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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로 멸망의 교훈

LNCK 2021. 2. 17. 15:11

 

◈두로 멸망의 교훈                 겔26, 27, 28장        출처1        출처2   

 

에스겔 26~28장은 두로에 관한 예언입니다.

지리적으로는 큰 나라가 아니지만, 영적으로는 대단히 중요한 나라입니다.

그래서 에스겔 선지자가 3개의 장이나 할당한 것입니다.

 

에스겔 26장은 두로의 죄는 무엇이며, 두로에 임한 심판은 무엇인지 기록되었습니다.

에스겔 27장은 아름다운 두로가 멸망한 것을 슬퍼하는 애가입니다.

에스겔 28장은 독특한 장으로서 두로 왕의 교만을 책망하는 내용입니다.

 

많은 사람이 두로 왕의 교만이

'사단의 기원'에 관한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독특한 장입니다...

 

두로와 시돈은 ‘페니키아’라는 한 나라이지만, 중앙 집권력이 약하여

두로와 시돈이 독립 국가처럼 활동했습니다.

 

시돈이 먼저 건설되었고, 두로가 나중에 건설되었습니다.

하지만, 두로가 돈도 더 벌고, 권력도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두로가 시돈보다 중요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두로의 지형

유대인 역사가인 요세푸스는 두로 도시는 B. C. 1200년에 건설되었다고 했습니다.

또 다른 역사가인 헤로도토스는 두로가 B. C. 2700년에 건설되었다고 했습니다.

1500년의 차이가 있지만 분명한 것은 두로 도시는 역사가 오래된 도시라는 거죠.

 

지중해 연안에 건설되었고, 예루살렘으로부터 160km 떨어져 있습니다.

서울에서 대전의 거리입니다.

두로는 한 개의 도시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두 개의 도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는 바다 가운데 있는 도시이며, 또 하나는 육지에 붙어 있는 도시입니다.

 

본문 5절에 보면 “바다 가운데 그물 치는 곳이 되게 하리라”라고 했습니다.

바다 가운데 있는 것은 섬도시를 말하는 것이고,

본문 6절에는 “들에 있는 그의 딸들은 칼에 죽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육지의 정착지라는 말입니다. 육지에 정착해 있는 주민이 죽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바다 가운데 땅이 있는 것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두로는 원래 섬나라입니다.

그런데 섬이라고 해서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니고

육지에서 0.8km 떨어진 바위섬입니다.

그 바위섬에 난공불락의 도시가 건설된 것입니다.

사면이 바다로 돈 요새이니 그 당시에 얼마나 안전한 도시이겠습니까?

 

그리고 육지에도 건설되었습니다.

45m 정도의 높은 성을 쌓아 견고한 성을 이루었습니다.

여호수아 19장 20절입니다. “견고한 성읍 두로에 이르고 (fortified city of Tyre)”

두로는 이렇게 이중의 도시입니다.

육지의 도시(mainland city)와 섬도시(island city)입니다.

두 개가 합하여 두로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겔이 예언하던 당시에 두로의 인구는 10만 명이었습니다.

육지 도시에 6만 명, 섬 도시에 4만 명이 살고 있었습니다.

두로는 어떤 일을 하며 먹고 살았습니까? 지중해 연안의 해상 무역을 장악했습니다.

무역도시였습니다. 최고의 부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홍콩과 비슷합니다.

 

두로의 무역이 얼마나 왕성했는지 다시스까지 배를 타고 갔습니다.

아프리카 북부까지 갔습니다. 로마 다음으로 번영했던 도시가 카르타고인데

이 도시를 처음으로 세운 사람들이 두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태리까지 이릅니다.

 

무역하는 상품의 종류가 매우 다양합니다. 노예장사도 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사다가 비싼 값에 팝니다.

애굽에서 쌀을 사다가 비싸게 팝니다.

에스겔 27장을 보면 두로의 해상 무역이 지역적으로 광범위했고,

품목도 다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두로의 역사

두로의 역사를 보면 특기할 만한 요소가 있습니다.

두로가 이스라엘을 도울 때는 번창하였고,

이스라엘을 헤칠 때는 쇠퇴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영적인 중요한 요인이 있기 때문에 두로는 작은 나라이지만,

성경에 세 장씩이나 기록된 것입니다.

 

두로 왕 히람이 있었습니다.

히람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다윗과 솔로몬을 많이 도와주었던 두로의 왕이었죠.

 

다윗 왕이 즉위한 때가 B. C. 1010년입니다. 솔로몬은 B. C. 970년에 왕이 되었습니다.

두로 왕은 히람이었습니다. 히람 왕이 통치할 때에 다윗 왕이 집을 짓는다고 하면

레바논의 백향목과 목수를 보내주었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이 왕이 되자 히람 왕이 축하 사절도 보내 주고,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기꺼이 도와주었습니다.

 

특별히 성전을 지을 때 중요한 사람은 놋기술자였는데

히람이 놋기술자도 보내주었습니다.

이런 내용이 열왕기상 5장, 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두로 왕 히람이 도와줄 때에 하나님이 엄청난 축복을 해 주셨습니다.

에스겔 27 :4절입니다. “네 아름다움을 온전케 하였도다”

흠이 없는 아름다움을 가진 도시가 되었습니다.

 

두로 왕 히람은 섬과 도시를 잇는 다리도 만들었습니다.

성경에는 ‘아름다움의 온전함’이라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두로 왕이 솔로몬과 다윗을 도와줄 때에는 황금기를 맞이했던 것입니다.

 

히람 왕이 죽은 후, 그 아들들의 반역으로 왕이 자주 바뀌었습니다.

B. C. 9세기 중반에 아주 악한 왕이 나왔습니다.

그는 엣바알이라는 사악한 왕이었습니다.

엣바알은 바알의 제사장이었는데 왕을 죽이고 왕이 된 것입니다.

 

엣바알은 유명하지 않고 엣바알의 딸이 유명합니다. 그의 딸은 이세벨입니다.

그리고 이세벨은 아합의 아내입니다. 이세벨은 바알을 숭배하는 것밖에는 모릅니다.

아비처럼 야비하고, 탐욕스럽고, 가증스럽고, 우상 숭배하는  악한 여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에 바알 신전을 크게 지어놓고, 아세라 신상을 세워놓고,

제사장 400명을 세워 나랏돈으로 월급을 주고,

아합도 바알 신을 위해 제사장 450명을 세워 월급을 주었던 것입니다.

 

이때에 엘리야 선지자가 혼자 나와 850명과 갈멜산에서 싸웠습니다.

바알, 아세라 신들은 아무 소리 하지 않는데, 하나님만이 불로 응답하여

하나님만이 참 신이라고 보여준 것입니다. 이것이 갈멜산의 영적인 대결입니다.

두로가 이렇게 나쁜 영향을 줄 때에는 이스라엘과 두로가 망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삼 년 반 동안 가뭄으로 고생했습니다.

아합과 이세벨은 맷돌에 맞아 죽었는데,

그 피를 개가 핥아 먹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두로는 앗수르에 망하진 않았지만,

앗수르 왕 살만에셀과 산헤립이 계속 쳐들어와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두로가 결정적으로 망한 것은 본문 1절로 3절에 나와 있습니다.

“제 십일 년 어느 달 초 일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에스겔이 포로가 된 지 십일 년입니다. B. C. 587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B. C. 587년은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이 쳐들어와서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해입니다.

 

멸망시키자 본문 2절에서 두로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인자야 두로가 예루살렘을 쳐서 이르기를 아하 좋다 만민의 문이 깨어져서 내게로

돌아왔도다 그가 황무하였으니 내가 충만함을 얻으리라 하였도다”  26 :2

 

'만민의 문'은 예루살렘을 거쳐서 여러 나라로 가는 문이라는 말입니다.

즉 예루살렘이 망하면 두로는

예루살렘을 통과할 때에 관세를 내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두로는 자기들에게 유익이 된 것을 좋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두로가 좋아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완전히 망하게 했습니다.

 

본문 26 :3절입니다.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두로야 내가 너를 대적하여

바다가 그 파도로 흉용케 함 같이 열국으로 와서 너를 치게 하리니

 

바벨론은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여세를 몰아 160km 떨어진 두로도 멸망시켰습니다.

이사야 23 :7절에는 두로를 가리켜 ‘고대에 건설된 희락의 성’이라고 했는데,

희락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에스겔 26 :13, 14절에서는 두로를 ‘음악의 도시’라고 했는데,

다시는 노랫소리와 수금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두로의 성벽은 훼파되고, 망대는 헐려 버렸습니다.

그래서 두로가 건설된 반석은 ‘말간 반석’이 되어버렸습니다. 26 :4

 

어떤 미국 목사님이 설교했는데, 두로를 가리켜 ‘flat Tyre’라고 했습니다.

구멍 난 타이어에 비유해서 설교 제목을 정한 것입니다.

 

두로는 바벨론에 의해 망하고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유다 백성이 포로로 끌려갈 때에 두로도 같이 끌려간 것입니다.

 

70년 동안 바벨론에서 함께 포로생활을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70년 동안 잊힌 세월을 보내리라고 했습니다(사 23장).

 

그런데 70년 뒤에 유다 백성이 예루살렘에 돌아오면서 두로 백성도 돌아왔습니다.

돌아와서 무역을 재개하여 이익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이익을 얻어 하나님께 헌금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두로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께 헌금하게 되었습니까? 이사야 23 :18절입니다.

“무역한 것과 이익을 거룩히 여호와께 돌리고 간직하거나 쌓아 두지 아니하리니

그 무역한 것이 여호와 앞에 거하는 자의 배불리 먹을 자료, 잘 입을 자료가 되리라”

 

두로 같은 이방인이 제사장이 잘 먹을 수 있도록,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헌금을 해준 것입니다. 왜냐면 포로 생활을 함께하면서

유다 백성에게 영향을 받아 믿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포로 생활의 고통은 쉽게 잊어버리고, 유다 백성에 대한 애정은 사라지고

옛날의 이기심, 교만이 돌아왔습니다.

 

부와 권력이 좀 있다고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에게 대항하다가

B. C. 333년에 육지도시와 섬도시 모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남에게 해를 끼치면 그 해가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두로의 역사를 왜 말하는 것입니까? 두로가 이스라엘에 잘할 때에는 번창했고,

잘못 할 때는 망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두로의 역사가 주는 교훈

 

첫째, 교회를 향해서입니다.

교회의 흥망성쇠는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 달렸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하나님께 달렸다는 말입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잘못한 것이 있다면 회개하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면 우리를 축복하실 것입니다.

우리 주변의 악인이 내 운명을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불신자를 향해서입니다. 재물과 권력은 좋은 것입니다.

인생에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돈과 권력만 가지고 인간은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도리어 두로의 돈과 권력은 멸망을 불러들이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이 쳐들어간 이유는 돈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두로가 잘 살기 때문에 간 것입니다.

두로의 부와 세력은 도리어 따먹기 좋은 사과나무가 되었습니다.

 

두로는 바벨론에게 멸망하고, 헬라 알렉산더 대왕에게도 멸망하고,

결국은 부와 권력을 모두 박탈당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백성이 망할 때에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고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교회를 공격하고, 해롭게 하여 이익을 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두로처럼 멸망이 득달같이 다가와도 보호받지 못할 것입니다.

 

나라가 멸망하고, 사람이 멸망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입니까?

한국전쟁을 겪은 세대는 멸망이 무엇인지 잘 아실 것입니다.

 

6․25 전쟁 후에 교회에서 부흥회가 있을 때면 여자들에게 회개기도를 하게 합니다.

‘제가 미아리 고개 넘을 때에 너무나 춥고 배고팠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애가 울 때 애를 전봇대에 비벼서 애를 죽였습니다.’

이런 고백을 하는 그리스도인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누가 그를 정죄하겠습니까?

 

그만큼 멸망은 고통스럽습니다. 당하는 사람은 피눈물을 흘립니다.

멸망은 결코 겪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 역사가들은 멸망이 오면 자연적인 원인이 무엇인지, 정치적 원인이 무엇인지,

사회적 원인이 무엇인지를 말하지만,

에스겔 26장은 멸망한 원인은 영적인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즉 두로가 예루살렘이 망하는 것을 좋아하고, 조롱한 것이 죄가 되어서

멸망이 왔다는 영적인 원인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2편은 불신자를 향한 최선의 권면입니다. 시편 2편 11~12절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돈과 부요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떠나게 할 위험이 있습니다.

두로의 이야기가 세 장이나 기록된 이유는

하나님 보다 돈과 번영을 좋아하는 사람은 운명이 그렇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 위에 돈이 올라가게 되면 돈 때문에 망하고,

돈 때문에 멸망이 온다는 것을 두로의 이야기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13세기에 프란시스칸에 소속된 신학자 보나벤투라 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쓴 책이 있는데, 「The life of St. Frances(성 프랜시스의 생애)」입니다.

 

그 책에 기록된 우화입니다. 아씨시의 성자인 프랜시스가 초보 수도승과 해변을

거닐고 있었습니다. 해변을 거니는 중 돈이 빵빵하게 든 큰 지갑을 발견했습니다.

 

프란시스는 청빈을 주장했기 때문에 그 지갑을 못 본 척 하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초보 수도승이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저기 돈이 가득 들었는데,

왜 그냥 지나갑니까? 다시 돌아가서 갖고 와야 하지 않습니까?”

 

프란시스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갑니다.

초보 수도승은 가난한 사람도 도와줄 수 있고, 맛있는 것도 사서 먹을 수 있다고

프란시스를 귀찮게 졸라댑니다.

 

프란시스는 돈 있는 곳으로 가서 초보 수도승에게 그 지갑을 주우라고 합니다.

수도승이 지갑을 여는 순간 그 안에는 독사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지갑과 함께 뱀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사실이 아니라 우화입니다.

이 우화의 목적은 돈에는 위험이 있으니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현재 대한민국은 얼마나 잘 삽니까? 하나님의 덕분입니다.

그러나 잘 살 때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물질에 마음을 두면

두로 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 :19~20절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우리는 있을 때에 잘해야 합니다. 있을 때에 복음을 전하는 일,

하늘에 쌓는 일을 게을리하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로 왕을 위한 애가

 

에스겔서 26장과 27장은 두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에스겔서 28장은 두로 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고대 국가에서는 왕과 나라는 하나의 운명체였습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은 왕을 사랑했고, 왕을 사랑했던 사람은 나라를 사랑했습니다.

 

에스겔이 예언하던 당시에 두로의 왕은 엣바알 3세였습니다.

9세기 중반에 아합의 부인이었던 이세벨의 아버지가 엣바알 1세였고,

엣바알 3세는 엣바알 1세의 영적인 후손입니다.

 

엣바알의 의미는 ‘바알 신이 함께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귀신이 함께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에스겔 28 :2절입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말하기를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중심에 앉았다 하도다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 할찌라도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어늘”

 

엣바알 3세는 자신은 신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다 중심에 앉았으니

자신의 덕 없이는 어떤 나라도 살아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마치 세계 중심에 있는 것처럼, 바다 중심에 있는 신인 것처럼 말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나라든지 간에 정치 지도자를 신격화하는 나라는 모두 망할 것입니다.

정치 지도자를 신격화하는 사상은 옛날 애굽의 바로 왕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두로 왕도 자신이 신이라는 사상이 있었습니다.

 

21세기 대명천지에도 이런 사상으로 백성을 억누르는 나라가

우리와 같은 언어를 쓰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정치지도자를 신격화하는 것은 나라를 망치는 일입니다.

 

제가 선교 사역을 위해 연길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북한식당에서 식사를 한번 했는데 종업원들이 모두 김일성 배지를 달고 다닙니다.

 

제가 종업원에게 물었습니다. “죽은 지 오래된 사람인데 왜 배지를 달고 다닙니까?”

종업원이 “그런 말씀 마십시오. 이 분이 내 영혼 안에 영원토록 살아계십니다.”

라고 답합니다. 김일성을 신격화한 것입니다.

 

이렇게 정치 지도자를 신격화하는 나라는 역사에 흥한 나라가 없었고, 망했습니다.

또 이들을 따르는 사람들도 망하게 됩니다.

 

엣바알 3세는 한동안 권력을 잡았습니다만,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이 B. C. 587년에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두로를 침공하여 13년 포위시킨 후 멸망시켰습니다.

이때 엣바알 3세도 죽었습니다.

 

에스겔 28 :8절입니다. “너로 바다 가운데서 살육을 당한 자의 죽음 같이

바다 중심에서 죽게 할찌라” 엣바알이 바다 중심에 있다고 하니깐

그를 바다 중심에서 살육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두로 왕을 위해서 애가를 지어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겔28장은 두로 왕이 교만하여 멸망한 것을 노래한 것입니다.

 

▲애가의 주제

애가에 대해서 역사적으로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하나는 3세기에 알렉산드리아의 교부였던 오리겐이

이 본문은 사단의 기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이후로 17세기 영국의 사상가인 존 밀턴도 「실낙원」에서

사단의 기원을 말한다고 해석했습니다.

 

20세기에 유행했던 세대주의 종말론주의자들도

이구동성으로 사단의 기원을 말한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만 있지는 않습니다.

복음주의자들은 사단의 기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담의 타락 사건을 말하는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복음주의자들 가운데 다수가 아담의 타락을 말한다는 해석에 동조합니다.

 

왜냐하면, 에덴동산에서 지음 받은 존재는 아담이지 천사가 아니기 때문이며,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존재도 사단이 아니라 아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아담을 가리켜서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이라고 했습니까? 28 :14

시적인 노래에서는 아름다운 사람을 보고 종종 천사에 비유합니다.

애가가 노래이기 때문에 사람을 가리켜 천사라고 할 수 있다는 논거입니다.

 

이 본문이 사단의 기원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견해고,

아담의 타락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본문이 노래이기 때문에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이 두 가지는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본문을 연구하면서 생각한 것은 동일한 패러다임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패러다임은 동사 변화의 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원리에 따라서 모든 동사가 같게 변한다는 것입니다.

 

즉 에스겔 28장은 하나의 변화의 형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어떤 존재에게 영광을 주시면, 영광을 받은 존재가 교만해지고,

교만해지면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심판하시면 멸망이 온다는 것입니다.

 

이 원리를 따라서 사단도 덮는 그룹이고, 계명성이었는데

하나님이 영화롭게 하자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결국은 천국에서 쫓겨났습니다.

 

에덴동산의 아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영광스럽게 만들어 주셨는데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했다는 말입니다.

 

두로 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주었더니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했습니다.

 

이사야 14장의 바벨론 왕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바벨론의 멸망은 사단의 멸망과 패턴이 같고,

에스겔 28장의 두로 왕의 멸망은 사단의 멸망과 패턴이 같으며,

에덴동산의 아담의 멸망도 사단의 멸망과 같은 패턴이라는 것입니다.

 

모두 동일한 패턴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즉 애가의 주제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며,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라(잠16:18)’는 것입니다.

 

에스겔서에 나오는 애가는 두로 왕의 교만으로 말미암아 살육당하고,

심판당하고, 멸망하고, 열방의 구경거리가 되었다는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우주의 원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애가를 지은 목적

두로 왕의 멸망을 보고 있는 유다 백성을 경고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문제 삼고 있는 두로 왕의 교만이 아니고 유다 백성의 교만입니다.

 

두로 왕의 교만을 볼 때에 교만은 다섯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교만은 자기 자신을 우상화합니다. 자기 자신을 높입니다.

히브리어로 교만을 의미하는 단어는 10개나 된다고 합니다.

그 단어에 공통으로 자기 자신을 높이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둘째, 교만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경쟁하는 것입니다.

삶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중심에서 몰아내고 자기 자신이 중심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교만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려면 ‘내 중심에 하나님이 계신지

아니면 나 자신이 들어가 있는지’를 살펴보면 됩니다.

 

셋째, 교만은 뿌리에 해당하는 죄(mother sin)입니다.

죄중의 우두머리 죄는 교만이라는 말입니다.

모든 껍질을 벗기고 나면 가운데에는 교만이 들어가 있습니다.

다른 죄는 교만의 증세에 불과하고 그 뿌리는 교만입니다.

 

넷째, 인간이 교만하면 사단이 받은 형벌과 같은 종류의 벌을 받게 됩니다.

디모데전서 3 :6절입니다. “새로 입교한 자도 말찌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마귀가 정죄당하는 죄는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마귀도 교만해서 벌을 받았고, 두로 왕도 교만하여 벌을 주었다는 말입니다.

 

다섯째, 교만은 스스로 속이고, 속습니다.(self-delusion)

두로 왕은 자신이 신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 것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을 신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신이 아니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겔 28:2)

 

우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신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입니다. 에스겔 28 :9절입니다.

“너를 살육하는 자 앞에서 네가 그래도 말하기를 내가 하나님이라 하겠느냐

너를 치는 자의 수중에서 사람뿐이요 신이 아니라”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이 와서 엣바알 3세를 죽이려고 하는데,

‘나는 신이다. 신을 죽이려고 하느냐’ 이렇게 하고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두로 왕을 신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은

살육하는 방법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지 않는 한 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중세 스콜라 신학의 대가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교만은 인간이 피조물이요, 유한한 존재요, 죄인임을 잊어버리는 데서 온다.”

사람이 자기 자신의 죄성을 안다면 교만에 빠질 수 없습니다.

 

16세기 성녀로 추앙받는 여자인 아빌라의 테레사 Teresa of Avila가 있었습니다.

그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중상모략 하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거짓말을 지어내고, 공격하지만

나에 대한 전체적인 진실을 말하지 않은 것을 나는 정말로 다행으로 생각한다.”

내 진실을 알았다면 더 크게 공격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18세기 영국의 위대한 신학자였던 William Law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누구든지 나 자신의 영혼 깊은 곳을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부끄러워서 차라리 늪지대로 들어가 버릴 것이다.”

 

우리 속에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교만이 있습니다.

이 교만을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으로 바꾸는 것은

스스로 평생 해야 할 영적인 싸움입니다.

 

에스겔 28장에서 두로가 망한 이유는 하나님 보다 물질을 높였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28에서 두로 왕이 망한 이유는 하나님 보다 자기 자신을 더 높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에스겔은 유다 백성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의 교만으로 말미암아 이 고통이 오게 되었고,

포로 생활의 고통은 교만을 꺾고, 겸손을 회복하기 위한 필수 과정인 것을 알아야 한다.’

 

▲교만의 원인

두로 왕은 지혜와 총명으로 교만했습니다.(4절)

큰 재물을 있어 교만했습니다.(5절)

지혜가 충족하고 아름다움으로 말미암아 교만이 왔습니다.(12절)

두로 왕은 하나님께서 갖가지 축복을 주셨는데 그 축복으로 교만이 온 것입니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마이클 칸즈(Michael Karns) 목사님이 이 본문으로

설교하면서 교만의 다섯 가지 영역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내용에는 두로 왕의 경우를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첫째, 지위에서 오는 교만입니다(Pride of Position).

사람이 높아지면 교만해집니다. 바벨론 왕도 지위가 높아져 교만해졌습니다.

이사야 13 :13~14절입니다.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바벨론 왕의 교만이 루시터의 교만과 동일하다는 말입니다.

원래 루시퍼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를 지키는 경호실장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를 보니 너무나 영광스러워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다가 마귀가 되고, 음부 구덩이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둘째, 업적에서 오는 교만입니다(Pride of Achievement).

다니엘 4 :30절에서 느부갓네살 왕의 교만을 볼 수 있습니다.

“나 왕이 말하여 가로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이 말이 끝나자마자 하나님이 소처럼 풀을 먹는 신세가 되게 하고,

머리털이 독수리 같은 신세가 되게 하고, 네 손톱이 새 발톱처럼 되게 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짐승처럼 살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은 이 말씀처럼 7년 동안 짐승처럼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7년이 지난 후에 제 정신이 돌아오자 느부갓네살 왕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릇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니라”(단 4:27)

 

셋째, 부에서 오는 교만입니다(Pride of Richness).

예레미야 9 :2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디모데전서 6 :17~18절입니다.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부는 좋은 것이요 선한 일의 자원이 되지만,

부가 교만의 원인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넷째, 지식에서 오는 교만입니다(Pride of Knowledge).

고린도전서 8 :1절입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이사야 47 :10절입니다.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니라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으므로”

지식이 많아도 교만해지면 도리어 손해입니다.

 

다섯째, 영적인 일에서 오는 교만입니다(Pride of Spiritual Attainment).

성경을 많이 읽었고, 기도도 많이 하고, 40일 금식 기도도 했다고

명함에 써서 다닙니다. 모두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교만의 원인이 되면 도리어 해가 됩니다.

 

현대 심리학에서 인간의 문제는 낮은 자존감(Low Self-Esteem)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인간의 문제는 교만이라고 말합니다.

자존감이 너무 높아서 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여섯 나라의 학생들을 초청해 수학 경시대회를 열었습니다.

경시 대회가 끝나고 타임즈지의 한 기자가 설문지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설문지 내용은 ‘당신은 수학에 대해서 자신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 질문에 대해서 미국 학생이 가장 자신 있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학생이 가장 자신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막상 성적이 나온 것을 보니 대한민국 학생이 1등이고, 미국은 6등이었습니다.

 

이것을 본 타임스지 기자는 미국의 교육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실력은 길러주지 않고, 자존감만 높여 주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교만은 자신을 높이고, 스스로 위험한 위치에 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만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교만하면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겸손해야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야고보서 4 :6절입니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으로 내 영혼을 채워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