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주만 나의 분깃이십니다 시142:1~7 큐티묵상
오늘 본문의 표제어가 <다윗이 굴에 있을 때에 지은 마스길 곧 기도>입니다.
‘마스길’은 ‘교훈’이라는 뜻입니다. 주1)
‘인생의 동굴에 있을 때’, 즉 ‘인생에서 환난을 만날 때’에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것이 지혜로운 해결책임을 교훈하여 주는 시라는 의미입니다.
◑환란을 당해서 불평과 비판이 나올 상황에서, 기도가 나온 다윗 1~3절
1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2 내가 내 원통함을 그의 앞에 토로하며 내 우환을 그의 앞에 진술하는도다
3 내 영이 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
내가 가는 길에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올무를 숨겼나이다
지금 다윗은 표제어에 ‘굴에 있을 때 드린 기도’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굴에 침대가 있습니까, 먹을 게 있습니까, 화장실이 변변합니까,
정말 불평과 불만이 가득 터져나올.. 폭발하기 직전 임계점에 도달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신기하게도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기도하라고.. 하나님은 성도에게 환란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끝까지 기도하지 않고, 대신에 불평, 원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기도가 터져나올 때까지, 곡소리가 나올 때까지.. 하나님은 환란을 더 주셔요!
성도가 가는 길에는 환란이 있습니다. 평탄한 길이 아닙니다.
그때는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무조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곳곳에, 환란을 당하면 기도하라는 내용이
거듭, 거듭 반복해서 나옵니다. 수 십~ 수백 구절이 나올 것입니다.
시편 118:5절에는,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광활한 곳에 세우셨도다"
고통이 있을 때에 기도해야 합니다. 고난을 당할 때 기도해야 합니다.
시편 116:1~4절,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저를 사랑하는도다.
그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음부의 고통이 내게 미치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시편 107:13절,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 얽은 줄을 끊으셨도다"
기도하면 이렇게 나를 얽어맨 줄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사람은, 비판을 안 하게 되고
비판하는 사람은 기도를 안 하게 됩니다.
저도 과거에는 얼마나 이 사회를 비판했는지 모릅니다.
제가 목회 초년기를 돌아보면 처음 십여 년 동안은
교회와 사회를 비판하는 설교를 주로 했습니다.
신문을 보세요. 전부 비판할 거리만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기도 안 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흐름에 물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지도자들을 비판하고, 정치 지도자들을 비판하고,
사회를 비판하고.. 그 당시 저는 몽땅 설교가 비판하는 쪽으로 갔어요..
그러니까 또 그런 사람들만 만나게 됩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셈이 되는 거죠.
그러던 어느 날, 제가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너는 무슨 일을 했냐? 너는 한국 교회를 비판하면서
네가 한국 교회를 위해서 한 일은 무엇이냐?
너는 이 나라를 비판하면서 이 나라를 위해서 한 일이 뭐냐?'하시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비판하는 사람은 비판만 하지..
자기가 나라를 위해서 한 가지도 일은 못하는 것입니다.
목사도 기도하지 않는 목사들 열 명이 모이면, 여덟 명은 비판하는 쪽으로 갑니다.
여러분, 끝없는 이러한 유혹 속에서, 비판하면서 이 세상을 허무하게 끝내지 말고
그 비판할 제목들을, 기도의 제목으로 바꾸어.. 다윗처럼, 주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오는 이런 어려움은 하나님께서 '기도하라' 고 하시는 사인입니다.
기도의 칼로리, 기도의 영양이 부족할 때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동이 빨리 와야 돼요.
'아 내가 집사인데 요사이 너무 기도하지 않았더니 가정에 어려움이 있나 보다!'
이렇게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도하도록 몰아붙이시는 거예요.
※유력한 가문도.. 기도 안 하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갑니다. 주2)
▲존 번연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다 악하기 때문에 죄를 지을 소지가 너무 많다.
기도하는 사람은 죄를 멈추게 되고,
죄를 짓는 사람은 기도를 멈추게 된다.’
놀라운 통찰력입니다.
죄를 짓기 시작하면 기도가 안 나오고, 자연스럽게 기도를 안 하게 됩니다.
꼭 죄를 안 지어도 우리에게 재밋는 일이 너무 많으면 기도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하기 시작하면 죄를 멈출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다윗은 지금 악에 받혀 있고, 무슨 일을 벌일지 모릅니다.
그만큼 다급하고 급박한 상황에 몰려 있다.
정말 살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그가 동굴에서 기도함으로써 죄를 이기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성화의 길을 멈추지 않는 다윗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어렵고 힘들지라도, 기도의 자리에 붙들려 있어야 하는 까닭은
그렇지 않으면 나락의 길, 타락의 길, 추락의 길로
급속히 빨려들 듯이 내리막 길로 떨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비탈길에 세워놓은 수레바퀴의 쇄기(바퀴의 미끄럼 방지 버팀목)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걸 빼는 순간, 수레는 비탈길 아래로 굴러떨어져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추락해 가는 인생에 더 이상 추락을 멈추게 하는
기도의 쇄기를 박아넣는 기도를.. 오늘도 멈추지 말아야 됩니다.
기도를 멈추면 우리는 한없이 타락하고 말 것입니다.
자기 본성대로, 성질대로 살게 됩니다.
여러분, 신앙인은 말씀과 기도가 이끄는 삶을 삽니다.
내 정욕이 이끄는 삶도 아니요
내 생각이 이끌어가는 삶도 아니요
내 생각과 대치되고, 내 경험과 맞지 않아도
그 분의 말씀을 따라서, 그 분의 말씀을 기억하며 그렇게 기도하며 살아가는 삶
그게 신앙인의 삶입니다.
◑오직 주만 나의 피난처요 분깃이 되십니다 4~7절
4절에 ‘오른쪽을 살펴보소서
나를 아는 이도 없고 나의 피난처도 없고 내 영혼을 돌보는 이도 없나이다’
성경에서 ‘오른쪽’, ‘오른손’ 등은 ‘힘 또는 능력’을 뜻합니다.
자기를 정말 힘있게 도와 줄 이는.. 아무도 없고, 어느 것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5절,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오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분깃’은 ‘할당’, ‘몫’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땅을 분배할 때에
레위 자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분깃과 기업이 되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에
땅을 기업으로 받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아무리 사방을 둘러봐도 피할 곳, 피난처는 오직 유일하게 하나님이시며,
혹 모든 것을 잃어서 빈털터리가 된다 할지라도 결코 빼앗길 수 없는 것,
유일한 분깃(몫)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6절에 ‘그들은 나보다 강하니이다’
여러분, 가인의 후예가 아벨의 후예보다 약했던 적은 없습니다.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제단을 쌓는 사람들보다 약했던 적은 없습니다.
이 땅에 문명을 건설하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자들보다 언제나 강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부르짖어 기도할 때, 성도가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7절,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
주께서 나에게 갚아 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
자신이 물리적으로 감옥에 갇혀 있지는 않지만,
감옥 속에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장의 별칭이 ‘감옥에서 드리는 기도’, ‘버림받은 사람의 호소’입니다.
결국 기도하는 사람은, 옥에 갇힌 것 같은 혼자라는 느낌을 받을지라도
곧 '의인들이 나를 두르는' 환경으로 인도될 것을.. 그는 자기 스스로에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적용 / 주는 나의 <분깃>이시라 시142:5
‘분깃’은 영어로는 portion, 히브리어는 ‘헬렉’이다.
한글로 다른 말로 표현하면 ‘몫’이고,
의미를 더 확장하면 ‘유산’이란 뜻과도 연결된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몫’이란 의미에서 ‘유산’과 동의어이다.
이 단어는 구약에서 창세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부터 광범위하게 63회 사용되었다.
그런데 오경에 보면,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분깃’을 받지 못했다.
땅분배에서 자기 몫을 받지 못한 것이다.
대신에 하나님은, 다소 의아한 말씀을 이렇게 하신다.
‘여호와 내가 너희의 분깃이니라!’
▲그래서 레위인이나 제사장은 분깃(땅 분배)을 받지 못했고,
대신에 ‘여호와’를 분깃으로 받은 구절을 아래에서 5~6구절 찾아보았다.
민18 :20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에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
신10 :9 ‘그러므로 레위는 그의 형제 중에 <분깃>이 없으며 기업이 없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 같이 여호와가 그의 기업이시니라’
신12 :12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음이니라’
위 구절들에서 ‘분깃’과 ‘기업’이 동의어처럼 쓰였다.
뜻은 각기 다르지만, 의미 면에서 동일한데
‘하나님이 주시는 몫 또는 유산’이란 뜻이다.
수14 :4 ‘레위 사람에게 아무 <분깃>도 주지 아니하고
다만 거주할 성읍들과 가축과 재산을 위한 목초지만 주었으니’
레위 사람들에게는 ‘땅’을 분배해주지 않았고, 그들은 12지파 중에 흩어져서
즉 분산 배치되어서 12지파 가운데서 일부 거주할 성읍과 목초지만 분배받았다.
수18 :7 ‘레위 사람은 너희 중에 <분깃>이 없나니
여호와의 제사장 직분이 그들의 기업이 됨이며’
시119 :57 이 시편의 저자가 누군지 알 수 없으나, 레위인이었을 것이다.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시니 나는 주의 말씀을 지키리라 하였나이다’
시73 :26 레위인 아삽의 고백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그런데 <다윗>이 레위인이나 제사장을 질투한 것일까? 물론 아니다.
다윗은 유다지파이면서, 레위인이나 제사장이 하는 고백을 하고 있다.
즉 ‘여호와가 나의 분깃이시다’는 고백이다. 시편에 아래 두 구절이 나온다.
시16 :5 다윗의 고백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히 ‘헬렉’
시142 :5 다윗의 고백
‘여호와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여호와가 나의 ‘분깃’이라는 말의 의미
♬ Father you are my portion in this life
(아버지 내 삶의 모든 것 되신 주) 라는 복음성가가 있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 것도 바라는 게 없고,
오직 하나님 만이 나의 이 세상에서의 분깃이요, 기업이시오
내 유산이시며, 내 기쁨이요 모든 것이 되신다는 아주 철저한 헌신의 고백이다.
예를 들면, ‘사업’이 나의 분깃이다.. 라고 믿으며 사는 사람이 있다.
그는 사업이 잘 되면.. 기뻐하고
반대로 사업이 시원찮으면.. 슬퍼하고 괴로워한다.
하나님이 아니라, 사업이 자기의 분깃이요, 모든 것이 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또 예를 들면 ‘자녀’가 자기 분깃이요, 유산이라고 여기고 사는 성도도 있다.
그는 자녀가 잘 풀리면.. 주님이 자기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느끼고
자녀가 안 풀리면.. 주님이 자기를 버리시는 것처럼 느낀다.
이런 사람은, 자녀가 자기 사랑이요, 자기 우상이 된 사람이다. (사업도 마찬가지!)
입술로는 기독교를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사실은 ‘자녀교’를 믿는 사람이다.
그는 자녀를 잘 되게 해달라는 목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사업 - 자녀 외에도 건강 – 배우자 – 연인 – 명예 – 직장 .. 다 마찬가지다.
성도의 본분은, 다윗과 마찬가지로,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분깃입니다’ 라고 고백한다.
영어 찬송으로 ‘♬ Father you are my portion in this life’를 부른다.
이런 성도는
사업이 잘 되든지 / 시원찮든지 .. 거기에 따라 기분이 달라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시23편에서 다윗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고백했는데,
사업과 자녀가 잘 될 때만.. 그 고백을 드렸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여호와를 자기 분깃, 기업으로 삼는 사람은,
1년 365일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왜냐면, 사업이나 자녀는.. 잘 풀릴 때가 있으면, 반대로 잘 안 풀릴 때도 있다.
그러나 여호와는.. 언제나 변함이 없으시다.
나를 사랑하실 때도 있고, 나를 버리실 때도 있고..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성숙한 성도는, '여호와를 자기 분깃이요, 기업으로 삼고
여호와로 인하여 만족하는 삶을 늘 연습해 나가야' 함이 필요하다..
어떤 사람은 '나는 레위인도 아니요, 제사장도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호와만 나의 기업이 아니다. 그래서는 못 산다,
나는 세상 기업도 필요하다..' 이렇게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신약의 새언약의 성도는, 기본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의 모든 세상 분깃들이 다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베드로는 '너희는 왕같은 제사장이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다윗이 참으로 훌륭한 점은,
자기는 레위인도, 제사장도 아니면서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시요, 그래서 나는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정말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삶을.. 늘 추구했던 것이다.
그러니 솔로몬에게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다윗에게도 하나님은, 그의 위 throne 를 영원히 견고케 하셨다.
오늘 내가 만약 기분이 우울하고 시무룩하고 다운 됐다면
하나님 때문에 기분이 우울해졌는가?
결코 그럴 리는 없다. 하나님은 언제나 나를 변함 없이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럼 오늘 내가 만약 기분이 우울하고 시무룩하고 다운 됐다면
뭔가 나의 ‘우상’이 삐걱거리고 문제가 생긴 것이다.
-사업이 잘 안 된다든지
-자녀가 속을 썩인다든지
-직장의 승진에서 누락되었다든지
-그 외 나의 우상이 잘 풀리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 나의 분깃’이 되지 않은 사람이다.
대신에 ‘사업 – 자녀 – 직장 – 우상이 나의 분깃’이 된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나의 기쁨 또는 슬픔의 근거가 무엇인지 자세히 살펴봐야 된다.
내가 사업 – 자녀 – 직장 – 건강 등의 문제로 기뻐하거나 슬퍼한다면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다’ 라는 고백을 드릴 수 없는 사람이다.
본문에 다윗이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니라’고 고백한 것은, 시142:5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기쁨의 근원이시다.. 라는 고백이다.
내가 사업 – 자녀 – 직장 – 건강 등의 문제로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자기가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근거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 한 분 때문이라는 고백이다.
예를 들면, 아주 귀한 진주 하나를 발견한 사람은
다른 자잘한 보석 여러 개가 있거나 / 없거나 그것으로 일희일비 하지 않는다.
가장 귀한 값진 보석 진주 하나를 가졌기 때문이다.
오늘날 나의 기쁨의 근거, 또는 슬퍼함의 근거가,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 때문인가, 아니면 세상 것들 때문인가?
만약 세상 것들 때문에 기뻐날뛰거나 슬퍼 풀이 죽어있다면
‘♬ Father you are my portion in this life’ 이런 찬송을 부르든지
‘생명 주께 있네, 능력 주께 있네, 소망 주께 있네 주께 있네♬’ 이런 찬송을 부르든지
다윗 같은 신앙으로 빨리 자기 트랙을 되찾아서 돌아와야 한다.
오늘날 철저히 헌신된 성도와, 그저 명목상의 성도는 이렇게 구분이 선명해 진다.
내 기쁨과 힘과 소망의 근거를 '여호와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성도와,
그것만 갖고는 안 되고 '그래도 사업, 자녀, 건강, 명예도 있어야 된다. 그래야 기쁘다'
하는 성도로 명확히 구분된다. '그게 없으면 슬프다. 아무 살 소망이 없다' 이렇게 나온다.
다윗처럼 살 수 있는 길을 자기 스스로 포기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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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본 시편의 제목이 다윗이 굴에 있을 때에 지은 마스길이라고 합니다.
마스길이란 말은 성경에서 ‘생각한다(시 64:9)’
‘깨닫는다(신 32:29, 사 41:20, 단 9:13,25)’는 말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마스길이라고 제목을 붙인 것은 이 시가 교훈적 시라는 말입니다.
시편에 다윗이 ‘굴에 (피하여) 있을 때’라고 표제어가 붙은 시편은 2편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142과 시편 57편입니다.
다윗이 자신의 주군이자 장인인 사울왕에게서 오해와 모함을 받아 도망을 다닐 때에
숨었던 굴 2개가 성경에 나타납니다. 하나는 아둘람 지역에 있는 굴(사무엘상 22장)이고
또 하나는 엔게디 광야에 있던 굴(사무엘상 24장)입니다.
오늘 본문은 아둘람 굴에 있을 때에 지은 것으로 보입니다.
주2)
1999년 7월에, 제가 이번에 미국에 가서 집회를 하는 동안에 보니까
미국의 모든 뉴스와 전 국민의 관심과 시선이
존 F 케네디 대통령 아들 부부가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한 데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얼마나 충격이 큰지 국민들이 울면서 줄을 지어 꽃을 가져다 놓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맨하탄에도 그렇고 온 나라가 그러는 거예요. 제가 참 감동을 많이 받았어요.
‘미국은 케네디 대통령은 돌아가셨지만 아직도 그렇게 그 대통령을 사랑하는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케네디 가문은 전 국민이 사랑하고
이렇게 명예도 있고, 돈도 어마어마하게 많고, 권력이 몰려 있는 하나의 왕국이라는 거예요.
그 가문에서 대통령이 나오고, 상원의원이 몇 명 나오고,
대통령에 출마한 분도 몇 분이고.. 이런데도
그 가정에 재앙을 막을 수 없다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왜 케네디 가에는 악마의 저주가 떠나지 않는가요?
지난 수십년 사이에 연속적인 재앙이 있었습니다.
그 거대한 권력을 가진 가문이 이것을 못 막아내는 거예요.
이 가정에는 재앙이 그치지를 않아요.
9남매 였는데 지금 막내아들 하나만 남고 다 죽었어요.
첫 아들은 29세에 비행기에서 떨어져 죽고,
케네디 대통령은 46세에 총에 맞아 죽고,
그 다음 동생은 41세에 법무부 장관 하던 그 케네디는 또 총에 맞아 죽고,
그 아래에도 마약 복용하다가 자살해 죽고,
손자들도 자꾸 그렇게 죽고
이번에 케네디 2세 부부가 또 그렇게 비행기 사고로 떠났습니다.
사람에게 닥치는 재앙이 있습니 다. 저주가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다 막아낼 것 같으면 누가 하나님을 믿겠어요.
그 큰 권력을 가진 가문이, 그 저주를 못 막아내는 거예요.
오직 기도하는 사람만이, 그런 저주를 막아낼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