내 마음이 종교적 언어로만 그 하나님의 말씀을 가두어 놓고
실제로는 세상 것을 내가 좋아하기 때문에, 다른 이론을 또 찾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돌밭'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돌밭이 옥토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럴 가능성이 없다면, 예수님이 아예 설교하실 필요가 없으시지요.
그러나 돌밭들을 향해서 이 비유로 설교하신 예수님은,
돌밭도 변하여 옥토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셨기 때문에
이 말씀을 비유로 가르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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