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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3장. 일평생 듣고 싶은 주님의 칭찬 한 마디

LNCK 2020. 11. 22. 13:36

 

◈일평생 듣고 싶은 주님의 칭찬 한 마디           눅3:22           2020.11.22 큐티묵상

 

 

내가 첫 번째로 듣고 싶은 주님의 칭찬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는 칭찬이다.

 

눅3:22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목회자나 선교사 또는 사역자도 자기 분야에서 성공을 원한다.

그런데 그 성공의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숫자나 재정의 크기에 달려 있을까? 꼭 그렇지 않다.

 

그런데 주님이 만약 그 사역자를 향하여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라고 인정해 주시고,

그가 그런 주님의 인정과 칭찬을 듣는다면,

그는 정녕 성공한 사역자가 될 것이다.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작사한 존 뉴턴의 글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하나님이 두 천사를 불러서

한 천사는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의 왕을 도우는 사명을 줘서 내려보냈고,

또 한 천사는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에서 사역하는 사역자를 도우라는 사명을 줘서 보냈다.

 

두 천사는 자기 임무를 각각 무사히 마치고 천국으로 돌아왔다.

그럼 두 천사 중에 누가 더 성공한 천사일까?

그 답은 똑같다! 이다.’

 

그러므로 거기가 어디든지 주님이 부르신 곳에서 충성하는 사역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가장 사랑받는 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주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은

‘존재론적 사랑’이다.

내가 주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나를 사랑해 주시는 것이다.

 

육신의 부모는 미숙해서

명문대 졸업하고 일류 기업에 취직한 자녀를

고등학교 중퇴하고 집에서 빌붙어 사는 자녀보다 어쩌면 더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미숙한 부모와는 다르시다. 주님의 사랑은 근본적으로 '존재론적 사랑'이시다.

내가 꼭 셀럽이 되어서 더 사랑받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자녀는 일단 모두 공평하게 사랑해 주신다.

하나님은 외모를 취하지 않으시고, 즉 편애가 없으시다고..

그 보좌의 기초는 공평이라고 성경에 반복해서 나온다.

 

 

그런데 내가 그 크신 주님의 사랑을 피부로 와 닿게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너무 바빠서, 또는 다른 세상 일에 너무 몰두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사방이 온통 분홍빛 벚꽃이 만개해서 만발한데

하루 종일 사무실에 틀여박혀서 사무만 보는 사람은

그 만발한 벚꽃의 감흥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다.

 

 

신앙이 성숙해질수록.. 멀게만 느껴지던 하나님의 사랑이 점점 더 가깝게 느껴진다.

마치 철모르던 아이가 철이 들수록, 부모님의 사랑을 점점 더 깊이 이해하는 원리와 같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내가 뭔가 사역에 성공하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면,

그건 사역에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더 밑바탕에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가 없기 때문이다.

 

오늘 내가 뭔가 경제적으로 불만족이 있다면

그건 경제적인 부족 때문이라기보다는

더 밑바탕에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가 없기 때문은 아닐까?

 

바꾸어 말해서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만 있으면

사역이 힘들어도, 경제적으로 부족해도

그는 찬송할 것이다.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할 것이다. 마음에는 기쁨으로 충만할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성공은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를 늘 확인하는 길에 있다!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기 직전에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로다'라는

인정을 받으셨다. 그리고 공생애를 시작하셨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 각자도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로다' 라는

하늘의 인정, 주님의 승인이 먼저 있어야.. 사역자의 길을 출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을 가다가 보면 지치고, 힘들고, 쓰러지고, 드러눕는 일도 생길 것이다.

그때 다시 벌떡 일어나 그 길을 계속 갈 수 있는 힘은

무슨 자기 소원의 기도가 응답되는 것에 있기보다는,

'너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는 주님의 음성을 재확인하는데 있을 것이다!

 

*관련글 : 축복보다 하나님의 인정을 구하기 http://blog.daum.net/rfcdrfcd/15976128 (강추)

   예수님을 사랑하신 것처럼나를 사랑하신다 http://blog.daum.net/rfcdrfcd/15974199

 

지금까지 위에서 '존재론적인 하나님의 사랑' 을 언급했는데,

그 반대적 측면도 고려해 봄직 하다.

(성경에는 종종 모순적인 말씀이 나온다. 일례로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동시에 엄위하시다.)

 

아래 구절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한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을 믿어도 그 분의 계명에 등한시하는 사람은

특별한 사랑을 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요14: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즉 하나님께 많은 사랑을 받으려면

그럴수록 하나님의 계명을 많이 지켜야 한다는 말씀이다.

 

어떤 미국 설교자는 ‘우리가 평소에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느끼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평소에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며 살고 있기 때문에

그 점을 살펴서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고 설교했다.

 

그렇다. 나의 상태와 상관없이 나를 사랑해 주시는 ‘존재론적인 사랑’이든지

내가 주님께 늘 순종해서 더 사랑받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사랑’이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늘 느끼고 살아가는 행복한 크리스천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