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눅10:25~28 2020.11.30.큐티묵상
▲예수님은 ‘이신칭의론’을 믿지 않으시나? 예수님은 행위구원론자이신가?
25절에 어떤 율법사가 물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구원)을 얻으리이까?’ *눅10:25
예수님은 오히려 그 율법사에게 질문하신다.
‘율법에 어떻게 기록되었느냐?’ :26
율법사가 대답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7
28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율법사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으리이까?’ 물은 것은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으리이까?’와 사실 내용적으로 같은 질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조금 의외이다.
‘하나님을 믿으라! 그리하면 영생하리라’ .. 이렇게 이신칭의적 답변을 하셔야 될 것 같은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 이렇게 행위를 강조하시는 대답을 하셨다.
그리고 연이어서 이웃 사랑의 예로
우리가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길게 말씀하셨다. *눅10:30~36
당시 유대인들은 유대교가 국교였다. 다들 모태-유대교인들이었다.
그러니까 다 하나님을 믿고 있는데, 그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할 필요가 없었던 것 같다.
바울이 믿음을 강조한 것은, 주로 이방인들에게 전도하다보니
여호와와 그리스도가 생소한 그들에게는 먼저 일차적으로 ‘믿으라’를 강조한 것으로 여겨진다.
예수님이 이신칭의론을 부정하신 것이 아니라
믿음의 동전의 뒷면은 행함이다.
눅10장의 정황에서는 그 믿음의 뒷면, 즉 행함을 강조하신 것이다.
▲행함으로 영생을 얻는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가르치기 직전에는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하시고 :28
그 비유를 가르치신 직후에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37
이렇게 샌드위치 화법으로 행함을 강조하셨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영생 eternal life’은 죽어서 저 천국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 현실 세계속에서 시작된다. *냉수 한 그릇 (daum.net)
예수님은 현세와 내세를 모두 사시는(존재하시는) 분으로서
그 분이 영생을 언급하실 때는, 현세와 내세를 모두 아우르는 영생(영원한 생명)인 것이다.
오늘 나와 내 주위에 영생을 '현실'에서 사는 신자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즉, 정말 파릇파릇한 새로 돋아난 움과 같이, 새 잎사귀와 같이
또는 아침에 새로 떠오르는 태양의 밝음 같이
또는 비옷 뒤에 싱싱한 풀잎과 같이
그런 영생의 생명으로 생기있게 현실속에서 영생을 살아가는 크리스천은.. 오늘날 얼마나 될까?
오늘 본문에 그렇게 영생의 생명을 사는 비결을 이렇게 예수님은
한 마디로 짧게 말씀하신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영생을) 살리라!’ 눅10:28
요즘 코로나19로 인해 병원이나 요양원을 방문하는 일이 쉽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 입원환자나 요양원을 계신 분들이 언제나 있다.
쉽게 말하면, 본문에 나오는 ‘강도 만난 자’들이다.
그들을 기억하고 기도해주고
시간을 내어서 그들을 찾아가 위로해 주고,
그렇게 하면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말씀이 내게 응하여
내가 생기있게 푸릇푸릇한 영생의 삶을 오늘 현실에서 살아가게 된다.
오늘 현실에서 영생을 못 사는 사람이.. 죽어서 내세에서 영생을 기대하면 안 된다.
오늘 현실에서 지옥같이 사는 사람은.. 죽어서 내세에서 비슷하게 살게 될 것이다.
오늘 지옥같이 살다가.. 내세에 영생을 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늘 현대인들은 다들 바쁘다. 뭐가 그리 바쁜지 정말 바쁘다.
간혹 터키나 필리핀 등 그런 나라의 가족 중심 드라마를 보면
참 우리가 문화충격을 느낄 만큼, 그들은 형제, 가족, 친척의 관계중심적이며,
또한 한 집에서 삼사 세대가 어우러져 함께 산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한국인들은
오직 자기와 자기 자녀밖에 모르는 것 같다.
심지어 자기 부모도 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바쁘기 때문이다.
그럴 만한 정신적인 여유들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친척을 돌아보고, 무슨 친구나 교인의 병원 심방...
이런 것은 이제 남의 나라 얘기, 또는 한 세대 이전의 과거의 추억이 되어버렸다.
그 결과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셨는데, *눅10:28
우리는 영생을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너무 이웃에 대해서 관심이 없으니까!
영적으로 부익부가 아니라 빈익빈 법칙이 내게 적용되어서
더 바빠지고, 더 여유가 없어지고, 더 정신적으로 메마르고 황폐하게 되어서
마치 본문에 나오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강도 만난 수많은 사람들을 보고도, 그저 지나쳐버리거나 피해 가 버리게 된다.
그런 종교인들이 과연 머리로 예수를 믿는다고, 구원과 영생을 받게 될까
오늘 나에게 영생(다른 말로 생명, 성령, 생기)이 혹시 없다면,
그게 있기는 있어도 아주 조금 뿐이라면
혹시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너무 이웃 사랑에 대한 행함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죽어서 영생을 얻으려면, 그 영생은 오늘 현실에서부터 시작되는데,
그 절체절명으로 중요한 내 영생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데서부터 얻어진다는 것이다.
흔히 강력한 설교는, 오랜 서재의 연구 시간에서 나온다고 한다. 정말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서재에서 연구만 하다보면.. 소위 '책상 신학'으로 빠져버릴 위험이 상존한다.
바쁜 일상이지만, 중병 불치병 환자들의 손을 잡아주고
굶주린 도시 빈민들의 아픔과 애환을 동병상련 같이 위로하고..
이런 데서 설교자의 '영생'이 살아 꿈틀거리게 되고, 그것이 그의 스피치에 묻어나오게 된다.
20년 전에 어느 큰 교회 목사가 이런 말을 했던 적이 있는데,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저는 가끔씩 지하철도 탑니다.
그리고 길에서 5천원 짜리 혁대도 사서 허리에 둘러 봅니다.
그리고 시장에서 칼국수, 김밥도 사 먹어 봅니다'
▲불쌍한 사람을 도우는 것은, 사실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
인도 선교사의 자녀로 태어나 영국 의대에 진학해서 의사가 되어서
그 후 인도의 한센병 환자들을 진료하는 일에 평생을 바쳤던
폴 브렌드 Paul Brand 박사는,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즉 자기가 그들을 도와준 것도 있지만,
알고보니 자신이 그들로부터 많은 정서적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다.
*후회 없는 값진 삶을 위하여 http://blog.daum.net/rfcdrfcd/15978971 (강추)
(폴 브랜드 박사의 간증) “의술을 펼쳤던 지역 (인도 변방) 특성상
의술로 큰돈을 번다는 건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외과의사로서 그동안 살아온 세월을 돌아보면,
한때 환자였던 수많은 친구들에게 억만금보다 더한 기쁨을 얻었습니다.
이제 나이 들어 생각해보니, 그 친구들의 사랑과 감사야말로
내 인생 길을 환하게 비춰주는 등불이었습니다.”
오늘도 국제구호사역, 또는 국내빈민사역, 긍휼사역 하시는 분들도
동일한 고백을 한다.
내가 그들에게 작은 도움의 손길을 베풀지만
그들은 나에게 미소, 사랑, 따뜻한 눈빛, 감사의 말,
존경, 축복 등을 되갚아 준다는 것이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하셨는데, *눅10;28
본문의 선한 사마리아인, 그는 그렇게 행함으로 영생을 살았다.
즉 생명을 살았다. 천국을 살았다. 의미 있는 삶을 살았다.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
그 이유 중에 한 가지가
강도 만난 사람이 그에게 돌려주는
미소, 사랑, 따뜻한 눈빛, 감사의 말,
존경, 축복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도, 그를 신령한 복으로 은총 내려주실 것이다.
예수님을 닮은 그 일을, 그가 똑같이 행함으로!
오늘 내 주위에, 강도만난 사람이 누구인지 한 번 생각해 본다.
선한 사마리아 인이 두 데나리온을 내고, 비용이 더 들면 더 내겠다고 했다. :35
그리고 그도 바쁜 사람이었다.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5
뭔가 볼 업무가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 일을 보고 나서 다시 주막으로 돌아오겠다고 했다!
없는 시간을 내어서라도,
비용을 내어서라도,
성령이 감동을 주실 때.. 우리가 순종해야 되겠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눅10:28
편집장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