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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4장. 예수님의 사명선언문 묵상

LNCK 2020. 11. 23. 16:48

 

◈예수님의 사명선언문 묵상           눅4:18                    2020.11.23.큐티묵상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본문은 ‘예수님의 사명선언문’이다.

오늘날 내가 전하는 복음과,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이

본질이 똑같거나 비슷해야 되는데... 혹시 변질되지는 않았는가.. 점검해 본다.

 

▲‘사도적 설교, 사도적 교회’ 라는 말이 있다.

영어에 apostolic preaching, apostolic church..

이런 말은 한국에서 잘 쓰지 않는 말이라서

처음에 무슨 의미인지.. 들어도 쉽게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번역은 쉽다, ‘사도적 설교, 사도적 교회’

그런데 그 의미가 처음에는 뭔지 몰랐다.

 

그런데 자꾸 영어설교를 듣다보니.. 그 말은 이런 뜻이었다.

‘사도적 설교, 사도적 교회’ 라는 말은

오늘날의 설교, 오늘날의 교회가

과거 사도행전 시대의 사도들의 설교, 목회와 똑같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과거 사도들이 설교했던 것처럼.. 오늘날 설교자들이 설교해야 하고  *사도적 설교

과거 사도들이 교회를 목회했던 것처럼.. 오늘날 목회자들이 목회해야 된다는 뜻이었다. *사도적 교회

 

바꾸어 말하면, 오늘날의 설교, 오늘날의 목회가

2천년 전 사도들의 설교, 사도들의 목회와 많이 동떨어져 있을 수 있다는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말이었다.

 

▲그래서 어느 교수님은 ‘요즘 설교자들은 주석도 안 보고 설교 한다’고

통렬하게 지적한 적이 있었는데, 그 분의 말 뜻은

그 설교 본문을 과거의 정통 기독교는 어떻게 해석했는지.. 참고하라는 뜻이고,

설교자가 자기 나름대로 눈감고 잠시 묵상했다가.. 해석, 설교하지 말라는 뜻이다.

 

물론 ‘계시의 점진성’이란 말도 있듯이, 이 말을 확대 적용하면

오늘날 21세기의 설교자들은, 과거의 어느 시대보다 성경을 잘 해석할 수 있다.

요한계시록의 경우는 특히 그렇다.

과거의 더 많은 축적된 해석을 모두 참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자의적 해석은 안 된다는 뜻이다.

 

어쨌든 그 교수님의 주장에는

‘설교자의 성경 해석이, 정통적 해석의 틀을 뛰어넘어서

자의적으로 해석하지 말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맞는 말이다.

 

▲여담으로, 신학교시절에 어느 수재인 학우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당신은 석사논문과 박사논문의 차이를 아는가?’

나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는 이렇게 내게 가르쳐 주었다.

‘논문을 쓰는 가운데 해석사가 들어가면 박사논문,

해석사가 들어가지 않으면 석사논문이다.

 

해석사란, 그 논문의 주제에 대해서

교부시대나 중세시대에는 어떻게 해석했으며,

종교개혁시대의 개혁자들은 어떻게 해석했으며,

18세기, 19세기의 신학자들은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문헌을 연구해서 밝혀내는 것이 ‘해석사’이며,

 

그 해석(의 역)사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라틴어, 불어, 독일어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왜냐면 중세시대~19세기까지는

신학문서들이 주로 라틴어, 불어, 독일어로 쓰여져 있기 때문이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학우님은 정말 불어나 라틴어에도 능숙한 소문난 수재였다.

 

▲우리 <냉수한그릇>에는

16세기 종교개혁시대

17세기 청교도시대

18세기 1차영적대각성 시대 등

과거의 설교들, 소위 ‘고전’에 속하는 설교들을 가급적 많이 소개하는 중에 있다.

 

이렇게 과거 설교들을 소개하는 이유는

‘오늘날의 설교가 과거의 설교와 맥을 같이 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오늘날의 설교가 사도들의 설교와 주제와 강조점과 논지와 결이 같아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설교는 한 마디로 그 특징이

‘실존주의적(나 중심적), 현재 상황적 relevant, 현세적’이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설교, 사도들의 설교, 역사적 정통 설교는

‘하나님 중심적, 복음 중심적, 내세(영생)적’이다.

 

우리가 어릴 적에 이런 놀이를 종종 했다.

10명씩 두 팀으로 나누어서

맨 앞에서 말을 전달하기 시작해서,

10번째 맨 마지막 사람이 들은 말이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맞추어 보는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10명을 통과해서 전달된 말이 한 번도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았다.

전달되는 와중에 어디에선가 그 말이 다른 의미로 변하고 말았다.

처음에는 정확했던 말이.. 여러 사람을 거치면서 전혀 엉뚱한 말로 둔갑되어 버리는 것을 체험했다.

  

오늘날의 복음도 그와 유사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복음이 2천 년을 지나오면서,

또한 한국에 복음이 전래된지 135년이 지나면서

세대로 치면 4~5세대로 복음이 세대를 거쳐 전달되어서 지금까지 내려왔다.

 

그런 와중에 오늘날의 복음이, 초대교회 사도들의 복음과는 너무도 상이한..

본문 '예수님의 사명 선언문'에 나오는 복음과는 아예 거리가 먼..

그런 복음의 변질을 가져오기 쉽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명선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복음>을 잠시 살펴보면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 그렇다, 복음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은 듣게 되어있다.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죄의 속박에 포로된 자들을 자유케 하고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천국 복음에 눈을 뜨게하고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마귀와 질병과 세속에 눌린 자들을 풀어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 그들을 완전히 회복시키는 사역을 하셨다.

 

17세기 스코틀랜드 청교도들의 설교가 어떠하였는가? 읽어보면 안다.

18세기 조지 휫필드, 조나단 에드워즈가 그런 설교를 하였는가? 그렇다.

19세기 찰스 스펄전, 존 라일이 사도적인 설교를 하였는가? 아주 그렇다.

20세기 마틴 로이드존스, 아더 핑크가 예수님의 사명선언문과 같은 설교를 했는가? 그렇다.

 

나의 설교를 듣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죄의 포로로 억압되어 살다가 자유케 되었으며,

몇 명이나 눈이 멀었다가 천국과 영생의 눈이 떠졌으며,

언제 질병과 악령과 세속에 눌린 자들이 해방을 맛보았으며,

정말 저들이 복음안에서 참 자유를 얻었다는 그 희년의 감격과 간증이 있는가?

 

오늘날의 찰스 스펄전은 우리 주위에 누구인가?

오늘날의 조지 휫필드는 우리 주위에 누구인가?

그런 호기(씩씩하고 호방한 기상)를 가진 젊은이들이 나오기를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