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시106편 광야에서 반역한 역사를 기억하며 노래함

LNCK 2021. 8. 14. 13:43

 

◈광야에서 반역한 역사를 기억하며 노래함            시106:1~48               여러 설교 정리

 

시편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루는 대표적인 작품들이 있습니다(78, 105, 106, 136편).

이 시편들의 특징은 끊임없이 불순종하는 백성들과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 사이에 있는

신학적, 실존적 갈등을 주제로 다룹니다.

 

본문 106편은 시4권의 마지막 시편입니다.                  *4권: 90~106편
출애굽으로부터 시작해서 바벨론 포로까지의 긴 역사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심층적인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전편 105편에서는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를 말하였다면,

본문 106편에서는 그들이 주님을 거역한 범죄의 역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본 시편을 누가 썼는가에 관해서는 바벨론 포로 생활이 언급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무명의 어떤 시인이 썼을 것으로 봅니다.

시인은 출애굽과 같은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서

가나안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시편 저자는 광야에서의 반역 사건을 계속해서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말세를 만난 우리들의 거울이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줄거리

영원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1-5)

홍해에서 구원하신 하나님(6-12절)

광야에서 불순종한 이스라엘(13-15절)

 

(고라) 다단과 아비람 당의 반역죄(16-18절)

호렙에서 만든 금송아지 사건(19-23절)

정탐꾼들이 약속의 땅을 멸시한 사건(24-27절)

바알브올에서 지은 죄(28-31절)

 

므리바 물가에서 지은 죄(32-33절)

약속의 땅에서 지은 범죄(34-39절)

하나님의 진노 (40~43절)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함(44-48절)

 

 

▲8~14절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구원하셨으니

그의 큰 권능을 만인이 알게 하려 하심이로다

이에 홍해를 꾸짖으시니 곧 마르니 그들을 인도하여 바다 건너가기를

마치 광야를 지나감 같게 하사

그들을 그 미워하는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며 그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셨고

 

그들의 대적들은 물로 덮으시매 그들 중에서 하나도 살아 남지 못하였도다

이에 그들이 그의 말씀을 믿고 그를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도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행하신 일을 곧 잊어버리며 그의 가르침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내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

 

저는 지금까지 사역하면서,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

하나의 패턴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신 다음에는

거의 즉시로 시험의 광야로 인도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삶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강에서 나오시자 예수님은 성령에 의해

광야로 이끌리셔서 극한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똑같은 일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애굽으로부터 구원을 받자마자, 광야의 위기 가운데로 인도를 받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서 온 세계 앞에서 불가능한 상황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백성을 찾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큰 의미를 깨닫게 해 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내보낼 복음의 사자들을 찾으실 때

주님은 두려움과 의심이 가득하고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백성들로 좌석이 가득찬

교회를 모집하시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은 힘 있고 효율적인 종교단체나,

아주 고매한 교육을 받은 신학자들을 찾으시지도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조직이나 고학력자들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조직과 학력 자체에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한 사자가 되기에 필요한 자원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잃어버려진 상처 받은 세계에, 다가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시험과 고난의 학교를 거친 군인들로 이루어진 작은 군대입니다.

 

하나님은 시험 받기를 자원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불의 시험을 기꺼이 받으려 하는 자,

그 믿음을 정련하고 정금과 같이 나아올 모든 자들을 모집하십니다.

 

제 (데이빗 윌커슨) 아내 그웬이 처음 암에 걸렸을 때가 34살 이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우리는 망연자실했습니다.

 

우리는 막 식구들을 뉴욕으로 이사시키고

저는 거리의 갱들에게 사역을 시작하려고 할 때였습니다.

 

이제 뉴욕의 갱단의 멤버들과 마약 중독자들에게

거리를 걸으면서 전도설교를 하면서도

그 시간에 동시에, 저는 고통과 두려움의 눈물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끊임없이 저에게 확신을 주셨습니다.

“나는 신실하다, 데이빗. 나는 너와 너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저희 부부가, 그웬의 암으로 인한 엄청난 시련을 겪는 동안

저와 주를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동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승리하는 것을, 단지 한번의 경험으로 그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분의 목표는 우리가 위기에서 빠져 나와

“하나님 감사합니다. 시험을 받는 동안 저는 믿음을 지켰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그 시험을 통과했을 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홍해에서 승리를 거뒀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다른 시험이 연이어 따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시험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안식가운데 거하는 것은 삶의 방식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우리의 약함을 체휼하시는 대제사장을 알고

시험가운데서도 그분의 평안과 확신으로 굳게 서기를 원하십니다.

     *더 보기 https://blog.daum.net/rfcdrfcd/15975149

 

 

▲15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그들에게 주셨을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쇠약하게 하셨도다

 

‘오만한 평안’이란?

기도도 안나오고, 죄짓고 나서 회개도 하지 않는데,

이상하게 내 주변 환경이 잔잔하고 별 일이 없습니다. (사실은 폭풍전야)

 

그래서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별 문제가 없다, 나는 의인이다!’고 스스로 자긍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무게가 없습니다.

영적인 권위가 점점 약해지고, 자기 심령이 점점 무뎌갑니다.

 

겉은 멀쩡한데, 속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고,

쉬지 않고 반복적으로 죄를 짓습니다.

 

옛날 노력의 대가로 열매가 달려 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포도나무에서 점점 멀리 떨어져가는 가지입니다.

 

어느 순간 나에게 간절함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보통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우상이 생겼을 때, 그렇게 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역이 그럭저럭 되어간다’는 평안(?) 가운데,

가난한 마음, 통회하는 마음은 사라져버리고,

간절한 기도도 사라져버렸습니다.

점점 매너리즘에 빠져드는 자신을 보면서도... 돌이킬 결단이 없습니다.

 

옛날에는 사역이 작았지만, 간절하고 뜨거운 열망으로 하나님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일 예배 후에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데...

그래도 사역, 또는 사업은 대충 굴러갑니다.

 

성도에게 위기, 실패란 무엇인가요?

-간절함이 떠난 것. 간절한 기도가 안 되는 것입니다.

통회해야 되는데 통회가 안나오는 것입니다.

 

별로 외적인 뚜렷한 고난이 없고 평안하니까 그렇습니다.

(이러다가 자칫하면 큰 것 맞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고난을 주시지 않아서

평안한 삶을 사는 것이 바로 나의 삶에 암초입니다.

곧 크게 침몰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그렇게 되지 말라고,

하나님은 나에게 반대자를 보내시는 은혜(?)를 주신다.

고난과 환란풍파도 보내주십니다.

 

오늘 다시 한 번 점검해 봅시다.

오늘 내가 ‘오만한 평안’을 누리며, 스스로 자긍하고 있지는 않는가요?

 

내 사역이나 사업이 평안한(별 문제 없는) 가운데,

내 영혼은 점점 무디어지고, 파리해 가고 있지는 않는가요?

 

오늘 나에게 ‘간절한’ 하나님과의 교제가 있는가?

무엇이 나를 무디게 만들고, 무엇이 나를 부요해서 안일하게 만드는가?

 

    *더 보기 https://blog.daum.net/rfcdrfcd/10641053

    *관련글 https://blog.daum.net/rfcdrfcd/15973456

 

 

▲24~25절 ‘그들이 그 기쁨의 땅을 멸시하며 그 말씀을 믿지 아니하고

그들의 장막에서 원망하며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아니하였도다’

 

기독교는 현상보다 본질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 시대의 기독교가 안타까운 것은,

진리를 믿는 기독교가 자꾸 ‘본질’에서 벗어나

‘현상’으로 치우쳐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거의 다 ‘본질’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것이 그렇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분별도 못한 채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다 현상화 해서 증거 되어지고 있는 것이

심히 안타까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5:3절부터 팔복이 나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한 자, 온유한 자...

 

아무리 읽어봐도 모두 ‘복’을 이야기 하지만,

돈 되는 현상적인 얘기는 하나도 없습니다.

거기서 가르치는 복은 모두 본질적인 복, 천국의 복, 영생의 복입니다.

 

팔복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은, 성경을 다 뒤져보아도,

사실 돈 되는 얘기는 없습니다.

세상은 현상을 말하지만, 성경은 ‘본질’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시편1편에서 말하는 복도, ‘본질’적인 복입니다.

시1편을 아무리 읽어봐도

‘복 있는 사람은.. 신랑이 돈 잘 벌어오고, 자식이 공부 잘 하고,

이빨이 튼튼하고 몸이 건강하며, 손대는 사업마다 돈이 착착 달라붙고...’ 등

이런 현상적인 얘기가 하나도 안 나옵니다.

 

사람들은 ‘본질’을 싫어합니다.

 

‘광야에서 출애굽 중인 백성들은

그 아름다운 땅(가나안)을 싫어하고 주의 약속을 믿지 않았습니다.

장막에 들어앉아 불평만 하고, 여호와께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시106:24~25

 

그러자 ‘주께서 그들에게 진노하셨습니다’ 라는 내용이 뒤이어집니다.

 

▲26~27절

이러므로 그가 그의 손을 들어 그들에게 맹세하기를 그들이 광야에 엎드러지게 하고

또 그들의 후손을 뭇 백성 중에 엎드러뜨리며 여러 나라로 흩어지게 하리라 하셨도다

 

부모가 자녀에게 좋은 생일상을 차려줬는데, 자녀가 발로 걷어차듯이,

하나님은 애써 10재앙, 홍해기적을 통해서 저들을 광야 훈련과정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복된 땅, 가나안을 장차 예비해 놓으셨는데,

 

백성들이 눈에 안 보인다고 삐져서

장막 안에 들어가 수군거리며 불평만 했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눈에 보이는 금송아지를 만들고 춤추며 뛰놀았습니다. 시106:19~20

 

오늘날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본질이고, 눈에 보이는 현상이 아닙니다.

 

그 때 ‘도대체 하나님을 믿고 따른 결과가 이런 것인가!’ 하며

집에 틀어박혀 하나님께, 광야 백성들과 똑같이, 불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워낙 현상적인 결과를 강조하는 설교들을 사방에서 듣다보면,

그런 딜레마에 더 깊이 빠져듭니다.

 

명심할 것은, 하나님 나라의 복은 본질적인 것입니다. 눈에 안 보입니다.

그런데 현상적 복이 내게 나타나지 않는다고 불평하면

그러면 하나님이 진노하신다는 것입니다.

불순종한 광야 백성들에게 진노하신 것처럼!

      *더 보기 https://blog.daum.net/rfcdrfcd/120534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