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종교의 영적 조상, 마술사 시몬 - YouTube
◈기독교 종교의 영적 조상, 마술사 시몬 행8:9~25 출처
18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19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20 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21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이 설교의 부제는
<예수 이름 신앙인, 예수 이름 교양인, 예수 이름 마술애호가> 입니다.
근데 오늘날 우리가 '예수 이름 교양인'과 '예수 이름 마술애호가' 가 될 경우에
18절 이하에 사도 베드로가, 사마리아의 마술사 시몬에게 말했던 것과 같은
저주의 대상이 우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참 무서운 얘기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기독교)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21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23
정말 무서운 말들 아닙니까?
근데 예수 이름을 받아들인 사람(시몬)에게 주어지고 있는 말이라는 겁니다.
어떤 때요?
예수 이름을 받아들였는데, '예수 이름 신앙인'이 아니라 '예수 이름 교양인(이하 교양인)'이 되고
'예수 이름 마술애호가(이하 마술애호가)'가 될 때 그렇다는 겁니다.
▲예수 이름으로 '교양인'이 된다는 건 쉽게 말하면
예수 이름을 받아들이는 것이, 인간 세상에서, 이 사회 안에서
하나의 경향이 되고, 문화가 되고, 대세의 흐름이 될 때 나타나는 일입니다.
즉 예배당 소속의 회원이 됨으로써, 사회적인 품위를 더하려고 하는 의도에서
예수 이름을 붙잡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사회생활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예수 이름을 받아들인 경우입니다.
기독교와 연관된 문화적 분위기를 받아들임으로써,
사회 생활을 해나감에 있어서 자기 교양을 좀 더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품위를 더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로 예수 이름을 붙잡습니다.
▲그러면 '마술애호가'는 무엇이냐?
마술의 핵심은, 어떻게 하든지 무슨 장치를 쓰든지, 손을 재빠르게 움직여서 하든지
어떤 속임수를 쓰든지.. 그 목적은 불가사의한 일을 드러내 보이는 겁니다.
그러므로 뻔한 일을 지양하고, 생각과 상상과 인간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차원의 일이
일어나는 것이 '불가사의' 인데, 이게 바로 마술을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 이름을 붙잡고 불가사의한 일들이 삶에서 일어나기를 바래서
예수 이름을 붙잡습니다.
이런 경우에,
사회생활에 있어서 품위를 더하기 위한 '교양'을 위하여 예수 이름을 붙잡거나,
사회생활에 있어서 '불가사의'한 일을 보고 싶어서, 생각과 상상을 초월하고
인간의 힘을 초월하는 일들이 내 삶에 나타나기를 바래서 예수 이름을 붙잡을 경우에,
베드로 사도가 말한 대로 그 무서운 모든 저주가 임하게 된다는 겁니다.
'네가 네 은과 함께 망할 지어다. 너는 이 기독교에는 관계도 없고 분깃도 없다.
너는 악독이 가득하고 불의에 메인바 되었다!' 라고 퍼부었습니다.
이런 내용이 마술애호가 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임한다는 겁니다.
근데 너무나 편안하게 '교양인'으로서, 또 '마술애호가'로서 우리가 살았던 시절이
과거에 한 때 우리에게 있었고,
심지어는 지금도 우리의 이웃들이 그렇게 살고 있다는 것이.. 우리 가슴을 서늘하게 합니다.
▲자 내용을 좀 자세히 들여다 봅니다.
시몬은 사마리아에서 마술사로서 이름을 떨치고 있던 사람입니다.
행8:9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10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따르며 이르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11 오랫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그들이 따르더니..'
그러니까 시몬은 굉장히 마술에 탁월한 능력을 가진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오랫동안 마술에 놀랐으므로 그들이 따랐다'고 했으니까요. :11
그리고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능력이 임했다'고 여길 정도로 :10
단순한 속임수가 아니었다고 느껴질 만큼
탁월한 마술의 능력을 보임으로써
시몬은 그 사회에서 지도자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근데 전설에 따르면, 그는 이집트에 가서 철학과 마술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마술이 실제로 어떤 형태로 나타났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빌립 집사님이 사마리아 성에 와서 기사와 표적을 행하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이 다 빌립 집사님에게로 방향을 돌립니다. 빌립 집사님을 따르게 됩니다.
근데 그것을 보고 너무나도 쉽게 이 마술사 시몬이
사마리아 사회에서 가장 큰 자로 추앙을 받고 있던 사람 아닙니까?
그래서 자기의 그 세상에서 누리고 있었던 사회적인 위치를
너무나 쉽게 포기하고, 빌립 집사님에게 (무릎을 꿇고) 따르게 됩니다. *세례를 받음 :13
그런 걸 보면, 이 사람이 행한 마술이
빌립 집사님이 행했던 성령의 역사를 통해 나타난 어떤 기사와 표적들,
병자를 고친다든지.. 귀신을 쫓아낸다든지 하는
그런 강력한 형태로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비록 사람의 생각과 상상과 능력을 초월하는 불가사의한 일들이
마술사 시몬에게서 나타났다 할지라도
그가 빌립을 따랐던 것을 보면.. 그만한 능력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내용을 좀 자세히 들여다보면
시몬을 통하여 지금 저자 누가가 이 사도행전 본문에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요?
(이 사실이 참 의미 있습니다) 무엇을 말하고자 합입니까?
▲당시에 보면, 유대인들은 예수님 이름을 강력히 거부하고 적극적으로 박해를 합니다. *흑
반면에 교인들은, 예수 이름을 받아들여서 목숨을 걸고 그 이름을 붙잡았습니다. *백
그런데 사마리아에서 특이한 일이 벌어지는 것이에요.
'예수 이름'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있어서 <제3의 방식>이 등장합니다. *회색
제3의 방식이란, 예수 이름을 교인들 못지 않게 적극적으로 환영하며 수용합니다.
근데 특이한 것은, 유대인들과 똑같이 화려한 이 세상을 자기 마음으로 흠모하며 바라봅니다.
세상을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여전히 세상 방식을 그대로 갖고 있으면서 예수를 믿습니다...
지금 교회의 역사가,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시작되고 있고
이제 예루살렘 교회에 박해가 일어나서, 신자들이 각 곳으로 흩어져서
그 흩어진 사람들이 각 곳에 말씀을 전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
사마리아에서 새롭게 등장한 '제3의 방식'이란
이 세상 안에 그대로 머물면서, 예수 이름을 받아들이는 것은..
이게 교회 역사상 처음 일어난 일이라는 거예요!!
오늘날 용어로 '명목상의 교인 nominal Christian'이라 부릅니다.
근데 예수 이름을 왜 받아들이느냐?.. 살펴 봤더니,
'교양의 차원'에서 받아들이고, 사회생활에서 자기 품위를 높이기 위한,
즉 교양의 수준에서 받아들이는 사람이 생기는가 하면,
또한 '마술애호가' 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즉 불가사의한 일(기적)들이 나타나기를 바래서 예수 이름을 받아들이더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기독교 신앙에 최로초 '이상한 변종'들이 생기기 시작한 겁니다.
예수 이름을 진짜 교인 못지 않게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유대인 못지 않게) 이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수 이름을 받아들이는
제3의 방식, 변종이 나타난 겁니다. 즉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서 자아가 죽지 않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모든 신앙인들의 조상이었던 것처럼
그래서 아브라함이 영광의 하나님을 뵈었던 일이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교인들에게서 똑같이 나타나서
영광의 하나님을 뵙는 일이 나타나야 되는데,
마술사 시몬은, 예수 이름을 받아는 들이는데..
이 세상에서 좀 더 잘 되어 보겠다는 목적으로 예수 이름을 받아들이는..
그래서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는 한 번도 나타나 본 적도 없고,
당시 성도들의 입장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이상한 일이
사마리아 성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 조상, 그 최초의 인물이 마술사 시몬인 것입니다.
즉 세상을 사랑하면서 예수 이름을 동시에 받아들이는 것이
그 당시 빌립 집사님이나, 사도들이나, 성도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일이 앞서 살짝 비춰진 사건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이었는데,
그들은 그 자리에서 즉사해 버렸습니다.
그런 변형된 영적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의 조상이 바로, 본문의 마술사 시몬이었습니다.
▲보세요. '빌립 집사님이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으니..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나타나는 표적과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12~13
그러니까 시몬은 자기가 누려오던 존경받던 마술사의 위치가 위태롭게 되자 화가 나서,
시기심이나 질투심이나 아니면 빌립 집사님을 험담을 한다든지, 뭐 박해를 한다든지 하는 게 아니라
빌립 집사님에 의해서 지금 자기 위치가 뺏기게 되었는데도
그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고, 모든 남녀가 세례를 받으니까 자기도 세례를 받고
모든 남녀가 빌립을 따르니까, 자기도 적극적으로 빌립을 따르게 됩니다.
그러면서 '빌립 집사님에게서 나타나는 표적과 기사를 보고 놀랬다' 라는 얘기를 합니다. :13
그러니까 지금 이 '시몬이 세례 받고 믿었다' 라는 것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닌 거예요.
사회적인 경향이나 당시 사회 분위기와 흐름을 매우 중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나 중시 했냐면, '자칭 큰 자라' 했고,
사람들이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큰 능력이라'고 칭송하며 자기를 따랐지만
그러던 대중들이 자기에게 등 돌리고 빌립을 따르게 되지.. 그는 쉽게 그 위치를 포기합니다.
이런 것을 보면, 시몬은 인간 사회속에서 형성되는
흐름과 경향을 굉장히 중요시 했던 사람이요. 사회에서 적응력이 아주 뛰어났던 것이죠.
그런 가운데 사람들로부터 주목받고 관심 받기 위한 수단으로 마술을 붙잡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즉 사회적 관심을 받는 방법으로 마술을 중시했던 사람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마술에 대한 선호도가 남달랐고, 마술사에 대한 존경심이 남다른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기사와 표적을 행하시는 빌립 집사님을, 자기보다 더 능한 마술사로 보면서
'큰 능력을 행하는 마술 세계의 탁월한 스승'으로서 모시고
그 빌립 집사님 밑에서 마술 능력을 전수받아 배우고자 했던 거예요.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빙자한 교양과 마술 이었습니다.
이 마술사 시몬의 관심은 바로 그것이었지, 참 기독교 신앙은 아니었어요.
중략
▲근데 오늘날 우리의 삶이, 우리의 믿음의 형태가
이렇게 마술사 시몬을 우리 조상으로 모셨던 시간들이
과거에 얼마나 길었던가요?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끔찍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가 시몬에게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도 없게 될 것이라'
무슨 말입니까? 예수 이름을 우리가 부르는 이유는
전적으로 세상을 탈출하는 데 있는 겁니다.
세상을 탈출(엑소더스) 해야만..
세상에 대해 내가 죽고,
세상의 좋음에 대해 내가 죽어서,
하나님의 좋으심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을 탈출하려는 생각이 추호도 없는 거예요.
대부분이 이 현실 세상 삶을 잘 살기 위하여, 어떤 수단으로 예수 이름을 받아들입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가, 이 마술사 시몬의 얘기를 여기 본문에 기록한 이유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싶은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자성의 차원에서, 자가진단의 차원에서
우리가 과거에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이 사실이 그리 새삼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누가가 본문을 기록하고 있는 당시 초대교회 상황에서는,
정말로 이상하고, 너무 특이하고,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것이라서.. 이렇게 특별히 기록한 것입니다.
어떻게 신자가, 이 세상을 탈출하는, 엑소더스(출애굽)하는 그런 마음을 갖지 않고
예수 이름을 그렇게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느냐? .. 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뒤로,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이 마술사 시몬의 영적 유전자를 내려받고 있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본문의 이 마술사 시몬의 기록이
지금 우리에게는 하나도 새삼스러울 게 없지만
사도행전의 당시로는, 정말 기가 막힐 일이 벌어졌던 겁니다.
베드로 사도나 요한 사도나 빌립 집사님이 볼 때,
아니, 정말 상상도 못 할 일이 벌어진 거예요.
어떻게 예수 이름을 부르면서, 마음이 세상에 머물기를 원하느냐?
유대인들이 예수 이름을 박해하는 것은 이해가 갑니다.
영화로운 하나님의 광채를 들여다 보고 싶은 마음도 없고
하나님은 어둠 속에 묻어 두고, 찬란한 세상만을 바라보고
세상만을 관계 하는 사람들인 유대교인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니 어떻게 예수 이름을 받아들인 사람이
자기 마음이 세상을 떠날 생각을 전혀 안 하고,
찬란한 세상을 더 얻기 위하여, 예수 이름을 이용해 먹으려고 생각을 하느냐?
놀랄 일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마술사 시몬 얘기가 사도행전에 기록된 것입니다.
그 후 2세기에 영지주의자 라는 이단들이 나타나는데
전설에 의하면, 이 영지주의가 바로 이 시몬의 계열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말도 있고
그리고 외경 중에 '베드로행전' 에서는
이 베드로와 시몬이 원수지간이 되었다는 그런 얘기도 있습니다만.. 확실한 얘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세상을 탈출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이
예수 이름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예수 이름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의 사회에서 경향성을 띄게 되자
즉 사회적 흐름(유행)이 되자
자기의 사회적인 품위를 더하기 위하여 교양 차원에서 예수 이름을 받아 들이는 일이 일어나고
-또 예수 이름을 통하여, 불가사의한 생각과 상상과 능력을 초월한 일들이
이 세상 삶에서 일어나기를 바래서, 예수 이름을 붙잡는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이런 방식은, 교회가 처음 생겨서 진행되고 있고
박해를 받아 흩어져서 말씀을 전하고 있던 이 초대교회 상황에서는
그야말로 불가사의할 정도로 상상도, 생각도 못했던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술사 시몬이 참으로 기가 막힌 것은
기독교 라는 '종교 religion' 의 역사를 만든..
실제로는 기독교 종교의 선조가 된 사람입니다. *참 신앙이 아닌 '종교'
복음의 조상은 아브라함입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봤다는 스데반 집사님의 해석을 통해서
아브라함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상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인자이신 예수님 안에서
영화로운 광채의 하나님을 보고 관계하는 사람들의 조상으로 자리매김을 굳건히 하게 됩니다.
근데 영광스러운 하나님과의 관계를 무시하고
이 세상 것을 열망하고 있는 마음으로 예수 이름을 하나 더 붙잡는 '그리스도 종교 religion',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회 가 아니라 '그리스도 종교'로서의 조상이
오늘 본문에 짜잔하고 나타난 것입니다. 종교로서의 기독교의 조상은 마술사 시몬!
오늘날 우리는 모두 처음 입교할 때에 (본문의 시몬처럼)
'기독교 종교인'으로 시작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 중에 누가 세례 받고 예수 이름을 부르고 회개한 뒤에
이 세상을 탈출할 것을 생각이나 하고 예수를 믿었습니까?
그러나 당시 사도행전의 상황에서는, 세상을 탈출 하지 않고 예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상상도 못 했던 거예요.
20~30년 전에, 우리 한국에서
세상을 버리고 떠날 것을 생각하면서 예수 이름을 믿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었고, 상상도 못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우리 이웃의 기독교인들 가운데, (마술사 시몬과 같은) '종교인'들이 허다합니다.
지금도 예배당을 다니고 있으면서도, 예수 믿음을 통하여 세상을 떠난다는 생각은
상상도 못 하고 있는 신자가 아주 많을 것입니다.
이런 신자들의 조상, 시초가 누구냐? 마술사 시몬입니다.
지금 편만하게 지구를 뒤덮고 있는 '기독교 종교인'들을 향한
본문의 베드로 사도의 말씀은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21
그렇게 신앙생활 함으로써 예수 이름을 통하여 얻게 될 것들을 위해
헌금도 하고, 충성도 하고, 봉사도 합니다. 헌신도 합니다.
그런 충성과 봉사와 함께 (시몬처럼) 망할 것이라는 겁니다!
'아 우리가 과거에 그런 사람(종교인)들이었지 않습니까?'
바로 마술사 시몬의 후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우리가 회복해야 됩니다.
무서운 일이지요!
그나마 뒤늦게나마 이렇게 깨달았다는 것이 다행입니다.
지금 너무나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함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