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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11:31~32 사역이 잘 될 때 빠지기 쉬운 영적 함정

LNCK 2021. 4. 17. 22:23

 

www.youtube.com/watch?v=zHd2HJWsNos

◈사역이 잘 될 때 빠지기 쉬운 영적 함정              고전11:31~32        출처, 번역

Spiritual Dangers When We Are Blessed

잭 푸닌                      

 

 

사역이 잘 되고 주님의 축복이 우리 삶과 사역에 부어질 때

우리는 여러 가지 위험에 빠질 수 있는데...

 

▲1. 내가 잘 될 때, 첫 번째 빠지기 쉬운 함정은 <영적인 교만>이다.

Spiritual Pride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실 때, 사탄은 우리를 시험에 빠지게 하는데,

그것은 자기의 영적 성장, 사역의 외적 성장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게 해서 우리를 교만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은 신자나 불신자에 관계없이

교만한 사람은 반드시 대적하신다. *벧전5:5

그래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얼굴을 티끌에 대고 있을 때.. 안전한 것이다.

애3:29 ‘입을 땅의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

 

교만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총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그런데 내가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하는 이유는, 내게 은사는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외적으로는 은사가 남아있지만, 내적 기름부으심은 떠나버린다)

 

그래서 사역이 외적으로 크게 변동이 없이 되어지고 있기에,

하나님의 은혜와 기름부으심이, 내 교만으로 인하여, 소멸되어버렸음에도

내가 그걸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사역이 그대로 여전히 이전처럼 굴러가고 있으므로.

 

일례로 사탄이 교만으로 범죄해서 자기 기름부으심을 잃어버렸을 때도

그가 가진 영적 은사들, 즉 사탄의 능력들은 대부분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사탄은 역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은, 오늘날 자기 은사나 사역을 자랑하며 교만에 빠지는 사람들에게

엄중한 경고로 들려져야 한다.

 

미성숙한 신자는, 자기 사역이 조금만 잘 되면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이 ‘이가봇’처럼 자기를 떠나버렸는데도 *삼상4:21 ‘영광이 떠남’

그걸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자기 사역을 자랑하기에 급급해 한다.

사역이 계속 되어지고 있으니까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이 계속 머물러 있는 줄로 안다.

 

개인뿐만 아니라 교회적으로도 ‘잘 되고 있다’는 목소리가 점차적으로 더욱 확산되면서

성령이 교회를 책망하신다는 소수의 목소리는, 대중에 의해 점점 파묻혀 버리고 만다.

 

실제로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이 우리 삶에 계속 임하고 있다는

틀림 없는 증거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이 점점 더 닮아가고 있다는 증거가 드러날 때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예정하시고,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것은

바로 그 목적을 이루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롬8:28~29

 

하나님은 우리가 천국에 가는 것을 예정하셨다기보다,

우리가 큰 사역을 감당하게 되기를 예정하셨다기보다,

우리 각자를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예정하셨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한다. 롬8:29

 

우리는 기름부으심의 설교를 감언이설과 분별해야 한다. 둘을 혼동하면 안 된다.

기름부으심 있는 설교나 사역의 열매는

언제나 신자들을 예수님께 대한 깊은 헌신으로 인도하며,

신자들을 더 깨어짐으로, 그리고 죄를 더 미워하도록 언제나 인도해 나간다.

 

그러나 감언이설의 말이나 설교는, 그렇지 못하고 '늘 잘 되고 있다'고 말하며

자기 사역이 잘 되는 점들을 부각시킨다.

그런 가운데 신자들가운데 영적 성숙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감언이설을 잘 하는 그룹의 직업군은 정치가들이다.

그들은 현란한 말로 듣는 청중들을 잘 설득시키는데 은사가 있고,

청중을 감정적으로 고조시키는 일에도 능하다.

그러나 그들이 집중하고 부각시키는 대상은 ‘사람’이지, ‘하나님’이 아니다.

 

감언이설을 잘 하는 사람은 보통 교만하지만

기름부음 받은 설교자는 보통 겸손하다.

 

설교를 하는 자나 듣는 자는

그게 감언이설인지 기름부으심 있는 설교인지 잘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떨 때는 감언이설을 듣고도, 은혜받았다고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듣는 그때 잠시 기분은 좋아지니까!

 

▲2. 사역이 잘 될 때 빠지기 쉬운 함정 두 번째는

<책망, 교정을 받기를 꺼려함>이다.            *첫 번째는 영적교만 이었고.

Unwillingness to Receive Correction

 

하나님이 우리 사역을 축복하셔서 잘 되고 있을 때,

‘우리는 언제나 틀리지 않는다’라고 늘 생각한다.

'우리가 늘 언제나 잘하고 있기에, 사역이 잘 되고 있다'.. 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연륜이 많은 분이 충고를 해 줘도.. 무시하고 듣지 않는다.

누가 바른 소리를 해 주더라도 ‘우리가 지금 잘 하고 있는데 무슨 잔소리냐?’

라는 식으로 일축해 버린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의 책망을 들었을 때, 그는 반발하고 뛰쳐나가버렸다.

그리고 그 즉시 예수님을 배신해 버렸다. 요12:4~8

그렇게 해서 결국 자기가 스스로 파멸에 이르고 만 것이다.

 

그러나 마26:10, 14절을 보시면

같은 책망을 받았을 때 베드로는 겸손히 자신을 낮추었다.

 

심지어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사탄아’라고 말씀하신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책망을 들을 줄 알았다.

그래서 같은 잘못을 범하고도, 그는 갸룟 유다와는 달리 자신을 구원한 것이다.

 

성령님은 항상 우리에게 예수님을 높이고 주님께 영광 돌리는 길을 제시하신다.

우리가 그 주님의 영광을 뵈올 때면, 항상 나의 부족함과 모자람을 즉시로 느끼면서

겸손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경건한 신자는 항상 자기 스스로를 판단하고 심판한다.

늘 주님의 영광을 보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렇게 약속한다.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하나님의 판단 judge 을 우리가 받지 아니하려니와’ 고전11:31

 

다음 구절에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우리가 스스로를 살피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판단 judge 하시고 우리를 징계하신다’ :32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은

우리가 세상과 함께 정죄를 받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32

 

 

▲3. 자기들을 스스로 높임

Exalting Ourselves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실 때, 사역이 잘 될 때

우리를 다른 사람보다 스스로 높이기 쉽다.

 

이때 사람들은, 자기를 칭송하는 사람들 중심으로 ‘팬 클럽’ 비슷한 것이 형성되는 것을

그대로 방치한다. 적극적으로 자기 부인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마치 연예인처럼 행동하려는 미혹에 빠지기 쉽다.

은연중에 더욱 팬들의 요구와 열광에 부응하는 것이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이와 비슷한 연예인 병에 빠져버렸다.

그가 연로한 장로들의 조언을 듣지 않고

자기를 흠모하고 따르는 젊은이들의 말을 들은 것은

주로 열광의 함성을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젊은이들의 요구에 그가 부응한 것일 것이다.

 

이것은 결국 이스라엘 나라가 두 쪽으로 쪼개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런 현상은, 오늘날에도 기독교계에 수많은 쪼개짐이 생기는 똑같은 이유라고 본다.

 

쪼개짐과 나뉨은 때때로 하나님이 사역을 축복하셔서 잘 되어질 때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지 못하고 자아가 강한 사역자들이 자기 스스로를 높일 때

자기를 추종하는 자들의 말을 듣고서.. 일어나는 것이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두 가지 사례를 살펴보면

1) 에베소교회는 사도행전에서 가장 큰 부흥이 일어난 지역 중 하나였다.

행19:11~20장에 보면 거기서 일어난 놀라운 일과 기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3년이나 그곳에 머물면서 말씀을 가르치고,

에베소를 거점으로 삼아서 주변 인근 지역으로 복음을 전했다.

 

그렇게 한 후 3년이 지나서, 바울은 에베소를 떠날 때 그 교회의 장로들에게 경고하기를

‘내가 떠난 다음에는 사나운 이리가 들어와서 앞으로 교회가 쪼개지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왜냐면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 자기를 따르라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행20:30

 

‘그들 사나운 이리는 자기 이름과 자기 사역을 추구할 것이고, 그래서 교회를 쪼갤 것이다.’

라는 뜻이었다.

 

그런 자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이 얼마나 주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며

주의 원수들에게 얼마나 큰 비방거리를 제공하는 일인지.. 그런 일에는 염려하지 않는다. *삼하12:14

 

다들 자기들을 높이려 할 때 일어나는.. 잘못된 분열인 것이다.

 

2) 그런데 분열되었지만, 좋은 결과를 맺는 경우도 있었다.

바울과 바나바가 함께 동역해서 사역에 거대한 성공과 열매를 거둔 후에

그들은 마가 요한에 대한 견해의 차이 때문에 심하게 서로 다투고

결국 분열되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행15:39

 

그러나 하나님은 그 분열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하셨다.

한 팀이 두 팀으로 나눠져서 결과적으로 복음전파 사역이 더욱 활발해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마가요한도 나중에 주님을 위한 훌륭한 사역자가 되었다. 마가복음을 쓰게 된다.

 

어떻게 해서 이런 분열 뒤에,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었을까?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는, 에베소의 장로들과는 달리

바나바는 자기를 높이지 않았고 영적으로 행했기 때문이었다.

 

바나바는 교회를 분열시키지 않았다.

자기를 따르는 신자들을 모아서 끌고 나가지도 않았다.

바울의 사역 영역을 침범하지도 않았고, 마가요한과 함께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행15:39

 

바나바는 경건한 사람이라서, 자기 사역보다 주님의 이름에 더 신경을 쓰고 염려했다.

그래서 참 예수님의 제자로 매사에 행한 것이다.

 

그와 같이 분열되었으나 하나님이 그 분열을 축복하시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기독교계에서 바나바와 같은 경우는 있기는 하나, 찾기가 쉽지는 않다.

 

고전11:19절에 보면 ‘하기야 여러분 가운데서 바르게 사는 사람들이 환히 드러나려면,

여러분 가운데 파당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라는 말씀이 나온다. *새번역

 

하나님은 파당, 즉 분열을 통해서

교회 가운데서 거만하고 불경건한 잡초들을 드러나도록 하기도 하신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신을 높이는 교만한 자들은 제하고)

곤고하고 humble 가난한 lowly 백성을 네 가운데에 남겨 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 스바냐3:12

 

그래서 교회에서 남은 자들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습3:13

 

그런 남은 자들을 주님은 보시고 아주 기뻐하시는 것이다.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습3:17

 

▲4. 좋은 예와 좋지 못한 예

Good And Bad Examples

 

성경에는 좋은 예가 나오지만, 본받지 말아야 할 좋지 못한 예도 정직하게 나와 있다.

그래서 지혜있는 성도는 좋지 못한 예를 보면서도 교훈을 얻을 줄 안다.

 

일례로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계속 뭔가를 움켜쥐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형 에서의 발꿈치를 붙잡고 태어난 이후로

형 에서의 장자권을 움켜쥐기 위해서 온갖 소동이 일어났고

 

그 일로 타국 외삼촌의 집으로 도피해서는, 거기서도 계속 뭔가를 움켜쥐려고 했었다.

그게 자연인의 본성일 것이다.

 

그런 움켜쥐는 자 야곱이 (그의 이름 야곱은 ‘뒤꿈치를 붙잡다, 약탈자’ 라는 뜻)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 자기가 움켜쥔 모든 것을 다 자기 손에서 놓고,

하나님만 온전히 꽉 움켜쥐었을 때였다.

 

창세기 32장에 보면, 그는 형 에서에게 어마어마한 예물을 보냈으며 (세상 것을 손에서 놓고)

또한 그 밤에 하나님과 씨름할 때, 하나님을 꼭 붙들고 놓지 않았었다. (하나님을 움켜 쥐었다)

 

다윗도 이런 가문의 피를 이어 받아, 결코 사울의 왕권을 찬탈하려 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분명히 자기를 왕으로 기름부으셨지만, 그는 스스로 그것을 차지하지 않았고

하나님이 그를 수년에 걸쳐 여러 번 시험하셨지만, 그는 그 시험을 통과하였다.

사울 왕을 죽일 기회가 몇 차례 있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기름부은 왕을 손대지 않은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 하나님의 때에,

이스라엘 온 장로들에 의해서 헤브론에서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압살롬은 달랐다. 그는 아버지 다윗의 명성을 시기해서

아주 영악하고 교묘하게 행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도적질했다.’ 삼하15:16

백성들의 마음이 다윗 왕을 떠나 자기를 지지하도록 만든 것이다.

 

결국 그는 모반을 일으켜 아버지를 왕권에서 쫓아내고 스스로 왕이 되어 보좌에 앉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압살롬을 한 순간에 왕위에서 쫓아내시고, 끝장나도록 하셨다.

 

하나님이 세우셔야 그 나라가 오래가는 것이지..

사람이 스스로 세운 나라는 곧 망하고 만다.

 

우리 사역도 마찬가지다.

우리 사역도 하나님이 세우신 사역이 될 때 영속적으로 지속되지만

사람이 자기 스스로 세운 사역이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곧 무너지고 말 것이다.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요3:27 

 

사람이 자기 스스로 애써서 안달해서

뭔가를 움켜쥐고, 세우려 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닐 가능성이 아주 크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사역, 자리, 보좌는.. 저절로 세워지는 것이다.

 

여기 사역의 중요한 원칙이 있다.

사람이 세운 사역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곧 무너질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세우신 사역은.. 영구히 지속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역하면서 서로 싸우고, 빼앗거나 할 필요나 이유가 없는 것이다.

혹시 분열하게 되는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바나바처럼 행하면 되는 것이다.

 

예수님도 결코 자기 사역을 위해서 꾀를 내거나 움켜잡으려 하지 않으셨다.

당연한 얘기지만 사람들을 감언이설로 유혹해서 자기를 따르게 하지도 않으셨다.

결코 자기 교회로 강압적으로 끌어들이지도 않으셨다.

예수님의 자세는 항상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은 내게로 올 것이다’ 였다. 요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요6:37 

 

예수님은 사람을 많이 끌어모으려는 야심이 없으셨다.

제자들에게도 사람들을 많이 불러모으라고 독촉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따르는 사람이 작을 때에도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로’ 만족하셨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했지,

그들을 질질 억지로 끌고 오거나, 그들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꽉 움켜쥐지 않으셨다.

 

‘내가 만약 들리면 lifted up 내가 많은 사람들을 내게로 이끌리라’ 요12:32

이것은 장차 예수님이 지실 십자가를 말씀하신 것이었다.

 

우리가 해야 할 일도, 사람들로 하여금 십자가의 예수님을 높이게 하고 lifted up

십자가의 예수님께로 이끄는 일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자기도 십자가에 들리는 방식으로, 즉 십자가 지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이끄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자기 손이 십자가의 굵은 못에 박혀 있으므로

그 손으로 뭔가를 움켜쥘 수가 없는 사람이다.

 

그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끌 뿐이다.

결코 내 영역, 내 사람, 내 소유로 만들지 않는다.

 

오늘날 기독교계의 문제는, 십자가에 못 박히지도 않은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높이는 일이다.

그래서 크게 열매가 없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셔서 우리 얼굴을 땅의 티끌에 대게 하시고 (겸손케 하시고)

그래서 사역을 하되, 그 분의 십자가 길을 따르는 사역이 되기를 기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