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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40:1~13 악인들 앞에서 다윗이 부른 노래

LNCK 2021. 6. 30. 17:16

 

◈악인들 앞에서 다윗이 부른 노래            시140:1~13           큐티 묵상 

 

시편 140~144편까지의 시들은 모두 <원수의 핍박에서 구원>을 호소하는 다윗의 시입니다.

시편 150편 중간 중간에도 이런 다윗의 시편인 탄원시가 등장합니다. .

시편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주제가 ‘탄원시’입니다.

 

◑악인들을 하나님께 고발하는 다윗   1~7절

 

다윗 주위에는 여러 악인들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자기를 늘 죽이려 했던 장인이자 모시는 상관이었던 사울 왕.

또한 도엑과 아히도벨 같은 악한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수많은 배신자들과 음모론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문제는, "왜 하나님은, 악인들이

다윗 주위에 포진하도록 허락하셨는가?" 하는 아주 원론적 질문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사울 주위에는 또 악인들이.. 성경에 많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악인들을 많이 만나게 하신다'는 명제가 성립됩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그런 '사람으로 인한 고난'을 성도에게 주시는 것일까요?

 

가장 원론적인 대답은 "성도의 신앙성장과 성숙을 위하여" 입니다.

사실 이런 시련을 많이 당했던 다윗은, 왕으로서 성군의 이미지로 자기 직무에 충실했으며

이런 시련을 거의 겪지 않았던 사울은, 왕으로서 학정과 포악을 일삼는 인물로 남았습니다.

 

백 번 좋게 얘기하자면, 사울이.. 다윗을 훌륭한 왕으로 키우기 위해서

스스로 '반면교사'가 되어준 셈입니다.   

 

성도들이 많이 오해하고 있는 아주 큰 위험한 사실 중 하나는,

'내가 죽어서 천국에 가기만 하면, 나는 저절로 변화되어 성자가 될 것이다!'

라는 막연한 기대감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을 마음으로 (지식적으로) 믿을 뿐

살아있을 동안에 '성화의 과정, 신앙성숙의 과정'을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막연하게 자기는 죽으면 무난히 천국에 들어갈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런 믿음의 오해를 주는 성경구절이 요한일서 3 :2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요일3 :2  

 

한 마디로 말하면,

'그가 나타나시면'.. 주님의 재림 때에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 우리가 예수님처럼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재림 때에, 내가 예수님처럼 변화되고, 성화될 터인데

뭐하러 일평생 사는 동안에 그 힘든 '성화의 과정, 연단의 과정'을 겪어야 하느냐..

이런 안일한 (잘못된) 신념을 가지고서, 성화와 신앙성숙의 과정에 관심이 1도 없습니다.

 

이것은 오해입니다. 먼저 위 구절의 본래 의미는,

주님이 재림하시면, 성도는 주님과 같은 부활체를 입는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체질이, 죽어서 썩어 없어지는 육체가 변하여, 영생하는 부활체가 된다는 뜻이죠.

 

그런데 우리의 오해는.. 그 때는 내 인격도,

짠~ 하고 예수님의 성품처럼 자동적으로 변화될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로봇' 으로도 만들지 않으셨고, '천사'로도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사람과 '인격적 사랑의 관계'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뉴스에 보니까, 요즘 '사람처럼 만든 성인로봇'이 나왔다고 합니다.

만약에 성도가 재림의 날에 짠~ 하고 주님의 인격을 닮은 자로 확 바뀐다면

그건 로봇이나 가능한 일이지, 인격을 가진 사람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그렇고, 사람들도 그렇고

조금 티격태격 하는 면이 있더라도, 사람 (인격)을 원하는 것이지

주인이 하는 명령에 백프로 순종하는 로봇을 원할 사람은 없고, 주님도 안 원하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일평생 '신부 수업'을 쌓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죄성, 전적 부패한 본성'이

마치 천지창조와 같은 기적적인 역사로, 내 속에서 거듭났습니다.

내 본성에 '새 생명'이 심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새 생명은 싹이 나고 자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신부 수업' 받으라고.. 하나님은 성도에게 종종 '악인들을 주위에 붙이시는' 겁니다.

본문의 다윗처럼, 악인들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억한 심정을 토로하며 기도하게 되고

악인들 때문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겸손하게 되고

또한 그들을 반면교사로 삼아서 '나는 저렇게 살면 안 되겠다' 하고 .. 성숙하는 것입니다.

 

제가 한 가지 중대한 걱정은, 

'만약 나의 나쁜 습관을, 이 세상에서 고치지 못하고.. 죽으면 어떻게 될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천국 심판대 앞에서 그에 대한 책망과 심판을 받겠지요.

그런데 운이 좋아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국에 남게 되었다고 할 때,

 

천국에서도 그 과거 지상에서의 우리의 못된 습관이 발동되어

거기서도 싸우고 헐뜯고 눈부라리고 속이고 거짓말하고 탐내고 미워하고.. 그러면

거기가 천국이 되겠습니까?

그러니 주님은, 아예 그런 사람은 천국에 못 들어가게 하신다는 것이죠.

입장부터 거절되는 겁니다. 천국이 천국 되려면, 그런 사람은 못 들어오게 해야 됩니다. 

 

그리고 신랑되신 주님은 순수한 innocent 신부를 원하시는데,

그런 순수하지 못한 사람이, 주님의 신부가 될 수 있을까요? 불꽃같은 눈을 가지셨는데!

턱도 없는... 언감생심 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다윗을 포함해서,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주님은 '신부 수업'을 시키십니다. 신부를 만들어서 결혼을 하시겠다는 것이죠.

 

그 신부수업에 가장 필수 코스가 '주위에 악인들을 포진'시키는 방법입니다.

또는 환경적 환란과 고난입니다. 대표적으로 사도바울이 많이 받았죠. 

   

그래서 그 과정을 통과 안한 성자는 없습니다.

야곱 요셉 모세 사무엘 다윗 등등

만약에 통과 안한 특혜를 받는 사람이 있다면.. 사울 왕처럼 됩니다! 

처음에는 기름부음을 받아도.. 나중에 버림 받습니다. 

 

 

◑악인들에 대한 다윗의 저주시    9~13절 

 

시편의 ‘저주시’에는 두 가지 측면을 담고 있습니다.

 

▲1. 하나는, 악담이요 자기 마음의 불편함, 억울함의 토로이겠지만

또 하나는, 악인들에 대한 연민을 담고 있습니다.

 

악인들이 장차 그 행한 악독으로 인해 당하게 될 끔찍한 결과에 대해

예언적으로 ‘이러할 것이다’라고 미리 말해 주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연민’입니다.

무조건 미워해서 억한 심정을 토로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저들이 거지가 되게 하고, 자녀들이 걸식하게 해 달라’고 저주시가 선포한다면

그들이 장차 그렇게 될 것에 대한 염려와 연민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말이나 표현은 겉으로 쎄게 하지만, 겉바속촉(겉은 바삭하지만 속은 촉촉)처럼

그 속에는 그 악인들이 장차 당하게 될 비참한 결과에 대한 염려와 연민이 담긴 것이죠.

 

9 나를 에워싸는 자들이 그들의 머리를 들 때에 그들의 입술의 재난이

그들을 덮게 하소서

 

10 뜨거운 숯불이 그들 위에 떨어지게 하시며

불 가운데와 깊은 웅덩이에 그들로 하여금 빠져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소서

 

11 악담하는 자는 세상에서 굳게 서지 못하며 포악한 자는 재앙이 따라서 패망하게 하리이다

 

▲2. 이 저주는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며,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저주시는, 어떤 악담과 저주를 퍼붓는 것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공의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억울한 실상을 낱낱이 고해바치면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12~13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12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

 

13 진실로 의인들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들이 주의 앞에서 살리이다

 

그 공의의 하나님의 심판을 부탁하는 (합당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이런 저주시의 내용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 탄원시의 최종은 원수로부터의 승리나 감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것에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원수의 악행과 같은 거짓된 삶을 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원수 앞에 행하신 하나님의 정의가 계속해서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기 위해서

이제 우리가 주 앞에서 살면서 우리 또한 정의를 실천하며 살아갈 것에 대한

믿음의 실천과 다짐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