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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궁극적인 갈등 욘4:5~11 2011.10.30.
서론
요나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로 택한 사람임에도
니느웨성으로 가서 40일이 지나면 망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라는 명령에 불순종했습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지 않고 스페인 지역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갔지만
풍랑을 만나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물고기가 삼일 밤낮이 지나도 소화가 되지 않자 육지에다 요나를 토해냅니다.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3:3
혹자는 이것을 도시의 지름을 나타내는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성벽의 둘레로 이해합니다.
하루에 걸어서 가는 거리를 약 20마일로 감안하면,
니느웨 성은, 언덕으로 구성된 불규칙한 사각형의 순환은 약 60마일입니다.
삼일 길을 걸어 니느웨성에 가서 하루 종일 돌아다니며
40일이 지나면 성이 망할 것이라고 선포했더니 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3:4~5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왕도 회개하고 온 백성과 짐승까지 금식하며 회개하니까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않으신 것입니다.
3:10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지 않으시자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며 화를 냅니다.
4:3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이렇게 기도도 아니고 반항도 아닌 말을 합니다.
그런데 4:5절을 보니까 요나가 니느웨성 밖으로 나가 초막을 짓고 앉아서
성읍이 망하는지 안 망하는지를 지켜보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면 4:1-4절과 4:5절 이하의 내용 중 어떤 것이 먼저 일어난 사건입니까?
4:5절 이하가 먼저인 것입니다.
요나가 니느웨성 밖으로 나가 동편에 초막을 짓고 지켜보다가
망하지 않자 요나 4장 1-4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성질을 낸 것입니다.
요나 4장은 시간 순서대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나서의 결론 부분인 4장을 왜 하나님께서 시간 순서에 맞게 기록하지 않으시고
먼저 일어난 사건을 뒷부분에 기록하였느냐?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것을 강조하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무슨 말을 할 때 강조하는 결론은 뒷부분에 놓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읽은 본문은 요나서의 중요한 주제이고
요나서를 통해 하나님께서 증거하고자 하시는 핵심 메시지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요나서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요나에게도 중요한 문제였지만
요나 뿐만이 아니라 모든 성도에게 중요하며, 심지어는 모든 인간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을 인간의 궁극적인 갈등으로 잡은 것입니다.
◑1. 요나가 겪은 갈등은 무엇인가?
요나는 하나님의 계시된 뜻과 자신의 감정이 맞지 않아서 갈등을 겪고 있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알고 있었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었습니다.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4:2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자에게 심판을 내리려다가도 회개하면 뜻을 돌이켜서
재앙을 내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죽이려다가도 회개하면 뜻을 돌이켜 살려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나는 어떻게 알았느냐? 성경을 읽어서 알았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출 34:6).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하려다가도 회개하면 뜻을 돌이켜 심판을 거두시는 분이라는 것을
요나는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니느웨성으로 가서 40일이 지나면 망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라고 할 때
벌써 눈치 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구원하시려고 하는 것을 눈치 채고
다시스로 도망가려다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명확합니다. 40일 지나면 망하지만
그전에 회개하면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나의 소원은 니느웨가 망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기의 동족인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시는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원수국가인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를 구원하는 것은 싫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구원의 축복을 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창 22:18).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
네 씨로 인하여 네 후손만 복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으시고
천하 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창 26:4).
아브라함의 자손은 예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천하 만민이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복 받는 것은 삼신할머니나 알라와 같은 우상을 숭배해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복은 아브라함의 씨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받게 된다는 것이
하나님 말씀인 성경의 위대한 계시인 줄로 믿습니다.
요나도 언젠가는 구원의 축복이 이방인들에게도 미치게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구원받는 것은 괜찮아도 자신의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가 복 받고 구원받는 것은 못 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나가 겪는 갈등이었습니다.
요나의 문제는, 하나님의 명백한 계시와 자신의 감성이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요나는 자신의 감성을 따라 기도하고 행동한 것입니다.
이것은 요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 성도들의 공통된 문제입니다.
◑2. 이런 갈등의 구체적인 예
이런 갈등을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보면 코리 텐 붐 여사가 쓴 「주는 나의 피난처」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코리 텐 붐 여사는 네덜란드 여자인데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 병사가 집으로 쳐들어옵니다. 유대인 한 명을 숨겨줬다는 이유로
코리 텐 붐 여사의 온 가족이 독일 나치 수용소로 끌려가게 된 것입니다.
거기서 가족을 다 잃고 코리 텐 붐 여사도 온갖 고통을 당하다가 천신만고 끝에 살아나왔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코리 텐 붐 여사는 신학을 공부해서 세계를 다니며
복음을 증거하는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기도하다가 성령께서 말씀하시기를 독일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일에 가게 되었고 설교가 끝나 밖에서 악수하며 인사하는데
한 노신사를 본 순간 코리 텐 붐 여사의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앞에 서 있는 노신사가 바로 자기 가족을 고문해서 죽이고
자신에게 고문을 자행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믿고 교회 나와서 코리 텐 붐의 설교를 들은 것입니다.
코리 텐 붐 여사는 내가 온 세상 사람은 다 용서해도
내 앞에 서 있는 이 사람만큼은 용서할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참 어려운 일입니다.
인간의 감성은 이런 인간을 용서할 수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엡 4:32).
코리 텐 붐 여사의 감성과 계시의 말씀이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는데
성령님께서 그 순간에 말씀하셨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셨다. 이 사람도 하나님의 택한 사람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니까
순종하여 그 사람을 용서하고 그녀의 생애 가운데 가장 큰 기쁨을 누렸다고 합니다.
▲결혼을 앞둔 청년들도 이런 갈등을 겪습니다.
하나님의 계시 말씀은 결혼할 때 절대 불신자와 하지 말라고 합니다.
신자는 신자와 결혼해야 합니다. 성령을 모신 사람은 성령을 모신 사람과 결혼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청년들이 예수 믿는 사람과 결혼해야겠다고 생각해도
교회에는 마음에 드는 여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까
얼굴도 예쁘고 학벌도 좋고 집안도 좋은 여자를 만나 한눈에 반해버립니다.
그런데 딱 한 가지 교회를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교회 나오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와 결혼하겠습니까?
교회는 나오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 여자와 결혼하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의 아들이 그런 갈등을 겪고 있으면 누구와 결혼하라고 그러시겠습니까?
어렵습니다. 보통은 다 사랑하는 불신자를 데려다 가르쳐서 예수 믿게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게 사람 뜻대로 쉽게 됩니까?
이처럼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계시의 말씀보다 감성을 따라 가더라다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요나에게 가르치시려는 진리
하나님께서 요나서를 통해 마지막 부분에 가르치시려고 하는 진리는
바로 계시를 따라 살고, 감성을 따라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원리를 요나에게 어렵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여러 가지 실물교육과 질문법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서 가르쳐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가르치신 방법은 우선 실물교육입니다.
박 넝쿨과 벌레 그리고 뜨거운 동풍 세 가지를 가지고 교육의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요나가 니느웨성 밖 동편에 초막을 짓고 니느웨성이 어떻게 되는가를 보고 있었지 않습니까?
요나서에 대한 주석을 쓴 사람 가운데 제일 탁월한 분이
19세기 스코틀랜드의 휴 마틴이라는 목사님입니다.
이 분은 요나가 세 가지를 잘못했다고 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니느웨성에 가서 메시지를 증거하라고 했으면 성 안에 있어야지
왜 성 밖으로 나갔느냐? 성 밖으로 나간 것도 불순종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성 밖으로 왜 나갔느냐? 그것은 니느웨성이 망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니느웨성이 망할 때 자기도 그 안에 있으면 같이 망하니까, 성 밖으로 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 밖으로 나간 것은 니느웨성이 망하기를 바라는 요나의 열망을 나타내기 때문에
잘못됐다는 것입니다.
셋째, 요나는 성에 들어가서 구원의 메시지를 증거해야 될 사람인데
구원의 전령으로 하나님께서 보냈더니 겨우 초막이나 짓고 지켜보는 방관자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나가 성 밖으로 나간 것이 참 잘못됐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요나에게 축복을 주십니다.
요나가 지은 초막은 엉성하게 지어서 지붕도 없었습니다.
그것을 아시고 하나님께서 박 넝쿨을 심어 자라게 하셔서
큰 잎사귀로 지붕을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러자 요나가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 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니” (욘 4:6).
머리에 바로 햇볕이 쬐니까 얼마나 뜨겁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박 넝쿨로 그늘 만들어 주니까 심히 기뻐한 것입니다.
요나서에서 요나는 항상 성질만 냈는데 이 장면에서 딱 한 번 기뻐합니다.
니느웨성의 백만 명이 구원받는 것은 하나도 기쁘지 않고 도리어 싫어했는데
박 넝쿨이 자기 머리에 그늘을 만들어 준 것은 심히 기뻐한 것입니다.
교회가 부흥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은 하나도 기쁘지 않은데
자기 주머니에 10만원이 들어오는 것에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이튿날 벌레를 준비하셔서 박 넝쿨을 다 먹어 버려 시들게 하십니다.
그다음에는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십니다.
중동지방의 서쪽에는 지중해가 있어 서풍은 비를 몰고 오며 차고 습합니다.
그러나 동쪽에는 사막이 있어 동풍(함심)은 뜨겁고 건조한 것입니다.
뜨거운 동풍이 불자 요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욘 4:8).
요나는 걸핏하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말합니다.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욘 4:3).
이것은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서 성질을 부리고 분노를 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기도를 절대로 배워서도 안 되고 해서도 안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이런 말도 안 되는 기도를 하는데도 오래 참으십니다.
선생님이 되려면 인내심이 많아야 됩니다. 특히 아버지가 아들을 가르칠 때 인내심이 없으면
혼이 먼저 나가기 쉽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친절히 가르치십니다. 세 가지 실물교육을 시키시더니
이제는 질문법을 활용하시는 것입니다. 두 가지 질문을 합니다.
첫째,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합당하냐는 것입니다.
박 넝쿨을 네가 심은 것도 아니고 기른 것도 아닌데
그것을 가지고 네가 성내는 것이 합당하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요나는 막무가내로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다고 대답합니다.
만약 제가 가르치는 학생이 이런 식으로 대답했다면 바로 F학점을 줬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들으시고 다시 한 번 질문합니다.
“너는 네가 심지도 않고 기르지도 않은 박 넝쿨을 그렇게 아끼는데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요나서는 하나님의 질문으로 끝납니다.
성경에서 요나가 대답했다는 기록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요나는 여태까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한자말로 하면 유구무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실물교육과 질문법을 통해서 가르치려고 하는 진리는 명백합니다.
“요나야! 너는 너의 감정, 너의 소원, 너의 뜻대로 살지 말고 내가 계시한 말씀,
나의 소원, 나의 뜻을 이루며 살아라!” 이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4. 인류의 궁극적인 문제는 “아담 신드롬”이다
인류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아담 신드롬”입니다. 신드롬은 증세라는 뜻입니다.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시면서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계시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하와하고 결혼해서 살다가 하와가 감성에 이끌려 선악과를 먹고
아담에게도 줘서 아담도 먹게 됩니다.
인류에게 사망과 저주가 온 것은 아담이 계시를 버리고
자신의 감성을 따라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원죄가 되어 사람에게 사망이 온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자기 뜻을 이루려고 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을 보좌에서 끌어내리고 자기가 보좌에 앉으려 한 것입니다.
이것이 ‘아담 신드롬’입니다.
▲성경 역사에서 위대한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감성의 요구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계시를 따른 사람들입니다.
창2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백 세에 얻은 자식 이삭을 모리아산으로 데려가
칼로 죽여 번제로 바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백 세에 얻은 아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을
아버지가 직접 칼로 찔러 죽여서 불에 태워 바치라면 여러분은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아버지 차라리 나를 죽여 달라고 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감성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갔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이 죽어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줄로 믿고 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죽이려는 순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번제할 어린 양을 준비해놨다고 하시면서
이삭에게 칼을 대지 말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여든다섯에 이스마엘을 낳았고
아내 사라가 죽고 나서도 그두라 라는 후처를 취해 자식을 많이 나았음에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왜냐면 자신의 감성을 이기고 계시의 말씀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도 자기 감정을 누르고 계시를 따르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땀방울이 핏방울이 될 정도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아버지여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이 내게서 지나게 해주소서’
하지만 거기서 끝내지 않고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감성의 요구를 거절하고
계시의 뜻을 따라 순종해서 우리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결론
예수님도 우리가 가진 모든 감성을 다 소유하신 참 인간이셨습니다.
그러나 감성을 따라 살지 않으시고 계시된 말씀을 따라 사셨습니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히 10:7).
오늘날 많은 신학자들이 계시를 따르지 않고 감성을 따라 합니다.
예수님이 왜 오셨냐고 물어보면 어떤 사람들은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러 오셨다고 대답합니다.
저도 감성적으로는 그렇게 대답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수님께서 온 세상 사람들을 다 구원하셔서 한 명도 지옥가지 않고 다 천국에 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감성은 만인 구원설을 좋아합니다.
예수님을 안 믿어도 천국가고 스님도 천국가고 무슬림도 천국가는 것을 원합니다.
하지만 계시는 그렇지 않습니다. 계시는 하나님께서 택한 자가 있고
하나님의 택한 자들에게 성령이 역사해서 믿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신학자들도 감성을 따르게 되면 알미니안주의가 됩니다.
그러나 계시를 따르게 되면 칼빈주의자가 되는 것입니다.
저(피영민 목사)는 처음부터 칼빈주의였고 지금도 칼빈주의, 계속 칼빈주의입니다.
알미니안주의가 기분은 좋아도 하나님의 계시와 어긋난다고 믿습니다.
신학자들도 감성 따르지 말고 계시에 의존해서 공부하고 그것을 신학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많은 문제가 일어나는데 이것도 계시를 따르지 않고
인간이 자신의 감성을 따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람의 감성으로는 이러는 것이 좋겠다고 해도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아니라면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도 개개인의 문제와 고통도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보다
자신의 감성을 따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운동을 열심히 하고 왔는데 앞에 시원한 맥주가 있다고 해봅시다.
감성은 그것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만 계시는 무엇입니까?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엡 5:18).
감성이 요구하는 대로 맥주도 마시고 소주, 양주 마시다 보면
나중에는 간도 망가지고 술값으로 가산도 탕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나서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무엇이냐?
인간은 자기 감성만 따라서 살아서는 안 되는 존재이고
바른 원리를 하나님께서 문서로 계시해 주신 말씀을 따라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르쳐주시려고 요나서의 마지막을 우리에게 기록해주신 줄로 믿습니다.
항상 말씀의 지배를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