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장] 시편103편_내 영혼아 송축하라 - YouTube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시 시103:1~22 출처, 정리
◑서론 / 시103편은 하나님을 송축하는 ‘송축장’으로 불립니다.
송축하다(바라크)란 말이 5번 나옵니다; 1, 2, 20, 21, 22절.
특히 서두 1~2절에, 또한 끝인 20~22절에 ‘송축’이 나오기 때문에
‘송축장’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주1) '송축이란?
▲문단 구분
-개인이 송축 (1~5절)
시인 다윗이 하나님을 송축합니다.
-민족이 송축 (6~18절)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해서 증거(송축)합니다.
-하늘이 송축 (19~22절)
하나님을 향한 송축은, 이 땅에서만이 아니라 하늘에 까지 확대가 됩니다.
그래서 시103편은 시편 기자가 자기 자신에게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말하면서 시작해서
하늘의 천군 천사들과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가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만물들에게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설교하면서 끝마칩니다.
시편 103편은 굉장히 유명한 시편 입니다.
시편 103편에서 참 많은 찬송이 씌어졌습니다.
역사적으로 가장 사랑받은 시편 가운데 하나입니다.
왜 그럴까요? 시편 103편이 어떤 내용이기에
과연 다윗은 어떤 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하는 고백을 했기에
이것이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시편 가운데 하나가 되었는지.. 살펴보기 원합니다.
◑1절,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여러분 지금까지 시편은 주로 뭐라고 시작하느냐면 "하나님이여, 여호와여, 지존자여!"
이렇게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시100편에서 한번 확 바뀌는데, '온 땅이여!' 이렇게 시작합니다. 100:1
앞서는 '찬송 받으실 분, 기도회 대상이신 하나님'을 먼저 부르고 시편을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100편에서 '온 땅이여 (여기에는 만민도 포함됩니다)' 로
처음 부르는 대상이 변화되었습니다.
여러분 기독교를 둘로 나누면 천주교 개신교 인데요,
천주교는 신부님들이 강단 앞쪽을 바라보고 있어요. 회중을 등지고 있죠.
왜냐면 하나님이 강단 앞쪽에 계신다고 가정하고 미사를 집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개신교는 목회자가 성도를 쳐다보고 섭니다.
여러분 이것은 굉장히 큰 변화입니다.
종교개혁을 통해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나면,
'우리가 다 같이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하면서
예배 시간 내내 회중이 사제의 등만 쳐다보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그런 예배를 1천년이 넘게 드린 거예요.
그러다가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목회자들이 회중 쪽을 바라보고 서게 됩니다.
왜냐면 우리가 <하나님>중심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만
그러나 그 예배를 드리는 <회중들의 대한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중심해서 예배하지만, 더불어 우리의 삶이 달라져야 되고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삶 가운데서 실제로 살아내야 되기 때문입니다.
근데 그 동안은, 성도의 삶에는 관심이 없었어요. 오직 하나님만 예배!
그러니까 미사 시간에도 라틴어로 미사를 인도했습니다. (최근에 자국어로 다 바뀌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관심가지고, 회중에게는 관심이 미미했기 때문이었지요.
그리고 오래동안 가톨릭은 라틴어 성경을 고집하고, 종교개혁 이전까지는,
자국어로 성경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교회 벽에 성화를 그려 놓고, 그 그림으로 하나님을 알고 *동방정교
조각상으로 하나님을 알고
그냥 어깨너머 들려오는 말로 하나님을 알게 되니까
그동안 (종교개혁 이전) 하나님에 대해서 굉장히 왜곡된 모습을 가지고 있었어요.
근데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목사님들이 성도들을 바라보고
자국어로 설교하고, 자국어로 성경을 번역하고, 그 성경을 각자 읽으라고 퍼트렸어요.
이때부터 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 하는 것을,
각자가 나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나기 시작한 겁니다.
이건 굉장히 큰 변화였어요.
시편 중에서도, 그래서 이런 변화가 시작되는 변곡점이 100편입니다.
'온 땅이여~' 이렇게 시작하죠.
그동안 계속 '하나님이여, 주여!' 하다가 확 바뀌면서
마치 그동안 등을 보이던 신부님이 뒤돌아서면서 회중들을 향해서 예배를 인도하듯이
시 100편은 '온 땅(만민)이여 하나님을 찬양 하십시오!' 이렇게 외칩니다.
마치 여러분, 찬양대 지휘자가 찬양대를 지휘하다가
갑자기 휙 등을 돌려서 온 회중을 지휘할 때가 있습니다.
그건 회중들과 다 함께 찬양하자는 얘기입니다.
그러면 성가대 만의 찬양이 아니라, 온 회중과 함께 찬양하게 됩니다.
그 변화가 100편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근데 오늘 본문 103편은 또 한 번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그 하나님을 찬양하는 회중들,
온 땅 가운데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마음을 열고
가장 모든 것을 동원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가 누구냐?
바로 "내 영혼아" 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영혼들 말고, 모든 영혼들 말고
바로 "나의 영혼, 내 영혼"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1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이 1절은 굉장한 변혁입니다. 그야말로 종교개혁적인 변혁이에요.
그동안은 찬양받으실 <하나님>에게만 주목해 오던 시편이
이제 <우리 영혼>을 주목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1절 한 마디로, 인간에 대한 인문학이 시작되는 거예요.
1절 이 한 마디를 통해서, '그럼 인간이 뭐가 그렇게 중요한데?' 라는 질문이 시작되었어요.
그 이전에는, 인간은 티끌이었어요.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인간은, 그냥 미천한 죄인일 뿐 인간에게 관심이 없었어요.
그런데 그 인간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이제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얼마나 존귀한 인간인가!
즉 찬양받을 대상인 <하나님> 뿐만 아니라
찬양하는 <나>에 대한 관심이 시작된 거예요.
여러분, 이때부터가 인간의 존귀함과 인간의 가치가 재조명되었던 것이에요.
그래서 103편은 역사적인 변혁의 변곡점이고
그래서 103편이 유명한 시편, 가치있는 시편으로 인정받았고요
이 시편을 통해서 어마어마하게 많은 찬양이 지어진 거예요. 주2)
◑2절,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1절에 이어 또 반복됩니다.
여러분, 이 반복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시'라는 장르는, 말을 줄여가는 장르에요.
소설이나 산문처럼 말을 늘려가는 장르가 아니예요.
얼마나 말을 잘 줄이느냐 가 시인의 실력이에요.
그런데 다윗이 실력이 없어서 똑같은 말을 반복해서 할까요? No!
그럼 2절에서 왜 반복 할까요? 하나님이 너무 좋아서요!
너무 이건 찬양하지 않으면, 송축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내가 가질 수가 없어요.
너무 너무 좋고, 하지 않을 수 없어서.. 지금 다윗은 2절에서 또 반복하는 거예요.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은택'이란 말은, 우리가 쉽게 '하나님이 해 주신 좋은 일들 benefits' 이라고 해석해요.
그런데 원어로 보면, 이 말에는 좋은 일만 있는 게 아니에요.
여기에는 힘든 일도 들어가요.
괴롭고 눈물 났던 일도 포함되요.
그 모든 것을 '은택'으로 고백하는 거예요.
여기에 다윗의 위대함이 있어요.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려면, 좋은 기억만 가지고는 찬양 못 해요.
때로는 어렵고 힘들고 쫓기고, 내 마음이 어디로 갈지 몰라 방황하던 시간까지 포함해서
그 모든 것을 주의 은택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일을 하나님이 하셨다' 라고 고백하는 거예요.
찬양은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그래서 찬양은, 내가 힘들었던 건 빼고, 싫었던 것 말고,
내가 기분 좋았던 것만, 행복했던 것만 끌어모아서 찬양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돌아보니, 내 모든 지난 날이 하나님의 은택이었습니다' 라는 고백이 찬양인 거예요.
▲그런데 '내 영혼아, 내 영혼아'라며 계속 내 영혼을 지금 지적해서 말하는 이유가 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가 중요해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 뭐예요?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가 뭐예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가 뭐예요?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유가 뭐예요? .. 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어요?
여러분의 자녀가, 또는 어린 손주가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 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어요?
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어요? 왜 예수님이 죽으셨죠?
왜 예수님이 부활 했어요? 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죠?' 라고 말하면 뭐라고 하시겠어요?
그 답이 3~5절에 나와 있습니다.
◑3~5절,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계속 반복되는 말이 있어요. 뭘까요?
'네 You' 입니다.
'바로 네 죄를 사하시고 그래!
네 모든 병을 고치시려고 그래!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그래!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고,
네 청춘을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려고 그러신 거야!
바로 너를 위해서 그러셨어!' (위 어린아이의 질문에 대한 답변)
이것은 굉장히 충격적인 말이예요.
여러분 하나님이 뭐가 아쉬워서 우리를 그렇게 생각해 주세요?
그럴 이유가 없잖아요.
오늘 날은 '인권'이 굉장히 발달했습니다. 사람 한 명을 굉장히 귀하게 봐요.
그런데 이 성경이 기록되던 고대 근동 시대에서는, 사람의 '인권'이란 없었어요. 전무했어요.
위대한 신 앞에 인간은 다 쓸어 죽여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무지렁이 같은 존재가 인간이었어요.
그런데 그 시대에 신 앞에서 인간을 이렇게 귀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종교에선 찾아볼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3~5절을 읽으면서 여기 '네 모든 죄악을, 네 모든 병을, 네 생명을, 네 소원을, 네 청춘을'
정말 하나하나 따라 오셔서, 하나하나 찾아보시고
하나하나 들춰보시고, 하나 하나 이루어주시고, 하나 하나 체크해가면서 확인하시는
우리의 모든 것을 챙겨 주시는 그 하나님이 보여서
이건 그저 좋은 게 아니고요, 떨리더라고요.
'아 내가 이런 관심을 받을만한 존재인가,
하나님이 정말 이렇게까지 하실 정도로 내가 하나님 앞에 의미있는 사람인가? 내가 뭔데?'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나님은 이 시간에도 우리 영혼에게 말씀하세요.
'내가 너를 이렇게 생각해, 내가 너를 이 정도로 생각해! 너 몰랐지?' 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한번 (3~5절로) 놀래켜 주시는 거예요.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처럼 새롭게 날게 하시는 분,
그 분이 하나님이세요!
▲그리고 이 말씀은, 동시에 우리의 영혼에게 해 줘야 될 말입니다.
우리 영혼이 얼마나 아픈지 아세요? 얼마나 지쳐 있는지 아세요?
우리가 어제 102편에서 봤잖아요.
'나의 괴로운 날에, 내가 부르짖는 날에..'
우리의 영혼은 괴롭고, 부르짖고 있어요. 너무 힘들고 답이 없어요.
102편에서 '나는 부엉이 같다, 나는 올빼미 같다, 나는 외로운 참새 같다'
'정말 온몸이 다 부르트고, 재가 돼 버렸고' 꼼짝달싹 할 수 없는 우리의 영혼이 상태가
102편에 나와 있잖아요.
그 102편의 영혼에게, 지금 103편은 말씀하는 거예요.
'내 영혼아 너 지금 힘들고 지치고 지금 죽겠지?
그런데 하나님은 너를 사랑하시고, 하나님은 너를 지금 바라보시고
하나님은 네가 새로워지길 바라시고,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셔!'
근데 이 말씀을 내가 나에게 해 주어야 해요.
이거 굉장히 중요한 말이에요.
우리는 남들이 나를 인정해주기를 원해요.
남들이 나를 기분 좋게 해주고, 남들이 나를 존중해 주기를 원해요.
그래서 '왜 나를 인정하지 않느냐고, 왜 나를 존중하지 않느냐?'고 가족끼리도 싸워요.
그런데, 내가 나를 존중하지 않는데,
내가 나를 위로하지 않는데,
내가 나를 품어 안지 않는데.. 과연 누가 나를 품어 안아 줄까요?
내 자존감이 땅바닥을 치고 있는데
과연 그것을 누가 끌어올려 줄 수 있을까요?
내가 먼저 나를 사랑해야 됩니다.
내가 먼저 나를 북돋아 줘야 됩니다.
그러기에 본문 103편은 굉장히 훌륭한 시편 입니다.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4
'속량'은 돈을 주고 샀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서, 노예이던 자를, 값을 치르고 풀어줘서, 자기 소유로 삼아주신 것이죠.
근데 이것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실제로 불가능합니다.
왜냐면, 내 생명의 값이 너무 비싸니까요. 너무 비싸서 살 사람이 없어요.
영적으로 우리의 속량의 값이 얼마입니까? '내 생명'입니다.
자기 생명을 줘야지 내 생명을 살 수 있는데, 그걸 누가 낼 수 있겠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예수님이 지불해 주셨어요.
그래서 우리의 생명의 가치가 이제 얼마가 되었습니까?
예수님의 생명 가치만큼 되어버린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거죠.
이렇게 해서 '내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그 다음에는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신다'
관을 씌운다는 말은 대관식이죠. 왕으로 만들어주신다는 겁니다. 더 나아가
▲5절,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여기서 '소원'은 히브리 원문에 '입'이라고 되어 있어요. *'에디' mouth, 또는 ornament(장신구)
우리의 입은 또는 세상 소원은.. 만족을 몰라요.
아무리 맛있는 걸 먹어도, 아무리 비싼 것으로 치장을 해도
공허감이 더 커지지.. 만족하지는 못합니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그런 세상 것으로 만족하도록..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근데 본문은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좋은 것은 히브리어로 '토브'인데,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번역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인간의 것으로는, 우리가 아무리 먹어도, 아무리 가져도.. 만족을 못 해요.
더 좋은 명품, 더 비싼 것을 사준다고 만족이 되는 게 아니고요,
'하나님의 선하심'이 내게 임할 때만.. 우리 영혼이 만족해요.
그래서 만족된 결과는 무엇입니까? '내 청춘을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청춘같은 인생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매일 새롭게 되기 때문입니다.
◑6절, '여호와께서 공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억압 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심판하시는도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은 힘들고 괴로워도 기다리십시오!
하나님이 반드시 공의로 심판해 주실 것입니다. 억압 당하는 자들을 위하여!
◑7~8절, 그의 행위를 모세에게, 그의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그의 행위를 모세에게,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다' 이거 무슨 말일까요?
바로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모세오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려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모세오경>의 기록을 통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또 알려주었죠.
그 오경의 내용, 그 알려주신 하나님의 성품은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살펴볼 104편, 105편, 106편에는 모세오경의 내용이 나옵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5가지 책의 내용이
시 104편 105편 106 편에 그대로 축약적으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얼마나 성경에 능통했던 사람인가를 알 수 있어요.
모세오경의 내용을, 다윗이 자신의 해석으로, 자신이 압축해서 묘사하는데
쉽게 말해서 '압축 성경'입니다. 모세오경의 압축 성경이 바로 시편 104편 105편 106편입니다.
그래서 103편 8절은 너무나 많은 작곡가들에게 감흥을 주었고,
너무나 많은 작사가들에게게, 너무나 많은 성악가들에게
너무나 많은 찬양대들에게,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을 향한 모티브를 제공한 바로 그 시편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하나님께만 주목하던 시편이 (103편에서부터)
이제 어느덧 우리 자신도 (하나님을 주목함과 더불어) 돌아보게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