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히브리 성경에서는 연대기적으로 가장 마지막에 기록된 <역대기>를 통하여 다윗 과 솔로몬 왕을 기준과 정답으로 제시하시고 난 이후에 나라가 갈라지고 다윗의 가문의 이어지는.. 남유다 왕들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보여주시면서
하나님은, 어떤 개념적인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이 땅 가운데 한 인생을 하나님 앞에 바쳤던 역사적인 인물들의 실제 삶과 역사의 교훈을 통해서 지금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제 12대왕 요담의 아들 아하스가 왕이 되었는데요. 아하스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대하28:1 '아하스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20세라 예루살렘에서 16년 동안 다스렸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지 아니하고'
사실 아하스의 할아버지 웃시야도 52년간 통치하면서 물론 마지막에 교만해져서 오점을 남기기는 했지만, 그렇지만 거룩한 왕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요담은 전반적으로 아주 후한 평가를 받은 인생으로서 제시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거룩한 할아버지와, 그 위대한 아버지 아래에서 태어난 아하스 왕이 오를 때, 그것도 어릴 때 왕위에 오른 것도 아니고, 나이가 20세였어요. 배울만큼 배웠고, 자랄만큼 자랐어요.
그리고 아버지 요담과 똑같이 16년을 다스렸는데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지 아니하고..' 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2절부터 아하스의 악행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2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바알들의 우상을 부어 만들고 3 또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분향하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그의 자녀들을 불사르고 4 또 산당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니라'
'자녀들을 불사르고.. 모든 산당과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니라..' 아하스는 선대 남유다의 1~12대 모든 왕들과는 확연히 차이나는 가증한 일을 행했습니다.
◑왜 아하스가 여기까지 극도로 빗나간 것입니까?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몇 가지 이유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거룩한 아버지 아래에서 왜 우상숭배자 아들이 나타나게 되었는가요?
▲1. 그 첫 번째는 <어머니의 부재다>.. 라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남유다의 대부분의 20명의 왕들은, 공이 있고 과가 있어요. 우리 인생과 마찬가지입니다.
완전하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정답으로 제시된 다윗과 솔로몬도 그러했죠.
어쨌든 완전하진 않아도, 하나님 앞에 그래도 경건한 삶을 보였고, 그렇게 유지를 했으며 큰 과오를 범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산 사람들 대부분은 마치 공통적인 수식어를 가지고 있는데요.
아하스의 할아버지 웃시야 때로 한번 가 볼까요? 그래도 52년 동안 통치하면서 그가 교만해서 나중에 나병 환자가 되긴 했지만 그러나 대부분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살았던 웃시야의 시작점에 가 보시면,요
역대하 26장 3절에서 한번 보겠습니다. 3 '웃시야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16세라 예루살렘에서 52년 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골리아요 예루살렘 사람이더라 4 웃시야가 그의 아버지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며'
자, 완전하진 않아도 정직하게 행했습니다. 이렇게 웃시야가 살았던 이유는, 3절과 연관성이 있다고 봅니다.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골리아요 예루살렘 사람이더라' :3
이렇게 그 웃시야의 "어머니"에 대한 언급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27장에 자신의 삶을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드렸다고 할 수 있는 요담 왕도 "어머니"를 잘 두었습니다.
대하27:1 '요담이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25세라 예루살렘에서 16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루사요 사독의 딸이더라 2 요담이 그의 아버지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나..'
2절에, 요담 왕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한 이유가, 1절에 그 연관성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루사요 사독의 딸이더라'
그런데 이제 본문 28장에, 조상들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았던 아하스 왕의 시작점을 한 번 살펴봅시다.
대하28:1 '아하스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20세라 예루살렘에서 16년 동안 다스렸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지 아니하고..'
아하스는 그의 어머니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실제로 아하스에게 그의 육신을 어머니가 없었겠습니까? 어머니는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역대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아하스의 어머니의 이름이나 그의 어머니에 대한 어떤 언급도 배제 시키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거룩한 자녀가 일어나는데 있어서, 분명한 것 중에 하나는 바로 그에게 거룩한 어머니가 있었다라는 것이고
악한 왕 아하스가 일어났던 이유는 거기에 거룩한 어머니에 대한 언급이 없다 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녀를 주실 때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그런 여성에게 우리의 자녀들을 맡기지 않고 하나님은 누구에게 맡기셨습니까?
'그(웃시야)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골리아요 예루살렘 사람이더라' 26:3 '그(요담)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루사요 사독의 딸이더라' 27:1
예루살렘 여자라고 표현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루살렘은 왕의 도성입니다. 예루살렘을 누가 통치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세우신 왕을 통하여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
그러니까 '그 여인이 예루살렘 여자다' 라고 하는 것은 '왕의 통치,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는 여자였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는 전문적인 성경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표현하지 않고 '그는 예루살렘 여자로서 하나님 앞에 어떻게 통치를 받으면서 살아가야 하는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여자였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을 따라서 살아가는 여자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왕이신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삶을 살아야 되는지를 보여주는 여자였고, 왕이신 하나님 앞에 삶을 살아갔던 여자였고, 자기 자녀에게 왕이신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보여주고 가르쳐 주고 영향을 주던 여자였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담의 어머니 여루사에 대해서는, '사독의 딸이더라' 사독, 즉 위대한 대제사장의 집안의 딸이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어요.
그러니 '그가 참 많은 성경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기도를 많이 하는 여자였다' 이렇게 표현하는 대신에, '사독의 딸이더라'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제사장은 뭐 하는 사람입니까? 그 집안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집안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여자는,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서 살아가던 여자라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 어떻게 예배하고 제사하는지를 가르쳐 주며 자기의 자녀에게 그것을 전수하고 영향을 끼쳤던 여자였다.. 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거룩한 자녀가 일어날 때는, 그래도 완전 하진 않지만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삶을 살았던 왕들이 일어날 때는 예루살렘 여자처럼, 왕 되신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하는지, 그분의 말씀에 어떻게 통치를 받아야 되는지.. 그리고 그 분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하나님 앞에서 살았던 예루살렘 여자와 *여골리아, 웃시야의 어머니
무엇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인지, 제사하는 것인지 제사는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인지, 회개(번제)는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인지를 보여 주는 하나님 앞에서 생생한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산 증인으로서 자녀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여자, 그런 어머니가 있었다라는 것입니다. *여루사, 요담의 어머니
그러나 안타깝게도 본문의 아하스에게는, 그의 육신을 낳아준 어머니는 있었겠지만 왕의 통치를, 하나님의 통치를 어떻게 받아야 되는지.. 하나님을 어떻게 제사야 되는지를 가르쳐 주는 영적인 어머니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하스의 삶속에는 어머니의 이름이 부재 되어 있다 라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왜 웃시야와 요담은 잘 했는데, 그 다음에 악한 아하스가 일어났는가요?
물론 그런다고 그의 개인적인 책임이 면책되는 것은 아닙니다만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에 대하여 실제로 삶속에서 자녀에게 영향을 미치던 그의 어머니의 부재가 악한 왕 아하스를 낳았다..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왜 그 거룩한 웃시야와 그 위대한 요담 이후에 하나님을 떠난 우상숭배자 아하스 라는 자녀가 일어났는가요? 그 두 번째 이유는, <아버지의 부재> 라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방금도 살펴보았지만, 완전하진 않지만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삶을 드린, 하나님 앞에서 그래도 거룩한 삶의 흔적을 가지고 있는 왕들에게
또다시 그들을 소개하면서 수식 문구처럼 붙는 말이 있어요. 웃시야를 다시 한번 살펴볼까요?
대하26:4 '웃시야가 그의 <아버지>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며'
앞서 살펴 보았던 수식어는 '그의 어머니가 누구이다' 그리고 또 다시 붙은 수식어는 '그의 아버지'입니다. :4 '웃시야가 그의 <아버지>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아마샤는 완전한 삶을 살았던 사람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아마샤는 자신의 아들 웃시야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살던 삶이었다.. 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담을 보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요담의 삶의 시작점에도 또 동일한 수식어가 붙어있는데요,
27:2 '요담이 그의 아버지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나'
요담에게는, 그의 어머니 여루사의 선한 영향력 외에도 '그의 아버지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정직하게 행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웃시야도 잘 나가다가.. 강성해지고 나서 교만해지고 교만해지고 나서 나병환자가 되었어요. 그리고 아들과 함께 섭정을 하면서 통치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의 아버지 웃시야는, 아들 요담에게 영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게 좋은 영향력이기도하지만, 나쁜 본을 보이면서도 그것이 어쨌든 자기의 자녀에게,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그런 어떤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8장에는, 웃시야나 요담과 전혀 다릅니다. 28:1 '아하스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20세라 예루살렘에서 16년 동안 다스렸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지 아니하고..'
아하스에게는 어머니의 이름도 나오지 않고 아버지의 이름도 등장하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웃시야와 요담과 비교해서 볼 때, 좀 의아하지 않습니까?
선친 요담은 비교적 거룩하게 살았는데 왜 아들 아하스 에게는, 그의 아버지 요담이라는 이름의 기록되지 않는가요?
요담은 사실 아주 짤막하게 역대기 27:1~9절까지 최고의 삶을 산 것처럼 보여져요. 그러나 (절 수로) 길게 이어지는 28장을 통해서, 요담의 가장 큰 결점 중의 하나, 우리가 경계해야 되는 것 중에 하나를 보여주는 샘플이 (요담이) 되기도 합니다.
요담의 특징을 보면, 그는 하나님 앞에 정말 거룩하게 살았고 최고의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왕하15:34~35절을 보시면,
왕하15:34~35 '요담이 그의 아버지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오직 산당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요담이 여호와의 성전의 윗문을 건축하니라'
역대하 27장에서 본 것처럼, 요담은 거의 결점 없이 마친 인생이었지만 그러나 그는 한 가지 결점이 있었는데 뭐냐면 자기는 하나님을 잘 생겼어요. 최고의 왕이었어요.
그런데 산당을 제거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백성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자신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데, 자신 안에 있는 백성들에게는 영적인 영향력과 거룩의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던 그런 왕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백성' 안에 누구까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까? (자기 아들 아하스까지 포함되었어요)
대하27:2절을 보시면, 그 요담은 왕으로서 하나님 앞에는 거룩한 이름으로 남았지만 백성들에게는 거룩을 미치지 못 했어요.
백성들의 신앙에는 신경 쓰지 않았어요. 백성들이 어떻게 사는지는 관여하지 않았어요.
근데 그 백성들 가운데 누구도 있냐면 2절을 읽어볼까요? 대하27:2 '요담이 그의 아버지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나 여호와의 성전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고 백성은 여전히 부패하였더라'
'그의 백성들'의 범주 속에, 그의 아들 아하스까지도 포함된 것입니다.
요담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산 선한 왕으로 이름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여러 외적인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거룩'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한 왕이었고 그러나보니 심지어 자기 아들의 거룩, 자기 아들의 영적인 삶에도 전혀 터치를 하지 않음므로써
그의 아들 아하스의 삶의 보면, 그의 어머니의 이름도 없었고, 자기 아버지의 이름도 성경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요담은, 하나님 앞에서는 경건한 삶을 살았고, 백성들에게 평화도 주었고, 안식도 주었고, 경제적인 부도 주었고, 안정도 주었어요. 그리고 요담은 자기 자녀 아하스에게도 그 모든 외적인 것은 다 채워 줬겠죠.
그러나 한가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아버지로서 보여 주지 아니한 왕, 그가 바로 요담이었습니다.
그래서 아하스는, 분명히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살지 못한 개인적인 책임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하스가 이렇게 엄청 타락하게 된 이유에 대하여 성경은 무엇을 강조하고 있을까요?
아하스의 인생에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삶을 살아야 되고, 어떻게 예배 해야 될지를 보여주고, 신앙을 나누고 함께 고민하면서 나가야 될 어머니가 없었다는 것과,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을 자신은 살았지만 그리고 자녀에게 주어야 될 모든 외적인 것들은 풍성히 주었지만 거룩한 삶을 살아야 될 것에 대한 책임과 (아들의 잘못에 대한) 징계와 관여가 없었던.. 즉 아버지가 없었던 그것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녀가, 즉 아하스가 일어났다 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우리의 자녀들의 신앙의 1차적인 책임, 가장 막중한 책임은 누구라는 것입니까? 그 자녀의 아비와 어미다 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인생, 한 그리스도인의 인생을 만드실 때 사회를 통해서도 우리를 다듬어 가시며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그리고 학교와 우리 주변에 있는 환경들을 통해서도 우리를 만들어 가십니다. 그리고 교회를 통해서도 우리를 만들어 가십니다.
그러나 일차적이고 가장 막중한 책임은 결국 어디에 있다는 겁니까? 결국은 가정에 있으며, 부모에게 있다 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요 유대인들은 결코 자기 자녀의 신앙교육을 남에게 맡기지 않습니다. 모든 유대인들이 성경에 정통하고,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성경을 잘 알아서 그렇게 말하는 것일까요? 아니요.
예수님이 오시고 난 이후에 2천 년이 지난 이 때도 나라도 없이 떠돌던 그들이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가지면서 2000년을 넘게 그 선민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른 것은 남들에게 다 맡겨도, 자기 자녀의 신앙에 있어서는 누가 책임을 집니까? 그 아버지와 어머니가 책임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 신앙 문제에 있어서는 그 누구에게도 맡기지 않았어요.
그런데 한국 성도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녀들의 신앙을 누구의 책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자녀의 신앙의 책임을 누구에게 맡기고 있습니까 수학은 수학 선생님께 맡기고, 축구는 축구동아리 선생님에게 맡기고 농구는 농구 선생님한테 배우면 되고, 국어는 국어 선생님한테 배우면 되는 것처럼 '신앙과 성경은 목사한테 배우면 된다' 라고 말하면서 교역자에게 다 맡겼어요.
그런데 아하스가, 제대로 된 교역자가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을까요? 놀라운 사실은, 아하스의 지금으로 말하면 그의 담임목사는 그의 영혼을 책임졌던 교육자가 누구였을까요?
이사야 7장으로 가보겠습니다. 사7:1 '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유다의 아하스 왕 때에 아람의 르신 왕과 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의 베가 왕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쳤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지금 위 본문은 아하스 때 라고 말하고 있죠. 그런데 그 때에.. 3절을 보십시오. 7:3 '그 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에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
위 본문을 보면, 아하스의 담임목사는 누굽니까> 이사야 입니다. 성경에 선지자들 중에 가장 긴 예언을 했던, 대선지자 중의 대선지자! 하나님 앞에 최고의 선지자라고 말할 수 있는 목회자 이사야가 아하스의 담임목회자였습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14절을 가보시면 그때 선포되어지는 말씀을 한번 읽어 볼까요? 사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우리 인생이 받을 수 있는 가장 복된 말씀, 가장 감동적이고 가장 은혜되는 말씀, 가장 거룩한 말씀 중 하나가 이 악한 왕 아하스에게 이사야를 통해 선포되어졌습니다.
그러나 아하스는 이런 잘못된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될까요? 아하스에게 좋은 교역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신아이 이렇게 된 것입니까? 아니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외 모든 것들을 다른 곳에서 배울 수 있지만 우리 자녀들에게 있어서 영적인 생명은 그의 부모에게 맡겨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비가 어떠했느냐, 그 어미가 어떻했느냐에 따라서 그 자녀들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 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이 말씀을 우리에게 해 주셨는데 대부분 보면 다 자녀들을 두고 있는 부모 들입니다.
이 앞에서 자랑스러울 만큼, 그리고 아무런 가책이 없을 만큼 '나 스스로 괜찮다. 나는 잘 하고 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저부터 포함해서 우리 모두가, 우리 자녀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떳떳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왜 이 코로나 시점에 우리에게 이 본문 말씀을 주시는 것일까요? 하나님 우리를 절망시키시려는 게 아닙니다.
'그거 봐라. 네 자식 꼬라지가 그렇게 된 이유는 바로 너 때문이다!' 하는 이 말씀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고 싶으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네 자녀가 세상 사람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아하스를 만들어 낸 것은 다 너 (부모) 때문이야!' 하나님 지금 그걸 지적하고 싶으신 것일까요?
물론 우리는 찔림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창으로 감사한 것은, 지금 설교하는 저도 사실은 우리 아버지로부터, 어머니로부터 예수의 '예'자도 듣지 못했던 '안모태' 입니다.
집안 전체에 예수 믿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으시더라고요. 그런 사람을 목사로 만드실 수 있는 분이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또 '아이고 그래 맞다. 하나님이 하시는 거지!' 라고 면책 되는 것입니까? 아니요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것일까요?
아하스가 일어난 이 시점에는, 사실 아버지 요담에 대한 정죄입니다. 아하스에게는 호적상의 어머니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을 있었지만 영적인 아버지 와 어머니의 이름이 없었다.. 라고 지금 (본문은) 요담을 지적하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지금 이 말씀을 주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아직까지 요담처럼, 다 끝나고 상황종료된 인생이 아니고 여전히 자녀들 옆에 남아 있기 때문에,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되는지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 해야 되는지 내가 완전하진 않아도, 그것을 애쓰고 수고하고 넘어지기도 하면서 그런 것들을 영향을 미치는 부모가 되어 주고 어머니가 되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비록 완전한 삶은 아니었지만 때로 하나님께 꾸중과 경책을 받기도 하고, 나병에 걸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영향을 미치는 아버지가 지금이라도 되라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전폭적으로 회복의 기회를 우리에게 주고 계신다는 것은 코로나를 통해서 보게 됩니다.
코로나가 우리 모두를 멈추게 했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십시오. 이 코로나 때문에 이제 교회는 본질적인 것 하나 빼고는 모두 멈추게 되었습니다.
행사, 이벤트 등 밖으로 하던 모든 것들을 다 멈추고 오직 말씀 선포만 남아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이 우리에게 벌주시는 걸까요, 회복을 시키는 걸까요? (회복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연말에 모든 모임을 취소하십시오. 제발 좀 그렇게 해 주십시오!' 정부가 싹싹 빌듯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어요.
하나님이 정부를 통해서 우리에게도 말씀하고 있어요. 그 모든 모임들은 다 취소되고 있어요. 그런데 뭐만 남았습니까?
가족끼리 모이는 것만은 하나님이 허락하십니다. 부부가 함께 있을 수 있도록, 부모 자녀가 함께 있을 수 있도록 모든 모임은 폐해져도, 가족 모임은 가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서
어쩌면 하나님이 이 코로나를 통해서 이 사회를, 이 나라를 변화시키기 위하여서 교회가 바꿔야 되고,
이 교회가 바뀌기 위해서 우리가 초점을 맞춰야 될 것이 무엇인지를 지금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교회를 변화시키기 위하여.. 먼저 가정이 바뀌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멈추게 하시지만 가정에서 모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하나님께서 이렇게 전폭적으로 우리에게 딱 지정해서 뭘 집중적으로 해야 되느냐?
이 코로나 기간동안 가정을 회복하고, 자녀들에게 거룩한 아버지, 어머니로서의 모습을 회복하고 가족 관계를 회복하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가정이 회복되면.. 코로나는 언젠가는 물러 갈 것이고 회복된 가정이 있는 우리 가정 공동체들이 교회에 나와서 교회를 회복시킬 것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