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보시기에 선과 공의를 행하라 대하14:1~7 설교 두 편에서 발췌
아사 왕이 다스릴 때, 나라가 평안했다는 말씀이
:1절, :5절, :6절, :7절.. 이렇게 계속 반복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의 아들 아사가.. 그의 시대에 그의 땅이 10년 동안 <평안>하니라’ :1
‘또 유다 모든 성읍에서 산당과 태양상을 없애매
나라가 그 앞에서 <평안>함을 누리니라’ :5
‘여호와께서 아사에게 <평안>을 주셨으므로
그 땅이 <평안>하여 여러 해 싸움이 없은지라’ :6
◑1. 아사 왕이 다스릴 때, 나라가 평안했던 이유
‘아사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하여’ :2
아사는 남유다의 왕으로서 41년을 통치했습니다.
왕은 필연적으로 백성들의 눈치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백성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뭐라고 말하는지
그 눈치(여론)보느라 이리저리 흔들립니다.
근데 왕은 한 명이고, 백성들의 숫자는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왕 한 명이,
그 수많은 백성들의 취향과 의견에 일일이 다 맞춰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아사 왕은 백성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백성들에게 과연 한 명 한 명의 말에 뒤흔들리는 길을 택한 것이 아니라,
어떤 길을 택했느냐면
‘그의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했습니다!’ :2
이것이 아사 왕이 ‘평안’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습니다. :1
‘과연 하나님은, 하나님 보시기에 어떤 것이 선일까?
어떤 결정을 선으로, 정의로 여기실까?’ 아사가 그것을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쉽지 않습니다.
왜냐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선과 정의가 너무 각양각색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게 선이다, 저게 정의다’
어쩌면 모든 사람들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선과 정의의 기준들이 있습니다.
똑같은 정책인데.. 이 사람에게는 선인데, 저 사람에게는 악이 됩니다.
이 사람의 얘기를 들어줬다가, 저 사람에게 욕을 먹습니다.
왕이 보통 어려운 자리가 아닙니다.
이럴 때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되는 것입니까?
똑같은 말도, 해석하기에 따라서
자기 구미에 맞지 않으면 ‘뭐 이런 왕이 다 있느냐?’며
그때부터 나라에 평안이 깨어집니다.
아사는, 깨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선과 정의를 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했다’는 것입니다. :2
이게 굉장히 중요한 가치입니다.
아사가 41년간 왕으로 다스렸습니다.
그 아사의 재위 기간 41년 동안, 북왕국은 왕이 7번이나 바뀌었습니다.
(여로보암 – 나답 – 바아사 – 엘라 – 시므리 – 오므리 – 아합)
그 동안 남왕국의 아사는 혼자서 계속 나라를 통치했습니다.
과연 무엇이 아사 왕을, 계속 안정적으로 통치하게 했을까요?
바로 사람의 생각이나, 사람의 선, 사람의 정의를 구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구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역대하 기자의 관점이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기도 합니다.
‘너희도 너희만 바로 서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남을 바로 세우려면, 공동체를 바로 세우려면,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아느냐?
흔들리는 사람의 마음에 너희의 마음을 주지 말아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선과 정의가 무엇인지를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자 그래서 3~5절에 보면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애고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상을 찍고
4 유다 사람에게 명하여 그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하며
그의 율법과 명령을 행하게 하고
5 또 유다 모든 성읍에서 산당과 태양상을 없애매
나라가 그 앞에서 평안함을 누리니라’
그런데 이게 다 언제 만들어진 우상들입니까?
아비야는 3년 만 통치했으니까, 이런 우상들을 만들 여유가 없었습니다.
이게 다 솔로몬 때 만들어진 것입니다.
왜냐면 태양상은 애굽에서 가져온 것이거든요.
이것은 쉽게 가져오기도 어려운 것입니다. 솔로몬 때 나라가 국력이 강력해서,
아마 외교관계를 수립하면서 가져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가져오고, 세운 우상들을
아사가 하나 하나 다 없애고 있습니다.
여러분, 솔로몬은 다윗의 아들입니다.
이스라엘에서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왕입니다.
그의 업적을 함부로 없앨 수 없습니다.
아무리 그게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다 해도
솔로몬 왕이 가져다 놓은 것을, 누가 함부로 없애겠습니까?
그런데 솔로몬의 자손 중에서 증손뻘인 아사는
솔로몬의 모든 이방신과 주상과 태양상을 없애버렸습니다.
왜 그럴 수 있었습니까?
바로 아사 왕이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백성들의 여론에 신경쓰기 보다는
‘과연 무엇이 하나님 앞에서 선인가?
무엇이 하나님 앞에서 정의인가?’
이것을 생각하니까.. 답이 확실했던 것입니다.
‘아~ 저 우상은 하나님 앞에서 용납될 수 없다.
저것을 숭배하는 한, 우리 백성에게 평안 없다’
그 판단으로 모두 찍어서 버린 것입니다.
그랬더니 :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라가 그 앞에서 평안함을 누리니라’
그래서 본문 아사 왕의 통치 가운데 ‘평안’이란 단어가 계속 등장합니다. :1, 5, 6, 7절
이렇게 <평안>은,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선과 공의를 행할 때 주어지는 것임을
우리가 본문을 읽을 때.. 캐치해 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 아사 왕이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하다
저는 이 땅의 정치인들이 이 말씀(1~5절)을 읽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봅니다.
‘어떻게 나라를 바로잡을 것인가, 어떻게 정치의 질서를 새롭게 할 것인가?’
거기에 지침이 될 말씀들이 여기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땅에 평안이 오는 길, 이 땅을 화평케 하는 길
이 땅에 진정한 샬롬이 임하는 길은
위 본문에 보니까 먼저
하나님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도, 창세기18 :19절에 보면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아브라함이 그 길을 먼저 행하는 것이죠.
그렇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동행이요, 하나님의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길!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길’이 아니라
‘세상의 길’에서 너무 많은 것들을 배우고자 합니다.
세상의 성공한 사람들이 어떤 길을 가는지.. 너무 과도하게 궁금해 합니다.
세상의 잘 된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에.. 너무 관심을 많이 갖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작 하나님께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세상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도움 구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길을 가기 위해서
세상 것들을 최소화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의 길을 너무 많이 배우면
하나님의 길을 따르기가 어렵습니다.
바둑의 격언 중에 ‘장고 끝에 악수 둔다’는 말이 있습니다.
장고.. 너무 오래 생각하다가, 악수.. 나쁜 수를 두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너무 많은 것들을 배우다가
정작 “하나님의 길”을 잃어버리고
본질을 놓쳐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아사 왕은, 그런 우(잘못)를 범하지 않습니다.
그는 먼저 하나님의 선과 정의를 행했습니다. :2
하나님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가리는 것들,
하나님을 어른거리고 흐릿하게 보이게 하는 것들,
그런 것들을, 눈에 비늘을 벗기듯.. 다 벗겨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사 왕은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애고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상을 찍어’ 없앴습니다. :3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가리는 것들,
자기 눈 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정결케 하고, 혁파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길”을 가기 위해서
우리 각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엇을 혁파해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길을 가리는 것들,
즉 우리 자신의 나쁜 버릇 하나 하나를
하나님 앞에서 고쳐나가는 작업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말버릇이 나쁘면.. 그 말씨를 기도하면서 고치고
사람을 쳐다보는 시선과 버릇이 나쁘면.. 그 눈길을 지속적으로 고쳐 나가는 것입니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교만하면.. 그런 것들을 그냥 방치하지 말고, 스스로 고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선과 정의를 행하는’ 것이고, :2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애고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상을 찍어’ 없애는 길인 것입니다. :3
‘하나님의 길’을 가는 것이란, 그런 것입니다.
그저 교회 다니는 것으로 만족하면 안 되고, ‘하나님의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 정의, 공도, 거룩함’
이런 개념들이 언뜻 들으면 매우 거창하게 들리지만
위에서 언급한 대로 ‘하나님의 길’을 내가 가는 것이..
그 의와 선을 구하는 길인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의, 정의, 공도,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과 똑같은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닮는다, 하나님의 마음을 따른다’는 신앙을
뭐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복잡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란,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고,
내가 이웃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 길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을 믿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정상화 되면
그 열매로, 그 증거로
나의 이웃과의 관계, 가족간의 관계부터 회복되고 정상화되는 일이
저절로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전 생활과 어떻게 똑같겠습니까!
하나님이 신령한 성령의 능력으로 그렇게 회복되도록 나를 도와주시겠지만
나 스스로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에 반응하여, 그 길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가정이 평안치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든 관계가 깨어져 버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그저 관념으로만 믿으면, 삶에 평안이 없게 됩니다.
예수를 믿고 나면, 나의 옛사람과의 단절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바알, 아세라 등의 우상을 척결하게 되는데,
즉 나의 옛습관을 버리는 일이.. 단계적으로 일어나게 (성숙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옛 관계가 정리되는 아픔을 감수하게 되시기 바랍니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