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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20:30 사교집단적 기독교 cult 의 특징 / 잭 푸닌, 정리

LNCK 2021. 7. 4. 17:23

 

◈사교집단적 기독교 cult 의 특징              행20:30, 행17:11                      출처, 정리

The Marks Of Cultism 잭 푸닌

 

※cult를 한국어로 번역하기가 참 까다롭습니다.

‘이단’이라고 하면, 원래 heresy 인데, 이건 삼위일체도 부정하고,

성경의 유일성도 부정하는 이단을 뜻합니다. 몰몬교나 여호와의 증인 등이죠.

 

cult는 기독교적인 요소를 거의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정통적 신앙을 벗어난 ‘사교私敎집단적 기독교’의 특성을 유지합니다.

 

그 외 ‘유사기독교 pseudo-Christianity (사이비)’ 라는 말도 있습니다.


여기서는 ‘사교私敎집단적 기독교’에 의미가 가장 가까우므로

cult를 줄여서 ‘사교집단’으로 번역하겠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공공성 (호환성)을 부정하고, 자기들만의 어떤 특색있는 기독교 신앙을

형성하는 것을 뜻합니다.

..............................................................................

 

골2:18~19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행20:30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사교집단’이 된다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어떤 특정한 사람이나 그 교리에 자신을 헌신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을 위해 초막(성막)을 지을 뿐만 아니라

    '엘리야'와 '모세'를 위한 초막(성막)도 함께 만드는 것에 비유됩니다. 마17:1~8

    초막은 오직 주님만 위해서 지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이것은 항상 하나님의 임재를 ‘숨기는’ 구름을 가져옵니다.

    원래 임재의 구름은, 주님을 드러내는 구름인데,

    ‘사교집단’은 구름(신비)을 통해, 주님을 자꾸 가립니다.

    그리고 교주나 자기 교리 등, 다른 것을 자꾸 신비하게 드러내려 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과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 한 분께만 있습니다.

    그런데 ‘사교집단’의 특징은, 그 외 다른 것을 그리스도와 함께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가 희미해 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는 기독교 국가들에서 ‘사교집단’이 증가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먹이가 될 것입니다.

    왜냐면 그들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을 강조하지 않고,

    주님의 사자(사교집단의 머리)를 더욱 경배하라고 유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위험으로부터 피하기 위해서는, 사교주의 cultism의 특징을 알면 좋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항상 그것을 경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사교적인지 / 아닌지를 판단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먼저 우리 자신에게 사교적인 요소는 없는지.. 스스로 검진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 자신과 우리 주위의 교회들이 노골적으로 ‘사교주의’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사교주의란, 기독교 신앙을 자기 개인이 멋대로 규정해서 이끌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 주위의 교회들은 대부분 다 기본적으로 성경의 바탕 위에서

    경건한 신앙을 가진 지도자들에 의해서 이끌어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중에 한 두 가지, 또는 일부 요소에 있어서

    사교주의 cultism 적 특색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고,

    이 글은 그 점을 주의하자는 것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교리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교리는 다 건전하고 성경적입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태도, 우리 삶의 행위에 있어서는 ‘사교주의적 cultistic’이 될 수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럼 우리 삶 가운데, 한 두 가지 있을 수 있는 사교주의적 특징을

    아래에서 구체적으로 살펴 보겠습니다.

     

    ▲1. 그리스도 플러스 또 다른 사람

    Christ Plus Another Man

     

    사교주의의 가장 우선되는 특징은, 그리스도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람인 지도자를 높이 존경하는데, (보통은 그 교단의 창시자)

    그래서 그의 삶이 완전하고 그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말씀과 동등하다고 간주됩니다.

    인간을 신성시 (신격화) 하는 것이죠.

     

    성경은 베뢰아인들을 ‘고상한 사람들이라서 바울의 가르침이 성경적인지 확인하기 위해

    매일 성경을 읽으며 조사했다’고 했습니다. 행17:11

     

    바울은, 의문을 제기할 수 없는 정도의 권위를 가진 당대의 위대한 사도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조차도, 베뢰아 교인들은 매일 성경을 확인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을 신성시하지 않았고, 그리스도처럼 높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고전14 :29절에 ‘한 사람이 예언하면, 다른 사람은 반드시 분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의 예언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인가? ..를 분별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정통 기독교는 서로 서로를 검증합니다. 그런 분위기가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이단이나 사교집단은, 그런 검증 과정이 없든지, 그런 시스템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도자의 가르침이나 삶이 검증되지도 않고 ‘다 옳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단이나 사교집단의 가장 큰 특징이자, 정통 교회의 가장 큰 보호책이 됩니다.

     

    그래서 사교집단의 신자들은, 그들의 지도자를 너무 존경한 나머지

    (기적을 행한다든지 존경받을 만한 남다른 뭐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 지도자의 가르침을, 아무 검증도 없이 무조건 다 받아들여 버립니다.

    또 그렇게 하도록 분위기를 이끌어갑니다.

     

    이런 사교집단에서, 창립자가 사망한 후 일반적으로 후임자가 리더십을 이어받아

    그룹의 대표로 인정받습니다. 그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룹의 모든 구성원은, 현재의 지도자를 신성시, 신격화 합니다.

    그가 현재 살아있는 모든 하나님의 종들 중에 가장 위대한 종으로 인정하고 추종합니다.

    그렇게 사람을 신격화 하는 중에, 그리스도가 자꾸 가리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의 태도’의 결과는

    (‘교리’는, 자기들이 성경적 교리를 따른다고 표방하므로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러한 지도자의 권위와 가르침에 의문의 여지가 없는 무조건 복종으로 이어집니다.

    그룹의 모든 구성원에 대한 그 지도자의 권위는

    마치 교황의 말만큼 절대적이며 그의 말은 곧 법이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지도자를, 마치 그리스도의 권위만큼 높이고 존경하는 것은

    (마땅히 교회 지도자들은 존경을 받아야 하지만, 그게 도를 넘어 맹목적이 되면)

    이단이나 사교집단의 특징이 되며,

     

    지금 현재는 정통 기독교라 하더라도,

    점차적으로 사교집단으로 빠져가는 과정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2. 성경 말고 또 다른 책을 강조함

    The Bible Plus Another Book

     

    이단주의의 두 번째 표시는, 절대 오류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는 성경 외에

    또 강조되는 한 권의 책이 있다는 것입니다. 보통은 그 그룹의 리더가 쓴 책입니다.

    그 책이 마치 성경적 권위를 가진 것처럼 강조됩니다.

     

    물론 공식적으로, 또는 교리적으로는 그런 주장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삶의 태도, 행위에 있어서는

    그들의 교주를 신성시 할 뿐만 아니라, 그 교주가 쓴 책도 아주 신성시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만이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천명하면서도

    실제 생활에 있어서는, 그들 교주의 책을 더 많이 인용하고,

    그 책의 내용이 틀린 것이 없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외부 사람들이 보기엔, 그 책이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가진 것처럼 보이는 거죠.

     

    그런데 사교집단이 형성되는 초기 단계에서는 보통 아주 뜨겁고 열정적입니다.

    처음부터 잘못되지는 않았고, 오히려 처음부터는 아주 열심이 특심했었습니다.

    주님께 대한 신실함과 진정한 헌신이 다른 교회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많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도자 (설립자) 자신도 남달리 아주 경건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는 과정에서

    그런 경건한 지도자들이 점점 우상화되면서 변질되기 시작하고,

    그의 글과 가르침이 문서화되면서, 마치 성경과 동일한 권위로 높이 간주되어지면서부터

    삐걱거리면서 사교집단화 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사교집단으로 출발하지 않고,

    처음에는 아주 열심있는 기독교 집단이었다는 거죠.

    그런 열심이 없었으면, 사교집단으로 빠질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고립되어 있으니,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고,

    또한 점점 신격화, 우상화 되어지는 과정에서

    처음에 그 열심있던 신앙이 사교집단화로 서서히 변질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 변천과정이 너무나 서서히 느리게 일어나기 때문에, 스스로 잘 깨닫지 못하는 거죠.

     

    따라서 설립자의 개인적인 의견은, 추종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 (교단) 설립자가 진정 경건한 사람이라면,

    그는 사는 평생동안 그러한 일(우상화)이 일어나도록 결코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단 설립자가 서서히 교만해지면서, 수많은 따르는 무리들의 열광 속에서

    그는 점점 자신의 말에 대해 신적인 권위를 주장할 것입니다.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마저도, 자기 말이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권위를 가진다고 믿는 것이죠.

     

    수만 명이 은혜받았다 그러고, 수많은 기적이 일어나고 그러면

    지도자가 스스로 속기 쉽습니다.

    처음엔 남들이 환호해도, 자기는 스스로 보통 사람으로 생각했었는데,

    그런 일이 반복해서 일어나는 과정에서,

    나중엔 자기 스스로도, 자기를 특별한 존재로 여깁니다.

     

    이때 사교집단 교인들은 설립자가 쓴 한 권의 책을, 읽고 또 읽고 또 다시 읽습니다.

    그의 설교도 듣고, 또 듣고, 다시 반복해서 듣습니다. (다른 설교는 안 듣습니다.)

     

    그래서 그 교인들이 모이는 미팅에서는

    교인들이 그 설립자(지도자)의 말을 자주 인용하는데,

    ‘우리 목사님이 그때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식으로, 종종 인용하죠.

    그런데 그게 마치 성경을 인용하는 것처럼, 자주 인용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특징들이 나타나면 ‘그 교회가 점점 사교집단화 cultistic 되고 있다’는 증거이죠.

     

    예를 들면, 종말론 같은 성경교리에 여러 갈래의 해석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교집단화 되면, 다른 교리나 해석은 일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직 그 교주가 해석한 방식만 진리인 것처럼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그 교회가 ‘점점 사교집단화 cultistic 되고 있다’는 증거이죠.

    점점 자신도 모르게 세뇌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방식이, 아주 협소해 집니다.

    이런 사람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가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자기 마음속에 ‘견고한 진’이 딱 생겨 버리거든요.

     

    이들은 예수님을 믿고, 정통 기독교와 비슷한 신앙을 가지기 때문에

    ‘이단 heresy’으로 보기엔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는, 이렇게 이단은 아니지만

    그의 기독교 신앙이 ‘사교집단화’ 되기는 아주 쉽습니다.

    혹시 나는 그렇지 않는지요?

     

    만약 로마가톨릭 사제들이 신도들에게, 오직 로마가톨릭 신학이 해석하는 방식으로만

    성경이 해석되어져야 한다고 가르친다면.. 사교주의에 빠질 위험성이 대단히 큽니다.

    똑같은 위험이 일부 개신교 교단에서도 있을 수 있습니다.

     

    ▲3. 교제의 배타성, 단절성

    Exclusiveness In Fellowship

     

    교회나 모임이 사교집단화 되면, 점점 외부와의 교제가 차단되고 단절됩니다.

    이들 신자들은, 자기들의 가르침이 더 영적이고 우월하다고 믿기 때문에

    바깥의 다른 일반 교회 신자들과의 교제를 스스로 단절하기도 하고,

    다른 일반 교회에서도 그들과 교제를 멀리하게 되면서.. 점점 더 고립적이 됩니다.

     

    그리고 그런 교제의 단절을, 교단 자체적으로 장려하기도 합니다.

    전도할 목적이 아니라면, 다른 교회 신자들과 만나지 말라고 권합니다.

    그런데 뭐든지 고립적이 되면.. 잘못된 길로 빠질 가능성이 점점 더 높아집니다.

     

    그래서 교회 자체적으로, 다른 교회나 교인들과 교제를 끊도록 유도하는데

    그건 자기들 교리나 신학의 우월성을 장려하는 목적이기도 하지만

    즉 자기들이 성경을 더 잘 가르친다, 자기들의 해석이 더 올바르다고 말들을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들을 스스로 지키려는 방어적 자세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자기 교단의 교리적 순수성 내지 우월성을 내세우는 것은 필요하겠지만

    그것이 ‘우리 교단의 교리만 진리다. 다른 것은 모두 비정통, 비진리이다’의

    배타적 자세로 나아가면 안 됩니다.

     

    뭐든지 자기 교단, 자기들 교리, 자기들 신학.. 이것만 배타적으로 강조하고 나아간다면

    현재는 몰라도, 앞으로는 점점 더 사교집단화 될 가능성이 큽니다.

     

    다른 신자, 다른 교회, 다른 신학과 교제가 단절되면 단절될수록,

    그런 교제의 단절은 ‘사교주의’의 특징이며

    스스로 속을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자기들이 가장 고상하므로,, 외부와 교제를 단절하는데, 나중에는 결국

    자기들이 가장 이상해져 버릴 가능성이 높은 것입니다.

     

    (사도신경에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라는 대목이 있는데,

    우리는 ‘다른 교회’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과 필요시 교제를 통해서, 온전한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해 나가야 합니다.

    뭐든지 ‘우리만 옳다’는 식으로 배타주의로 나아간다면,

    사실 나중에 ‘우리만 틀릴’ 가능성이 아주 높아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에큐메니즘(무조건 교회통합 운동)이나 신앙적 타협을 장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바벨론 제도하에 있는 많은 신자들과 함께 일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제도적(=교파적) 연합, 제도적(=교파적) 교제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도나 교파에 관계 없이 모든 성도를과의 교제를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항상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과 교제 할 수 있도록

    열려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친히 누군가를 받아들이셨다면,

    우리는 그의 교파나 신학과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를 거절할 권리는 없습니다. 눅9:49~50

     

    바울과 바나바는 반드시 같은 팀에서 함께 일하지 않고도

    개인적으로 서로 함께 교제할 수 있는 좋은 예입니다. 행15 :36~41

     

    그들은 어떤 문제에 대해 서로 강력하게 다른 견해를 나타냈고,

    그래서 더 이상 함께 사역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은 서로 교제를 끊거나,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지만 따로 일했으며

    의심할 여지없이 서로를 위해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교주의자들은 그러한 교제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전적으로 복종하는 사람들과 만 교제할 수 있습니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