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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밀함의 함정 눅17:15~18 2020.12.08.큐티묵상
본문은 예수님이 10명의 나병환자들을 고쳐주셨으나
사마리아인 한 명만 돌아와 예수님께 감사드린 내용이다.
▲예수님은 이방인을 우대하시나? 유대인을 역차별하시나?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신다고 했다. 롬2:10~11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롬10:12
그런데 사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행적을 보면, 이방인을 우대하시고
유대인을 역차별하신 모습이 역력히 나타나 보여진다.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인 한센병자를 칭찬하신 것 말고도
선한 사마리아인을 칭찬하셨고
수가 성에서 우물가의 그 사마리아 여인도 예수님이 우대하셨다.
그리고 믿음 좋다고 칭찬받은 이방인 백부장..
이때 예수님은 오늘날의 ‘차별금지법’에 위배될 만한 발언을 하셨다.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마8:10
그런데 사도행전에 나오는 백부장 고넬료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이방인이다.
십자가 아래에 이방인도 ‘그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이쯤 하면 자칫 잘못하면 ‘백부장은 다 의인이다’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정도가 된다.
또 믿음 좋다고 칭찬 받은 수로보니게 여인도 이방인!
이런 여러 이방인들을 칭찬하신 것도 모자라
예수님은 구약의 이방인들까지 소환시켜서 칭찬하셨다.
(내가 만약 유대인으로서 그 자리에 있었다면 약이 오를 만하다)
눅4:25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시돈 땅의 사렙다 과부, 수리아 사람 나아만.. 다 이방인이다.
이쯤 되면 예수님은 이방인을 우대하시고 유대인을 역차별하신다는 느낌을
안 받을 수 없다.
물론 아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공평하게 대하신다.
이것이 성경의 대전제이다.
하나님의 보좌의 기초는 ‘공평’이라고 성경에 반복해서 나온다.
시97:2 의와 공평이 그의 보좌의 기초로다
시89:14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에스겔 18:29 그런데 이스라엘 족속은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하지 아니하다 하는도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왜 유대인 나환자 아홉 명은 예수님께 와서 감사하지 않았고
사마리아인 나환자 한 명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 돌아와서 발 아래 엎드려 감사했을까?
그것이 바로 “친밀함의 함정”이란 생각이 든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과 친한 것이다.
반면에 이방인들은 예수님이 생소한 면이 있다.
예수님과 너무 친해서 벌어지는 몇몇 에피소드 들이 성경에 이렇게 나온다.
마13:55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 하며 예수를 배척한지라
이때 예수님은 유명한 말씀을 하신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마13:57
예수님의 가족들도 예수님을 무시하듯 대했다. 막3:30~31
정리하면, 이방인들이 예수님께 칭찬을 많이 들은 것은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친밀함이 거의 없다. 예수님을 잘 모르니까!
그러니 예수님을 깍듯하게 예우했고, 그래서 예수님의 은총을 입었다.
일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것은
예수님에 대해 어느 정도 친밀하기 때문이다.
그 집안도, 그 배경도, 그 성장과정도 어느 정도 알면.. 그를 예우하기가 사실 쉽지 않다.
▲적용
기독교 신앙의 신비 중 하나가 이렇다.
예를 들면, 아주 달이 아름답게 뜬 밤에
그 달을 쳐다보는 세상 모든 사람들은
마치 저 달이 자기만 비춰주는 어떤 ‘자기 만의 달’로 여기게 된다.
그래서 달을 보며 시를 쓰는 사람도 있고
달을 쳐다보며 서로 속삭이는 사람들도 있고
어쨌거나 저 하늘에 달을 마치 자기가 독점한 것처럼.. 달을 누리고 즐긴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할 때, 이와 같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모든 사람에게 은총의 빛을 골고루 비춰주시는데
우리 각자 개개인 성도들은 ‘나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로만 섬긴다.
마치 내가 하나님을 독점한 것 같고, 하나님은 세상에서 나 혼자만 사랑하시고
나 혼자만 돌보시는 것 같다..
새벽에 기도할 때, 자기와 하나님만 독대해서 만나고 교제하는 것 같다.
실제로 그 날 새벽에 온 세상에 수 백~ 수천만이 똑같이 그런 느낌을 갖는데 말이다.
그렇게 느끼는 면이 있다.
이게 기독교 신앙의 신비다.
▲그런데 ‘나의 하나님, 나의 예수님, 나의 아버지’ .. 이게 좋은 것이나
너무 오버하면 신앙의 독선, 독단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
또 어떤 사람은 ‘우리 교회의 하나님’ .. 이렇게
하나님이 오직 그 교회를 통해서만 역사하시는 것처럼 믿는 신자들도 꽤 많다.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좋지만, 너무 오버한 것이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너무 큰 사랑을 받은 나머지
하나님의 눈에는 나밖에 안 보인다고 생각(오해)하고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주인공인 나의 엑스트라로 보는 유치한 신앙을 갖게 된다.
내 배우자도 나의 엑스트라, 나를 돕기 위해 하나님이 짝 지워주신 사람이고,
내 동역자들도 나의 엑스트라들, 나를 위하라고 하나님이 내게 보내신 사람들이고,
내 형제자매들, 내 친구들.. 모두 내 사역을 위해 마땅히 희생해야 하는 사명을 받은 자들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 이상한 독단주의에 빠질 수도 있다.
이것도 ‘친밀함’ 때문에 생기는 일종의 폐단이다.
거리가 먼 사람에게는 이런 생각이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와 거리가 가까운 사람일수록,
내가 주인공 히어로 이고, 내 주위 사람들은 모두 엑스트라로 보는 심성이
어쩌면 아직도 내게 남아있을 수 있다. 과거에는 아주 많이 있었고...
내 주위 사람들도
나와 똑같이
하나님이 그들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시고, 위해 주시고, 그들 각자를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시고..
그들도 나와 똑같이 대우해 주시는데
내가 신앙이 미숙하면 할수록
나 한 사람이 주인공이고,
내 주변 사람들은 모두 내 조력자, 엑스트라 쯤으로 보게 된다.
즉 하나님이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갖고 계신 계획들을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이다.
친하면 친할수록 무시하게 되는 경향이 인간에겐 내재되어 있으니까!
대학로 연극이나, 안방극장에는 주인공이 있고, 조연이 있다.
아주 분량이 적은 역할은 그저 ‘동네 아저씨1, 동네 아저씨2’ 로 나온다. (이름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의 무대에서는 그렇지 않다.
거듭나고 회심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모두가 다 무대의 주인공들이다.
우리 셀그룹에 10명이면, 그 10명이 다 각각 주인공들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서두에 '달빛이 모든 사람을 비춘다'는 예를 들었다.
하나님 보시기에 그들 각각은 다 하나님 나라 무대의 주인공들이며
무엇보다도 그들 각자 자기 자신이 ‘내가 주인공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성숙한 사역자는
자신이 하나님께 부름받고, 사명 받은 확실한 하나님의 종임을 인식하면서도
동시에
자기 배우자가, 자기와 똑같이 사명 받은 하나님의 종 임을 인식한다.
다만 눈, 코, 입, 손, 발의 역할이 다른 것같이
그 포지션과 역할이 다를 뿐이지,
주인공과 엑스트라의 관계는 아닌 것이다.
성숙한 사역자는
자신이 하나님께 부름받고, 사명 받은 확실한 하나님의 종임을 인식하면서도
동시에
자기 교우, 자기 동역자, 자기 친구들이
자기와 똑같이 사명 받은 하나님의 종 임을 인식한다. 다만 역할과 위치만 다를 뿐이다.
그런데 사람이 서로 친밀하다보면
그가 받은 사명은 .. 내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그저 막 대해도 별 이상 없는.. 나의 엑스트라처럼 내 눈에 보이기 쉽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막 대하고, 구세주로 못 알아 본 것은
자기 민족이고, 자기들이 잘 아는 사람이어서, 너무 친밀한 나머지
혹시 자기는 선민이요,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란 사실은 분명히 알았는데,
예수님은 그저 엑스트라로 보였던 것이다. 주인공인 자기들의 엑스트라로!
그러니 당시 산헤드린 공회, 제사장, 사두개인, 바리새인 ..
이들은 주인공 의식이 역력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는 별 볼일 없는 엑스트라!
▲뉴스를 보다 보면 아이러니 한 것은
10년 전에는 A가 아주 높은 자리에 있었고, B는 잠바를 입고 다녔다.
그래서 A는 B의 등을 두드려주면서 거의 엑스트라 취급을 했다.
그런데 10~15년이 지나면 완전히 바뀌게 된다.
B가 이제는 높은 자리에 앉게 되고
A는 은퇴하고서 잠바를 입고 다니는 엑스트라가 된다.
나이 든 내가 젊은 사람들을 대할 때,
지금은 내가 그들의 등을 두드려주면서 엑스트라 취급을 하지만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나는 은퇴해서 잠바를 입고 다니고, 그들이 나를 엑스트라 취급할 날이 곧 올 것이다.
이미 왔는지도 모르겠다.
이전 세대는 지나가고, 새 세대가 오기 마련이다.
역사의 주인공과 주도권이 .. 세월이 지나면 다음 세대로 넘어가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성숙한 사람은
젊은 사람을 대할 때도, 그들의 미래를 생각하며.. 그들을 엑스트라 취급하지 않는다.
미숙한 사람은
항상 자기만 주인공이고, 다른 사람들을 늘상 엑스트라 취급하다가
세월이 조금만 지나면
그 엑스트라들이 다 주인공들이 되고, 자기는 그들로부터 엑스트라 취급을 당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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