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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7장 유다 와 북왕국-아람 연합군의 전쟁

LNCK 2021. 9. 10. 20:12

 

 

◈유다 와 북왕국-아람 연합군의 전쟁            사7:장             여러 설교 정리

 

4:장에서 '여호와의 싹' (4:2)

6:장에서 '거룩한 씨' (6: 13)

같은 맥락에서, 7 장에서는, 임마누엘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7: 14)

 

이것은 앞서 1~3장에서 패역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한 후

5장 포도원의 노래를 통해 유다가 철저하게 심판을 받게 될 것에 대한 예언 직후

주어진 계시인데, 임마누엘은 ‘회복의 희망’입니다.

 

◑이사야 7:장의 핵심 메시지는 14절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연약한 나라 남유다에, 강한 두 나라가 연합해서 쳐들어 왔습니다.

아하스 왕 때입니다.

 

이 때 이사야가, 그 난국을 타개하고 해결하기 위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아서 전했는데, 바로 7 :14절입니다.

 

이 예언이 마1 :23절에서 천사가 예언한 임마누엘이라는 성탄 이야기의

역사적 근원이 되는데요..

 

이사야에게 있어서는 기성세대에 실망한 하나님의 종들이 새 세대,

임마누엘 세대에 기대를 건 것이요,

 

신약에서는 바로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님께 기대를 걸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아하스 왕이 그랬듯이

세상 군사력, 외교적 동맹, 그 외 세상 경제력 등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임마누엘 세대’란 어떤 특징의 세대인가요?

 

우리는 신약으로 구약을 해석해야 하며, 또한 구약은 신약 이해에 상호 도움을 줍니다.

그래서 사7 :14절의 해석은 대단히 중요합니다만.. 사실은 까다롭습니다.

(여기서 일단 이 해석을 던져놓고.. 차츰 또 다른 해석을 참고하려고 합니다)

 

아하스 왕 시대에 직면한 여러 풍전등화의 위기와 문제 앞에서

하나님은 '처녀가 잉태하여 아기를 낳아서 그 이름을 임마누엘로 짓는' 해법을 주셨는데,

그 의미가 무엇인가? 그 해석이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 난제를 풀기 위해서 일단 전제로 살펴 볼 것은,

'임마누엘 세대' 라는 점입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기를 낳을 것인데, 그 아기는 '한 명'입니다만, 새 세대의 대표라는 거죠.

즉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세대'의 대표로서, 한 명이 예언된 것이고,

이런 '임마누엘' 신앙을 가진 새 아기, 새 세대들이 많이 일어날 것이다..

그것이 새 시대를 여는 하나님의 해결책이다.. 라는 뜻입니다. (신약도 이런 식의 해석 필요)

 

그럼 그 임마누엘 신앙을 가진 새 세대, 즉 '임마누엘 세대'의 특징은 다음 세 가지입니다. 

 

1) 임마누엘이란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임마누엘 세대란 하나님이 우리 속에 함께 하는 세대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속에 함께 계시고, 하나님이 지도자들의 마음에 함께 계신 세대,

하나님이 인간 생활 모든 분야에 함께 계신 세대,

즉 윤리적 중심이 하나님의 심정과 법도에 근거한 세대,

인간의 양심과 행위 속에 하나님이 함께 계신 세대가 될 것을 기대한 것입니다.

 

정치, 경제, 문화, 예술 전반에 하나님이 함께 계신 세대가 될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주장을 안 받으면 악마의 주장대로 하게 마련입니다.

 

인간은 본성상 죄인이고, 죄로 이끌리는 본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함께 계신 임마누엘 세대가 철저히 되지 않고선

누구나 자기의 죄를 따르게 되고,

자기 꾀를 따른다는 것이 결국 악마의 종이요 그 도구 노릇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임마누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를 기도하고 추구하는 것입니다.

 

2) 임마누엘 세대는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할 줄 아는 세대' 임을 말씀합니다. 7:15

성경에 악의 근본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반항과 교만이라고 했습니다.

또 바울사도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습니다. 딤전6:10

 

그 세계, 아하스 왕의 집권 방침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모든 판단의 가치 규준을 물질적 이익과 인간적 교만에 두고 있었습니다.

 

오늘도 아하스 세대와 다를 바가 별로 없습니다.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기준을 무시하거나 외면하고

 

오직 눈에 보이는 힘.. 그래서 앗수르를 의지하고

자기 인간적 목적 달성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래서 돈을 주고, 앗수르 군대를 남유다에 끌어들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당면한 아람-북왕국 연합군은

‘연기나는 두 불탄 막대기에 불과하다’는 이사야의 예언은 믿지 않았습니다.

 

이제 바랄 것은 이 썩고 죄악 된 시대는 그대로 썩고 망하더라도,

다시 올 새 세대만은 선을 추구하는 임마누엘 세대가 되어야 할 것이라는 소망이

이사야의 예언의 핵심입니다.

 

3) 이 임마누엘 시대는 어떤 시대인가? 더 자세하게는

이사야 11장에서 임마누엘 시대는 '평화와 자유의 세대' 임을 말했습니다.

 

자연과 인간이 화목하고

인간이 인간과 화목하는 자유의 질서와 평화의 질서를 보았습니다.

 

사자가 염소와 같이 풀을 뜯으며 어린아이가 독사의 구멍에 손을 넣고 놀 수 있는

자유와 평화의 질서를 보았습니다.

 

아하스의 인간적 정치 정략으로 사회 질서를 눌러서 억지로 얻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이사야의 ‘임마누엘 시대’에 대한 예언은

당시 아하스에서 히스기야 왕에 이르는 시대에

약간 맛보기로, 예고편으로 조금 성취되는 듯 했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 때, 앗수르가 물러가고 잠시 평화가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이루어질 진정한 임마누엘,

하나님 나라 시대의 도래에 대한 예고편이었습니다.

 

.......................................................... 이제 본문 해석 시작 ..........................................................

 

▲본문의 주인공은 아하스 왕입니다. 

아하스(12대 왕)는 남유다에서 가장 악한 왕, 두 명 중의 한 명입니다.  다른 한 명은 므낫세(14대)

그래서 아하스 때부터 '하나님의 심판(바벨론 포로)'가 예언되기 시작합니다. 

 

아하스는 자기 아들을 불태워 죽이면서까지 우상을 숭배한 왕입니다. 

온 나라에 바알의 신앙을 가득 채운 왕이고요,

하나님의 성전 기물을 다 빼내서 부셔버리고

거기에 앗수르의 제단을 본 떠서 만들어 세웠던 자입니다.  왕하16:11

 

사10 :1~2절, "불의한 법령을 만들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

가난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가난한 백성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이 말씀도 아하스에 대한 예언으로 봅니다.

왜냐면 이사야가 주로 활동 시절의 다른 왕들 (요담, 히스기야)은 모두 선왕이었거든요.

 

그래서 이사야는 아하스 왕에게 이렇게 쏘아부쳤습니다.

"너희가 국민을 괴롭게 하고도 그것을 작은 일로 여기고

또 나의 하나님까지 괴로우시게 하느냐?"  :13절

 

그래서 아람-북왕국이 연합해서 남유다를 쳐들어 왔을 때,

아하스는 더 북쪽에 있는 신흥 강국 앗수르를 의지했습니다.

그 일환으로 앗수르의 제단을 본 떠서, 성전 안에 세웠던 자입니다.  *외교적 동맹 강화 조치일 수 있음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하스를 보니까, 도저히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었고

그래서 이 때에 어마어마한 재앙이 닥치기 시작합니다.

 

아하스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거역했기 때문에 어떤 일이 벌어졌냐면,

아람의 르신왕과 북왕국 베가왕이 연합해서 전쟁하러 올라왔습니다.

본문은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 

 

비극적이게도, 이사야는 이 가장 악한 두 왕의 재위 시절을 다 겪었습니다. 

(므낫세 때 이사야는, 톱으로 켜서 순교를 당하게 되죠.)

 

이제 각 절의 해석을 살펴보겠습니다.

 

 

◑1  두려움을 믿음으로 극복하라!          사7:1~9

  

▲1절, 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유다의 아하스 왕 때에 아람의 르신 왕과

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의 베가 왕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쳤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능히 이기지 못하였더라' 

이 말은, 아하스가 아람-북왕국 연합군을 물리친 것처럼 들리나.. 실상은 정반대입니다.

예루살렘만 남겨놓고 그 외 나머지 지역은 다 점령되었다는 뜻입니다.

 

마치 조선이 청나라의 공격을 받을 때,

남한산성만 남았던 적과 같습니다.

 

아람과 북왕국이 연합해서 남유다를 공격해 왔는데

비유하자면 삼국시대 때, 나당(신라-당나라)연합군이

고구려와 백제를 친 것과 같다 하겠습니다.

 

아하스가 그만큼 하나님 앞에서 큰 범죄를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하스를 이렇게 크게 징벌하신 것입니다.

 

이때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무려 12만명이 하루만에 죽습니다. 대하28:6

게다가 20만명의 포로가 북왕국으로 끌려갔습니다. 대하28:8

 

이 정도면 나라가 거의 망해 버린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하스 때입니다.

그래서 무려 32만명이 죽거나 포로로 끌려갔던 결과를 낳았습니다.

 

본문의  전쟁은 왕하16:장 과 대하28장에 자세히 나와 있으니 참조바랍니다. 

 

▲2절, 어떤 사람이 다윗의 집에 알려 이르되, 아람이 에브라임과 동맹하였다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

 

“마음이 삼림의 바람에 흔들림같이 흔들렸다”고 했습니다.

우리 한국적 표현으로 ‘사시나무 떨듯이 떨린다’고 합니다.

여러분, 사시나무는, 바람이 약간만 불어도, 온 나무 이파리가 벌벌 떠는 모양입니다.

 

신앙인은 모든 상황에서 항상 두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두려움을 극복하려면,

위협적인 소문의 말에 휘둘리지 말아야 합니다. :2

 

아하스 왕과 유다 백성들이 두려움에 빠진 것은

북 이스라엘이 아람 나라와 동맹했다는 소문 때문이었습니다. :2

 

무엇보다 그들이 유다를 쳐서, 유다의 왕을 바꾸겠다는 말을 들은 것 때문이었습니다. :6

 

그래서 아하스 왕과 백성들의 마음이 마치 삼림이 바람에 흔들리듯이

몹시 흔들렸던 것입니다. 사지백체가 전부 흔들린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인 것도

부정적인 보고를 한 정탐꾼들 때문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대한 악평과 그 거민의 장대함에 대한 말을 듣고는  민13:32~33

온 회중의 마음이 두려움에 휩싸여 통곡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종 엘리야가 낙심하여 멀리 광야로 도망가서 죽기를 바라게 된 것도

이세벨 왕후의 위협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왕상19:2~3

 

두려움은 상대를 너무 크게 보는 데서 오는 실패에 대한 공포입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무기력해지고 힘을 잃어서 도전해 보지 못하고 포기하게 됩니다.

 

두려움은 모든 신경을 마비시켜 아무 것도 못하고 굳어지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삶을 살아가면서 어떤 환경에서라도 두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두려움을 극복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

 

▲3절, 그 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에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

 

하나님은 이사야와 그의 아들 스알야숩을 아하스 왕에게 보냈습니다.

이 두 사람을 함께 보낸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이사야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란 뜻이고,  

스알야숩은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 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아하스에게 믿음을 심어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두 나라 연합군이 공격해 와서, 지금 남유다의 대부분이 점령당했지만,

'여호와가 구원하실 것이고' .. 이사야란 이름의 뜻

'살아남은 포로는 돌아올 것이다' .. 스알야숩이란 이름의 뜻.

라는 메시지를 던져주시는 것입니다. 

   

▲4절, 그에게 이르기를 너(아하스)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북이스라엘 왕은 1절에 '베가'인데, 본절에서 ‘르말리야의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베가 왕이란 이름을 놔두고, 왜 ‘르말리야의 아들’이라고 깎아 부르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그가 반역을 통해 차지한 왕좌이므로, 그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 4 단어의 권고가 나옵니다. “너는 삼가며 - 종용하라 - 두려워말고 - 낙심치말라” 

'삼가라 take heed' 라는 말은 '정신을 똑바로 차려라'  즉 불안초조 하지 말라는 뜻이죠.

 

불안해서 안절부절, 초조한 모습, 움츠리는 모습을 보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면 이 전쟁의 결론을 하나님이 이사야를 통해 알려주셨습니다.

7절에 '그들 연합군의 도모는 이루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불안과 두려움, 염려와 근심, 절망과 낙심이 밀려올 때에

제일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회개하라 하시면.. 회개하고

고치라 하시면.. 고치고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은 보호와 회복을 약속해 주십니다. 

그 보호와 회복을 믿고서 안심하는 것입니다.

지금 현실은 아직 대적이 우는 사자들같이 삼키려고 어흥 하고 달려들지만..  말입니다.

 

그러면 대적들은 '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 로 변하될 것입니다.

그들은 타다 남은 두 나무 막대기에 불과하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그루터기'를 빼고 해석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큰 나무의 그루터기(둥치)란 뜻의 아니고, 나무 작대기의 타다 남은 부분(그루터기)이란 뜻.

   

▲5절, 아람과 에브라임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악한 꾀로 너를 대적하여 이르기를

6 우리가 올라가 유다를 쳐서 그것을 쓰러뜨리고 우리를 위하여 그것을 무너뜨리고

    다브엘의 아들을 그 중에 세워 왕으로 삼자 하였으나

 

'아람'을 '에브라임'보다 앞세운 것은, 이 전쟁의 주도자가 '아람'이란 뜻입니다.

그들의 최종적인 목표는 다윗 왕조를 폐하고

자기들의 정책에 순응하는 괴뢰 정권 (다브엘의 아들)을 세우는 것입니다.

 

'다브엘의 아들'은 '르말리야의 아들'이란 이름처럼 경멸스러운 표현입니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지, 더구나 이스라엘인인지 수리아인인지도 정확히 알 수 없죠.

 

다만 왕상15:18에 나오는 수리아인 '다브림몬'과 그 이름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그 역시 수리아인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들이 연합-공모해서 다윗 왕조를 폐하려 하였으니, 당연히 그 일은 이루어지지 못하죠.

 

7 주 여호와의 말씀이 그 일은 서지 못하며 이루어지지 못하리라

 

8 대저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65년 내에 에브라임이 패망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할 것이며

 

여기서 '머리'는 한 나라의 수도, 혹은 통치권을 비유합니다.

본문의 의미를 의역하면 '아람의 수도는 오직 다메섹일 뿐, 예루살렘은 아니다.

르신이 다메섹의 왕이고, 그의 통치는 오직 다메섹에만 국한될 뿐,

예루살렘에는 미칠 수 없다.' 

 

9 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머리는 르말리야의 아들이니라.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에브라임의 수도는 사마리아이고, 그 주권자는 르말리야의 아들(베가의 비하)이다.

너희는 너희 땅이나 다스려라. 이러한 경계를 넘어서서 유다 다윗 가문을 폐하려는 것은

역사의 주관자이신 여호와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이므로 결코 용납될 수 없다.'

 

‘65년 내에 에브라임이 패하여’

B.C. 669년에 있었던 앗수르 왕 앗수르바니팔에 의한 식민지 정책에 맞춘다면,

65년이라는 기한은 어김없이 들어맞습니다.   *북왕국 패망은 BC 722년

 

앗수르바니팔은 주변 여러 민족들을 데려와서 사마리아에 거주케 하였는데,

이로 인해 실질적으로 에브라임은 혼합 민족으로 남게 되었던 것이다(왕하17:24, 스4:2).

 

이 연대의 해석에 대해서, 신학자간의 의견이 몇 갈래로 나뉩니다.

분명한 것은, 북이스라엘이 곧 폐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라를 세우시고 하시고, 폐하기도 하시는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깨닫고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7~:8

 

“만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9

 그러므로 하나님을 신뢰하여 강하고 담대해야 합니다.

 

 

◑2. 아하스의 불신앙, 세상적인 선택        사7:10~17

 

▲10절,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1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하시니

12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하나님께서는,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공격을 받은

남유다를 위기에서 구원해 주시려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징조를 구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그러나 아하스 왕은 고집을 부리면서

이사야를 통한 하나님의 제안을 거절해 버립니다. 

“나는 구하지 아니 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 하겠나이다”(12절)

 

왕의 말은 매우 경건한 사람의 말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불신입니다.

'구해도 안 될 것을 아니까, 나는 구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아하스는 앗수르의 군사적 도움을 간절히 의지했습니다.

 

그는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본문의 역사적 배경이 되는 왕하16장을 보면,

아하스가, 성전과 왕궁 곳간의 은금을 취해서, 앗수르에 보냅니다.

 

왕하16:7 아하스가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사자를 보내어 이르되

나는 왕의 신복이요 왕의 아들이라 이제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나를 치니

청컨대 올라와서 나를 그 손에서 구원하소서 하고

8 여호와의 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취하여 앗수르 왕에게 예물로 보내었더니

 

그래서 앗수르를 끌어들인 결과는, 대하28:20절 전후에 자세히 나타나 있습니다.

똑같은 내용이, 사7:18~25절에 나옵니다. (아래◑3단락)

 

한 마디로, 앗수르 때문에 큰 고통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죠.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강대국의 군사력을 의지한 결과였습니다.

 

그 후로 앗수르는, 남유다에 깊이 개입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히스기야 때 18만 5천의 군사가 죽는.. 대패하기까지 유다를 괴롭힌 것입니다.

 

▲13절, 이사야가 이르되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

    

위 이사야의 말은 이런 뜻입니다.

'너희가 백성들을 그렇게 학대하고도 마치 그것이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경건을 가장하고, 이제는 불신앙으로 그분의 은혜마저 거절하는구나.'

 

그래서 우리는 지도자를 잘 뽑아야 하고,

지도자를 뽑은 후에는, 지도자를 위해서 늘 기도해야 합니다.

지도자 한 사람이 불신앙으로 행하면, 온 국민이 고통 당하는 일이 생길 수 있는 것이죠.

 

백성들의 처지를 생각한다면

이제는 정신 차리고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는 방책을 마련했어야 합니다.

 

그의 불신앙에 기초한 미련한 고집은 

계속해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일이었습니다.

 

▲14절,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아하스가 불신앙으로 징조를 구하지 않자, 이사야가 직접 징조를 예언합니다.

유명한 위 구절은 '이중예언'으로 해석합니다.

 

-그때 당시 시대적 예언임과 동시에

-장차 오실 메시야의 탄생을 이중으로 예언한 것입니다..

 

전자로 해석해서, 그때 당시 시대적 정황 속의 예언이라고 볼 때는

(이어지는 15~16절을 보면, 14절의 예언이 당시 정황 속의 예언임이 확실합니다)  

 

즉 '처녀가 (시집가서) 아이를 낳는 일이 있으면... 적국이 패배한다'는 예언이 됩니다.

 

그럼 여기서 '처녀'는 누구를 가리키나요?    *히 '알마' : 처녀 또는 신혼의 여성

 

1) 아하스 왕의 왕비 혹은 후궁을 가리키며,

그 아이는 히스기야를 가리킨다는 주장.

 

이는 주로 유태계 학자들이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 연대기적 문제가 있습니다.

B.C.728년 히스기야가 왕위에 올랐을 때, 그의 나이 이미 25세였으므로,

이사야가 이 예언을 할 당시에 히스기야는 이미 10대 소년이었던 것입니다. 대하 29:1

 

2) 여기서 '처녀 (또는 신혼의 새댁)'는 이사야 선지자의 아내이며

그 아이는 선지자의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주장.

이 경우, 이사야의 아내는 이미 상당히 결혼 생활을 한 여자로 봅니다. 좀 연대가 안 맞죠.

 

3) '처녀'가 특정인을 가리키지 않고

일반적으로 당시 유다에 살고 있던 어머니들을 가리킨다는 주장.

(이 경우에 정관사 '하'가 문제가 될 수도/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처녀')

    

*서두에서  '임마누엘이란 이름을 가진 새 세대'가 등장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희망이요, 하나님의 해법이라고 제시했는데,

그렇게 볼 경우, 위 1)번 2)번 3)번이 무엇이든지 다 그 주장과 연결됩니다.  

   

이 이사야의 예언 7:장 14절은, 더 큰 역사적 지평으로 확대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알고 예언했는지, 모르고 예언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알기도 했고, 모르기도 했을 것입니다. 예언이라는 게 그 일반적 특성이 '신비'거든요.

알기는 알겠는데, 아리송하게 압니다. 나중에 성취된 것을 보면 그제야 확실히 알게 되죠)

 

이사야는, 지금 다윗 왕가와 하나님의 나라가 당한 위기 속에서

그것을 돌파할 임마누엘의 약속과 구원을 가져다 줄 메시야의 탄생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예언을 발하기 위해서, 본문의 전쟁이 조성되었을 수 있습니다.)

 

어쨌거나 희한한 것은, 무시무시한 국제 전쟁의 공포스런 분위기 가운데서

그 사시나무 떨리는 듯한 국가적 위기를 타결하고 헤쳐나가는 방식이,

하나님은 한 어린 아기를 탄생케 하심으로써.. 그 위기를 해결해 나가시겠다는 것인데,

어쩌면 해학(코미디)같기도 하고.. 어쩌면 신적인 신비 divine mystery 같기도 한

하나님의 역사 운행, 섭리 방식입니다.

 

적용하면, 오늘날에도 세계에 산적한 커다란 문제들이 많고,

교계에도 해결되지 못하는 엄청난 난제들이 쌓여 있는데,

하나님이 그 문제들을 풀어가시고 해결해 나가시는 방식은

아주 기이하고 이상하고 전혀 뜻밖의 방식으로.. 해결해 나가실 것이라는 거죠. 시8:2, 고전1:27

(적어도 군사력이나 외교력, 경제력 이런 '힘'들은.. 일반적인 하나님의 해결방식이 아니죠)

  

▲15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가 되면 엉긴 젖과 꿀을 먹을 것이라

16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줄 알기 전에

    너의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폐한바 되리라

 

영아는 선과 악을 분별하지 못합니다. 선과 악을 선택할 줄 알 때는 약 3세 이후일 겁니다.

그래서 처녀가 잉태해서 아기를 낳고, 그 후 약 3년 이전에

(엉긴 젖인 버터와 꿀을 먹기 전에)

아람-북이스라엘 두 왕의 땅이 무너진다는 예언입니다.

 

유다에게 큰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두 나라 아람과 에브라임은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과(B.C. 732년) 살만에셀 5세(B.C.722년)의 침공으로

황폐하게 될 것이며(왕하15:29, 16:9, 17:6),

따라서 그들로부터 가해진 위협도 소멸될 것임을 예언한 것입니다.

 

17 여호와께서 에브라임이 유다를 떠날 때부터 당하여 보지 못한 날을

    너와 네 백성과 네 아비 집에 임하게 하시리니, 곧 앗수르 왕의 오는 날이니라.

 

‘에브라임이 유다를 떠날 때부터 당하여 보지 못한 날을’

'에브라임이 유다를 떠날 때부터'란 남북왕국의 분열 이후를 뜻합니다.

그 이후로 가장 무서운 환난과 비참함을 예언합니다.

 

16절까지는 좋은 예언이나, 17절은 좀 두려운 예언입니다.

아람과 에브라임은 곧 무너지지만,

그 후에는 앗수르의 압제를 받을 것인데

그것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처참한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그 날, 곧 앗수르의 날이 이를 때 이스라엘은 황폐화 될 것에 대해서,

이사야7:장의 나머지 끝 절까지 (◑3단락에) 자세하게 예언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증표로 보여주신 임마누엘은

임박한 유다의 멸망으로부터 구원을 상징함과 더불어 철저한 심판의 표적입니다.

아람, 북왕국의 두 왕으로부터 구원, 과 더불어 앗수르에 의한 심판입니다.

 

 

정리하면, 풍전등화의 위기를 당한 남유다 아하스는,

하나님이 ‘임마누엘’의 약속까지 주시면서

즉, ‘하나님이 너희와 같이 해 주시겠다’는 임마누엘의 약속을 주시면서,

그들을 구원하려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하스는,

그런 ‘말 뿐인 약속’보다는, 실제 현실적 도움을, 앗수르에게 구한 것입니다.

강대국의 도움보다, 하나님의 도움이 더 위대하다는 것을.. 못 믿은 것입니다.

 

아하스가 앗수르에게 도움을 구했다는 내용은

본문 사7장에는 안 나오지만,

왕하16장과, 대하28장에 자세히 나옵니다.

 

아하스 왕은, 위기 앞에서, 돈을 싸들고 인간적 도움을 구하러 갔습니다.

아하스 왕은 앗수르 왕에게

“나는 왕의 신복이요 왕의 아들이라 이제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나를 치니

청컨대 올라와서 나를 그 손에서 구원하소서”(왕하16:7)라며 사신단과 보냈고,

 

그때 하나님의 성전과, 왕궁과 관리들의 집에서

재물을 각출하여 예물로 보냈습니다. (왕하16:8, 대하28:21)

 

이것은 완전히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위였습니다.

또한 이것은 무엇이 참된 도움이 되는지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행동이기도 했습니다. 사31:1

 

‘임마누엘’, 하나님이 함께 하여 도와주시면

아람~이스라엘 연합군이 몰려와도 잠시 고난을 겪을 뿐이지

금방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아하스가, 임마누엘의 징조를 믿지 않고,

현실적인 도움으로, 앗수르를 끌어들인 결과, 재앙을 맞이하게 됩니다.

 

17 여호와께서 에브라임이 유다를 떠날 때부터 당하여 보지 못한 날을

   너와 네 백성과 네 아버지 집에 임하게 하시리니 곧 앗수르 왕이 오는 날이니라.

 

인간적 전략은 시행착오와 함께 더 큰 불행이 몰려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하스의 전략은 일시적 효과를 얻었지만 오히려 역효과만 낳게 되었습니다.

 

앗수르 왕은 도와주는 척 했으나 “돕지 아니하고 도리어 군박(窘迫)하였고” 대하28:20

성전과 왕궁과 방백들의 집에서 재물을 끌어 모아

“앗수르 왕에게 주었으나 유익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대하28:21

혹 떼려다가, 더 큰 혹 붙인 격이지요. 이것은 엄청난 시행착오였습니다.

 

강대국의 도움만이 진정한 도움이 될 줄 알고

인간적 지혜와 노력을 총동원하여 수고했으나.. 오히려 역효과만 낳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현실적으로 내가 어떤 큰 어려움을 당하면,

전화를 하루 종일 붙잡고 번호를 누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힘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또는 돈을 마련합니다.

여차하면, 돈을 써서라도 해결하려 합니다.

 

다 아닙니다.

임마누엘의 도움을 구하십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요?

아하스는 불신앙적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해 표적(임마누엘)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아하스와 같이 헛된 우상(대하28:)을 믿고 섬기지 말고,

무능한 존재인 사람도 의지하지 말고

허무한 돈이나 세상 권력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순수하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임마누엘)’만 믿읍시다.

그것이 곤경에서 벗어나는, 가장 정도요, 가장 빠른 길입니다.

 

 

◑3. 세상 힘을 의지한 결과 당하는 고통  사7:18~25 

 

본문에는 “그날에는”이라는 말이 네 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이는 아하스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옹고집을 부리면서

잘못된 결정으로 앗수르 왕을 끌어들인 날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보다 인간적 권력을 의지하여 앗수르 왕을 끌어들이므로

“앗수르 왕의 오는 날”(7:17),

즉 그날에 하나님께서 그 백성의 땅을 징계하시고 심판하실 것입니다.

 

세상 힘(앗수르)을 의지하고,

이는 자신의 경내에 끌어들이지 말아야 할 것(앗수르)을 끌어들인 결과가 무엇인지

본문을 살펴봅시다.

 

▲18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애굽 하수에서 먼 지경의 파리>와

<앗수르 땅의 벌>을 부르시리니

19 다 와서 거친 골짜기와 바위틈과 가시나무 울타리와 모든 초장에 앉으리라. 

 

‘파리와 벌’은 큰 무리, 즉 군대를 상징합니다. 파리 떼, 벌 떼는 숫자가 많은 게 특징이죠.

하수로 이뤄진 애굽에는 파리가 들끓었고, 산지인 앗수르 지역엔 벌떼가 많았습니다.

<애굽의 파리>는 애굽의 군대를, 하나님은 애굽도 끌어들이시겠다는 겁니다.  

<앗수르의 벌>은 앗수르의 군대를 가리킵니다.

 

당시 애굽이 유다를 친 것은 주전 609년 바로느고가 올라와서 요시야 왕을 친 때입니다.

그리고 앗수르가 유다를 치러 올라온 것은, 히스기야 때 가장 극심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자, 시커먼 파리 떼처럼 몰려오고,

거대한 벌떼처럼 몰려와서 골짜기와 바위틈과 모든 초장에 앉게 됩니다.

그래서 유다나라 전체를 짓밟게 될 것을 예언합니다.

 

▲20절, 그 날에는 주께서 하수 저편에서 세내어 온 삭도 곧 앗수르 왕으로

   네 백성의 머리털과 발털을 미실 것이요 수염도 깎으시리라

 

'세 내어 온 삭도'

아하스가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셀에게 상당한 양의 돈을 주고

군대를 동원한 사실을 뜻합니다. 왕하16:7, 8

 

그들은 ‘삭도’, 즉 무서운 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머리털, 발털, 수염을 밀어버리고 깎는다는 것은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전쟁에서 승리한 사람들이 패배한 포로들에게 행하는 방법으로

상대방에게 패배감과 수치심을 안겨주기 위하여 행하는 행동입니다.

불신앙적 어리석은 행동이 이런 패배와 수치를 겪게 만든 것입니다.

도움을 받으려고 끌어들인 것이, 오히려 수치와 패배를 안겨줄 것입니다.

 

▲21절, 그 날에는 사람이 한 어린 암소와 두 양을 기르리니

22 그 내는 젖이 많으므로 뻐터를 먹을 것이라.

   무릇 그 땅 가운데 남아 있는 자는 뻐터와 꿀을 먹으리라

 

삶의 환경이 초라하고 비천하고 고달파져서,

한 사람이 아주 적은 가축만 기를 것이고, 

거기서 나오는 젖의 양도 많지 않을 것인데,

살아남은 사람의 숫자가 워낙 적으니까.. 그것으로도 충분하고 남아 돈다는 것입니다.

 

앗수르의 삭도를 피하여 남아 있는 자에게 제공되어질 음식은 응결된 젖(버터)과

야생꿀이 그 전부입니다.

그들은 싫증이 날 정도로 계속 그것을 먹게 될 것이다. 양식이 없다는 뜻입니다.

  

▲23절, 그 날에는 천 주에 은 일천 개의 가치 되는 포도나무 있던 곳마다

질려와 형극이 날 것이라

 

본절 이하에서 질려와 형극으로 특징지워지는 황무지에 대한 묘사가 계속 반복됩니다.

남은 자들이 뻐터와 꿀로 연명하게 되는 것은

포도와 곡식으로 가득 채워졌던 언덕들이 모두 가시덤불로 뒤덮였기 때문입니다.

 

'은 일천 개'는 은화 일천 세겔을 말합니다.

이처럼 최상품의 포도나무들이 재배되던 곳이

그 날에는 질려와 형극으로 무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유다 백성들에게 임할 비극을 극명하게 암시하고 있습니다.

 

24 온 땅에 질려와 형극이 있으므로 살과 활을 가지고 그리로 갈 것이요

찔레와 형극으로 가득 차고 사나운 들짐승들이 서식하게 될 그곳이기에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살과 활을 갖고 나가야 한다는 거죠.

그 땅이 아무 쓸모가 없는 황무지로 변한다는 뜻입니다.

 

25 보습으로 갈던 산에도 질려와 형극 까닭에 두려워서 그리로 가지 못할 것이요

그 땅은 소를 놓으며 양의 밟는 곳이 되리라

 

이전의 유다는 포도나무로 상징되는 농업 경제를 자랑했었다.

그리고 요단강 변에는 제법 농사도 잘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이제는 소와 양으로 상징되는 유목으로

겨우 생계를 꾸려나가게 될 것이고.. 이것이 선지자가 본 유다의 미래 모습입니다.

   

유대의 모든 산등성이는, 개간이 잘 되어 좋은 경작지가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곳도 황폐하게 무너져서 호미와 곡괭이로 농사를 짓던 곳이

찔레와 가시덤불이 무성한 버려진 땅이 된 것입니다.

 

얼마나 파괴되었으면 그곳에 들어가기도 무서울 정도로

잡초만 무성한 야산으로 퇴락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을 버리고 앗수르에게 도움을 청한

아하스의 어리석은 선택과 미련한 행동의 결과가

엄청난 경제적 파탄을 몰고 오게 된 것입니다.

 

아하스와 그 측근 지도자들이

국가적 위기를 당했을 때, (아람과 북왕국의 연합 침입)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의 약속을 버리고,

앗수르라는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세상 힘을 의지했을 때,

 

국가 전체의 기강을 무너뜨리고 경제를 파탄(破綻)나게 만들어

국민들의 삶을 처참하게 만들어 놓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치는 말

여러분은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될 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어떤 선택을 하십니까?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징조를 선택하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아하스 왕처럼 어리석은 잘못된 정책으로

인간적 힘, 권력 있는 힘을 끌어들이겠습니까?

 

분명히 아십시오.

하나님을 선택하기보다 세상의 조건들을 선택하여 끌어들이면

그것은 나중에 나에게 큰 불행을 몰고 오는 원인이 된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의지하고 매달릴 것은 영원한 반석이신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