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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03편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시

LNCK 2021. 8. 11. 11:51

[하루 한 장] 시편103편_내 영혼아 송축하라 - YouTube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시                시103:1~22                 출처, 정리

 

◑서론 / 시103편은 하나님을 송축하는 ‘송축장’으로 불립니다.

송축하다(바라크)란 말이 5번 나옵니다; 1, 2, 20, 21, 22절.

 

특히 서두 1~2절에, 또한 끝인 20~22절에 ‘송축’이 나오기 때문에

‘송축장’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주1) '송축이란?

 

▲문단 구분

-개인이 송축 (1~5절)

시인 다윗이 하나님을 송축합니다.

 

-민족이 송축 (6~18절)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해서 증거(송축)합니다.

 

-하늘이 송축 (19~22절)

하나님을 향한 송축은, 이 땅에서만이 아니라 하늘에 까지 확대가 됩니다.

 

그래서 시103편은 시편 기자가 자기 자신에게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말하면서 시작해서

하늘의 천군 천사들과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가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만물들에게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설교하면서 끝마칩니다.


시편 103편은 굉장히 유명한 시편 입니다. 
시편 103편에서 참 많은 찬송이 씌어졌습니다. 
역사적으로 가장 사랑받은 시편 가운데 하나입니다. 

왜 그럴까요? 시편 103편이 어떤 내용이기에
과연 다윗은 어떤 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하는 고백을 했기에
이것이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시편 가운데 하나가 되었는지.. 살펴보기 원합니다.

 
◑1절,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여러분 지금까지 시편은 주로 뭐라고 시작하느냐면 "하나님이여, 여호와여, 지존자여!"
이렇게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시100편에서 한번 확 바뀌는데, '온 땅이여!' 이렇게 시작합니다. 100:1

앞서는 '찬송 받으실 분, 기도회 대상이신 하나님'을 먼저 부르고 시편을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100편에서 '온 땅이여 (여기에는 만민도 포함됩니다)' 로 
처음 부르는 대상이 변화되었습니다.

여러분 기독교를 둘로 나누면 천주교 개신교 인데요, 
천주교는 신부님들이 강단 앞쪽을 바라보고 있어요. 회중을 등지고 있죠.
왜냐면 하나님이 강단 앞쪽에 계신다고 가정하고 미사를 집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개신교는 목회자가 성도를 쳐다보고 섭니다.
여러분 이것은 굉장히 큰 변화입니다. 

종교개혁을 통해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나면, 
'우리가 다 같이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하면서
예배 시간 내내 회중이 사제의 등만 쳐다보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그런 예배를 1천년이 넘게 드린 거예요. 

그러다가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목회자들이 회중 쪽을 바라보고 서게 됩니다. 
왜냐면 우리가 <하나님>중심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만 
그러나 그 예배를 드리는 <회중들의 대한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중심해서 예배하지만, 더불어 우리의 삶이 달라져야 되고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삶 가운데서 실제로 살아내야 되기 때문입니다. 

근데 그 동안은, 성도의 삶에는 관심이 없었어요. 오직 하나님만 예배! 
그러니까 미사 시간에도 라틴어로 미사를 인도했습니다. (최근에 자국어로 다 바뀌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관심가지고, 회중에게는 관심이 미미했기 때문이었지요.

그리고 오래동안 가톨릭은 라틴어 성경을 고집하고, 종교개혁 이전까지는, 
자국어로 성경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교회 벽에 성화를 그려 놓고, 그 그림으로 하나님을 알고      *동방정교
조각상으로 하나님을 알고 
그냥 어깨너머 들려오는 말로 하나님을 알게 되니까 
그동안 (종교개혁 이전) 하나님에 대해서 굉장히 왜곡된 모습을 가지고 있었어요. 

근데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목사님들이 성도들을 바라보고 
자국어로 설교하고, 자국어로 성경을 번역하고, 그 성경을 각자 읽으라고 퍼트렸어요. 

이때부터 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 하는 것을, 
각자가 나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나기 시작한 겁니다.
이건 굉장히 큰 변화였어요. 

시편 중에서도, 그래서 이런 변화가 시작되는 변곡점이 100편입니다.
'온 땅이여~' 이렇게 시작하죠. 

그동안 계속 '하나님이여, 주여!' 하다가 확 바뀌면서 
마치 그동안 등을 보이던 신부님이 뒤돌아서면서 회중들을 향해서 예배를 인도하듯이

시 100편은 '온 땅(만민)이여 하나님을 찬양 하십시오!' 이렇게 외칩니다.

마치 여러분, 찬양대 지휘자가 찬양대를 지휘하다가
갑자기 휙 등을 돌려서 온 회중을 지휘할 때가 있습니다. 
그건 회중들과 다 함께 찬양하자는 얘기입니다.
그러면 성가대 만의 찬양이 아니라, 온 회중과 함께 찬양하게 됩니다.

그 변화가 100편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근데 오늘 본문 103편은 또 한 번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그 하나님을 찬양하는 회중들,
온 땅 가운데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마음을 열고 
가장 모든 것을 동원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가 누구냐? 
바로 "내 영혼아" 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영혼들 말고, 모든 영혼들 말고
바로 "나의 영혼, 내 영혼"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1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이 1절은 굉장한 변혁입니다. 그야말로 종교개혁적인 변혁이에요. 
그동안은 찬양받으실 <하나님>에게만 주목해 오던 시편이
이제 <우리 영혼>을 주목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1절 한 마디로, 인간에 대한 인문학이 시작되는 거예요. 
1절 이 한 마디를 통해서, '그럼 인간이 뭐가 그렇게 중요한데?' 라는 질문이 시작되었어요.

그 이전에는, 인간은 티끌이었어요.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인간은, 그냥 미천한 죄인일 뿐 인간에게 관심이 없었어요. 

그런데 그 인간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이제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얼마나 존귀한 인간인가!

즉 찬양받을 대상인 <하나님> 뿐만 아니라 
찬양하는 <나>에 대한 관심이 시작된 거예요. 

여러분, 이때부터가 인간의 존귀함과 인간의 가치가 재조명되었던 것이에요. 
그래서 103편은 역사적인 변혁의 변곡점이고
그래서 103편이 유명한 시편, 가치있는 시편으로 인정받았고요
이 시편을 통해서 어마어마하게 많은 찬양이 지어진 거예요.                                    주2) 


◑2절,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1절에 이어 또 반복됩니다.
여러분, 이 반복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시'라는 장르는, 말을 줄여가는 장르에요. 
소설이나 산문처럼 말을 늘려가는 장르가 아니예요.
얼마나 말을 잘 줄이느냐 가 시인의 실력이에요. 

그런데 다윗이 실력이 없어서 똑같은 말을 반복해서 할까요? No!
그럼 2절에서 왜 반복 할까요? 하나님이 너무 좋아서요! 

너무 이건 찬양하지 않으면, 송축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내가 가질 수가 없어요. 
너무 너무 좋고, 하지 않을 수 없어서.. 지금 다윗은 2절에서 또 반복하는 거예요.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은택'이란 말은, 우리가 쉽게 '하나님이 해 주신 좋은 일들 benefits' 이라고 해석해요. 

그런데 원어로 보면, 이 말에는 좋은 일만 있는 게 아니에요. 
여기에는 힘든 일도 들어가요. 
괴롭고 눈물 났던 일도 포함되요. 

그 모든 것을 '은택'으로 고백하는 거예요. 
여기에 다윗의 위대함이 있어요.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려면, 좋은 기억만 가지고는 찬양 못 해요. 
때로는 어렵고 힘들고 쫓기고, 내 마음이 어디로 갈지 몰라 방황하던 시간까지 포함해서 
그 모든 것을 주의 은택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일을 하나님이 하셨다' 라고 고백하는 거예요. 

찬양은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그래서 찬양은, 내가 힘들었던 건 빼고, 싫었던 것 말고, 
내가 기분 좋았던 것만, 행복했던 것만 끌어모아서 찬양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돌아보니, 내 모든 지난 날이 하나님의 은택이었습니다' 라는 고백이 찬양인 거예요. 

▲그런데 '내 영혼아, 내 영혼아'라며 계속 내 영혼을 지금 지적해서 말하는 이유가 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가 중요해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 뭐예요?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가 뭐예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가 뭐예요?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유가 뭐예요? .. 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어요? 

여러분의 자녀가, 또는 어린 손주가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 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어요? 
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어요? 왜 예수님이 죽으셨죠?
왜 예수님이 부활 했어요? 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죠?' 라고 말하면 뭐라고 하시겠어요? 
그 답이 3~5절에 나와 있습니다.

◑3~5절,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계속 반복되는 말이 있어요. 뭘까요? 
'네 You' 입니다.

'바로 네 죄를 사하시고 그래! 
네 모든 병을 고치시려고 그래!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그래!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고, 
네 청춘을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려고 그러신 거야! 
바로 너를 위해서 그러셨어!' (위 어린아이의 질문에 대한 답변)

이것은 굉장히 충격적인 말이예요. 
여러분 하나님이 뭐가 아쉬워서 우리를 그렇게 생각해 주세요? 
그럴 이유가 없잖아요. 

오늘 날은 '인권'이 굉장히 발달했습니다. 사람 한 명을 굉장히 귀하게 봐요. 
그런데 이 성경이 기록되던 고대 근동 시대에서는, 사람의 '인권'이란 없었어요. 전무했어요.

위대한 신 앞에 인간은 다 쓸어 죽여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무지렁이 같은 존재가 인간이었어요.
그런데 그 시대에 신 앞에서 인간을 이렇게 귀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종교에선 찾아볼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3~5절을 읽으면서 여기 '네 모든 죄악을, 네 모든 병을, 네 생명을, 네 소원을, 네 청춘을' 

정말 하나하나 따라 오셔서, 하나하나 찾아보시고 
하나하나 들춰보시고, 하나 하나 이루어주시고, 하나 하나 체크해가면서 확인하시는 
우리의 모든 것을 챙겨 주시는 그 하나님이 보여서 
이건 그저 좋은 게 아니고요, 떨리더라고요. 

'아 내가 이런 관심을 받을만한 존재인가, 
하나님이 정말 이렇게까지 하실 정도로 내가 하나님 앞에 의미있는 사람인가? 내가 뭔데?'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나님은 이 시간에도 우리 영혼에게 말씀하세요. 
'내가 너를 이렇게 생각해, 내가 너를 이 정도로 생각해! 너 몰랐지?' 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한번 (3~5절로) 놀래켜 주시는 거예요.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처럼 새롭게 날게 하시는 분,  
그 분이 하나님이세요! 

▲그리고 이 말씀은, 동시에 우리의 영혼에게 해 줘야 될 말입니다.
우리 영혼이 얼마나 아픈지 아세요? 얼마나 지쳐 있는지 아세요? 

우리가 어제 102편에서 봤잖아요. 
'나의 괴로운 날에, 내가 부르짖는 날에..' 
우리의 영혼은 괴롭고, 부르짖고 있어요. 너무 힘들고 답이 없어요. 

102편에서 '나는 부엉이 같다, 나는 올빼미 같다, 나는 외로운 참새 같다' 
'정말 온몸이 다 부르트고, 재가 돼 버렸고' 꼼짝달싹 할 수 없는 우리의 영혼이 상태가
102편에 나와 있잖아요. 

그 102편의 영혼에게, 지금 103편은 말씀하는 거예요. 
'내 영혼아 너 지금 힘들고 지치고 지금 죽겠지? 
그런데 하나님은 너를 사랑하시고, 하나님은 너를 지금 바라보시고 
하나님은 네가 새로워지길 바라시고,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셔!' 

근데 이 말씀을 내가 나에게 해 주어야 해요.
이거 굉장히 중요한 말이에요. 

우리는 남들이 나를 인정해주기를 원해요. 
남들이 나를 기분 좋게 해주고, 남들이 나를 존중해 주기를 원해요.
그래서 '왜 나를 인정하지 않느냐고, 왜 나를 존중하지 않느냐?'고 가족끼리도 싸워요. 

그런데, 내가 나를 존중하지 않는데, 
내가 나를 위로하지 않는데, 
내가 나를 품어 안지 않는데.. 과연 누가 나를 품어 안아 줄까요? 

내 자존감이 땅바닥을 치고 있는데
과연 그것을 누가 끌어올려 줄 수 있을까요? 

내가 먼저 나를 사랑해야 됩니다. 
내가 먼저 나를 북돋아 줘야 됩니다. 
그러기에 본문 103편은 굉장히 훌륭한 시편 입니다.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4
'속량'은 돈을 주고 샀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서, 노예이던 자를, 값을 치르고 풀어줘서, 자기 소유로 삼아주신 것이죠.

근데 이것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실제로 불가능합니다.
왜냐면, 내 생명의 값이 너무 비싸니까요. 너무 비싸서 살 사람이 없어요. 

영적으로 우리의 속량의 값이 얼마입니까? '내 생명'입니다. 
자기 생명을 줘야지 내 생명을 살 수 있는데, 그걸 누가 낼 수 있겠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예수님이 지불해 주셨어요. 

그래서 우리의 생명의 가치가 이제 얼마가 되었습니까?
예수님의 생명 가치만큼 되어버린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거죠. 

이렇게 해서 '내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그 다음에는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신다' 

관을 씌운다는 말은 대관식이죠. 왕으로 만들어주신다는 겁니다. 더 나아가

▲5절,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여기서 '소원'은 히브리 원문에 '입'이라고 되어 있어요.       *'에디' mouth, 또는 ornament(장신구)
우리의 입은 또는 세상 소원은.. 만족을 몰라요. 

아무리 맛있는 걸 먹어도, 아무리 비싼 것으로 치장을 해도 
공허감이 더 커지지.. 만족하지는 못합니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그런 세상 것으로 만족하도록..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근데 본문은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좋은 것은 히브리어로 '토브'인데,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번역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인간의 것으로는, 우리가 아무리 먹어도, 아무리 가져도.. 만족을 못 해요.
더 좋은 명품, 더 비싼 것을 사준다고 만족이 되는 게 아니고요, 
'하나님의 선하심'이 내게 임할 때만.. 우리 영혼이 만족해요.

그래서 만족된 결과는 무엇입니까? '내 청춘을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청춘같은 인생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매일 새롭게 되기 때문입니다. 


◑6절, '여호와께서 공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억압 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심판하시는도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은 힘들고 괴로워도 기다리십시오! 
하나님이 반드시 공의로 심판해 주실 것입니다. 억압 당하는 자들을 위하여!

◑7~8절, 그의 행위를 모세에게, 그의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그의 행위를 모세에게,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다' 이거 무슨 말일까요? 
바로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모세오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려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모세오경>의 기록을 통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또 알려주었죠.

그 오경의 내용, 그 알려주신 하나님의 성품은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살펴볼 104편, 105편, 106편에는 모세오경의 내용이 나옵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5가지 책의 내용이 
시 104편 105편 106 편에 그대로 축약적으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얼마나 성경에 능통했던 사람인가를 알 수 있어요. 
모세오경의 내용을, 다윗이 자신의 해석으로, 자신이 압축해서 묘사하는데 
쉽게 말해서 '압축 성경'입니다.  모세오경의 압축 성경이 바로 시편 104편 105편 106편입니다. 

그래서 103편 8절은 너무나 많은 작곡가들에게 감흥을 주었고, 
너무나 많은 작사가들에게게, 너무나 많은 성악가들에게 
너무나 많은 찬양대들에게,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을 향한 모티브를 제공한 바로 그 시편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하나님께만 주목하던 시편이 (103편에서부터)
이제 어느덧 우리 자신도 (하나님을 주목함과 더불어) 돌아보게 하는 것입니다... 

 

▲8절,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다윗은 이 구절을 출34:6절에서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출34: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근데 여러분, 위 출34:6절 말씀이 선포되었던 역사적 배경이 뭔가요?

어떤 사건 이후에, 위 말씀이 선포되었느냐면, 바로 금송아지 숭배사건 직후입니다.

 

시내산 아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더디 내려올 때

자기들이 갖고 있던 장신구를 모아서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우상숭배 했습니다.

 

산에서 내려 온 모세는 그 패역한 상황을 보고서 노해서

가지고 왔던 십계명 돌판을 던져서 깨뜨려 버립니다. 언약이 깨어짐을 상징하죠.

 

그래서 백성들은 하루에 3천명이 죽게 되는 징계를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금송아지를 섬기던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다시 두 번째 돌판을 주시던 상황이 출34장입니다.

 

죽어도 마땅한 그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돌이키시고 용서하신 하나님!

하늘의 법정에 앉아 계신 분이 아니라

바로 그 엉망진창인 회중들 가운데 살아계시고,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실 때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출34: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다윗은 본문 8절에서 그 구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백성들이 패역하고, 하나님을 진노케 하더라도

(그들을 징계하신 후에)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시고, 자비롭고, 은혜를 베푸신다는 뜻입니다.

          

◑13절,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여러분, 부모가 자식이 잘 되라고, 어린 자녀가 잘못했을 때 혼을 내다가도 
그 자녀가 엄마 아빠를 두려워하게 되는 것을 느꼈다면 
그러면 부모 마음은 그게 더 아픈 거예요.
 
자녀가 잘못한 것도 문제지만, 엄마 아빠가 무섭다고 느끼는 것은 더 심각한 거지요. 
그러면 엄마 아빠는 반드시 회초리를 내려놓고, 무서워 하는 아이를 달래주게 됩니다. 
'엄마 아빠는 너를 미워서 그런 거 아니야, 너를 사랑해!' 

당연히 그렇지요. 엄마 아빠가 무서워 하는 그런 모습을 보고 
자기 자녀를 가엽게 여기지 않을 부모가 누가 있겠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그렇게 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두려워하세요. 
오늘 여러분 중에 이렇게 하나님께 예배 드리러 나오셨는데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이 과도하게 두려워한다면... 하나님이 그걸 염려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지금, 하나님을 두렵게 생각하는 나를 가엽게 여기시겠구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14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이 말씀도 너무나 위로가 돼요.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원래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 아십니다.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잘 아십니다.

우리를 흙으로 지으셨어요. 우리는 그냥 흙에 불과해요. 
잘난 것도 없고, 몸도 약하고, 의지도 약하고, 늘 하는 것마다 늘 실수하고 실패하고.. 
우리가 그런 존재예요. 하나님이 우리를 그런 존재로 알고 계세요. 
그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몰라요. 

우리가 잘못했을 때, 우리가 실수했을 때, 우리가 넘어졌을 때 
우리가 애초에 그런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 인정하고 계세요. 
이미 받아들이셨어요. 

이 사실을 여러분이 정말 아멘으로 여러분도 받으셔야 돼요. 

내가 뭔가 제대로 하지 못 했을 때 
하나님은 나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17~18절,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
곧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해요.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자에게는 찬송이 항상 있어요. 
그래서 여러분이 항상 찬송을 점검하고 살아야 되요.

본문 103 편에는 '찬송하라'는 말이 7 번 나옵니다.


◑19절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도다

그런데 왜 나는 그 하나님을 모르고 한 주간을 그냥 그렇게 사는 거지요? 
하나님이 천지를 다스리시고 창조하시고 통치 하신다면 
나는 왜 그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거지요? 

이상한 거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만드신 작은 피조물 중에 하나인 태양을 
우리 맨눈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까? 눈부셔서 못 봅니다.
그렇다면 천지를 지으신 크신 하나님을 어떻게 눈으로 보겠다고 합니까? 
애초에 우리에게는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전혀 모르게 계시는 하나님도 아니십니다.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게 하십니다.

맨눈으로는 하나님을 뵐 수가 없지만 
믿음의 눈으로 지금도 나와 함께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마지막에 20~22절에, 다시 한번 '찬송하라'고 3번 거듭 말씀합니다. 

20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행하며 
그의 말씀의 소리를 듣는 여호와의 천사들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21 그에게 수종들며 그의 뜻을 행하는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22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가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구원받은 성도는, 항상 여러분 안에 찬송이 있는지를 점검하고 살아야 됩니다. 
내 마음으로부터 터져나오는 진심어린 찬송이 있는가? 이건 생명과 같은 일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때때로 찬양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너무 힘드니까, 너무 어려우니까! 
그런 때도 어떻게 찬양할 수 있겠어요? 

여러분 절대 속으면 안 됩니다. 
힘들고 어려워서 찬송이 안 나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렸기 때문에!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찬송이 그친 것입니다.
힘들고 어렵다고 찬송이 그친 게 아닙니다. 

성도는 어려움을 이기는 방법이 찬송입니다. 
찬송하면서 성도는 반드시 일어납니다. 
삶이 어려워서 찬송 못 하는 거 아니에요. 
어려울 때 그때 찬송을 놓치면, 길이 없어요. 어려움에서 일어날 수 있는 길이 없어요. 

편안할 때도 찬송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편안하고, 부족함 없고, 모든 일 잘되고.. 
그러면 당연히 감사하고 찬송만 하면서 살 것 같은데.. 실제로는 정반대입니다. 

차라리 어려울 때 찬송하는 사람이 더 많아요. 
편안할 때, 부족함이 없을 때, 여유가 있을 때, 
오히려 찬송이 내 속에서 사라져버리는 일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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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송축’이란 말의 뜻 *히브리어 ‘바라크, 영어 bless

이 시편은 놀라울 정도로 여호와를 송축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바락’은 ‘무릎을 꿇다, 경의를 표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글로 ‘송축’은, ‘칭송하고 축복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축복은 항상 ‘하나님이 인간에게 빌어주시는 것’으로만 알고 있기에,

인간이 하나님을 송축(축복)하는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만,

가장 쉽게 이해하자면 ‘찬양한다’의 비슷한 말이다.. 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송축하다’의 더 자세한 의미는 아래와 같습니다.

 

1) 하나님이 주어가 되실 때 ‘송축 - 바라크’의 뜻은 ‘복을 빌어주시다’입니다.

성경에는 사람이 하나님을 ‘칭송하다 (바라크)’, 즉 좋은 말을 하고, 찬양할 때도 씁니다.


본문 시103:1절과 2절에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했습니다.

20, 21, 22절에도 ‘천사들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했는데.. 같은 뜻입니다.

 

우리가 잘 부르는 복음성가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하라’

이 노래도 본문 시103:1절에서 따온 것으로서 ‘송축하라 내 영혼아’ 라는 뜻입니다.

 

2) 그런가 하면, 또 다른 뜻이 있는데 바로

‘무릎을 꿇다’, ‘낙타의 무릎을 꿇게 하다’ 등입니다. *히필

 

‘나를 낙타처럼 겸손히 낮추고 무릎을 꿇을 때 (바라크)

하나님만을 진심으로 높여드릴 때 하나님의 복이 임한다(바라크)’

 

여기서 깨닫게 되는 사실이 있습니다.

 

다윗의 탁월한 찬송 능력이 어디서 왔을까 하는 겁니다.

그 출발은 철저한 자기 겸손(바라크)인 겁니다.

 

하나님 앞에 낙타 무릎(바라크)의 인생인 겁니다.

그렇게 자신을 낮추는 삶을 살았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택하여 기름 부으시고

놀라운 축복(바라크)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복이 다윗의 삶에서 너무나 실제적(3-19절)이었기에

다윗은 그가 경험한 하나님의 축복(바라크)에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송(바라크)하는 것으로 연결했습니다.

 

자기를 낮추고(바라크) 하나님을 높였더니(바라크)

하나님이 복 주셔서(바라크) 그의 삶에 감사와 찬양(바라크)이 넘치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 삶에도 ‘바라크’의 은혜가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는 것입니다.

 

날마다, 매 순간, 그곳이 어디든지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릴 때

하나님이 그의 삶을 축복하십니다. 붙드십니다. 은혜와 사랑으로 인도하십니다.

 

​오늘도 언약의 말씀 붙들고 겸손히 무릎 꿇은 나를 통해

하나님께서 가정과 일터, 학업의 현장, 내가 속한 곳 어디든지

귀한 축복을 허락하심을 믿습니다.

 

 

 

주2)

여러분, 존 스티븐슨 성경학자가, 본문 1절을 읽고 너무 감동했어요. 
'그렇지! 내 영혼이 주를 찬양 해야지, 내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주를 찬양 해야지!' 
그래서 그걸 이렇게 역동적으로 풀어놨어요. 

'내 속에 있는 (모든) 것들아' 이 한 마디를 어떻게 표현했냐면 
내 양심으로 변함없이 신실하신 주님을 송축하라 
내 판단력으로 주의 말씀에 합당하게 송축하라 
내 상상력으로 거룩한 묵상을 통해 그 분을 송축하라 
내 감정으로 주님의 사랑 하시는 모든 것을 사랑하며 송축하라 
내 기억력으로 주의 은총을 하나도 잊지 말고 송축하라 
내 생각으로 주에 탁월하심을 묵상하며 송축하라 
내 소망으로 주의 영광을 기대하며 송축하라 
내 모든 감각들로 주를 송축하며 
내 모든 말과 행실로 신실하게 주를 송축하라' 

우리 속에는, 의식적인 부분도 있고요/ 무의식적인 부분도 있고요 
우리 속에는 옛날에 받은 상처도 있고요/ 앞날의 비전도 있고요 
과거를 살아온 나도 있고요/ 현재를 살아가는 나도 있잖아요.
내 속엔 참 여러 '내'가 있잖아요. 

그런데 그 여러 가지 '내'가, 살다 보면 서로 부딪치고요, 서로 상처를 주고요. 
서로 아파 할 때가 많아요. (내가 내를 상처줌)

근데 그 내 속에 있는 그 모든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나와
앞으로 미래에 살아갈 내가 
다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지점'에서 만나는 거예요. 

그 지점이 어디냐? 
바로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은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이 한 마디 안에,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향하여 새로워지는 시점이 새롭게 출발하는 겁니다. 


▲여러분, 오늘 어떻게 하루 시작하셨어요? 한번 자신을 돌아보세요. 

어떻게 눈을 뜨며, 어떻게 이 하루를 시작하셨어요? 
여러분 이 103편은 하루를 시작하는데 굉장히 좋은 시편입니다. 

비록 내가 어제 많은 일들을 겪었지만 
비록 내가 밤새 많은 뒤척임이 있었지만 
내가 오늘을 시작하면서, 두려움과 떨림과 약간의 설레임이 있지만 
이것들을 가지고 어떻게 하루를 살아갈까?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은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여러분, 이 한 마디의 시편은 우리의 삶의 자세를 바꿀 것입니다. 
우리 삶의 내용을 바꿀 것입니다. 

어떻게든 내 것을, 어떻게든 내 이름을, 
어떻게든 내 소유를 늘려가는 것이 유일한 목적인 이 시대를 살아가는 때 
우리의 삶이 더 가치있어지고, 더 규모있어지고
더 품격있어지는 하나의 방법은 
이 시편을 우리 아침의 시편으로 삼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그렇게 찬양하는, 송축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