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08 14 사도행전 강해 (36) / '그리하여'에 담긴 신비 - YouTube
◈'그리하여'에 담긴 신비 행9:19~31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을 했습니다.
회심한 사울은 사명을 받았었죠.
사명을 받은 사울은 본격적으로 다메섹에서 전도를 시작합니다.
그 내용이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울의 첫 사역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행9장의 흐름은,
사울의 회심, 그 다음에 사울이 사명 받음, 그 다음에 사울이 사역을 시작하다.
오늘 본문은 그 사울의 첫 사역을 다룹니다.
▲문제 제기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시면 흥미로운 구절이 있습니다.
흥미롭기보다는 이해가 되지 않는 구절이 있습니다.
제가 이 본문을 읽는데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표현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의 결론인데요.
오늘 본문은 사울이 사역한 결과를 3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31절은 '그리하여' 로 시작합니다.
여러분 '그리하여' 는, *'멘' truly, certainly, surely, indeed, 영어성경은 주로 Then(그때) 로 번역
앞의 내용이 뒤의 내용에 원인이 될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쉬운 예를 들면, '그는 키가 작습니다. 그리하여 그를 찾기 힘들더라' 이해가 되시죠?
이 때 쓰이는 접속사가 '그리하여' 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갓 회심한 청년 사울이 사역한 결과가 무엇이죠?
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이 결론만 떼놓고 보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역시 사울이다. 사울이 회심을 하더니 초대교회가 평안해지고 든든히 서 가고
신자가 많아졌다. 사울이 얼마나 사역을 잘했으면 그리하여 이런 결과가 나타났는가?
역시 사울은 사울이다.' 당연히 이런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앞에 내용을 보시면, 사울이 사역을 잘 했다는 얘기가 성경에 없습니다.
사울이 사역을 시작한 것까지는 맞는데,
그의 사역이 교회에 무슨 보탬이 됐다는 얘기가 없습니다.
사울이 얼마나 초대교회에 유익한 인물이었는지,
그런 내용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이 31절의 앞에 내용들은 하나같이 무슨 얘기이죠?
거의 전부가 사울이 도망다닌 얘기입니다.
사울은 두 번이나 도망을 다닙니다.
한 번은 다메섹에서 쫓겨나는 바람에 예루살렘으로 도망을 갔고요.
또 한 번은 예루살렘에서 쫓겨나는 바람에, 고향 다소로 도망을 갑니다.
사울이 이렇게 도망을 다니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전부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든든히 서 가고, 수가 더 많아졌다니... 이게 무슨 연고입니까?
▲사울의 회심 후 즉시 다메섹 전도 9:19~22
사울은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그 즉시 사울은 다메섹에 있는 유대인 회당을 찾아갑니다.
회당에서 사울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복음을 전합니다.
9:20~22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그러자 듣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놀랍니다. 본문에 '당혹하게 하니라'
당연하죠. 원래 사울이 다메섹을 찾아간 이유가 무엇이죠?
다메섹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잡아 가두기 위해서 입니다.
그들을 잡기 위해, 사울은 대제사장으로부터 공문을 받아가지고... 체포영장이죠.
체포영장을 받아가지고 다메섹에 갔습니다.
이 사실을, 다메섹에 있는 기독교인들도 소식을 들어서 알았을 것입니다.
'사울이 우리를 잡아 죽이려고 공문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오고 있다'
그들은 사울이 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 예상대로 사울이 회당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체포 영장을 꺼내서 보여주어야 할 사울이
갑자기 회당 안에 있는 성경을 펼칩니다.
그리고서는 예수쟁이를 죽여야 할 사울이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전에는 회당에서, 예수의 제자를 결박했던 사울이
이제는 회당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라 전합니다.
그러니 유대교 사람들이 당황을 하는 거죠.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사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예수님을 전하는 저 자가, 정말 우리가 알고 있는 사울이 맞는가?'
많은 사람들이 자기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사울은 예수를 그리스도라 힘있게 더욱 증거합니다.
▲사울의 아라비아 3년 9:23
:23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그런데요. 갑자기 사울이 잠적합니다. 잠수를 타는데요.
다메섹에서 사울이 보이질 않습니다.
9:23절에 '여러 날이 지나매' 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여러 날이 지나서 사울이 다시 다메섹에 나타났다는 거죠.
그런데 여기서 '여러 날'은 단순히 며칠 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여러 날'은, 원문으로 보면 '많은 날'이라는 뜻인데요.
성경을 통털어 보면, 3년의 기간을 말합니다. *바울의 아라비아 3년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한 사울은, 다메섹을 떠나 3년 동안 잠적을 했습니다.
그러면 이 3년 동안 사울은 어디에 있었는가요?
이 3년이라는 공백을 찾기 위해서는, 갈라디아서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사울은 자신이 그 3년동안 어디에 있었는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갈1:17~18 '또 나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여기에 보면 사울이 다메섹에서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왔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아라비아'는, 지금의 사우디 아라비아 라기 보다는,
다메섹과 닿아있는, 가까운 사막 지역을 일컫는 당시의 지명이 '아라비아'입니다.
회심한 사울은, 대도시 다메섹에서 (광야, 사막지역인) 아라비아로 가서 3년을 있었습니다.
3년 동안 사울은 그곳에서 신학적 훈련을 받았을 것입니다.
물론 신학적인 공부만 하진 않았겠죠. 그곳에서도 복음을 증거했을 것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신학대학원 과정을 밟은 거죠.
우리가 사역자의 소명을 받았다고 해서 바로 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하지는 않고,
신대원에 가서 훈련을 받아야 하죠. 사울도 그런 훈련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모르겠는데요. 오늘날 신대원 과정이 3년입니다.
그것처럼 다메섹에서 회심한 사울은요, 곧바로 아라비아로 가서 3년을 준비했습니다.
그것을 본문 23절은 '여러 날이 지났다'라는 말로 그냥 압축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러 날은, 사실은 3년이죠. 아라비아에서 지낸 3년입니다.
3년을 아라비아에서 머물던 사울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이제 복음을 열심히 증거하며,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때 나타난 일이 무엇이죠?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공모를 했습니다.
아마 유대인들은 사울에게 큰 배신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여러분 사울은 아시다시피 과거에 열렬한 유대교의 신봉자 아니었습니까?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죠. 그런데 열렬한 유대교의 신봉자였던 사울이
유대교의 배신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핍박했던 사울이, 예수를 도리어 그리스도 라고 증거하고 다닙니다.
그러니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얼마나 이 배신자 사울을 죽이고 싶었겠습니까?
▲사울의 첫번째 도피 : 다메섹에서 예루살렘으로 9:23~26
24절에 보면 '사울을 죽이려고 유대인들이 밤낮으로 다메섹 성문을 지켰다'고 말합니다.
이 계략을 사울이 듣게 됩니다.
그래서 사울은, 한밤 중에 예수님의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광주리를 타고 다메섹을 탈출합니다.
이처럼 3년 만에 다메섹으로 돌아온 사울은,
돌아오자마자 다메섹에서 제대로 사역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를 죽이려는 유대인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피신해야 했습니다.
바울이 어디로 피신하느냐? 예루살렘으로 피신합니다.
이게 오늘 본문에 기록된 다메섹에서의 사울의 사역입니다.
그런데 어떤 내용으로 가득 차 있죠?
다메섹에서 예루살렘으로 도망간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울의 두 번째 도피 : 예루살렘에서 고향 다소로 9:26~30
사울은 예루살렘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도 이 사울의 사역은 수월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 먼저 믿은 제자들이 그를 만나주지 않습니다.
아직 사울을 믿지 못하는 거죠.
'정말 사울이 회심한 게 맞는 건가? 사울이 혹시 교회 안에 들어온 프락치(첩자)는 아닌가?'
이렇게 사울을 믿지를 못했습니다.
그때 사울을 중재하는 한 사람이 등장을 하는데, 바로 바나바 입니다.
바나바는 앞서 행4장에서 본 적이 있죠.
자신의 밭을 팔아 헌금한 사람입니다. 그 헌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었죠.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나바'(위로의 아들)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본명은 요셉
그 위로의 아들 바나바가 오늘 본문에 다시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중재자로 나오는데요.
바나바의 중재로 예루살렘 교회는 사울을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출입을 하는데요.
이 부분이 갈1:18절에 나옵니다.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여기 3년은, 아라비아에서 머문 3년을 뜻합니다.
다메섹에서 돌아온 사울은, 광주리를 타고 다메섹을 탈출합니다.
그리고 바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래서 3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가게 됐다는 거죠.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사울이 오래 있지 못했습니다. 단 15일만 머물렀습니다.
어렵게 바나바의 중재를 통해 예루살렘 교회에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예루살렘 교회에서도 사역을 제대로 하지를 못합니다.
예루살렘에서 고작 15일밖에 있지를 못합니다. 이유가 무엇이죠?
예루살렘에서도 사울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유대인들이에요? 29절에 보면 '헬라파 유대인들'이라고 말합니다.
:29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헬라파 유대인들은, 앞서 스데반을 죽였던 자들입니다.
스데반을 죽였던 그들이, 이제는 사울을 죽이려 했습니다.
아마 사울이 그곳에 계속 있었다면, 사울은 스데반처럼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형제(성도)들의 도움을 받아 가이사랴로 내려갑니다. :30
가이샤라로 간 이유는, 배를 타기 위해서 입니다.
가이사랴에서 사울은 배를 타고 자신의 고향인 다소로 도피합니다.
다소는 사울의 고향인데요. 여기서 약 10년을 지냅니다.
그리고 나서 사울이 행11장에 가서야 다시 나타납니다.
바나바의 픽업을 받고, 안디옥에서 바나바를 도와서 사역을 시작하게 되죠.
▲본론 : 사울은 도망만 다니고 별로 사역한 게 없는데, 교회는 든든히 서 가고 수가 많아졌습니다. :31
그러니까 여러분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사울의 사역은, 정말 특별한 게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다 사울이 도망간 내용입니다.
첫 번째는 다메섹에서 예루살렘으로 도망간 내용이고요.
두 번째는 예루살렘으로 도망간 사울이 다시 15일 만에 고향인 다소로 도망간 내용입니다.
이거 말고는 다른 특별한 내용이 없습니다.
사울은 회심했지만, 교회도 자기를 별로 환영하지 않는 분위기였고,
다메섹이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은, 사울을 잡아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도망가기에 바빴습니다. 그곳에서 제대로 사역할 시간조차도 없었습니다.
본문에는, 복음을 전하다가 도망간 사울의 모습만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31절에 나오는 '그리하여'라는 말 다음에는 어떤 내용이 나와야 맞습니까?
뒤에 나오는 내용은 부정적인 내용이 나와야 맞습니다.
즉 '그리하여 교회는 적지 않는 타격을 입었더라'
'도망가는 사울로 인하여, 그리하여 교회는 크게 흔들렸더라'
'도망다니는 사울로 인하여, 그리하여 교회는 점점 영적으로 피폐해져 갔더라'
'도망가는 사울로 인하여, 그리하여 교회는 점점 위축되어 갔더라'
여러분 이런 식으로 결론이 나야 문맥이 맞습니다.
그런데 본문 31절은, 정반대의 결과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히 든든히 서가고 수가 더 많아졌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해가 되십니까? 말이 앞뒤가 안 맞지 않습니다.
여러분 사울은 이 시점에서,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에
큰 도움이 될 만한 어떤 업적을 남긴 게 아닙니다.
업적은 커녕 도망가느라 제대로 사역할 시간조차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교회가 사울을 뒷수습 하느라 바빴던 거죠.
그런데도 성경은 '그리하여 교회가 망했다'가 아니라
'그리하여 교회가 잘 됐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저자 누가가 말하고 싶은 요지가 무엇이죠?
이 31절의 결론은, 교회가 든든히 서 가는 원인이, 사울에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상했던 것처럼... 우리가 그렇게 예상하고 싶은 거죠.
'역시 사울이야, 사울은 달라, 위대한 종이야!'
이 예상은 틀렸다는 것입니다.
사울의 어떠함에, 교회 부흥의 원인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31절의 결론의 원인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 원인이 31절 안에 있는데요.
: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여기 보면 중요한 원인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이죠?
바로 맨 끝에 '성령의 위로'라는 원인입니다.
왜 교회가 평안하고 든든히 서 가고, 수가 더 많아질 수 있었는가?
왜 그들이 사울이 쫓겨남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심하지 아니하고
그들은 주를 경외할 수 있었는가? 성령의 위로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울의 위로가 아닙니다. 사울의 잘남과, 잘 함과, 사울의 탁월함이 아닙니다.
사울은 도망간 것밖에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없었지만, 성령님의 위로는 여전히 교회와 함께 했다는 것입니다.
그 성령의 위로가, 교회를 평안하고 든든하고 성장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주님은, 우리의 손에 교회를 맡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교회를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들어도 들어도 식상하지가 않습니다.
들으면 들을수록 얼마나 감사하고 다행인지 모릅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매번 눈으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요즘 우리가 이것을 실감하고 있는데요. 코로나가 시작된 지가 3년이 넘었습니다.
처음에 코로나가 시작되었을 때, 마치 교회가 큰일 날 것처럼 걱정들을 했습니다.
교회에 모일 수가 없습니다. 모일 수가 없으니, 예배를 드리러 나올 수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다보니 교회들이 전부 다 문을 닫는 것 아닌가, 타격을 입는 것 아닌가?' 걱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결론이 무엇이죠?
'그리하여' 입니다.
'그리하여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3년 동안 교회는 코로나 바이러스에 쫓겨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무엇이죠?
'그리하여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우리 교회는 새가족반 교육도 시작하더라'
여러분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코로나라는 시간을 지나면서
우리는 이 하나님의 일하심, 성령의 위로를.. 우리 눈으로 확인합니다.
얼마나 우리에게 큰 위로이고, 소망인지 모릅니다.
결과를 만들어내는 원인이,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적용
여러분 우리 교회를 보십시오. 목사인 제가 무슨 능력이 있습니까?
뭘 해도 어설퍼 보이고, 어리버리해 보이지 않습니까? 잘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러분 그냥 겸양이 아닙니다. 저는 목사이기 때문에 말씀을 전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혼을 살리는 은혜의 수단이라는 사실을 믿기에
말씀을 준비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을 준비할 때마다. 여러분 모두가 은혜를 받는다는 확신으로
솔직히 말씀을 준비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말씀을 전하는 일이 제 의무니까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하나님 앞에 성실히 감당하려고 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도 아주 가끔 어쩌다가 한두 분이, 제 말씀에 은혜를 받는 분들이 계십니다.
여러분 그건 제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제가 열심히 준비를 해서도 아닙니다.
그건 '은혜 받은 그 사람'을 향한 성령의 위로입니다.
성령께서 그 영혼에게 위로를 주시고자, 제 설교을 사용한 것뿐입니다.
여러분,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은 게 실력이 없어서입니까? 아니죠.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저는 설교가 지금도 어렵습니다. 설교가 쉽게 써 지지 않습니다.
한 줄을 끙끙 알아야 겨우겨우 설교가 써 집니다.
그런데도 작성된 설교문을 보면, 늘 자신이 없습니다.
강단에 오르는 것도, 여전히 자신이 없습니다.
제가 언변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뛰어난 통찰이나
성경 전체를 보는 안목이 있는 건 더더욱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이 무엇이죠? '그리하여' 입니다.
'그리하여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성령께서 전적으로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늘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쓰시는 것은, 나 아니면 그 일이 안 되기 때문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솔직히 하나님 앞에서 도움이 된 게 뭐가 있습니까?
오히려 방해된 적이 훨씬 더 많지 않습니까?
사실 하나님은, 직접 일하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그러나 나를 통해 일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왜 그렇죠?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쓰시는 것은, 나 아니면 그 일이 안 되기 때문이 아닙니다.
나에게는, 주님이 써먹을 무엇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나를 쓰시는 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저희 집 아이들이 물을 마시다가 바닥에 흘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제가 바닥을 닦는데요.
그때 둘째가 세 살밖에 안 됐거든요.
둘째가 도와주겠다고 함께 닦습니다. 그런데 도움이 안 됩니다.
닦는 게 아니라 오히려 물을 더 퍼뜨리고 있습니다.
그 부분을 닦아야 하는데, 꼭 물티슈를 가지고 와서, 옆으로 물을 더 퍼뜨립니다.
덕분에 제가 일을 두 번 하게 만듭니다. 아이는 나를 도운다고 하는데,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그래도 제가 같이 하는 이유가 무엇이죠?
그 아이들과 함께하는 그 시간이 좋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죠? 아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여러분 하나님께 별로 도움이 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하시는 게 훨씬 더 편하고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을 맡기시고요. 우리와 함께 하자고 하십니다.
왜 그렇죠?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능력으로 쓰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쓰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걸 우리가 언제든지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이 사랑으로 서로를 향해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능력이 아니라 사랑으로 서로를 대하는 따뜻한 시선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능력이란 게, 하나님 앞에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우리의 능력으로 교회는 세워지지 않습니다.
능력은 늘 주님이 주시는 거죠.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방해된 적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결론이 무엇이죠? '그리하여'입니다. *영어성경엔 Then (비슷한 의미)
'그리하여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이 성령의 위로가 우리와 여전히 함께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사울이 없어도, 성령님의 위로가 여전히 교회에 함께했던 것처럼
특별히 잘난 사람이 없어도,
오히려 우리가 하는 일들이 어설프고 부족해 보일지라도
성령의 위로가 오늘도 우리 교회에 여전히 함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말을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주님의 교회에서 여러분들의 헌신을 대충하라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여러분 그런 메시지가 아니라는 건 아시죠?
다만 교회의 흥망성세가,
우리의 열심과, 우리의 실력과, 우리의 재능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별 볼일 없고 초라한 헌신일지라도
그것들을 가지고 하나님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복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우리의 별 볼일 없는 헌신과 부족함을 뚫고, 이런 결론이 맺어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여러분,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에 나타나는 모습들이
외적으로는 평안하고 든든한 것이 없을 수 있습니다.
본문에 사울이 쫓겨다녀야 했듯이, 우리의 삶에도 늘 쫓기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렇죠. 하나를 벗어나면, 또 하나가 쫓아오고, 늘 문제에 쫓겨다니는 게
여러분 우리의 인생입니다.
외적으로는 평안하고 든든할 조건이 우리 안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늘 결론은 31절 '그리하여'의 신비로 끝납니다. *설교제목
성령님의 일하심과 위로가 여전히 우리의 삶 가운데 함께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주께서 함께 하십니다.
오늘 사울처럼 눈에 보기에는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상황일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으로도 일을 하십니다.
오늘 사울처럼 우리의 계획대로 일이 풀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는 일마다 번번이 막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오늘도 신실하게 이루고 계십니다.
때로는 울 수밖에 없고, 때로는 낙심과 불안이 사라지지 않는 우리의 인생이라 할지라도
여러분 그것으로 우리의 인생이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결론은 31절에 '그리하여'에 담긴 이 신비로 끝납니다.
성령의 위로와 일하심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빼앗길 수 없는 신자의 평안함이고 여러분 신자의 힘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겁내고 무엇을 걱정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여러분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하나님을 신뢰하며 이 땅을 살아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