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소리가 많은 것 같아 보이시는 주님? 눅6:47~49 2020.11.25.큐티묵상
성경은 신앙 성숙이 가나안 복지, 천국 맛보기의 삶이라고 가르치는 반면
요즘은 신자들마저도 '돈이 넉넉해야 행복하지' 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
오늘은 누가복음 6장을 읽어보았다.
눅6장을 읽으면서 드는 첫 느낌은
‘예수님은 왜 이리 잔소리가 심하실까?’이다.
특히 6:17절부터 마지막 절인 :49절까지는,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 준하는, 누가복음의 소위 ‘평지설교’이다.
눅6:17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여기서 ‘예수님은 왜 이리 잔소리가 심하실까?’하는 불경한 심경이 드는 이유는
예수님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행16:31
이렇게 간단명료하게 딱 한 마디만 하시면 될 것을,
여기서 지루할 느낌이 들 만큼, 마치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처럼,
구절구절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이렇게 계명을 자세하게 일일이 가르치셨다.
예를 들면, 인자의 연고로 너희가 욕 먹고 미움받을 때는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23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28
이렇게 살기란 정말 어렵다.
이번에 한 번은 어떻게 용서해 준다 하더라도,
재발 방지를 위해서 내 쪽에서 따끔한 어떤 조치가 필요할 것 같다.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29
혹시 예수님은 뺨을 한 번도 안 맞아 보시고 이런 소리를 하시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교회에서 저런 세세한 설교를 듣기 보다는
짧고 명료하게 통쳐서 엎어서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요3:16
이 한 구절로, 신약의 모든 새언약, 새 계명들을 ‘완전 정복’해 버린다. *옛날 참고서 이름
이렇게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율법 폐기론’ 또는 ‘무율법주의’적인
신앙생활을 하기 쉬운 것이다.
성경을 하루에 한 장씩, 한 구절씩 꼼꼼하게 읽지 않으면!
▲매일 성경말씀을 한 장씩, 한 구절씩 꼼꼼하게 읽지 않으면,
그래서 그저 주일날 교회가서 설교 한 번 듣는 것으로 만족하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율법 폐기론자’의 삶을 살기가 아주 쉽다.
신약에 나오는 여러 계명들을 모르니까,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으니까
일단은 내 마음이 편하겠지만
나중에 심판대 앞에 가서는 크게 당황할 일이 많을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다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은 다 알고 있는데
의외로 '모두 다 반드시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은.. 모르거나 /잊어버리거나/ 무시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백보좌 심판대 앞에 가서 그때 당황하지 않으려면
특히 신약성경을 꼼꼼하게, 한 장씩, 한 구절씩 읽어나가면서
자기를 매일 점검해 나가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산상수훈(마5~7장)을 하루에 한 번씩 읽는다고 한다.
최소한 산상수훈의 말씀이라도 다 지키고.. 나중에 자기가 심판대 앞에 서겠다는 각오다.
그런데 사실 산상수훈의 구절구절들을 다 지키는 신자도.. 많지 않을 것이다.
산상수훈만 거의 다 지킨다고 해도.. 그는 성자의 반열에 들어갈 수도 있다.
좀 더 신앙이 성숙한 어느 외국의 신자는
신약성경의 전 구절에 도전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신약의 한 구절, 한 구절 끝에 펜으로 무슨 표시를 해 놓는다고 한다.
일례로 O는 자기가 극복하고 순종한 말씀,
X는 자기가 아직 극복 못 하고, 순종 못한 말씀, 앞으로 순종해야 할 도전의 말씀!
오늘 내가 누가복음 6장만 다시 정밀하게 스캔해서 읽으면
X표가 수두룩하게 나올 것이다.
▲그럼 그냥 요3:16, 요5:24, 행16:31절 즉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단순 신앙과
이렇게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신앙의 차이는 뭘까?
그것은 구약을 거울로 들자면, 출애굽 때 광야의 삶과 가나안 복지의 삶의 차이이다.
광야의 삶은, 한 마디로 '방황'이고,
가나안의 삶은, 한 마디로 '안정, 천국'이다.
광야에서 40년간 방황할 때는, 구원은 받았으나 (출애굽 해서 홍해 건넜으나)
아직 온전히 하나님의 나라, 즉 가나안으로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거기에 여전히 이방족속들이 일부 섞여 살고 있어서 괴롭기는 했지만
그러나 광야에서는 괴로움과 비교할 바가 안 된다.
광야에서의 전쟁은 ‘전면전’이었다면,
가나안에 들어간 이후의 전쟁은 ‘국지전’에 불과했다.
즉 요즘도 자기 죄성과의 전면전을 벌이면서 사는 사람은.. 광야 방황 생활을 하는 중이고,
자기 여러 일곱가지 죄성(족속)을 어느 정도 거의 극복한 사람은.. 가나안 천국 생활을 사는 중이다.
그러나 아직 남은 것이 있어서 옆구리의 가시가 될 가능성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가나안을 사는 사람은, 거의 정복했다. 그래서 천국의 풍성함과 안정을 맛보며 사는 것이다.
돈이 넉넉한 삶이 천국을 제공해 준다는.. 그 환상을 떨쳐버려야 한다.
아무리 TV나 영화를 통해 그런 가치관의 맹폭격을 당하고 있지만, 성경적 진리로 돌아가야 한다.
결국 예수님은, 아주 심술궂은 여학생기숙학교 엄격한 사감선생님처럼
또는 군대에서 부하들을 괴롭히는 상관처럼
우리 신자들을 괴롭히려고, 지키기도 어려운 계명들을 세세하게 부여하시고
우리 어깨에 무거운 멍에를 얹어놓으시고 혼자 즐기시려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내 계명들을 지킬 때.. 너희 삶이 행복하다’
‘너희가 내 계명들을 지킬 때.. 너희 삶이 광야의 방황이 아니라 가나안 복지를 살게 된다’
‘너희가 내 계명들을 지킬 때.. 너희 삶에서 방황과 불만과 불행이 그치고 안정을 얻게 된다’
‘너희가 내 계명들을 지킬 때.. 너희 삶에서 괴로움이 줄어들고, 지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맛보게 된다’
그래서 우리에게 계명을 주시는 것이다.
신10:13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신약 기독교의 기초는 구약 유대교인데, 유대교는 시내산 에서 출발한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히브리인들은 '언약'(약속, 율법, 계명)을 맺음으로써 시작된 것이다.
요지는, 기독교는 그 출발부터가 '언약'에 기인하는데,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잘 모르고 있다.
그래서 '믿으면 그것으로 끝!' 하고서, 하나님의 언약, 계명에 대해서는 알려고 조차 하지 않는다.
이것은 기독교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이다. 이런 잘못된 흐름을 가리켜 '율법폐기론, 또는 무율법주의'라 부른다.
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계명이 다른 점은,
구약의 율법을 도덕법, 시민법, 제사법으로 크게 3구분 하는데,
시민법, 제사법은 신약에 와서 폐기되었지만, 도덕법은 여전히 살아있다.
그래서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실제로 10계명을 재해석 해 주셨다.
또한 신약에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성령의 감화와 인도를 받아서
성경의 계명을 자원해서, 자발적으로, 어떤 면에서 즐거이 지키게 되는 것이
구약과 다른 점이다. 구약의 도덕법, 계명들이 신약에서 폐기된 것은 절대 아니다.
만약 신약에서 계명(도덕법)들이 폐기되었다면,
본문 눅6장에서, 또한 산상수훈 등에서
예수님이 이런 수 십 가지 계명들을 가르치실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냥 ‘주 예수를 믿으라, 그것으로 끝!’ 하셨을 것인데...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
▲우리는 실제적으로 겪어 봐서 안다.
**‘인자의 연고로 너희가 욕 먹고 미움받을 때는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23
이 계명대로 지켜 사는 사람이 행복할까?,
아니면 연속극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자아 충만으로 길길이 날뛰며 복수하는 사람이 더 행복할까?
자기가 욕 먹고 미움 받는 것도 억울한데,
그렇다고 자기가 길길이 날뛰고 주먹으로 거실 벽을 치면..
더욱 더 억울해 진다.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평안이 내리지 않으므로!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28
내가 만약 오늘 광야의 방황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아니면 가나안 천국을 맛보며 살고 있는지... 그 차이는
위 말씀에 순종하느냐 / 불순종하느냐에 달려 있다.
예수님은 우리가 행복한 삶, 천국을 맛보며 살기 원하신다.
그래서 천국의 계명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이렇게 살아야 행복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예 성경을 꼼꼼이 안 보니까,
자기가 예수를 믿고 출애굽은 했지만
광야 40년을 방황했던 이스라엘처럼,
예수 믿고나서도 40년, 아니 더 이상 수 십년을 방황하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가나안 (천국)에 못 들어갈 확률도 크다.
그러므로 자기 스스로 진지하고 심각하게 점검해 봐야 된다.
-내가 광야 뱅글 뱅글 돌면서 제자리 걸음하며 방황하는 삶을 살고 있나,
늘 나의 죄성에 부딪히면서.. 그 전쟁에 지고 있나?
-아니면 내가 가나안 (현재)천국을 맛 보고 있나?
이 둘의 차이는, 내가 계명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 그 차이에 있다.
단순하게 요3:16, 행16:31절 암송하면서 ‘나는 믿는다, 고로 구원 받았다’는 신자는
쉽게 말해서 유년기적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고, 그래서 늘 넘어지고 방황하는 것이고,
그러다가는 광야에서 다 엎드러지고, 저 천국에도 못 들어갈 수도 있다. *고전10:5~11
성경의 계명들을 일일이 찾아서, 주님 말씀대로 순종하려는 신자는
대학생이나 대학원생 수준의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성숙한 신앙을 추구한다.
**눅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이런 말씀을 암송하며, 묵상하며, 순종하기로 애쓰는 자는..
쉽게 말하면 대학원생이고, 군대로 치면 장군급이요, 영적으로 실상은 부유한 자(계2:9)이다.
젖을 먹는 자가 아니요, 고기를 먹는 자이다.
히5:13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요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요한1서 2: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믿는) 줄로 알 것이요’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기독교의 가장 중심 신앙 주제는 ‘경건 piety’이었다.
딤전4: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경건이란, 예수님의 성품을 닮은 사람, 하나님의 성품을 반사하는 사람을 뜻한다.
그런데 20세기 후반부터 주류 기독교의 지향점이 바뀌었다.
더 이상 경건이 아니라, 부유 prosperity로 바뀐 것 같다.
아무리 경건해도 가난한 신자나 교회는.. 뭔가 불충성한 결과이고
경건에 상관없이 부유한 신자나 교회는.. 하나님을 잘 믿어서 복받은 결과이다!
이상하게 이런 식으로 흘러가 버렸다. 이것의 속본질은 바알 신앙이다.
그래서 교부시대 때 경건을 추구했던 신앙의 선배들은
오히려 누가 자기를 모욕하고, 경멸하고, 험하게 다루는 것을.. 은근히 기다리고 즐겼다고 한다.
왜냐면 자기 신앙의 성숙을 테스트 하고, 그 시험에 합격해서 천국적 삶을 누리기 위해서!
그런 기회를 맞이하는 것을 마냥 슬퍼하거나 불행으로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6장의 마지막은 '반석위에 세운 집과, 모래 위에 세운 집의 차이'로 마무리 된다. 6:47~47
출애굽 때 광야는 방황, 가나안은 안정이 그 키워드 라면
본문 눅6장의 결론, 모래 위와 반석 위의 집의 키워드도 무너짐과, 안정이다.
물질이 내 삶을, 우리 가정을 반석 위에 세워주는 것이 아니다.
주님을 믿은 후에, 그 계명에 하나씩 순종해서 살아갈 때.. 반석위에 세운 집이 된다. 안정적이다.
그래서 성경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을 허투루 듣지 말고,
읽고, 묵상하고, 자신을 비워서
튼튼한 반석 위에 세운 집이 되었으면 한다.
요즘 코로나 19사태로 너도 나도 다들 당황하고, 방황하고, 불안해하고 있다.
그러나 반석위에 세운 집은, 이까짓 코로나 사태에 흔들리지 않는다.
중병에 걸린다 하더라도.. 잠시 흔들리겠지만 금방 안정을 되찾는다.
신앙의 내공이 있는 사람은.. 절대 환경에 기가 죽지 않는다.
어떤 환경에 처해도 그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찾아낸다.
누구의 말대로, 삶은 힘들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시기 때문이다.
Life is hard and God is go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