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역사하심에 나를 맞추어 살려면 행9:19~31 2007-01-28스크랩
제 배목사가 예수님을 정상적으로 믿기 시작한 지 이제 20년이 좀 넘었습니다.
47년 인생에서 교회만 다닌 세월이 절반 됩니다.
정상적으로 예수 믿었다는 것은
성경을 제가 혼자 읽고 묵상하기 시작한 시점을 말합니다.
그렇게 성경을 읽으면서 깨달은 것이 뭐냐면,
하나님이 우리 살아가는 인생을 정의하시기를,
우리 스스로가 기쁘고 좋은 일 만나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얼마나 깨닫고 동참을 했는가, 안했는가로
의미를 두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경이 한 사람의 죽음을 무엇으로 평가하는지 아세요?
그가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 얼마나 건강했는가
얼마나 많은 물질을 소유했는가로 따지지 않습니다.
그가 얼마나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이루어 가시는 일을 깨닫고
참여한 인생인가 이것입니다.
오늘 제목을 한번 읽어볼까요?
“주의 역사하심에 나를 맞추어 살려면!”
▲우리가 2007년 한 해 동안 매일, 생각을 전환하는 연습을 하자고 정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으로 전환하자,
우리 생각은 ‘세상적’입니다. 하나님을 내게 맞추어 살고싶어합니다.
내가 뜻을 정해놓고 하나님이 이 길로 나를 인도하라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평생을 살면서도 이렇게 ‘세상적으로’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내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흐름에 맞추어 살라고 말합니다.
오늘은 사울을 보면 예수를 처음 믿고 그의 생각이 바뀝니다.
하나님의 흐름에 자기를 맞추어 살기 시작합니다.
그는 더 이상 자기 기분, 자기 느낌 이런 것을 중심으로 살지 않아요.
자기 속에서 뭔가 변화가 일어나고, 빛이 들어오고, 내면에서 가치관이 변화되고,
성령께서 그의 마음을 작동시키고 하니까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요.
사울이 하나님의 일하시는 역사에 동참합니다.
거기서 자기가 살아갈 동력이 발생합니다.
오늘 이 문제를 두가지로 다루어보려고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한다는 것은
내 삶의 의미를 그분의 뜻 안에서 찾는 것입니다.
먼저 행9: 3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리하여 교회가 평안하게 되었고, 든든히 서가게 되었고 점점 신자들이 많아졌다’
6~9장까지 스데반과 빌립과 사울을 각각 다룹니다.
이들은 각자 독특하게 자기 인생 살았는데,
하나님은 그 세 사람을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하나의 흐름으로 묶어 일하십니다.
각각 삶의 내용이 다릅니다.
그런데 세 사람 모두 하나님이 만들어가시는 하나의 구원역사 드라마에
중요하게 쓰임을 받습니다.
6~7장에서 스데반은 예루살렘에서 장렬하게 순교합니다.
8:장에서 빌립은 예루살렘에 큰 핍박이 나자 사마리아로 흩어진 가운데
사마리아 복음전파에 쓰임받습니다.
그러다가 성령께서 광야로 가보라고 해서 광야로 가니까
에디오피아의 재무장관을 만나 아프리카에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9장에 오니까 사울이 나옵니다. 다메섹으로 예수믿는 성도들을 결박하러 가는
사울이라는 청년이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나 회개하고 예수를 믿습니다.
▲지금 스데반과 빌립과 사울을 보세요,
엄밀하게 말하면 그들이 순교당하여 죽고, 난리가 나서 흩어지고,
누구에게 전도하러 광야로 가고,
예수를 미워하던 사람이 갑자기 예수를 믿고 하는 사건은
사람 편에서 보면 개별적인 자기 인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모든 각각의 삶들은
모두 하나님의 커다랗고 엄청난 하나의 주제 하에서 진행되는 거예요.
그것이 뭡니까?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폭발적으로 시작하여
점점 여기저기로 확장되어가고, 교회가 든든히 세워져가고,
그 일에 기쁨으로 순종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얘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예요.
그래서 스데반은 그 시간에 죽어요.
슬픈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거기까지 기쁘게 그를 쓰셔요.
빌립은 난리통에 황급히 예루살렘을 떠나고 흩어지다가 사마리아로 가게 되요.
사울은 갑자기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요.
▲제가 질문하겠습니다. 이 세 사람의 인생에서,
성경이 이들의 인생 자체의 성공, 안전, 행복이 주제인 것 맞습니까?
어떻게 하면 이 세사람이 보다 더 좋은 일터에서,
보다 더 안정된 월급을 받고, 보다 더 확실한 자리를 보장받는 것
이런 것이 그들에게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까? 다시 잘 생각해보십시오.
이 세 사람 중에 하나님의 일에 가장 무지하여
자기 인생 성공을 목표로 하여 살았던 사람은 누굽니까?
예, 예수님 만나기 전의 사울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종교를 필요로 합니다.
사람들이 만든 자연 종교의 핵심이 뭔지 아십니까?
신의 힘을 빌어서 내가 잘 살아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바다 신, 땅 신, 바위신, 이 신들에게 제사를 정성껏 모십니다.
그래서 무당종교,무속 신앙에서는 얼마나 복채를 바칠 것인가에 의하여
축복과 재앙이 결정됩니다. 뭐가 빠집니까?
내가 어떤 종류의 삶으로 성숙에 이를 것인가 이런 것은 무속신앙에 없습니다.
신의 이름을 부르되, 그것이 다 나를 위한 것이예요.
▲그러나 성경은 다릅니다.
성경을 읽고 성경에서 사람의 인생을 논하는 것을 잘 깨달아보면
우리는 나를 위하여, 내 인생의 성공을 위하여
하나님을 불러들이는 일을 가장 어린아이 신앙으로 말합니다.
그래요.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는,
예수님이 내 인생 도와주시는 분으로만 인식이 됩니다.
갓난아이와 엄마가 있어요. 갓난 아기에게 있어 엄마는 내가 배고프면 먹여주고,
내가 응아하면 기저귀 갈아주고, 내가 추우면 입혀주는 존재,
그것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신앙도 그렇게 시작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을 읽어보세요.
성경에 나오는 사람 중 하나님이 기뻐하셨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인생 됨됨이를 살펴보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은 어떻게 살든가요?
자기 인생의 의미를 정확히 압니다.
하나님께 사는 날 동안 쓰임받았으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감사입니다.
▲요나단을 한번 보십시오. 사울 왕의 아들 신분에서,
장차 이스라엘의 왕의 자리에 앉을 자기 인생 최대의 걸림돌은 누구입니까?
바로 다윗입니다.
그런데 요나단이 다윗을 바라볼 때,
적어도 다윗이 골리앗을 무찌르고 이스라엘의 영웅이 되고,
사울은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이라고 여인들이 칭송이 자자할 때,
사울 왕은 그 일로 인해 잠을 자지 못하고 괴로워하며 자기 자리에 연연하던 그때에
요나단은 담담합니다.
‘다윗 저놈이 있는 한, 내 왕의 자리가 불안해’,
이런 생각이 삐져나오는 모습이 발견되지 않아요.
왜, 무엇이 요나단을 그렇게 담담하게 만듭니까?
그렇게도 권력의 역학구도를 몰라서입니까?
요나단이 권력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는 멍청이입니까?
아니예요. 요나단은 한 가지를 알아요.
내 인생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어디에 쓰시든, 얼마동안 쓰시든,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면 충분하다, 이거예요.
▲여러분 스데반은 죽었습니다. 불행한 일이죠.
그 일로 사마리아에 교회가 섰습니다.
빌립이 예루살렘에서 황급히 떠나게 됩니다. 반갑지 않은 사건이죠.
그러나 그 일로 사마리아와 아프리카에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사울이 다메섹 가는 길에 예수믿었을 때, 자기 인생 최대 목표가 좌절됩니다.
그는 예루살렘 최고 서기관 되는 일이 꿈이예요.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불행한 일, 반갑지 않은 일, 목표가 좌절되는 일,
그런데 이 세 사람 중, 자기 인생이 잘 안풀린다고,
내가 안정된 삶이 아니라고 얼굴 어두운 사람 있습니까?
다시 한번 31절 읽어보십시다.
“그리하여, 예루살렘과 갈릴리와 사마리아에 ‘하나님의 교회’가 든든히 서게 되었더라”
하나님께서, 성령께서 이루어가시는 일이 쭉쭉 뻗어나가고 있다고
매우 긍정적으로 기록합니다.
핍박이 없다는 것이 아니예요. 일이 원하는 대로 다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 목숨 건지고 다 건강했다 이것도 아닙니다.
목숨도 잃고, 안정된 일터도 잃고, 최고가 되려는 목표도 사라졌어요.
‘그러나 그 일들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졌고, 그 일에 동참되었으면
전체적으로는 잘 되었다’ 그렇게 말합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을 하나님의 생각으로 정리하는 것입니다.
▲적용해봅시다. 31절에 근거하여 내 삶을 질문해봅시다.
그래요. 우리도 어렵고 우리도 고난이 많고, 우리도 희생이 많습니다.
그리하여 나를 통해 하나님의 교회가 든든해졌나요?
하나님의 교회가 나로 인하여 왕성해졌나요?
주를 경외하고 받드는 일에 나로 인하여 더 깊어졌나요?
복음을 믿는 자들이 나로 인하여 많아졌나요?
오늘 주님께서 우리 인생 정리하시면, ‘어제까지의 우리 인생 주제가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평가하실까요?
◑둘째,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냥 충성하고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행9: 19~30절까지 보면, 사울은 예수 믿고나서 인간적으로 보면 손해가 많습니다.
그 전에는 대제사장의 도장 찍힌 권세를 가지고 다녔는데,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를 가지고 다닙니다.
그런데 대제사장 권세를 갖고 다닐 때는 사울을 무서워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니니까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사울을 죽이려고 덤벼드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면서 사는 것은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23절 보세요. 사울이 바울이 되고 예수님 핍박하던 자리에서
예수님 증거하는 자리로 바뀌고 나니까 바울을 죽여버리자는 음모가 시작됩니다.
바울의 몸에 칼끝이 느껴질 정도로 위급해져요.
그런데 바울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아 너무 무서운데, 옛날 대제사장 권세를 갖고 살았을 때 참 좋았는데,
이제 예수님 증거하려고 하니 이렇게 미움받는구나, 포기할까?’ 이런 생각 하지 않아요.
‘아, 전도하는 거 정말 힘들다’ 현실은 이렇지만,
:22절에 보면 바울이 힘을 더 얻어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라고,
내가 그분을 만났다고 증거합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내게 이익이 될까 손해가 될까 이거 따지는 것이 아니예요.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는 건가, 나 몰라라 하는것인가 이것을 근거로 삽니다.
▲다메섹이 너무 바울에게 위험한 곳이 되었을 때,
바울의 친구들, 예수님 믿는 성도들이 바울을 살리려는 계획을 세워요. 그게 뭡니까?
성밖으로 밤에 광주리에 집어넣어서 도망가게 하는 계획입니다.
광주리를 타고 목숨 건진 사람이 두명이예요.
하나는 모세, 나일강에 갈대 광주리 속에 들어갔죠, 그리고 바울,
누가 더 창피합니까? 모세는 갓난 애기니까 광주리가 맞아요.
바울은 지금 30은 넘은 청년입니다.
며칠 전까지도 가장 위엄과 권세로 군사들을 지휘하던 사령관이었는데,
품위없이 광주리 타고 도망갑니다.
그런데 25절 마지막에 ‘바울이 심히 창피해 하더라..’ 이런 말이 없어요.
:26절부터 보면 바울에게는 정말 기가막힌 일이 나옵니다.
예루살렘으로 갔어요. 성도들에게 갔습니다.
예루살렘은 (변화되기 전) 바울의 본거지입니다.
그런데 여기가 전에 스데반 죽이고 교회 핍박할 때 자기가 선봉에 섰던 곳이라,
사울 하면 악명이 높아요. 그런데 다메섹에서 분명히 회개하고 예수믿고
예수님의 증인으로 예루살렘 교회에 가니까, 성도들이 사울을 믿어주지 않아요.
다 그를 슬슬 피합니다.
예루살렘 성도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무리는 아닙니다.
사울이 언제 돌변할 지 아무도 장담못해요.
그런데 문맥을 보면 사도들도 사울을 반갑게 맞아주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스데반 순교하던 그 일이 생각나면, 사실 마음이 안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사울이 이제부터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해야겠다 결단하고 나니까
모두가 사울을 반겨주고 환영해주고 그런 것이 절대 아니었어요.
미워하는 사람은 더 많아지고 죽이려는 사람들은 여기저기 나타나고,
사도들까지 외면하고 그래서 참 외롭고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바울의 인생을 놓아버리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어떻게 알 수 있어요? 힘들 때마다 하나님이 피할 길을 마련하여주십니다.
다메섹에서도 주의 제자들이 바울을 돕습니다. 광주리타고 도망갈 길은 열려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모두가 그를 외면했지만, 27절 보면 바나바가 바울에게 찾아갑니다.
바나바는 정말 좋은 사람이예요. 격려의 아들 바나바,
이 사람을 바울에게 친구로 동지로 붙여주십니다.
바나바가 바울을 찾아가서 다메섹 회개사건 자초지종을 듣습니다.
진짜로 회개한 것인가 자세히 물어봅니다. 그리고 바나바가 말합니다.
‘바울형제, 우리 베드로랑 사도들에게 가세!’
바울이 좀 망설였을지 몰라요. 전에도 찬바람 나게 사도들이 한 적이 있거든요.
그런데 바나바가 바울을 잘 설득하여 사도들에게 데리고 가서
바울이 진정으로 예수의 제자 된것을 적극적으로 말해줍니다.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주신다는 것이 뭡니까?
정서적으로 사면초가였던 바울에게 바나바 한 사람을 허락해주셨다는 것입니다.
▲29절 봅니다. 예루살렘에서 사도들과 교제하면서 전도를 시작하니까
유대인들이 또 바울을 죽이려고 작정합니다.
여기 보면 죽이려고 힘썼다고 되어있어요.
그러나 사도바울은 안 죽습니다. 왜 안 죽을까요?
아직 주님이 이땅에서 그를 통하여 하실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로 가서 다소로 도망갑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한다는 것은
마치 연극 감독에게 배우가 케스팅 되는 것과 같습니다.
감독이 배우를 이 각본 마지막까지 쓰겠다고 작정하면
그 연극에서 그는 안죽습니다.
죽이려는 사람들이 아무리 결심하고 힘쓰고 달려들어도, 주인공은 절대 안죽어요.
화살도 총알도 꼭 피해갑니다.
다윗의 인생에서 사울이 그를 죽이려고 정말 모든 에너지와 군사를 다 동원했어요.
그런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울의 손에 붙이지 아니하시니라!’ 그래요.
스데반은 일찍 죽었습니다. 또 일찍 죽으면 어떻습니까?
주님이 벌떡 일어나 맞아주시면 되는 것 아닙니까?
▲저는 이 말씀 이번 한주간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와 사마리아와 갈릴리로 퍼져가는 일을 계획하시고
그 일을 이루십니다.
그 일은 반드시 성도들에게 좋은 일만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순교와 핍박과 흩어짐과 살인음모와 광주리 도피와 외로움을 다 동반합니다.
그러나 이 일들을 다 겪으면서도
예수의 복음과 하나님의 교회가 든든히 서는 일이 이루어지면
그것은 다 좋은 일입니다. 다 의미있는 일입니다.
이 성경적 인생의 의미로.. 앞으로 우리의 남은 인생, 우리의 생각을 전환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