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교회 2024-05-19 주일예배 //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라 (youtube.com)
*위 동영상 58분~끝까지 녹취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라 눅18:9~17
눅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세리는, 감히 눈을 들어 하나님을,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무엇이죠? 자기를 그만큼 낮추는 거죠.
하늘을 쳐다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가슴을 쳤습니다.
이것은 후회, 그리고 아픔이죠. 고통이죠.
여기에 '하늘을 쳐다본다, 가슴을 친다'는 것은 미완료 시제로서
계속적이고 반복적인 행동입니다. 한 번이 아니고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세리는 하늘을 쳐다보지 못하고, 계속 가슴을 치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하나님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그때 14절은, 예수님의 평가입니다.
눅18: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이 사람'은 누굽니까? 세리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면서 '하나님, 죄인인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그렇게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 앞에 호소했던 세리,
그 세리를 향해 '그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그리고 집으로 내려갔다' 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13절에 '불쌍히' 라는 표현이 있는데,
앞에서도 정말 나병환자라든가 아니면,
소경 바디매오도 이런 사람들이 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라고 했죠.
그런데 우리 한글번역은 똑같은데, 헬라어는 다른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본문 13절에 사용된 '불쌍히'는,
히2:17절에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이 되신다 라는 것을 설명하시면서
마지막에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히2:17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여기에 사용된 '속량'이라는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정리하면, 일반적으로 이 '긍휼히 여겨달라'는 것은 '엘레오스'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눅17:13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나병환자들)
눅18:38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바디메오)
본문의 세리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13
여기서 '불쌍히'는 '속량'입니다. *힐라스코마이 merciful
(본문 눅18:13절과 히2:17절에 딱 두 번 사용된 단어입니다)
나병 환자나, 여리고 성의 맹인 같은 사람이
불쌍히 여겨 달라는 것은, 뭐가 관련이 있는가 하면... 고통입니다.
'하나님 나의 고통스런 현실, 이 비참한 현실 보시면서 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그러나 본문의 세리가 여기 사용한 '불쌍히' 단어는
죄와 관련된 단어입니다.
'주님, 저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진노를 거두어 주시고,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게 해 주십시오' 그 뜻을 담고 있는 '불쌍히'라는 표현입니다.
여러분, 세리는 지금 이제 이렇게 기도를 했죠.
'주님 저를 정말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저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그리고 나아가서 하나님의 진노를 거두어 주시고,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도록 저를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그를 내려다보시고 '그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주의 백성들은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면서, 살아가야 된다는 겁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하시나요?
제가 지금 이제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
그럼 마음에 조금 찡한 게 있습니까? 아니면 오히려 이렇게 기도하시지 않습니까?
'하나님, 우리 남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그는 죄인입니다!'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게 아니라, 남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게 정말 문제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본문의 바리새인의 기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도,
교우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라고 기도하기는 하는데,
정작 자기 자신은 쏙 빼 놓고, 남들만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한다면...
바람직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저도 참 그렇게 기도했던 적이 과거에 한 두 번 있었던 것 같아요.
'하나님, 그 성도들 때문에 제가 못 살겠습니다. 주님, 저 성도님을 좀 불쌍히 여겨주세요.'
우리가 이렇게 기도하기가 쉽지 않나요?
그런데 세리는 어떻게 기도했죠?
'주님, 바로 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
물론 이웃을 불쌍히 여겨 달라는 기도도 .. 훌륭한 기도입니다.
그러나 거기엔, 반드시 나 자신이 먼저 죄인이라는, 나를 먼저 불쌍히 여겨 달라는
전제 위해서, 드리는 기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절대로 '그가 죄인이기에, 그를 불쌍히 여겨주소서'라는
바리새인의 기도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저는 제가 청년 시절을 보내면서,
저는 어쨌든 하나님이, 당시 제게 주신, 제 인생의 최고의 은혜는 무엇이냐?
제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해주신 것입니다.
저는 대학에 들어가서, 처음에는 세상을 한번 바꿔보려는...
다 청년 때는 그런 마음을 가지잖아요.
'이 병든 세상을 좀 바꿔야 되지 않겠나?'
그 다음에는 '교회가 좀 바뀌어야 되지 않나?'
오랫동안 저는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정말 청년 시절을 쭉 살아가면서,
세상의 모순보다,
그리고 교회의 모순보다,
더 깊고 무서운 모순이 내 속에 있다는 것을 제가 깨닫게 됐을 때
저는 그것이 제 인생에 가장 놀라운 발견이었습니다.
세상의 어두움보다, 교회의 어두움보다
더 깊은 어두움이, 바로 내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래서 저는 예수님을 내 삶의 구원자로 모셔서,
주님의 보혈로 제 모든 허물이 용서함을 받고,
여러분 이거는 누군가 나쁜 놈을 죽여서, 그 죄의 흔적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죄를 지울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통해서 '나 같은 사람도 새로워질 수 있구나'
'나같이 나에 중독된 사람도, 주님은 나를 바꾸실 수 있구나'
이것이 제 인생의 최고의 발견이었어요. 최고의 발견!
저는 그래서 사람들을 믿지 않습니다. 왜요?
저와 똑같은 죄인이니까요.
반대로 저는 사람들을 향해 포기하지 않습니다. 왜요?
그분들도 나처럼, 예수님이 바꾸실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저는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이것을 깨닫게 됐어요.
나 자신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사람은 저는 믿지 않습니다.
왜요? 그분들 속에는 정말 여전히 모순과 죄가 살아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저는 누구도 포기할 수 없어요.
왜요?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은, 그분들도 다 구원하실 수가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지금 본문에 등장하는 세리,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날마다 구해야 될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을 보시면, 15절에,
사람들이 예수께 만져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아이를 데리고 옵니다.
눅18:15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그걸 보고 제자들이 보고 꾸짖습니다.
여기 '어린 아기'입니다. 그러니까 갓난아이들이죠.
사람들이 갓난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기대한 것은 예수님이 안수하시고 축복해 주시기를 구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보고, 그 사람들을 꾸짖었습니다.
여기서 '꾸짖는다'는 단어는, 복음서에 주로
귀신을 꾸짖을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에피티마오, 마17:18, 막4:39
그런데 16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죠.
18:16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이거는 죽어서 가는 '하나님의 나라'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고, 예수님 통해서 시작된 이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확장시켜가는 사람들은 누구냐?
바로 어린아이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자(어린아이)들의 것이다!'
그리고 17절에 이제 부정적으로 묘사하십니다.
18: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여러분 여기 '어린아이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인다'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어린아이가 순진하고, 그리고 정말 모든 말을 순진하게 잘 받아들이고...' 이런 것보다는
지금 본문은 '갓난아이'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갓난아이들의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어요.
여러분 갓난아이의 얼굴을 보시면 좀 어떻죠?
일단 애들이 얼굴이 밝아요. 우리들처럼 이렇게 찌그러져 있지 않아요.
어머니를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냥 맑고 그리고 애들이 그냥 깔깔깔 잘 웃어요. 아주 밝아요.
여러분 애들이 '나는 왜 이렇게 키가 작을까? 나는 왜 이렇게 가난할까?
나는 왜 이렇게 잘 모를까?' 갓난아이가 고민합니까?
어린아이들은 그냥 하나만 있으면 돼요. 엄마만 있으면 돼요. 엄마!
그리고 또 아빠가 있으면 돼요.
엄마, 아빠가 자기를 보고 있고, 그리고 자기를 축복해주고, 사랑하고 그러면...
아빠, 엄마가 있으면 충분하죠. 충분하죠!
우리 어린아이들은 전적으로 부모를 신뢰합니다. 전적으로 신뢰하죠.
그러니까 자기의 작음, 내가 문제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 전혀 염려하지 않아요.
그냥 아빠, 엄마를 바라보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나의 작음에 압도되지 말자' ... 과거에 제가 늘 기억하고 기도했던 제목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크심을 바라보며 살자는 뜻이죠.
그럼 그 안에서, 내가 비록 부족한 게 있어도,
'아빠, 엄마가 나를 채워줄 거야.. 아빠, 엄마가 도와줄 거야'
그러면서 그는 전적으로 신뢰하니까
그는 기대하고 그리고 기뻐하면서 살아가는 거죠.
'하나님 나라는 바로 이런 자들의 것이다' 라는 것이에요.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을 어린아기처럼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제가 요즘 노력하는 게 이겁니다.
저도 올해 환갑이거든요.
그러면서 이제 한 번씩은 '내가 왜 이렇게 부족한가?' 이렇게 생각을 하다가도,
'야, 환갑 지나서까지 그런 생각하면 어떡하냐? 그냥 내 생긴 대로 지내자.
그냥 내 수준껏 살자'
그러면서 저도 요즘 노력하는 게 뭔가 하면
'꼭 내가 잘나야 되나? 내가 준비 잘 하고, 내가 노력해야 교회가 잘 되냐?
그냥 교회는 머리되신 예수님이 잘 되게 하시는 거지...
내가 열심히 한다고 해서 뭐가 그렇게 크게 달라질까?'
제가 요즘은, 죄송한 말씀인데, 좀 뻔뻔해지려고 노력을 합니다.
'아이고 하나님, 내가 기도도 많이 못했고... 뭐 어떡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제가 좀 졸아도 하나님 좀 책임져 주십시오.
제가 좀 부족해도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십시오!'
그래서 저는 요즘에 이제 참 어린아이처럼,
제가 뭔가 열심히 노력해야 된다... 이런 강박관념에서부터 좀 벗어나서
그냥 어린아이처럼 제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이고,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고 하나님의 백성인데 내가 책임져야 됩니까?
하나님이 책임줘 주시겠죠.
그래서 그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하나님을 기대하고
꼭 하나님이 우리 수준에 매여서 역사하실 이유가 없잖아요.
하나님 수준에 역사하시면 되는 거잖아요.
그리고 그거 기대하니까 우리는 어떻게 되느냐?
기뻐하면서 어린아이들처럼 우리가 티없이 살아갈 수 있잖아요.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 어떻게 살아가야 되나?
본문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주시죠.
1) 첫 번째는,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마라 눅18:1
2) 두 번째는 (세리처럼)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낮추어라!
여러분,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낮추셔야 돼요.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낮추셔야 돼요.
3) 세 번째, 어린 아기처럼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냥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
그냥 그분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분을 신뢰하기 때문에
우리가 비록 부족해도 하나님을 기대하고.
그 기대함 때문에 우리는 기뻐할 수 있는 거죠.
▲제가 유학 가서 묵상했던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유학 가서 한 5년 동안에 진짜 이 구절로 매일 기도를 했는데
한국 오니까 이렇게 살기가 힘든 것 같아요.
잊어버렸다가 다시 한번 기억을 되살리게 되었습니다.
시편 131편인데, 다윗의 시입니다.
저는 다윗이 이런 시를 기록한 줄 몰랐어요. 다윗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131:1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2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3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러분 나중에 집에 가셔서, 나즈막하게 한번 소리내서 본문을 따라 기도해 보십시오.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도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면서 우리가 살고 있지 않습니까?
거창한 슬로건에 압도되어 가지고,
날마다 한순간도 감사해 보지 못한채
거대한 슬로건에 갇혀서 자기 자신을 그냥 보잘 것 없이 만들어 버리는...
여러분, 거창한 일, 감당치 못할 놀라운 일... 그거 힘쓰고 있지 않습니까? :1
2절에 이렇게 노래하며 기도합니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오늘 말씀에 등장한) 젖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습니다...'
정말자기 자신을 갓난 아기처럼,
어머니 품에 있는 갓난 아기처럼.. 자기를 고요하게 만들고 평온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고백하죠. '내 영혼은 젖뗀 아이와 같습니다.' (젖 먹고 배부른 아이와 같습니다)
여러분 참 무서운 고백이지 않나요? (다윗) 왕이 이런 고백을 했다는 거예요.
왕이 왕이 이런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지도자들이 이런 사람들이 될 수 있다면...
여러분 세상이 참 아름다워지지 않겠습니까?
'내 영혼이 젖뗀 아이와 같도다' (젖 배불리 먹고 만족하는 아이와 같도다)
그래서 3절, 여러분 젖뗀 아이가 되어서 뭐하죠?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혼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러분, 젖 먹고 만족한 아이가 되어서 뭐합니까?
바로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요즘 아이들은, 젖뗀 아이들도 좀 불쌍한 것 같아요.
여호와를 바라는 게 아니라, 아기들 앞에는 항상 스마트폰이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참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때로는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되지만
한 번씩은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힘을 빼는 시간이 필요해요. 힘을 빼는 시간!
'하나님, 저는 교만하지 않습니다. 내 눈은 오만하지 않습니다.
나는 정말 이룰 수 없는 거창한 슬로건에 압도되어서 살지 않겠습니다.
저는 바로 하나님 어머니 품에 그 젖뗀 아이처럼,
나 자신을 고요하고 평온하게 합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젖먹고 배부른, 만족한 아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이제 부터 나는 여호와를 지금부터 영원까지 바라보겠습니다.' :3
저는 이 고백이 우리 성도들의 고백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