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계 위주로 살지 말고 먼저 그 나라를 구하라 눅12:22~32 2020.12.02. 큐티묵상
※오늘 글은 실수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일단 평소 생각을 글로 정리해 보고
각론은 차츰 시간을 두고 고쳐 나가려고 한다. -교정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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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2:22~32절 단락을 읽고나서 압축해서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22
즉 너무 생계를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그리고 너희는 먼저 그 나라를 구하는 삶을 살아라 :31
왜냐면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23
▲오늘은 더 많은 연구와 배경 조사가 필요한 내용이지만
그냥 운을 뗀다는 심정으로, 화두를 던진다는 마음으로
평소의 생각을 글로 정리해 본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6장에도 나오는 말씀으로
기독교인들이 잘 알고 있는 말씀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6:33
굉장히 도전적인 말씀이다. 그래서 이 말씀에 의거, 이 말씀을 굳게 믿음으로
자기 직장을 내던지고 신학교에 가든지, 선교지로 자원한 분들도 많을 것이다.
그 분들에게 한 번 찾아가서 조용히 묻고 싶다.
‘그래서 당신의 의식주가 모두 채워졌습니까? 하나님이 정말 다 채워주셨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1%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캠퍼스 사역자들, 또한 개척교회 사역자들, 선교지 사역자들(후원 교회가 없는 경우)의
대부분은 의식주의 결핍으로 상당한 고통을 오래도록 당하고 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틀린 것일까?
아니면 저들이 다 부름 받지 못한 지원병들인 것일까?
저는 둘 다 아니라고 본다.
문제는, 우리가 본문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한 면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6:33절이나 눅12:31절 즉 ‘그 나라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라는
말씀을 예수님이 주실 때의 정황으로 들어가 보자.
나는 사도바울만 자비량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도 다 자비량 했으리라고 가정한다.
왜냐면 성직자에게 교회가 사례비를 주는 제도는, 주후 4~5세기 이후에 생긴 제도이다.
사례비를 주려면, 일단 교회가 세워져야 되는데,
제도적 교회는 4세기에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약 5세기 경부터 큰 성당이 세워지기 시작하면서, 그 성당을 관리할 성직자도 세워지고
이들의 사례도 정부에서 지급한 것으로.. 어디 문헌에서 읽은 것이 기억난다. (더 자세한 연구 요망)
어쨌거나 예수님 당시에는 교회가 미조직 되어 있었고, 건물도 없었고,
그러니 당연히 정규 예배도 없었고, 헌금도 없었고,
그러니 사도들에게 사례비를 줄 일도 없었다. 예수님이 돌을 돈으로 만들어 내지 않는 이상.
그리고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헌금을 걷었다는 기록도 사복음서 어디에도 없다.
단 하나, 예수님과 사도들을 후원한 여인들이 나오는데
눅8:3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
나는 이 여인들이 마치 12사도들처럼, 예수님과 삼년 반동안 동행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예수님이 전도여행을 다니신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일시적으로’ 동행해서
예수님의 일행을 도왔던 것으로 본다. 이들은 다 자기 가정이 있었을 것이고
오늘날의 예로 들면, 여름 수련회에 한 때 권사님들이 같이 따라가셔서 밥을 해 주신 것이다.
또 한 가지 예는, 이것은 설교자들이 종종 오해하는 대목이라고 보는데,
요21장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활 후에 디베랴 바닷가에서 물고기 잡고 있었는데
밤새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았다가 예수님의 방문을 받았다.
그래서 ‘이들이 믿음이 없어서 옛날 직업으로 돌아갔다’ 라고 다들 말하는데
그게 아니라, 이들은 평소에도 이렇게 물고기 잡아서 먹고 살았던 것이다.
늘상 평소에 자기들이 하던 일이었을 뿐이다.
사도직을 버리고 세속직을 취한 것이 아니라!
왜냐면 누가 사례비도 안 주는데, 일단 먹고 살아야 될 것 아닌가!
예를 들면, 우리나라 군대로 치면 정규군이 있어서 이들은 국가에서 의식주를 해결해준다.
그런데 예비군은 자기 직장이 있어서, 직장 다니다가 전쟁 나면 군인으로 싸운다.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은 정규군이 아니라, 예비군 개념이었다고 나는 그렇게 본다.
왜냐면 예수님은 어떤 센터, 본부, 건물이 없었다. 그런 흔적이 성경에 일절 안 나온다.
그럼 제자들을 뽑아서 3년 이상 계속 연속적으로 풍천노숙을 하셨다는 것일까? 그건 어려웠을 것이다.
남의 집에서 숙식을 해결 받는다 하더라도, 하루 이틀이지.. 계속 그렇게 받을 수는 없다.
특별한 시기를 제외하고는, 다들 자기 집에서 출퇴근 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예수님이 3년 반 동안 주로 활동하신 곳은 갈릴리 지역이다.
그러다가 예루살렘은 3번 정도 올라가셨다.
꼭 정확하게 날수를 계산하기는 어려우나, 거의 3년을 대부분 갈릴리에서 보내신 셈이다.
그리고 제자들의 출신지도 거의 (한 명을 빼고) 갈릴리이다.
오늘날의 지역교회에서 집사님, 권사님들이 자기 직업 가지면서
교회가서 봉사 하듯이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마치 ‘예비군’처럼
가끔씩 자기 직장 일을 보면서.. 예수님 제자로도 섬겼던 것이다.
왜냐면 누가 그들에게 사례비 줄 사람도 없었고, 그런 제도도 아예 없었던 시절이다.
단지, 과거에 직장 일이 요즘처럼 그렇게 빡세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12명이 늘 출석률 100%를 기록했다고 .. 나는 그렇게도 보지 않는다.
몇 명의 제자는 아주 열심히 예수님을 좇아다녔을 것이고
그렇지 못한 제자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 몇박 몇일 전도여행을 간 적은 있었다.
그러나 전도여행이 마치면 또 각자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면 또 집안 일을 했을 것이고, 그러다가 또 모이고 했을 것이다.
3년반을 마치 군대처럼 엄격하게 숙식을 같이 했다고 ..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전도여행을 할 때는 예수님이 이런 지침을 주셨다.
‘너희는 전대도 가지지 말고, 두 벌 옷도 가지지 말라’
그런데 제자들이 3년 내내 전도여행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특정 기간 그렇게 했다.
그러니 평소에는 전대도 필요하고, 두 벌 옷도 필요했다고 본다.
그래서 과거에 학생선교단체가 이것을 본 따서 ‘거지전도여행’을 한 적이 있었는데,
여름에 한 때 그렇게 한 것이다. 1년 내내 거지전도여행을 하고 다닌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제는 전대와 주머니를 가질 것을 당부하셨다.
눅22:35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주머니와 신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즉 전도여행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가로되 없었나이다
:36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주머니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찌어다
예수님이 전대와 주머니를 가지시라니..
그보다는 마6:33절을 가르치시는 것이 더 편하시지 않았을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또 가룟유다가 돈궤를 맡았다고 했는데, 예수님은 성전세 낼 때 돈이 얼마가 없으셔서
물고기를 잡아서 그 입에서 꺼내서 성전세를 내셔야 했다. 돈궤가 있었다면 그럴 필요가 없었다.
돈궤(구제용?)가 있기는 했겠지만,
거기에 돈이 넉넉하게 있고, 제자들을 배불리 먹여살릴 충분한 돈은 없었다고 본다.
오죽했으면 제자들이 안식일에 남의 밀밭에서 밀을 잘라서 먹었을까!
눅5장에 베드로와 안드레가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다고 했는데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로 나섰다는 것이지
그것이 꼭 그들이 생계를 포기했다고 ..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성직자가 풀타임 사역을 시작한 것은 주후 5세기 경에 시작된 제도로
나는 그렇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초대교회가 연보를 걷어서 흉년이 든 예루살렘에 보낸 적이 있는데,
그 때도 ‘구제헌금’ 성격이었지, 사역자 생활비 용도가 아니었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눅12:31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말씀은 ‘제자로 나서는 자는 자기 직업을 내팽개치라. 그럼 주님이 다 먹여살리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진의는 ‘생계를 염려하며 살지는 말라’는 뜻이다.
제자들이 생계가 염려되어서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일을 등한시 하게 되고, 포기하게 되고,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일을 관두어 버리는.. 그런 생계에 목숨 거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것이지,
‘네 직업을 내벗어던지고 나를 따르라’..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이 둘의 차이를 구분해야 한다.
심지어 예수님도 목수 일을 하셨다.
예수님도 30세에 공생애를 하시기 전에도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다 더하시리라’ 이 말씀을 분명히 알고 계셨을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도 목수든지 석수든지 그런 직장 일을 하실 필요가 없었다.
30세 전에는, 예수님이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지 않으셨을까?
그래서 생계를 위한 목수 일이 필요하셨던 것일까?
30세 전에, 즉 공생애 전에도 예수님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삶을 사셨지만
여전히 자기 직업을 가지셨다. 마6:33절을 오해하면, 직업을 가질 필요가 없는데 말이다.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 꼭 직장을 포기하라는 뜻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의미는 ‘다만 생계 위주로 살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마6:33, 눅12:31절을
‘네 직업을 내벗어던지고 나를 따르라’.. 이렇게 해석해서 직장 다 내팽개치고 예수님을 따라나섰다가
현실적으로
많이들 딜레마에 빠지는데,
주님이 자기 의식주를 책임져 주시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의 약속이 틀린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성경과 그 배경을 오해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나는 사도바울만 자비량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도 거의 자비량이었다고 본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들이 의식주 공급을 받았다고 보는 것은
오늘날의 시각에서, 2천년 전 당시를 보니까 그런 해석이 나오는데
2천년 전 예수님 당시에는, 어떤 조직 교회가 없었기 때문에
사도들을 조직적으로 서포트 하지도 못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의 직전 형태로 '유대 회당'이 존재했었는데, 예수님 당시에도 있었다.
여기도 회당장이 사례비를 받는 직책이 아니었다. 중국의 처소교회의 '책임 집사'같은 역할이었다.
자기 일을 하면서 회당장으로 섬겼던 것이다. 한국의 동네 이장처럼.
그러니 그런 문화가 아예 없었던 정황 가운데서, 사도들이 그 문화를 깨고 사례비를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구약시대에는 레위인과 제사장들은 12지파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신약의 사도들을, 또는 오늘날의 교역자들을
구약의 레위인이나 제사장과 매치시키는 일은.. 무리라고 본다.
▲그래서 마6:33, 눅12:31절과 연결해서 볼 내용이 '염려하지 말라'이다.
이 본문에 ‘염려, 근심’이란 단어가 4번이나 나온다.
4번이나 반복해서 나오는 것은 '염려 말라'가 그 주제이지, '직업을 버려라'가 주제가 아니다.
:22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25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26 그런즉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능치 못하거든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
:29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뭘 근심, 염려하지 말라는 것인가?
먹고 사는 것, 생계.. 이런 것을 너무 염려해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구하는데 있어서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직장을 버리라는 뜻과는 엄연히 다르다!
왜 그 나라를 먼저 구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왜냐면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23
때문이다.
먹는 것, 입는 것 염려하지 말고 그 나라를 먼저 구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는,
내 목숨이, 내 몸이, 즉 나의 영생이 매우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적용/ 특히 21세기가 되면서, 인터넷 사회가 되면서
교회의 환경도 거의 혁명적으로 바뀌고 있다.
21세기 교회의 특징 중 한 가지는
‘풀타임 사역자와 평신도 사역자의 구분’이 점점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교인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교회에 헌금을 내는 것도 과거보다는 현저하게 줄었다.
지금 선교환경도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다.
과거에는 WEC이나 NTM 또는 교단선교단체 등이 선교사를 많이 파송했지만
언제부턴가 예수전도단YWAM 이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다.
예수전도단YWAM 의 특징은, 선교사에게 선교비를 주지 않는 것이다.
마치 학생선교회처럼, 선교사 파송증은 심사를 거쳐서 주고 파송하되,
철저히 자비량 선교를 그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러자 파송선교사 숫자가 급등하여, 세계 제일의 선교단체로 부상하고 있다.
물론 사례비를 주느냐/ 안 주느냐
선교비를 주느냐/ 안 주느냐 ... 그것의 장단점을 이 자리에서 논의하자는 게 아니고
각각의 제도가 모두 각각의 의미와 필요성이 있을 것이다.
불필요하거나 불합리한데 만들어진 제도는 없다. 다 필요해서 만들어진 제도이다.
다만 21세기에 인터넷 사회와 더불어 기독교의 환경이 급격히 바뀌면서
성경으로 돌아가고, 신약교회 당시로 돌아가려는 노력이 끊임없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처음에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실 때는, 어떤 사례비를 약속하신 적도 없었다.
그리고 마6:33, 눅12:31절, 즉 ‘먼저 그 나라를 구하면 그 모든 것을 채우시리라’는 말씀은
‘생계를 걱정하지 말고 주님을 섬기라’는 것이지
‘네 직업을 내버리고 주님을 섬기라’는 의미로 오해해서는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 직장을 가지고, 자기 직업을 가진 상태에서
먼저 그 나라를 구하면.. 생계는 걱정 안 해도 된다는 것이다.
부부가 다 사역하기 원하면, 적어도 한 사람은 생계 일도 해야 한다.
사역자가 직업을 가지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신약의 성경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회가 그렇게 거대한 물줄기가 바뀌어가고 있다.
점점 교회가 서포트하지 않는 사역자들이, 교회가 부담지지 않는 사역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과거에는 교회가 서포트 하는 사역자만 주의 일을 하고,
나머지는 그 사역자를 서포트 하는 것이 주의 일이라고.. 생각하던 때가 한 때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사역자와 평신도의 담이 서서히 무너져내려가고 있다.
이제는 전 신자의 제자화, 전 성도의 사역자화로 세계가 변하고 있다.
어쩌면 더 성경적으로, 더 신약교회적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주님의 역사로!
앞으로 신학교에 진학해서 주의 종들이 되려고 하는 젊은이들에게
이 내용을 한 번 얘기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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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교회의 최고 모델로 많은 신학자들은 중국의 처소교회(가정교회)를 꼽고 있다. *1950~2010년 경
거기엔 나이 든 책임집사가 (가정)교회를 관리하고, 주로 젊은 청년을 설교자로 세워서 설교를 시킨다.
다들 각자 자기 직업이 있다. 어쩌면 초대교회의 가장 근접한 모습이 될 것이다.
그러다가 중국의 교회들도 건물도 짓고, 성가대도 조직하고, 풀타임 사역자도 세우면서
서구의 교회 전통을 따라가고 있다가, 최근 정부의 탄압을 받아 다시 수면 밑으로 들어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