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과 환란 가운데 일하신다 계7:9~10 2020.12.24.큐티묵상
오래 전에 본 영화 <벤허>에서 내게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벤허가 노예로 팔려서 노예선 밑창에서 노를 젓게 되는데,
그가 탄 배가 해전에 휩쌓였고,
그는 로마 장군과 함께 난파를 당했다.
난파선 널조각 위에서 로마 장군은 패배를 직감하고 자결을 시도한다.
벤허가 가까스로 장군의 자살을 만류시킨다.
널조각은 얼마 후에 다른 로마 함선에 의해 구조되는데
알고보니 장군은 대승을 거둔 것이었다.
그 장군을 살린 공로로, 벤허는 그의 양자로 입적된다.
내가 은혜 받은 내용은, 널조각에 올라탄 장군은 전투에서 진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오히려 대승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이런 비슷한 내용이 본문 계7장에도 나오는데...
▲계시록 6장에서 ‘일곱 인의 재앙’이 차례로 펼쳐진다.
그 중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5번째 인의 재앙
즉 ‘성도가 당하는 핍박’이다. 계6:9~10
거기에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하나님께 탄원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런 어쩌면 끔찍한 일들이 지상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이게 무슨 영문인지 비슷한 시간에 천상에서는,
계7장에 보니까, 오히려 승리와 찬양이 울려퍼진다.
계7:9~10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많은 신학자들은 위 구절을 장차 미래에 있을 어떤
승리의 최고조 Culmination 의 순간으로 해석한다.
그런 해석도 물론 맞겠지만, 그게 미래에 어떤 원 포인트의 시점에
벌어질 단회적 사건으로..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지금 현재에도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외치고 찬양하는’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으리라고 내다본다. (요한도 이 관점을 가졌으리라)
그렇게 온 족속 방언들이 하나님을 계속 찬양하다가, 나중에 종말에,
재림 후에는, 위 말씀처럼 정말 더 확대되어 이루어질 것이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과거-현재-미래의 시간 개념은
지금 우리가 사는 3차원의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시간의 원리이다.
그러나 영원의 세계에서는, 지금 우리가 쓰는 과거-현재-미래,
또는 하루 24시간, 1년 365일.. 이런 개념들은 없어질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도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고 하지 않는가!
위 계7:9~10 말씀을, 먼 미래의 어느 한 시점에 일어날 (단회적) 이벤트로
보는 시각은, 다분히 지구상의 3차원적 시간 개념으로
계시록 7장을 해석했기 때문이다.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계6장에 지상에서 일곱 인이 떼어지며 각종 재난이 연쇄적으로 닥치고
특히 성도들이 핍박을 당해 순교하는 일까지 벌어지는 그 순간에
비슷한 시간에 천상에서는
각 나라와 족속에서 셀 수 없이 많은 구원 받은 성도들이
흰 옷을 입고,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도요한은 지상의 모습과 천상의 모습을 번갈아 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우리에게도 같은 시각이 필요하리라고 본다.
▲그래서 계6장과 7장을 번갈아 보면서
어쩌면 지상의 사건과 같은 시간에 벌어지는 천상의 사건을
동시에 보면서 드는 생각은
‘혼란과 환란을 통해, 혼란과 환란 가운데 하나님은 일하신다’이다!
우리 생각에는 세상에 더 고요할 수 없을 정도로 고요하고
또 세상에 더 화목할 수 없을 정도로 화목하고
그런 절대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되어질 것 같지만.. 물론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본문에도 보듯이
세상에 혼란과 환란과 온갖 잡다한 일들이 벌어지지만
그런 환경을 통해서도.. 여전히 하나님은 구원 사역을 이루어 가신다!
아니, 어쩌면 평화롭고 안정적일 때보다
혼란과 환란을 통해서, 마치 풍랑에 배가 더 빨리 밀려가듯이
하나님 나라의 일이 더 잘 이루어 질 수도 있을 것이다.
▲2020년 금년도 어느 듯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지난 12개월을 되돌아볼 때,
나는 안정적이고, 잔잔하며, 평화로운 가운데 지내왔는가?
아니면 혹시 바람 불고, 풍랑 일고, 회오리 소용돌이 가운데 지내왔는가?
때로는 건강이 좋지 못해서 ‘이러다가 천국행?’을 생각한 적도 있었고,
때로는 관계가 파괴되어 정신적인 고통을 받은 때도 있었고,
때로는 사역이 뒷걸음질 치는 일도 있었고
때로는 경제적인 이유로.. 믿음이 잠시 식어지는 일도 있었을 것이다.
결과는, 뚜껑은.. 천국에 가 봐야 안다.
지금 지상에서 우리는 그 결과를 다 파악할 수는 없다.
왜냐면 하나님의 길은 나의 길과 다르고,
하나님의 생각은 내 생각과 다르기 때문이다.
사55:8~9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내가 생각하고 씨를 뿌린 곳에서, 열매가 안 생길 수도 있고,
내가 전혀 기대도 하지 않은 곳에서, 엉뚱하게 열매가 생기기도 한다.
일꾼은 그저 열매에 관계없이 충성하면 그것으로 만족이 된다.
왜냐면 ‘내가 전혀 모르는 길로 하나님이 인도하실’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 당대에 자기가 뿌린 열매를 다 보고자 하면.. 안 된다.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예를 들면, 반 고흐가 당대에 자기 그림을 한 점도 제 값에 못 팔았지만
그의 사후에는 지금 세계 최고가의 그림으로 거래되고 있듯이
나의 열매는 천국에 가서 그때 결산할 것이고,
지금 할 일은, 열매에 신경 쓰지 말고, 그저 씨를 열심히 뿌리는 일이다.
그리고 주님은 열매를 맺게 하시는데,
전혀 엉뚱한 방향에서,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열매를 맺게 하실
것이므로.. 그건 그냥 주님께 맡기고..
‘내 소관이 아니다’ 생각하면 된다.
▲18~19세기 영국이 아프리카에 복음을 전했는데,
노예무역도 같이 했다.
비슷한 시기에 스페인이 남미에 복음을 전파했는데
엄청난 사상자를 내며 정복 전쟁을 하면서 남미를 개종시켰다.
이런 승리주의 방식의 선교는, 많은 부작용과 휴유증을 낳게 된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방식은 십자가 방식이다.
‘네가 죽어서 남을 살리는 방식’이다.
'십자가에서 내가 지거나 죽는 방식'이다.
그래서 5번째 인의 재앙이.. 매 시대마다 닥치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 십자가의 길을 허락하시는 것이다.
계6:9~10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오늘날 21세기에는 이런 피를 뿌리는 순교가 있기는 있지만 희박하다.
그러나 여전히 다른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많이 교통사고나 강도로 죽거나 다치고,
의료 인프라가 열악한 곳에서, 병을 얻어서 죽거나 다치고,
또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기도 한다.
위의 계6:9~10절 말씀이 꼭 그대로 오늘날 일어나지는 않더라도 (2%)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오늘날에도 그대로 벌어지고 있다. (98%)
그러나 이 때 동시에 우리는 계7:9~10절을 떠올려야 한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승리는 꼭 내가 예상하고, 예측하는 방식으로 오지 않을 것이다.
<벤허>에 나오는 로마 장군처럼
자기가 완전히 졌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대승을 거둘 수도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혼란과 환란을 통해 일하신다’는 말은 정말이다.
금년 한 해도 혼란과 환란이 많았고,
내년에도 또 무슨 새로운 혼란과 환란이 닥칠지 모르지만
땅에서는 일곱 인이 떼어지고, 성도가 극심하게 핍박당하는 일이 있어도
천상에서는 백성과 방언과 족속들이 흰 옷을 입고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서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께 있도다!’
하며 찬송을 부르는 일이 계속 되고 있는 것이다! 금년에도, 내년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