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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1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총 3부로 구성된 본서의 마지막 3부(33-48장)가 시작되는 곳으로
이제껏 이스라엘과 주변 열강의 죄악을 지적하고 그 죄과로 말미암아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던
1부(1-24장), 2부(25-32장)와는 달리
이미 예루살렘이 멸망한 시점에서(32:1 주석 참조)
선지자는 더 이상 심판에 의한 멸망을 언급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회복과 구원이라는 위로와 평강의 메시지로 그 예언의 내용을 전환시킨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심판 예고 중에서도 그들의 고토 귀환(11:17,14:22)과
회복된 나라에서의 여호와 경배(20:40-44)를 언급한 바 있는데
본 예언부터 그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상세하게 기술된다.
이 3부는 크게 두 단락으로 대별되는 바,
그 첫째는 이스라엘의 고토 회복과 그 회복된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의 약속이며(33-39장),
둘째는 하나님에 의해 회복된 새 나라에서 영원히 여호와만을 섬기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다(40-48장).
한편 그 시작인 본장은 선지자의 파수꾼적 사명(1-20절)과 안악한 백성들에 대한 경고(21-33절)가 기술된다.
혹자는 1-20절까지의 내용이 회복과 구원이라는 3부의 내용과 모순된다는 점과
그 내용이 예루살렘 함락 직전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들어,
이를 새로운 단락에 포함시키는 견해를 배격하고
1-32장까지에 대한 선지자의 최종적인 결론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 심판적 내용이 앞으로 전개될 회개와 회복의 전제적 역할을 담당한다는
통시적인 개념과 구체적인 연대의 언급이 중반부인 21, 22절에 나타나,
전후 단락의 내용을 하나로 이어 주고 있다는 점으로 볼 때
본장을 3부의 서론부로 이해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33:2 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말하여 이르라 가령 내가 칼을 한 땅에 임하게 한다 하자
그 땅 백성이 자기들 가운데의 하나를 택하여 파수꾼을 삼은
본절에서 6절까지는 일반적인 군대의 파수병에 대한 비유를 들어 파수꾼의 막중한 책임과
파수꾼의 경고에 대한 반응을 비유하여, 이스라엘의 영적 파수꾼으로 부름받은
에스겔 선지자가 전개할 예언의 내용을 생동감 있게 전달한다.
'네 민족에게 고하여 이르라' - 이는 예언의 대상이 다시 이스라엘 민족으로 환원된
사실을 가리키며 본장이 새로운 단락의 서론부라는 것을 지지하는 구절이다.
'칼을 한 땅에 임하여' - 여기서 '칼'은 고대 전쟁의 가장 중요한 무기였던 바,
여기서는 대적의 침략으로 야기될 전쟁을 가리키는 제유법적 표현이다.
▲33:3 그 사람이 그 땅에 칼이 임함을 보고 나팔을 불어 백성에게 경고하되
'나팔을 불어' - 이 말은 성경의 용례상 특별하게 백성들을 소집하기 위한 신호를 나타내는 데 쓰여진
표현이다.
▲33:4 그들이 나팔 소리를 듣고도 정신차리지 아니하므로 그 임하는 칼에 제거함을 당하면
그 피가 자기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그 피가 자기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 '그 피'란 파수꾼의 나팔 소리에도 불구하고 방비하지 않아
죽게 된 자의 피를 가리킨다. 이런 점에서 본 구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는 자는 자기 죄로 인해 죽게 됨을 강조한다.
▲33:5 그가 경고를 받았던들 자기 생명을 보전하였을 것이나
나팔 소리를 듣고도 경고를 받지 아니하였으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본절은 4절에 선포된 내용을 부가적으로 설명하는 반복절이다.
▲33:6 그러나 칼이 임함을 파수꾼이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여 백성에게 경고하지 아니하므로
그 중의 한 사람이 그 임하는 칼에 제거 당하면 그는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제거되려니와
그 죄는 내가 파수꾼의 손에서 찾으리라
'자기 죄악 중에서 제한 바 되려니와' - 본 구절에서의 죽음이 하나님의 심판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2절) 그 죽음은 파수꾼의 직무에 관계없이 자신의 죄과에 대한 필연적인 심판의 결과임을 말한다.
'그 죄를 내가 파숫군의 손에서 찾으리라' - 이 말은 파수꾼이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
곧 백성들의 안녕과 보호의 직임을 게을리함으로써 백성들을 무방비 상태로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점에서
간접적인 살인 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하나님은 그 죄값을 파수꾼에게서 찾으신다.
이 비유는 이스라엘에 있어 영적 파수꾼된 선지자의 책무와
그에 순종해야 하는 백성들의 의무를 적절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33:7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삼음이 이와 같으니라
그런즉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을 삼음이' - 실로 구약에 있어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은
그 백성들에게 닥쳐오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소식을 미리 대언해 줌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영적 각성과 여호와 찬양을 실천케 하는 영적 파수꾼으로 비유된다(렘 6:17).
▲33:8 가령 내가 악인에게 이르기를 악인아 너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네가 그 악인에게 말로 경고하여 그의 길에서 떠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를 네 손에서 찾으리라
9 그러나 너는 악인에게 경고하여 돌이켜 그의 길에서 떠나라고 하되 그가 돌이켜
그의 길에서 떠나지 아니하면 그는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전하리라
본문은 3-6절의 비유에 대한 해설에 해당한다.
▲33:10 그런즉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말하여 이르되
우리의 허물과 죄가 이미 우리에게 있어 우리로 그 가운데에서 쇠퇴하게 하니 어찌 능히 살리요 하거니와
'우리는 허물과 죄가 이미 우리에게 있어' - 예언의 새로운 전환을 시사하는 구절로
이제까지 지속되어온 에스겔의 심판 예고 사역이
바로 백성들을 영적으로 각성시켜
본절처럼 그들 스스로가 죄를 인식하며, 그 죄를 시인케 함으로써
철저한 회개와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주기 위한 것이었음을 암시한다.
혹자는 이를 닥쳐온 심판을 모면하기 위한 위선적인 고백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우리로 쇠패하게 하니 어찌 능히 살리요' - 여기서 '쇠패하게'(네마킴)는
'녹이다', '썬다'란 문자적 의미를 가지는 바, '어찌 능히 살리요'란 절망적인 고백과 관련하여
죄가 인간에게 미치는 심각한 폐해를 잘 드러내주는 말이다.
▲33:11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본절은 내용상 18:23, 32의 반복이다.
'악인의...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 하나님의 징계의 목적이 악인의 멸절이 아니라
그 죄로부터 돌이켜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한 것임을 시사하는 구절로(신 8:5, 6,히 12:9-11),
절망을 마주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회개를 통한 새로운 구원의 소망을 확신시켜 주고 있다.
'돌이키고 돌이키라' - 연속적으로 반복된 원어 '슈브'는 '돌아가다'란 의미외에
'회복하다', '새롭게 하다'란 뜻을 함축하고 있는 바, 본 구절에서 이 말은 단순하게 악한 길에서
떠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길에서 떠남은 물론 철저한 회개와 함께
새로운 신앙의 사람으로 그의 전인격이 회복되는 것을 가리킨다.
▲33:12 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이르기를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공의가 구원하지 못할 것이요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는 날에는 그 악이 그를 엎드러뜨리지 못할 것인즉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의로 말미암아 살지 못하리라
'의인이...구원치 못할 것이요' - 율법 주의에 얽매여 '자기의'(自己義)를 구원의 요건으로 확신하는
유다인들의 보편적인 생각과
당시 선조들의 의가 자손에게 전가된다는 그릇된 사상으로(18:20, 21) 인해
하나님의 심판적 징계를 회개와 구원의 전제로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징계 자체를 이유없는 고난이라고 불평하며 심판적 경고와
그에 따른 회개를 촉구하는 선지자의 예언을 무시하고 배격하는 자들을 염두에 둔 구절이다.
에스겔은 구원의 소망을 제시한 11절에 이어 그러한 자들의 왜곡된 구원관을 경고하기 위해
20절까지 구원은 자기의가 아닌 회개와 새로운 신앙의 회복 속에 임하는 것이며
개개인의 운명은 어느 누구도 아닌 다사자의 영역에 속한 것이라는
(14:10, 14, 16, 18, 20) 하나님 심판의 기본적인 성격을 설파하고 있다.
▲33:13 가령 내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살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그 공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지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곧 그 안에서 죽으리라
'그 의를 스스로 믿고' - 여기서 '스스로 믿고'는 주관적인 확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자기의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본 구절은 그러한 자가 죄를 범하면서도 과거의 의가 자신을 구원하리라는 그릇된 확신 속에
안주하는 것을 경고하는 내용으로, 계속적인 의의 실행만이 구원의 조건임을 제시한다.
▲33:14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돌이켜 자기의 죄에서 떠나서 정의와 공의로 행하여
'법과 의대로 행하여' - 여기서 '법'(미쉬파트)은 종교적, 도덕적, 법률적 의미에서의 정의를 가리키며
'의'(체다카)는 종교적, 도덕적 의미에서의 올바름(right, NIV)을 각각 가리킨다.
따라서 '법과 의'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의 의롭고 올바른 내적, 외적 상태를 포괄적으로 언급한 것이다(18:5).
이런 점에서 본 구절은 '돌이켜 자신의 죄에서 떠나서'라는 앞 구절과 함께
진정한 회개란 단순히 죄를 떠나는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인격의 회복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바른 삶을 사는 것임을 재삼 주지시킨다.
▲33:15 저당물을 도로 주며 강탈한 물건을 돌려 보내고 생명의 율례를 지켜 행하여
죄악을 범하지 아니하면 그가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할지라
14절에 언급된 '법'과 '의'에 따른 행위가 몇 개의 구체적인 실례로 기술된다.
'생명의 율례를 준행하여' - 상반절인 대인 관계에 대한 의의 회복을 말한 것이라면
본 구절은 대신(對神) 관계에 대한 회복을 가리킨다.
여기서 '생명의 율례'는 협의적으로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을,
광의적으로는 구원과 영원한 삶의 근거가 되는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18:21,20:11).
▲33:16 그가 본래 범한 모든 죄가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반드시 살리라
이는 정의와 공의를 행하였음이라 하라
본절에 대해서는 18:22 주석을 참조하라.
▲33:17 그래도 네 민족은 말하기를 주의 길이 바르지 아니하다 하는도다
그러나 실상은 그들의 길이 바르지 아니하니라
'주의 길이 공평치 않다 하는도다' -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된 자신들을
이방인들과 같이 심판 대상으로 삼은 사실을 하나님의 공평치 못한 섭리로 받아들였다는 의미로
최후까지 회개하지 않음은 물론 그 고난의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하려는
백성들의 가증함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만유 앞에 공평하신 분이심을 깨닫고 회개했어야 하나
도리어 강퍅한 마음으로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려 했던 것이다.
▲33:18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공의에서 떠나 죄악을 범하면 그가 그 가운데에서 죽을 것이고
'그가 그 가운데서 죽을 것이고'- 본 구절은 내용상 13절 상반절과 논리적 연관을 맺고 있다.
▲33:19 만일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 정의와 공의대로 행하면 그가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본절은 11절, 그리고 14 -16절과 내용상 상통한다.
▲33:20 그러나 너희가 이르기를 주의 길이 바르지 아니하다 하는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나는 너희가 각기 행한 대로 심판하리라 하시니라
'각기 행한 대로 심판하리라' - 구약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였던 까닭에
모든 죄의 책임을 나누어 가져야 했다(사 6:5).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개인의 죄가 언약 공동체의 공동 책임으로 희석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개인의 죄를 결코 간과하지 않으신다.
곧 이스라엘의 죄는 공동체적 성격과 함께 개인적인 책임도 내포하는 것이었다.
▲33:21 우리가 사로잡힌 지 열두째 해 열째 달 다섯째 날에
예루살렘에서부터 도망하여 온 자가 내게 나아와 말하기를 그 성이 함락되었다 하였는데
본절은 선지자 예언의 새로운 전환부가 된다는 것을 연대기적 사실로 입증해주는 핵심 부분이다.
본장 이전에까지 언급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예언이 예루살렘의 함락으로 성취되었으며
그 함락 뒤에 선지자에게 일어날 일을 예언한 24:25-27의 내용이 본절에서 성취되고 있다.
따라서 24:27의 예언대로 이제 선지자는 그 입을 열어 심판 뒤의 상황,
곧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게 될 구원의 소망을 선포하게 된다.
'십 이 년 시 월 오 일' - 예루살렘의 함락은 시드기야 왕 제 11년(B.C. 586) 4월의 일이었다(렘 39:2).
따라서 여기에 나타난 연대는 예루살렘이 함락된 지 18개월이 경과한 시기로서,
이렇듯 오랜 시간이 경과한 뒤에 에스겔 선지자가 그 멸망 소식을 접했다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그러한 연유로 많은 학자들과 사본들은 맛소라 사본의 '12년'을 '11년'의 오기로 본다.
(LXX, 수리아역, Hitzig, Doederlein, Hengstenberg, Eichrodt).
또한 이러한 견해는 약 1세기가 지난 후 에스라가 동료들과 함께 똑같은 길을 4개월 만에 여행했다는
기록에 유추하여 볼 때(스 7:9) 에스겔에게 소식을 알린 도망자의 여정이
약 6개월 정도라는 사실과도 합치하는 바, 그 타당성이 인정된다 하겠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소식을 접한 시기를 에스겔이 잘못 기록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왜냐하면 그의 예언이(24:25-27) 성취된 사실에 대한 특별한 소식을 접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33:22 그 도망한 자가 내게 나아오기 전날 저녁에 여호와의 손이 내게 임하여 내 입을 여시더니 다음 아침 그 사람이 내게 나아올 그 때에 내 입이 열리기로 내가 다시는 잠잠하지 아니하였노라
본절에서 에스겔 선지자의 새로운 예언이 시작된 것은 결코 도망자의 소식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 때문임을 시사한다.
곧 본절에 사용된 동사 '임하여'(하예타 엘라), '여시더니'(이프타흐)가 모두 미완료형으로
계속적인 동작의 상태를 나타내는 용법으로 쓰인 점과
'열리기로'(이파타흐)가 '열리다'란 뜻을 강조하기 위한 강세 반복어란 점에서
선지자는 이미 도망한 자가 소식을 전하기 이전 저녁부터
새로운 구원과 회복의 예언을 선포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여호와의 손이 내게 임하여' - 본 구절은 에스겔이 하나님의 역사에 의해 황홀경에 빠진 상태를 가리킨다.
'다시는 잠잠하지 아니하였노라' - 곧 1~20절의 예언과 23절 이후의 예언을 구분지어 주는 말로
23절 이후의 예언은 도망온 자로부터 예루살렘 멸망 소식을 들은 후에 선포된 것임을 암시한다.
▲33:23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 멸망 소식을 접한 선지자에게 처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직접적인 구원과 위로의 선포 이전에 형식적인 선민 사상에 젖어있던 자들에 대한 책망의 형식
으로 전개된다.
곧 본절에서 29절까지는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 그 당에 남아있는 유다인들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이다.
▲33:24 인자야 이 이스라엘의 이 황폐한 땅에 거주하는 자들이 말하여 이르기를
아브라함은 오직 한 사람이라도 이 땅을 기업으로 얻었나니
우리가 많은즉 더욱 이 땅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신 것이 되느니라 하는도다
'이스라엘 황무한 땅' - 여기서 '황무한'(헤라보트)은 원어상 성읍이나 집들의 파괴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본 구절은 예루살렘이 바벨론의 침략으로 철저하게 약탈되고 폐허가 되었기에(렘 33:10-13)
오히려 피신한 유다인들이 거주하는 곳보다 더 핍절한 환경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아브라함은...주신 것이 되느니라' - 본 구절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육적 후손이라는 사실에 집착해
여전히 죄악의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고향에 남은 유다인들의 어리석음을 드러내준다(요 8:33, 39).
곧 그들은 아브라함이 혼자의 몸으로도 가나안 땅을 하나님께 기업으로 얻은 바 되었으며
그 기업이 후손에게까지 약속된 것이라는 사실을 들어,
죄악에 빠진 자신들의 상태를 망각하고 여전히 가나안 땅이 자신들에게 회복될 것이며
심지어는 그 회복의 조건이 아브라함 때와 비교해 숫적으로 많은 자신들에게
훨씬 더 유리하다는 착각에 빠졌다.
실로 그들은 외적 조건에만 매달려 문제의 본질, 곧 자신들이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의 자격을
상실했음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33:25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고기를 피째 먹으며 너희 우상들에게 눈을 들며 피를 흘리니 그 땅이 너희의 기업이 될까보냐
본절부터 29절까지 그들의 구체적인 죄목이 종교적, 도덕적 측면에 걸쳐 포괄적으로 나열된다.
'피 있는 고기를 먹으며' - 구약 이스라엘에 있어 피는 곧 생명의 상징이었기에
일찍부터 이 피의 식용이 금지된 바 있다(창 9:4-6,레 17:12,19:26).
따라서 본 구절은 그들이 피를 깨끗하게 씻어내지 않은 채 고기를 먹음으로써
율법을 경시하고 어긴 사실을 가리키는 듯하다.
또한 이는 하반절의 우상 숭배와 관련하여 우상에게 바친 피 있는 제물의 식용을 언급한 것으로도 보여진다
(18:6, 11,15,22:3).
이와 달리 혹자는 피가 곧 생명의 상징이란 점을 비유해 그들의 살인 행위를 책망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먹으며'라는 표현이 구체적으로 먹은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며
살인에 대해서는 다음 구절에 다시 언급되므로 이 견해는 타당하지 않다.
'우상들에게 눈을 들며 피를 흘리니' - 영역 성경 중 리빙 바이블(LB)은 본 구절을
'너희가 우상을 숭배하고 살인하니'(you worship idols, and murder)로 의역했다.
이 해석은 본 구절에 매우 적절하다.
▲33:26 너희가 칼을 믿어 가증한 일을 행하며 각기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니
그 땅이 너희의 기업이 될까보냐 하고
'칼을 믿어 가증한 일을 행하며' - 여기서 '칼'은 일반적인 전쟁의 상징이 아니라
제한적인 '폭력'의 의미를 '가증한 일'은 우상 숭배를(18:12) 각각 가리킨다.
특별히 '가증한 일'(아시텐 토에바)이 여성형이란 점을 들어
이를 우상 숭배와 관련된 종교적 매음 행위로 본다.
▲33:27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황무지에 있는 자는 칼에 엎드러뜨리고 들에 있는 자는 들짐승에게 넘겨 먹히게 하고
산성과 굴에 있는 자는 전염병에 죽게 하리라
26절에 언급된 범죄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철저하고도 완전하게 이루어질 것을 시사한다.
'산성과 굴' - 여기서 '산성'(메차도트)은 험한 산 위에 있어서 공략하기 어려운 천연 요새를,
'굴'(메아라)은 이스라엘 산지에 산재해 있어 은신하기에 알맞은 천연의 석회 동국을 각각 가리킨다(삼상 13:6).
하나님은 이런 곳에 피신해 있는 사람들에게조차 심판의 징벌이 임하게 하실 정도로
그 징벌을 철저하게 행하신다.
▲33:28 내가 그 땅이 황무지와 공포의 대상이 되게 하고 그 권능의 교만을 그치게 하리니
이스라엘의 산들이 황폐하여 지나갈 사람이 없으리라
'황무지와 놀라움이 되게 하고' - '황무지와 놀라움'(쉐마마 우메솨마)이란 말은 둘 다 '황폐케 되다',
'폐허가 되다', '경악하게 하다'란 뜻의 어근 '솨멤'에서 파생된 말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역본들은 본 구절을 '황폐시켜 폐허가 되게 하고'(NIV, RSV),
'가장 황폐하게 만들고'(KJV)로 번역했다.
'권능의 교만을 그치게 하리니' - 여기서 '권능의 교만'(게온 우즈)은 곧 세속적인 힘에서
유래한 교만을 가리키는 바, 본 구절은 그러한 교만의 근거가 되는 그들의 모든 세상적 존립 기반을
없어지게 하시겠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7:24 주석 참조).
▲33:29 내가 그들이 행한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그 땅을 황무지와 공포의 대상이 되게 하면
그 때에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하라
'그 때에...알리라'
- 여기서 '알리라'(야다)는 단순한 지식적 앎이 아니라
전인격을 통한 체험적 깨달음으로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정립과 그 맥을 같이한다(골 1:10).
따라서 본 구절은 위에 언급된 심판의 궁극적인 목적이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죄의 길에서 떠나 회개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진정한 구원의 자리에 이를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임을 시사한다(11절).
▲33:30 인자야 네 민족이 담 곁에서와 집 문에서 너에 대하여 말하며 각각 그 형제와 더불어 말하여
이르기를 자, 가서 여호와께로부터 무슨 말씀이 나오는가 들어 보자 하고
본절은 에스겔 선지자의 예루살렘 심판 예언이 성취됨으로써 고조될 선지자에 대한
백성들의 관심이 진실한 회개와 구원의 소망 때문이 아닌
자신들의 이기적 정욕 충족을 위한 것임을 보여준다.
'담 곁에서와 집 문에서 너를 의논하며'
- '담 곁에서'는 은밀하고 비밀한 것을,
'집문에서'는 공공연하게 공개되는 것을 각각 의미하는 말이며,
'너를'(베카)은 '너에게 관해서'란 문자적 의미로,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스겔과 그의 예언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임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것은 예루살렘 멸망 예언의 성취 후 선지자의 존재가 백성들간에
음으로 양으로 급속하게 부각되었음을 시사한다.
'자, 가서...들어보자' - 말씀에 대한 진지한 경청과 그에 대한 순종의 자세라기보다
단지 새로운 소식에 대한 호기심의 총족을 위한 행동이다(31절 주석 참조).
▲33:31 백성이 모이는 것 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으로는 이익을 따름이라
'내 백성처럼...행치 아니하니' - 본 구절은 실천적 순종이 결여된 그들의 내적 자세를 암시하고 있는 바,
그들의 행동이 극히 위선되고 가증된 것임을 주지시키고 있다.
'입으로 사랑을 나타내어도' - 여기서 '사랑'(아가빔)은 그들의 이기적 안목에서
자신들의 기호와 욕구를 충족시킬 만한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 구절은 후반절과 관련하여 그들 서로가 서로에게 하는 모든 좋은 말들이
사실은 자신들의 이기적 욕구 충족에 그 목적이 있음을 보여주는 구절로,
극단적으로 상반된 그들의 내적, 외적 상태의 양면성을 암시한다.
▲33:32 그들은 네가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며 음악을 잘하는 자 같이 여겼나니
네 말을 듣고도 행하지 아니하거니와
'음악을 잘하며...사랑의 노래를 하는 자같이' - 구약 선지자들이 종종 그들의 예언을 노래로 읊어
전달한 사실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삼상 10:5,왕하 3:15).
'사랑의 노래를 하는 자같이'(케쉬르 아가빔)는 세속적 의미에서 노래로 즐거움을 주는 가수와 같다는 뜻이다.
이는 백성들이 에스겔의 예언을 회복과 구원의 전제로서 진지하게 경청한 것이 아니라
단지 좋은 음악을 듣듯이 피상적으로 들은 사실을 시사한다.
즉 회개를 전제로 선포한 심판의 구원의 메시지 중
그들은 자신들의 욕구에 맞는 구원의 메시지만을
아무런 결단이나 돌이킴 없이 듣기 좋은 말로만 수용했다.
▲33:33 그 말이 응하리니 응할 때에는 그들이 한 선지자가 자기 가운데에 있었음을 알리라
'그 말이 응하리니' - 백성들에게 선포한 심판이 성취될 것임을 말한다.
곧 그들은 아직도 회개에 이르기 위한 내적 상태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구원의 약속에서 제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