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마지막 시험 눅23:47, 마5:11, 딛1:12~13 2020.12.15.큐티묵상
눅23:47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예수님이 지상에서 당하신 마지막 시험은 ‘모욕’이었다.
십자가 위에서 벌거벗고 모진 고통을 감내하고 계신데도
어쩌면 그 육체적 고통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그 앞 면전에서 조롱하는 사람들의 모욕이었으리라.
관리들 :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군인들 :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한 강도 :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잭 푸닌 목사는 ‘하나님은 승진 시키기 전에 우리를 시험하신다’ 라는 설교에서
'신자들은 하나님이 늘 시험하신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살고 있다,
그래서 시험에 늘 낙방한다'는 것이다.
아예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시험 보고 있다는 것 자체도 인식 못하며 살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교육부 학제로 비유하면, 오래 믿은 신자들도 항상 초등학교 1~2학년 수준의
신앙생활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10년 내내 학기말 고사에서 Fail 해서, 3학년 이상 더 고학년으로 진급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께 쓰임 받고 있는 신자가 찾아보기 드물다고 했다.
하나님이 쓰실만한 장년의 신앙인이 찾기 어려운데,
그 이유는, 신자들이 자꾸 시험에 져서, 그것도 때마다 반복적으로 져서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자기 신앙 수준이 바닥에서 무한 반복 맴돌고 있다는 것이다.
모욕을 참고, 도리어 그들을 축복하는 것이
예수님의 지상 마지막 시험이었다면
어쩌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그것이 어떤 마지막 시험이 될 수도 있다.
어떤 형제가 이런 얘기를 나눈 것이 기억난다.
하루는 새벽 꿈에, 자기가 ‘대학원 시험에 낙방’했다고 한다.
비록 꿈이지만.. 기분이 씁쓸하고 별로 유쾌하지 않은 꿈이었다.
그는 그 즈음에 혹시 자기가 무슨 시험에 낙방했는지를 돌아보았다고 한다.
기도하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자기가, 자기 사역을 훼방하고 태클 거는 사람들을 향하여
진정으로 예수님처럼 용서하지 못하고, 그들과 대적해서 싸우고
독한 말을 쏘아부치면서 되갚아준 것이 생각났다고 했고,
그 일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심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절치부심, 하나님이 재시험의 기회를 자기에게 주시기를 기다린다고 했다.
다음 번에 또 자기가 훼방을 받고 욕을 먹고 태클을 당할 적에
정말 예수님처럼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23:34
라고 기도하며, 그 시험을 패스하기를 바란다는 나눔이었다.
▲사실 이 ‘마지막 시험’은 패스하기가 쉽지 않다.
어느 책에서 읽고서 간접 경험한 내용인데,
병원에서 수술 받는 것이 다 어느 정도 아픈 육체적 고통이 있지만
그중에서 특히 정형외과에서 뼈 맞추는 수술이 가장 제일 고통스럽다고 한다.
그래서 교통사고 등으로 뼈가 으스러졌다가
정형외과에서 뼈 맞추는 수술을 받고 난 환자는
모르핀 약기가 떨어지면
자기를 수술한 그 고마운 의사, 간호사에게 마구 험한 말을 내뱉는다고 한다.
이유는 ‘너무 아프기 때문’ 이란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린 사람들도, 뼈가 으스르지는 아픔을 겪으면서
자기도 모르게 아주 심한 욕설과 저주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마구 쏟아져 나오는 것이 인지상정이라고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저주의 독한 말 대신에
가상 칠언으로 알려진 일곱마디 말씀을 하셨다.
어떤 학자의 주장에 의하면, 예수님이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으악~ 하고 비명이 나오는 그 비명을 참고 견뎌내기 위해서
시편 22편에서 69편까지인가의 말씀을 암송하셨다고 주장하는 신학자도 있다.
그렇게 볼 때 이것이 예수님의 ‘마지막 시험’ 일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정말 으악 하는 비명소리가 나오고
정말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는 자들에 대한 저주가 나올 법한 상황에서
주님은 그들을 용서해 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하신 것이다.
그러자 그 아래서 그런 정황을 목격한 백부장은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눅23:47
그렇다면 나는, 또한 우리는
비슷한 상황에 만약 내몰리게 된다면
정말 그 ‘마지막 시험’을 통과할 수 있을까? 패스할 수 있을까?
아니면 서두에 언급한 그 꿈을 꾼 형제처럼
대학원 시험에서 낙방해서 다시 재시험 기회를 기다려야 할까?
아니면 그런 시험에 낙방을 수 년간 거듭해서, 혹시 삼수생, 사수생이 되어있지는 않을까?
정말 내 주위, 또는 우리 주위 사람들이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눅23:47 라고 고백하며
내가, 우리가 그런 시험을 능히 패스하고 진급할 수 있을까?
그래서 사막교부들은, 자기를 모욕하고, 저주하고, 깔아뭉개는 사람들을 만나면
오히려 기뻐했다고.. 그런 기회를 기다렸다고 한다.
자기의 경건성을 테스트하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승진할 수 있는 시험의 기회로 여겼다는 것이다.
마5:11~12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그런데 TV연속극 같은 것을 보면, 주로 이런 내용이 끊임없이 나온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박대하고,
며느리가 교묘하게 시댁에 보복하고,
직장상사나 동료가 주인공을 마구 무시하고
주인공은 ‘억울하면 출세하자’는 심정으로 성공할 때까지 절치부심 칼을 간다.
연속극이라서 그렇겠지만, 거기서 참고 이해하고 용서하는 사람은 한 명도 안 나온다.
모두 자기 성질, 자기 자아 충만으로 대응해 나간다.
그래서 심한 박대와 모욕을 매일 당하는 것을 참다참다 견디지 못하여
사람들은 성경말씀과 정반대로 액션을 취하는데,
물론 시험에 낙방하는 것은 기본이지만
거기에 덤으로 병을 얻을 수도 있다.
뇌졸로 쓰러진다든지.. 신경쇠약과 불면증에 걸린다든지..
용서하지 못하고 밤마다 한을 품으면.. 자기만 암같은 중병에 걸리게 되는 것이다.
자기가 받은 스트레스가 몇 해 차곡차곡 쌓이다보면 그렇게 된다.
그래서 ‘용서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한다’는 말이 있다.
일례로, 자기 가족 중 한 명이 밤길에 노상에서 테러를 당했다.
그러면 그 가족들이 뉴스에 나오는데, 손에 든 피켓에 ‘법의 공정한 심판을 바랍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정당한 처벌이다!’ 이렇게 인터뷰하는 말도 나온다.
정말 너무 억울한 심정이야 십분 이해가 되지만
그 가해자를 진심으로 만약 용서하지 않으면
그 가족들에게 연쇄적인 피해가 발생하게 되는데
정신병, 불면증, 심장병, 뇌졸 등의 질병이 따라오는 것이다.
그래서 ‘용서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한다’는 말은 사실이다.
▲인간관계에서 피해를 안 받는 법, 또는 최소화 하는 법
나는 아래 방법을 몇 년 채택해 보았는데 꽤 효과가 있었다.
‘기봉이가 행복한 이유’라는 글을 읽었는데
기봉이는 약간의 발달장애가 있어서, 몸은 어른이나 정신연령은 아직 초등학생이었다.
그래서 시골동네에서 궂은 일, 힘든 일은
동네 어른들이 기봉이를 불러서 다 시키고 부려먹었다.
그리고 저녁 때 집에 돌아갈 때는, 그저 떡 두 덩이, 밭작물 약간
이렇게만 기봉이 손에 들려 보냈다.
그래도 기봉이는, 그걸 엄마에게 갖다주는 게 너무 기뻐서
맨발로 단숨에 집에까지 달려오는 것이다.
엄마는 그런 다 큰 아들 기봉이가 너무 안쓰럽지만
기봉이는 늘 싱글벙글 매일 행복하다고 한다.
그 글에서, 이렇게 기봉이가 늘 행복한 이유는.. 기대감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기를 부려 먹는 동네 어른들에 대한 어떤 기대치가.. 거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내가 사람에게 실망하는 것은
사실 그에 대한 어떤 기대치가 있었기 때문이고,
그 기대치가 높으면 높을수록.. 내 실망의 강도도 높아진다.
그가 나를 마땅히 존경해 주리라는 기대치,
그들이 나를 무슨 장長, 무슨 사士로 대우해 줄 것이라는 예상,
그가 내가 생각하는 만큼 보수를 줄 것이라는 기대,
그가 나를 내가 기대하는 만큼 사랑, 인정해 줄 것이라는 예측!
이런 것들을 아예 가지지 않거나,
가져도 아주 밑바닥 수준으로 낮추어서 가지면
기봉이처럼!
실망할 일이 없다. 언제나 싱글벙글하게 된다.
그리고 내가 기대하는 게 없으니까
상대방에게도 자유를 주게 된다.
(어떤 사람은 만나면 부담이 되고
그래서 만남을 고의로 피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자꾸 내게 어떤 기대감을 가지는 것이 내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럼 부담이 되고, 만남에 자유가 없게 된다.)
▲관련해서, 성경에 참으로 사도바울이 이렇게 말했다고 하는
믿기 어려운 말씀이 한 구절 나온다.
‘그레데인 중의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하니 이 증언이 참되도다’ 딛1:12~13
바울이 어떤 선지자의 말을 인용한 것이지만
‘이 증언이 참되도다’ 하며 그의 말을 확증한 것이다.
아니 그럼 사도바울은 그레데 (오늘날의 크레타) 전도는 포기했던 것일까?
그레데 사람들이 두고 두고 사도바울을 좋게 여길리 없는
그런 실언을 하신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레데 사람들에 대한 기대를 버려라’
또는 ‘그레데 사람들에 대한 기대치를 아주 낮추어라’
그러면 디도가 그레데 에서 사역하기가 한결 쉬워진다.
그레데 사람들의 거짓말, 악함, 게으름에 대해서 시험들 일이 거의 없게 된다.
아예 그렇지 않으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으니까!
▲정리하면, 예수님께 그런 마지막 시험이 있었다면
제자인 우리에게도 그런 마지막 시험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주의 일을 하다가 욕 먹고, 태클 당하고, 훼방을 받고, 신체적 가해를 받을 때
맞받아 치지 않고, 그대로 되갚아 주지 않고
예수님처럼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시험은 패스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그래서 정말 마지막 시험이 될 수도 있다.
이게 완벽한 답은 안 되지만, 그래도 쉽고 간단한 해결책은 될 것이다.
‘상대에 대해서 어떤 기대도 갖지 않는 것이다.’
그냥 사람은 응당 그려려니...
사람은 (나처럼) 죄인이니까...
아담의 원죄적 속성을 유전 받은 인간은 원래 그런 게지...
기대가 아예 없으면 실망도 전혀 할 게 없다!
용서할 것도 없다.
실망도 안 했으니까!
그래서 우리도 이런 증언을 주위로부터 들어야 한다.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눅2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