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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사가 아니라 제자가 되라

LNCK 2020. 11. 9. 15:00

 

www.youtube.com/watch?v=CDUI_My7i80

◈율법사가 아니라 제자가 되라                   딤전4:16, 요일1:7        출처, 번역, 정리

Be a Disciple Not a Scholar 잭 푸닌             

 

코로나 사태로 인도 전역에 봉쇄 lock down 조치가 내려져서

그동안 공예배 모임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8개월만에 이렇게 공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봉쇄 조치도 복음전파 사역을 제한하지는 못했습니다.

저는 지난 7개월동안, 과거의 어느 때보다도 더 말씀을 많이 전했습니다.

 

왜냐면 바로 줌 (Zoom 화상회의) 기술 때문이었죠.

교회를 위하여 이런 줌 앱을 미리 예비해주신 주님을 찬양드립니다.

 

이 줌 앱의 장점 중 하나는,

저 멀리 떨어진 수많은 고립된 사람들이

줌을 통해 예배에 참석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마13장에서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 7가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들의 마지막인 52절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마13:52

 

여기서 서기관(scribe , 이하 율법사)은 하나님의 말씀, 율법을 연구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오늘날로 치면 목회자나 신학교 교수입니다.

 

‘천국의 제자가 모든 every 율법사마다      (*원문에는 every가 들어있음)

보물 곳간에서 새것과 옛 것을 꺼내오는 사람과 같으니’

 

여기서 예수님은 ‘율법사는 제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성경에 대한 학문적인 지식, 우리 머리로 아는 것..

 

‘율법사’가 그런 일을 주로 하죠.

그들은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이해합니다.

 

그래서 이런 율법사들은 성경을 아주 잘 알아서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하기까지 합니다. 성경을 잘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오랜 시간동안 책상에 앉아서 성경을 연구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런다고 그가 꼭 제자가 저절로 되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항상 대면하는 위험입니다.

 

여러분이 저희 교회에 오시면, 새로운 가르침을 많이 배우게 됩니다.

다른 교회에서는 듣지 못한 내용들도 있어서 놀라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 머리와 생각으로는 너무 많은 성경 지식과 기독교에 대한

이론을 얻게 되는데요.

 

특별히 지성적인 사람, 머리가 좋은 사람은 이런 지식들을 더 잘 배우게 되겠죠.

그래서 우리 중 일부는, 그걸 또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 이런 ‘율법사’들이 지금 많습니다.

 

제 요지는, ‘율법사라고 해서 꼭 제자는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제자란, 자기가 알고 배운 것을 자기 매일의 삶에서

반드시 자기 삶으로 살아내는 사람입니다.

 

이런 제자도가 가장 먼저 나타나는 장소는

우리가 가장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는 우리 가정, 바로 우리 식구들입니다.

 

제자도가 가장 먼저 드러나지는 곳은

즉 내가 진정한 제자인지/아닌지 제일 먼저 드러나는 곳은

교회가 아니라 우리 각자의 가정입니다.

 

율법사는.. 가정 생활이 아주 빈약할 수 있습니다.

율법사는, 성경지식이 많을지 모르나, 자기 직장에서도 본이 못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많이 알고, 또 잘 말합니다.

설교도 잘 할 수도 있고요, 성경지식이 풍부해서 모든 교리도 잘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 비유들을 7번이나 말씀하신 후에 마지막에, 마13:52절에서,

율법사(서기관)는 반드시 하나님 나라의 제자게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의 제자된 율법사는...’ 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둘을 동격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정직하게 이 구절을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됩니다.

‘나는 새 언약을 그저 이론으로만 가르치는 율법사인가?’

아니면 ‘나는 정말 하나님 나라의 제자인가, 즉 복음을 삶으로 살아내는 사람인가?’

 

율법사의 특징은, 자기 마음 밭의 상태에 대해 별로 신경쓰지 않습니다.

그가 신경쓰는 것은, 자기가 얼마나 사람들에게 설교로, 강의로 깊은 인상을 주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복음에 반응하는 자기 마음 상태, 자기 진실된 내면적 신앙에는 별 관심 없고

그저 사람들에게 외모로, 자기가 훌륭한 신자로 보이려고 애씁니다. 특별히 성경지식으로써요!

 

반면에 제자는, 자기의 외적 사역에 대해서, 그 사역 규모라든지,

자기가 받는 평판.. 이런 것에 별로 신경쓰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그리스도를 불명예스럽게 하는 일은 당연히 없어야 하지요)

 

참 제자는, 복음에 반응하는 자기 마음 밭에 가장 신경을 씁니다.

내가 진실로 말씀을 따르는, 순종하는 제자인가? .. 라는 것이지요.

 

이 점이 저는, 율법사와 제자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봅니다.

<내 관심이, 자기 마음밭과, 남에게 보이는 외모 중

둘 중에 어디에 두느냐의 차이입니다.>

 

율법사는 성경도 많이 알고, 가르치기도 잘 하지만

늘 다른 사람들 눈에 자기가 어떻게 보이느냐... 이런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반면에 제자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보이느냐.. 거기에 주로 관심 가집니다.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가르치셨는데요

예수님에 대해 들었던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들이, 그 분의 가르치심에 놀랐다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말씀을 잘 알아들었을 것입니다.

모르긴 해도, 그 들은 말씀을 다른 곳에 가서 자기가 가르치기도 했을 거예요.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 군중들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너희들이 내게 대해서 많이 들었다.

그렇지만 내가 하는 말을 듣고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너희가 내 제자가 되기 원한다면, 아버지, 어머니, 아내, 자녀, 형제들을 미워하고

심지어 자기 생명까지 미워하고 나를 따르라’  눅14:26

  

이 말씀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제자도 discipleship 는 자기 가정에서 가장 먼저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당신의 설교를 듣고 있는 회중들에게

이웃사람이나, 교회 사람들을 언급하신 것이 아닙니다.

‘가정에서의 아버지, 어머니, 아내, 자녀, 형제, 자매..’ 들을 언급하셨어요.

 

그래서 우리가 제자로서 제자도의 삶을 가장 먼저 살아내야 할 곳이

바로 가정이라는 영역입니다.

 

우리 가정에서는, 우리가 뭐 자기 성경지식을 뽐낼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가 성경지식을 뽐내고자 할 때는, 바깥에 나가서나

즉 교회에서나 외부에 나가서 그렇게 하는 거죠.

 

가정에서 우리는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나타내 보여줍니다.

세상 어디에서보다 가장 정직하게 자기 있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길 ‘너는 내 제자가 되어야 한다!’

 

‘너는 가정에서, 식구 누구보다 나를 더 사랑해야 한다.’

‘너의 생명 life 은, 가정에서 네가 나를

네 식구들보다 더 사랑하는 것으로, 가장 사랑하는 것으로 결정된다.’

 

그러므로 제자는, 교리를 얼마나 잘 이해하느냐에 일차적으로 관심이 없습니다.

제자가 관심가지는 분야는 ‘삶’입니다.

 

 

◑디모데야, 네 자신부터 살펴라

 

딤전4장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하는데

이 편지를 쓸 당시가, 디모데가 바울보다 약 20살 젊으니까

40세쯤 되었을 것입니다.

 

디모데는 바울과 함께 한지 약 20년 쯤 되던 시점입니다.

그는 바울의 동역자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먼저 네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여라.

그 다음에 네 가르침에 주의를 기울여라.’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딤전4:16

(*한글성경에는 번역이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디모데는 설교자였습니다.

그래서 ‘네 설교에 굉장한 관심을 집중해라’ 이렇게 권면해야 되는데,

 

그게 아니라 바울은

‘네 삶에 먼저 관심을 기울여라, 그 다음에 네 가르침(설교)에 주의를 기울여라’

 

신약성경에는 항상 이 순서대로 나옵니다.

새언약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인데요,

삶 life 이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가르침 teaching 이 나오는 것입니다.

 

▲같은 원리가 행1:1절에도 나옵니다.

사도행전은 헬라인 누가가 기록했는데요, 그는 성경저자 중에 유일한 비유대인입니다.

그 외 성경 64권은 모두 유대인 저자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행1:1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

 

여기서 ‘예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기 시작하신 모든 것’을 주목하십시오.

 

이것이 누가가 누가복음서에 붙인 제목이었습니다.

 

‘누가복음’이란 제목은 후대에 붙여진 것이고,

저자인 누가가 자기가 쓴 복음서에 직접 붙인 제목은

‘예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기 시작하신 모든 것’입니다.

All that Jesus began to do and to teach

 

여기서 여러분 순서를 잘 보십시오.

삶 to do 이 먼저 나오고, 가르침 to teach 이 그 다음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본을 먼저 보이신 것입니다.

먼저 행하시고, 그 다음에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행하시지 않은 것은, 어떤 것도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져야 하는 원칙입니다.

 

우리는 자기가 행하지 않은 것은 어떤 것도 함부로 가르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행하지도 않은 것들을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시길 ‘너희는 많이 가르치고도 행하지는 않는구나!’

 

그래서 만약 제가 가르치는 것들을 제가 삶으로 행하지 않는다면

제가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되었다가, 바리새인을 뒤따르는 자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대합니다.

이런 일이 우리 삶에 일어날까봐 우리는 매우 염려해야 합니다.

 

내 삶에는 일어나지 않는 일들을 내가 가르치고 설교하는 것입니다.

자기도 못 지키는 말씀을 설교하는 일입니다.

 

많은 부모들은, 자기도 따르지 못하는 삶의 기준들로 자기 자녀들에게 짐 지웁니다.

그래서 자녀들로부터 위선자라는 얘기를 듣는 거죠.

또한 자녀들이 그런 부모 말을 듣지 않고 빗나갑니다.

 

저도 제가 예수 믿은 지 16년이 지난 어느 시점에서 이 점을 발견했어요.

보니까 제가 그대로 살지도 못하는 말씀들을, 제가 설교하고 있더라고요.

 

제가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닙니다. 성경적으로 그건 바른 설교이었어요.

그렇지만 제 마음으로 그 말씀을 따른 것은 아니었고,

제 가정에서, 또한 제 개인적 삶에서 그대로 산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도 모르게 제가 그걸 설교하고 있더라.. 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 개인적 삶에는 제가 실패했었습니다.

물론 제가 회개했고 주님께 용서를 구했지요.

그렇지만 저도 살지 못하는 말씀을 멋도 모르고 제가 설교한 것은,

사람들에게 설교를 잘 한다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도 처음부터 행하고 나서 그 다음에 가르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가르치고 있었지만, 평소 삶에서 온전히 행하고는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당시 저는 율법사였던 거죠.

그렇지만 제가 율법사란 것을 오래 동안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사실을 발견하고는, 저는 그런 제 자신에게 질려버렸습니다.

지금부터 50년 전의 일이네요. 제가 36세 경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기도했죠.

 

‘주님, 저는 이렇게 계속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것은 진정한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그때라도 그걸 발견할 수 있었던 게 다행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때부터 진정으로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고,

금식하고, 하나님 앞에서 울었고, 기도로 부르짖었습니다.

 

‘주님, 당신께서 저를 만나주시기를 진정 원합니다.

저는 새로운 성령의 내적충만을 간절히 사모합니다.

이것이 지금 제게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제게 새로운 가르침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신선한 새로운 성령의 내적충만이 필요합니다.’

 

그때 제가 완전히 삶이 한 번 새롭게 시작되게 되었습니다.

제가 설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거죠.

그리고 앞으로 나는 내가 행하지 않은 것들은, 절대 가르치지 않기로 했습니다.

 

하나님은 제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46년 전 그때 제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약 36세 경

 

그 일이 있은지 6개월이 지나서

저는 지금의 이 CFC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한 것은, 우리교회는 개척할 시작 때부터

이렇게 삶이 가르침보다 더 중요하다는 교훈으로부터 출발한 점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누가에게 ‘당신이 쓰신 책(사도행전)의 제목을

당신은 무엇으로 붙이길 원하십니까?’ 라고 물어본다면

 

제 생각에 그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속적으로 행하시고 가르치신 것’ *1:1 서두에 나오니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신 행적을 담은 책이요,

사도행전은, 그의 교회가 행하시고 가르치신 행적을 담은 책이라고요.

그런 점에서도 두 책은 연속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2천년이 지나서 이 연속성은 계속 됩니다.

오늘날은 우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시고 가르치신 것들이, 이제 우리를 통해서 연속적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는 여러분의 가정에서부터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가장 먼저 예수님처럼 부모는 행하면서 가르쳐야 합니다.

 

자녀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귀로 들어 배우기 전에

먼저 가정에서 여러분 부모를 통하여, 예수님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자기 눈으로 목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을 자녀들에게 가르치려고 애쓰는데요

그보다 더 애써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삶을 자녀들에게 직접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부모는 가정에서, 겸손과, 회개와, 깨어짐과, 금식과 기도와,

눈물의 기도를 통해서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만 입술로 가르치는 율법사는 되지 말아야 하겠다’는

강력한 결심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율법사가 되지 마십시오!

대신에 자녀들에게 예수님의 제자의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마13:52절에서 예수님은 ‘율법사는 제자인 점’을 기정 사실화 하셨다는 점을

명심하십시오.

 

※마13:52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율법사)마다’ 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천국의 제자’와 ‘천국의 서기관(율법사)’은 동격으로 쓰인 말입니다.

 

<아래 박스 녹음 안 합니다>

※ 마13:52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13:52

(NASB) Therefore every scribe who has become a disciple of the kingdom of heaven...

 

NASB 성경만 ‘disciple’이란 단어를 넣어서 번역했고,

KJV, NIV는 ‘disciple’이란 단어를 넣지 않았고,

대신에 ‘which is instructed(배운 자)’ 라고 번역했는데

 

신기하게도 한글개역은 NASB를 따라 ‘제자’로 번역했습니다.

두 번역 다 의미상 같은 뜻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 즉 서기관은,

먼저 말씀을 행하는 사람, 즉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행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디모데에게 바로 이것을 권면한 것입니다.

‘먼저 네 삶을 주의해서 살펴라’ 딤전4:16

 

바울은 여기서만 이것을 강조한 것이 아니고

디모데와 함께 전도여행을 한 20년 동안

다른 여러 곳에서도 반복해서 강조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디모데전서 편지를 써서 강조한 것입니다.

 

한글성경에는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딤전4:16

라고 번역해서 이 강조점이 두드러지지 않지만,

 

영어성경에는 Pay close attention to yourself and to your teaching (NASB)

이렇게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딤전4:16

당시에는 성경이 많이 없었습니다. 신약은 아직 완성되지도 않았던 때죠.

그래서 귀로 ‘듣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이 말씀에 의거, 우리는 각자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나는 나의 삶, 나의 행함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가?’

 

내가 얼마든지 기독교 신앙을 잘 믿는 체 할 수 있습니다.

성경도 읽고요, 교회에 적어도 주일날에는 빠짐 없이 다니고...

그런 외적인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내 마음, 내 가정, 내 개인의 삶에서

말씀대로 순종해서 살려는 제자도의 진지한 애씀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에 비로소 말씀을 가르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의 권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 사도바울, 사도요한의 강조점이 정확히 일치합니다.

 

사도요한은 계시록을 썼습니다.

그때 당시의 요한을, 한 번 여러분의 머리로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요한서신서를 쓸 당시 그는 95세 가량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지난 65년간, 그는 초대교회의 지나온 여정을 지켜 본 사람입니다.

 

그는 오순절날 성령이 임하시고 방언을 말하던 자리에도 있었고

베드로가 설교하고 하루에 3천 명이 믿고 세례 받은 자리에도 있었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그러면서 교회가 시작되었죠.

 

그런 역동적인 교회가, 시작된지 65년이 지난 즈음 기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계시록 2장과 3장을 읽어보시면 그래서 예수님의 책망이 나옵니다.

 

한 교회는, 그 지도자들에게, 너희는 처음 사랑을 버렸도다!

 

또 어떤 교회는 ‘너희는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도다’

발람은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였지만 동시에 돈을 좇았습니다.

오늘날에도 돈을 좇는 설교자는 발람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회중을 ‘경건’으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또 다른 (두아디라) 교회는 ‘이세벨을 용납했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정치, 경제 권력을 교회에 끌여들여 타협한 것입니다.

그 이세벨이 나중에는 교회를 자기 손아귀에 장악해 버리게 됩니다.

과거에 이세벨이 그랬던 것처럼요.

 

또 사데교회를 향해서는 ‘너는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교회다.

너희는 교회가 크고 알려졌을지 모르나 네 속에 생명이 없구나.’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는 ‘네가 부요하여  어떤 것도 더 필요 없다 하지만,

영적으로 너희는 가련하고, 불쌍하고 가난하여 헐벗은 자들임을 알지 못하는구나’

 

이 교회들은 불과 50년 전에는 능력있는 초대교회들이었습니다.

이 일곱 교회를 보면서 제가 배우는 것은

‘모든 교회는 기울어지고 쇠퇴하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곱 교회를 가만히 보면, ‘그 교회의 사자들에게 편지하기를’

즉 일차적으로 지도자들의 타락이 그 원인이었습니다.

 

지도자들이 영적 최상의 상태로, 교회를 끊임없이 독려해야 되는데

자기들부터 영적으로 힘을 잃어갔고, 세상과 조금씩 타협해 간 결과였습니다.

 

저는 우리 CFC교단 산하 교회들이 지도자들이 먼저 바로 세워지기 원합니다.

그래서 각 교회 교인들에게 최상의 영적 상태를 끊임 없이 도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지도자들이 먼저 행하고, 복음을 자기 삶으로 살아내는 제자가 되고

그 다음에 교우들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 모두를 향한 제 짐이요, 마음의 부담입니다.

 

물론 사도요한 당시에 건강하고 튼튼한 두 교회가 있었습니다.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 였습니다.

하나님은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너희는 하나님 나라의 기둥으로 삼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총입니까!

 

그렇지만 당시 주류 교회는 힘이 빠져있었고,

주님의 책망을 듣는 교회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사도요한은 무엇이라고 권면합니까?

그는 ‘방언으로 더 열심히 기도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병자를 고쳐라’고는 단 한 마디도, 그 편지에 쓰지 않았습니다.

 

그는 한 마디도 ‘교인들이 더 부유해지도록 설교해라’고 권면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에 이 주제는, 기독교계에서 가장 유행하는 설교 주제임에도 말입니다.

 

사도요한이 당시 타락한 교회들에 보낸 편지들에 보면,

오늘날 교회 일각에서 강조하는 그런 주제들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급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외적 은사에 대해서는, 어떤 강조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무시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더 놀라운 것은, ‘전도를 더 열심히 해라’ 이런 강조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요즘 교회들이 강조하는 또 다른 주제입니다.

 

여기서 쇠락해가는 교회들에게, 사도요한이 편지로 강조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들의 신앙을 순수하게 보호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그는 ‘빛 가운데로 행하라’고 했습니다.

 

만약 서기관이면서 제자가 되려면, 가장 먼저 깊이 깨달아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요일1:7 ‘만약 우리가 빛 가운데로 행하면, 우리는 서로 사귐(교제)을 갖게 될 것이요’

 

무슨 뜻입니까?

빛은 모든 것을 드러냅니다.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은 어두운 데서입니다. 아무도 안 볼 때요.

 

그러므로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은 매우 간단합니다.

빛 가운데 행하기 위해서 먼저 위대한 사람이 되어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정직한 삶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실패와 허물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용서함을 구하는 것입니다.

 

▼관련설교 / 하나님은 정직한 자를 기뻐하신다 blog.daum.net/rfcdrfcd/15974198

 

이렇게 빛 가운데 행하는 사람이, 다른 빛 가운데 행하는 사람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요일1:7 그래서 교회는 건강하게 세워지고 유지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쇠락해가던 초대교회를 살리는, 당시 사도요한의 처방이었습니다.

  

자기를 거룩하고 경건하게 외모로 치장하는 사람과의 교제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자기 있는 모습 그대로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사람과의

주 안에서의 교제는 무척 쉽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섯 번이나 이혼한 사마리아 여인과도 가까이 교제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 여인이 정직하게 빛 가운데 거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그 여인을 전도자로 사용하셔서, 사마리아 성을 전도하기도 하셨습니다. 요4장

다섯 번이나 이혼한 여인이었는데도 말입니다. 그녀가 빛 가운데 거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기 죄를 꼭 공중 앞에서 대중적으로 고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여러분은 여러 분의 죄를 오직 하나님께 고하십시오.

 

그리고 만약 사람에 대해 범죄한 것이 있으면,

그 피해를 받은 사람을 찾아가서 용서를 구하십시오.

죄는 그 범죄로 말미암아 영향을 미치는 범위 안에서 용서를 구하면 됩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자기 생각으로 범죄한 것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면 됩니다.

생각으로 누구를 피해 준 것은 아니니까요.

 

누구에게 화를 냈다면, 하나님과 그 화 낸 사람에게 가서 용서를 구하면 됩니다.

자기 범죄가 미치는 범위안에서 죄를 고하면 됩니다.

이것이 빛 가운데 행하는(거하는) 것입니다. 요일1:7

 

그것이 성도를 보호하고, 교회를 보호하고

말세 때 쇠락하는 교회를 막아서고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하여

계시록을 썼던 사도요한이 요한서신서에서 강조한 것입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면, 다른 성도들과, 나아가 하나님과

늘 친밀한 교제를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일1:7

그러면 교회가 쇠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우리에게 고상한 성품의 성자가 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빛 가운데 거하라, 빛 가운데서 살아라,

늘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 것을, 그리하여 생명이 넘치는 삶을 살 것을

쇠락해 가던 당시 교회에, 또한 오늘날 우리 교회에,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씩 빛 가운데 걸어가는 삶을 살다보면

언젠가는 예수님처럼 성숙하게 변화되는 날도 내게 찾아올 것입니다.

 

요일2:6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이것이 바로 서기관이면서 동시에 제자로 사는 길입니다!

 

여러분, 아마 당시에 구약에 능통했던 바리새인들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보다 구약을 더 잘 가르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구약성경을 그들보다는 많이 공부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는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가르치는 말씀을 그들은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설교만 잘 하는 설교자에 대해서 그리 깊은 인상을 받지는 마십시오.

그분이 진정 예수님의 제자인지, 삶으로 설교하는지.. 깊이 분별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칫 잘못하면 바리새인을 따라갈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우리 자신도, 설교만 잘 하고, 성경만 잘 가르치는 데 너무 목표를 두지 마십시오.

그것보다는 예수님 말씀대로 제자로 살겠다는데.. 더 강조점을 두시고

자기 인생을 그 방향으로 항해해 나가시면 나중에 결코 실패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부부생활, 가정생활에 관한 좋은 교훈만 얻기 원하시면

심리학자를 찾아가 보십시오.

그들은 그 분야에 실제적인 매우 훌륭한 가르침과 조언들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는 아닙니다. 이론만 가르칠 뿐입니다.

 

설교자들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못 된다면

가르침은, 어쩌면 심리학자들이 더 잘 가르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심리학자보다 못한 설교자들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먼저 제자가 되어 말씀을 행하며 가르칠 때

우리는 비로소 심리학자나 다른 철학자보다 나은 설교자가 되는 것입니다.

 

마12:33 ‘나무는 그 열매로 아느니라’

 

이제 금년이 두 달 남았습니다. 연말까지 이 말씀대로 순종하여 살아서

2021년 내년에는 더욱 영광스러운 새해를 맞이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