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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뢰아 교회가 세워지다

LNCK 2021. 9. 14. 19:02

2023 04 16  / 사도행전 17:10~15 / 베뢰아 교회가 세워지다 - YouTube

베뢰아 교회가 세워지다         행17:10~15            

 

지난 시간 우리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세워진 이야기를 살펴보았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는 유럽의 두 번째 교회 였죠. 
유럽에 세워진 첫 번째 세워진 교회는 빌립보교회 였습니다. 

유럽에 세워진 세 번째 교회가, 오늘 본문의 베뢰아교회입니다. 
먼저 지도를 한 번 보시면, 여기가 베뢰아 지역인데요. 


데살로니가 에서 베뢰아는 72킬로 입니다. 
서울에서 천안 정도 거리인데, 걸으면 3~4일 걸리겠죠.

그런데 이 베뢰아 지역은, 산기슭에 있는 작은 도시입니다. 
그러니까 주요 도시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주요 대도시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첫 번째 세워진 빌립보 교회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 이었죠. 
두 번째 세워진 데살로니가는, 마가도냐 주의 수도 였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주요 도시를 거점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의 반해 베뢰아는 산기슭에, 쉽게 말하면 촌 동네입니다. 
대도시에서 떨어진 외딴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자 그러면 바울이 왜 산기슭에 와 있겠습니까? 
바울은 급히 데살로니가에서 도망쳐 나왔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깡패를 동원해서 바울을 잡으러 다녔습니다. 
잡히면 바울은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는, 그들의 눈을 피해, 밤 중에 황급히 도망쳐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산기슭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자 그러니까, 이 베뢰아 성은, 원래 바울의 계획에 없었던 지역입니다. 
도망치다 보니까 얼떨결에 오게 된 곳입니다. 

그런데 그 도망치는 걸음에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도망쳐서 나왔는데, 거기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 우리도 인생을 살다 보면,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내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죠. 

'나는 살면서 내 계획대로 모든 일이 잘 됐다' ... 그런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를 믿고 나서는 더욱 더 그렇죠. 
왜냐하면 예수님의 뜻대로 이제부터 살아야 하니까요. 

저도 개인적으로, 예수를 믿고 나서, 제 계획과 제 뜻대로 된 적이 많이 없습니다. 
그런데 뒤돌아 보면, 그게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되는 때가 또 반드시 있습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거기에 하나님의 이야기(섭리)가, 우리의 삶 가운데에 들어옵니다. 
그때는 모르지만, 나중에 뒤돌아 보면 그걸 깨닫는 거죠. 

잠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 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본문의 바울의 걸음이 그랬습니다. 
베뢰아는 원래 바울의 계획에 없었던 곳입니다. 
도망치다가 오게 된 곳이, 베뢰아였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구원과, 계획이 있었습니다. 
자 오늘 베뢰아교회가 그렇게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바울은 늘 그랬듯이, 베뢰아에서도 먼저 유대인 회당에 들어갑니다.  17:10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자 그런데 여기에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바울이 전한 설교가, 사도행전에 하나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사도행전의 저자가 누가죠. 보통 누가는, 바울이 갔던 곳마다
바울이 전환 설교를 길거나 짧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빌립보에서도, 바울이 전한 설교를 기록해 놓았고요. 
데살로니가에서도, 바울이 전한 메세지를 기록해 놓았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누가는 바울의 설교를 3가지 포인트로 기록했습니다. 
첫 번째 성경을 가지고, 두 번째 뜻을 풀어, 세 번째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그러니까 누가는, 바울이 가는 곳마다 바울의 설교를 
짧게라도 기록을 했습니다. 

자 그런데 베뢰아에서는, 바울의 설교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바울이 무엇을 전했는지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아래에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대신에 누가는 무엇을 기록 하죠? 
바울의 설교를 듣는 회중들의 태도를 기록합니다. 

그러니까 누가의 관심은, 지금 바울의 설교가 아닙니다. 
누가의 관심은, 설교를 듣는 베뢰아교인들의 반응에 있습니다. (나중에 자세히 설명함)

베뢰아교인들이 어떻게 설교를 들었는가? 거기에 초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베뢰아 교인들은 어떻게 말씀을 들었는가요?> 
누가는 세 가지로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1. 첫 번째 그들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설교를 들었습니다. 

17:11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누가는 베뢰아 교인들을 말하는데, 데살로니가 교인들과 비교해서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면 안 되는 게 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떠나고 나서, 그 교회 교인들을 디스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너그럽게 못했다. 까칠했다. 불편하고 그래서 힘들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도,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정말 잘 들었습니다. 
살전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그들은 바울의 설교를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났죠? 
'그 말씀이 너희 믿는 자 가운데 역사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데살로니가 교회도 설교를 정말 잘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설교를 어떻게 듣고 계십니까?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멍하니 듣지를 않았겠죠. 
그리고 뭐 팔짱을 끼고서 고개를 숙이고 있거나, 
아니면 삐딱하게 앉아서 듣지 않았을 것입니다. 

귀는 쫑긋 세우고, 경외함을 가지고 말씀을 경청했을 것입니다. 
선포 되어지는 말씀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집중해서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 앞에 자기를 복종시키며, 그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기 때문이죠. 

그 결과 '그 말씀이 그 가운데 실제로 역사했다'고 말합니다. 살전2:13

여러분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칭찬 받을 만한 교인 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 만큼 훌륭한 청중을 찾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지금 데살로니가 교회를 돌려서 디스하는 게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는, 베뢰아 사람들을 가리켜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웠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더 너그럽다'는 말은 의미가 좀 모호합니다. 어떤 의미일까요? 
'너그럽다' 는 말은, 헬라어로 '유게네스' 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1) 하나는, '도량이 넓은' 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넓다 라는 뜻이죠. 
마음이 넓다 라는 건, 마음이 그만큼 열렸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트인 사람들이어서' (공동번역)
'더 고상한 사람들이어서' (새번역) 
'more noble' (여러 영어성경들)

그러니까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마음이 열려져 있습니다. 
제가 설교를 전하다 보면, 간혹 벽에 부딪히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듣는 청중의 마음이 닫혀져 있다' 라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설교를 전하는 게 너무나 힘듭니다. 

여러분 설교는, 청중을 향해 전하는 행위잖아요. 그러니까 인격적인 커뮤니케이션 이죠. 
그러다 보니까 청중들의 태도가, 설교를 전하는 자에게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설교자도 사람인지라, 설교를 듣는 회중의 반응에 따라 힘을 얻기도 하고요. 
힘이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설교를 하는데, 누군가가 졸거나 다른 것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아무래도 힘이 빠지기 마련입니다. 

반대로 설교를 잘 듣고 있다는 반응이 보이면, 설교자는 힘이 나는 게 사실입니다. 
'내가 전하는 메시지는 정말 부족하지만, 그래도 잘 들으려고 마음을 열어주고 계시는구나'
열린 반응이 보이면 힘이 나는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베뢰아 교인들은 마음이 활짝 열려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씨뿌리는 비유'를 빌리자면, 그들의 마음이 '좋은 땅' 이었다는 얘기입니다. 
길가, 돌짝밭, 가시밭이 아니라, 좋은 마음 밭을 가지고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2) 또 하나 '너그럽다' 헬라어 유게네스는, 
문자적으로 '태생이 좋은' 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뜻입니다. 

 

고전1장에 보면, 바울이 '너희 중에 문벌이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고전1:26
그때 '문벌이 좋은'이 오늘 본문에 '유게네스-너그러운' 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영어성경에 보면 '너그러운'을 more noble 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더 고상한, 더 고귀한' 이라는 뜻입니다. 
베뢰아 사람들이 그렇다는 거죠. 

그런데 여러분 인간적인 눈으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 주provincia 전체의 수도 였습니다. 
수도이다 보니, 모든 게 수준이 높았겠죠. 

반대로 베뢰아는, 산기슭에 있는 작은 도시입니다. 
그러니까 외딴 곳에 위치에 있는 동네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상식적으로, 어느 쪽이 더 문벌이 좋습니까? 어느 쪽이 더 태생이 좋습니까? 
더 문벌이 좋고, 더 배운 사람들은, 베뢰아 보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의도적으로 이 표현 '유게네스 - noble'을 
데살로니가 교인이 아니라, 베뢰아 교인들에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하나님의 눈에는, 큰 대도시의 사람들이 더 많이 배우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바르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고귀하고 고상해 보인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하나님 앞에 정말 고귀하고 고상한 자인가요? 
하나님의 말씀에 바르게 반응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너그러운 (유게네스)' 마음처럼, 
마음의 좋은 밭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훨씬 더 고귀하고 고상한 자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베뢰아 교인들은, 이처럼 너그러운 (유게네스)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이 너그러운 noble 마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하나님 보시기에, 
다른 교인들 보다, 더 고귀하고 고상한 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너그러운 - 유게네스 - noble'이 쓰인 신약의 다른 용례
눅19:12 '이르시되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안스로포스 유게네스 


◑2. 두 번째 베뢰아 교인들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설교를 들었는가요? 
그들은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설교를 들었습니다. 

17:11b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여기 '간절한 마음'도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요.  *프로쑤미아

▲1. 하나는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들었다는 뜻입니다. eagerness

그러니까 어떻게든 은혜를 받고자 하는 갈급한 마음으로 말씀을 들었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갈급한 마음에, 하나님은 은혜를 주십니다. 

간절함이 있으면, 거기에 은혜가 부어져요. 
예배의 자리에 나아와 앉아서 기도할 때부터 눈물이 쏟아지고,
찬송가 가사 한 구절 한 구절이 마음을 다독입니다. 
그 찬송가 가사 한 구절, 한 구절에 눈물이 떨어집니다. 

여러분, 중국의 처소교회나 북한의 지하교회를 보십시오. 
거기에는 악기 하나 제대로 갖춰진 게 없습니다. 숨어서 예배를 드리니까요. 
그런데도 얼마나 예배가 뜨겁고 은혜를 누리는지 모릅니다. 왜 그렇죠? 
그 안에는 간절함이 있기 때문이죠. 목숨을 걸만한 간절함이 있는 겁니다.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변화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는 자리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동적으로 기계적으로 우리가 변화되는 게 아닙니다. 

반드시 거기에는 베뢰아 교인들처럼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17:11
물론 이 간절한 마음도, 성령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이죠. 
다른 말로 영적인 굶주림과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제가 애를 키우다 보니까, 육아에서 제일 어려운 것 중에 하나가 
애들 밥 먹이는 거더라고요. 애들이 밥을 잘 안 먹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왜 밥을 먹이는 게 어려울까요? 
배고픔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이유가 있는 거죠. 

영적으로 같은 원리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어떻게든 부족하지만 주일날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배불리 먹이기 원합니다. 
여러분들이 말씀을 먹고, 말씀으로 여러분들이 변화되고, 자라기 원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나는 배가 고프지도 않은데, 왜 자꾸 저렇게 말씀을 내게 먹이려고 하나?' 
'아니 왜 저렇게 소리를 지르면서 먹이려고 하나?' 속으로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배고픔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거죠. 

그러니까 오히려 말씀을 먹는 대로, 소화되기 보다는, 뱉어내는 분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영적인 허기가 있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허기를 느끼지 않으면, 먹으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실 먹는다 하더라도... 참 맛을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도 그렇지 않습니까? 
배고프지 않으면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맛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허기와 갈증이 없으면, 
교회는 영적으로 피폐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먹지를 않는데요. 먹으려고 하지를 않는데요. 
먹어도 참 맛을 느끼지를 못하는데요. 
여러분, 그런 교회는 사실 영적으로 죽은 교회나 다름 없습니다. 

영적으로 살아있는 교회는, 배고픔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배고픔을 느껴야만, 그 말씀을 정말 하나님의 말씀으로 먹을 수 있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그 말씀이, 그 사람을 자라게 하고, 변화시키는 영적인 양식이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많은 말씀 들은
우리의 목마름, 굶주림, 간절함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사43:3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내 자손에게, 나의 복을 내 후손에게 주리니'

물을 주시는데, 목 마른 자에게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계22: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 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여기서도 목마른 자를 부르고 계십니다. 
이처럼 성경의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겠다는 많은 말씀들은
우리의 목마름, 우리의 굶주림, 간절함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베뢰아 교인들에게는, 이 마음이 있었다는 거죠. 
베뢰아 교인들은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2. 또 하나 '간절한 마음'으로 들었다는 것은,  학자들의 주석에 의하면 
'기꺼이 (편견이 없이) 들었다'는 뜻이라고 말합니다.  inclination; readiness of mind

유대인들에게는 지울 수 없는 편견이 하나 있죠. 
자기들이 기다려온 구약의 '메시아는, 십자가에서 죽을 수 없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 그렇죠? 그들이 기다렸던 메시아는 정치적인 메시아 였기 때문이죠.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로 부터 구해줄 정치적인 메시아 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메시아가 십자가에 달려 죽은 나약한 인간이다? 
그는 절대로 메시아가 될 수 없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편견에 사로잡힌 나머지 유대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바울을 죽이려고 했던 거죠. 
편견에 딱 붙잡혀 있어서, 십자가만 얘기 해도, 말씀이 들어가지가 않는 거죠. 

자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러한 편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하나님의 말씀만 골라 듣는 것, 
이것도 자기의 편견을 가지고 말씀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내가 말씀은 이미 어느 정도 다 알고 있다'
그런 태도로 듣는 것 또한, 편견을 가지고 듣는 태도입니다. 

여러분 오늘은 어떻습니까? 아마 교회를 오래 다닌 분들은
오늘 본문 베뢰아 이야기를 수없이 보고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듣기 전부터 '오늘 목사님이 12절을 가지고 주로 설교하시겠구나' 
예측을 하고, 이미 설교를 다 들은 사람처럼 듣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자 그래서 설교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그동안의 신앙의 경험, 
그리고 그런 경험을 통해 생긴 자기만의 기준과 방식, 
그것도 편견의 한 종류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거를 내려놓지 않는 한, 말씀을 들어도 거기에 변화가 없습니다. 
자 그러나 베뢰아 교인들은, 그런 편견을 가지고 설교를 듣지 않았습니다. 

마치 마음 밭이 깨끗한 도화지여서 
말씀이 떨어지는 대로 말씀을 흡수하고요, 그 말씀으로 새롭게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11

※참고로 여기 '간절한 마음', 같은 단어가 쓰인 성경의 용례를 보면  *프로쑤미아
고후8:11 '이제는 하던 일을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완성하되 있는 대로 하라'  
:12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 


◑3. 세 번째, 베뢰아 교인들은 말씀을 듣는 것으로 끝내지 않았습니다.

들은 말씀을, 날마다 성경에 비추어 검토했습니다. 

 

17:11b '바울이 전한 말씀이 그러한가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자 여기서 '상고했다'는 말은, 단순히 '생각하다' 라는 뜻이 아닙니다. *아나크리노
'조사하다. 검토 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to investigate, examine, scrutinise, question

그러니까 바울이 전한 말씀이 성경이 가르치는 말씀인지, 
스스로 집에 돌아가서 검토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이런 태도는, 지금 바울의 설교를 의심하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바울의 설교를 비판하려는 게 아닙니다. 

'바울이 뭐 틀린 거 없나?' 하고 흠을 잡으려는 게 아닙니다. 
이들은 바울을 불편하게 만들려고, 날마다 성경을 확인한 게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말씀을 분별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정말 바울이 전한 말씀이 성경에 맞는 내용인가?' 분별하려고 했습니다. 왜일까요?
그래야 자기들이, 그 들은 말씀에 더욱 확신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흠을 찾으려고 '날마다 그러한가?' 성경을 살핀 게 아니라 
자기들의 신앙의 유익을 위하여, 말씀을 스스로 검토했던 것입니다. 

'그 말씀이 그러한가?' 확인하고 
그러하다 확신을 더욱 가지게 되었을 때, 
그 말씀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마지막 세 번째 과정이 있으십니까? 
여러분은 집으로 돌아가서, 말씀을 다시 한 번 살피는, 이 마지막 과정이 있습니까? 

'말씀이 정말 그러한가?' 확인하고, 
그러하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을 때, 
그 말씀을 여러분의 삶에 적용하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여러분, 이 세 번째의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의 신앙에 유익을 있습니다. 
여러분의 말씀의 적용은, 제가 여러분들에게 일일이 시켜주는 게 아닙니다. 
말씀의 적용은 목회자 역할이 아니라, 여러분 스스로가 하는 겁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내가 변화되고 돌이켜 할 부분이 어떤 부분 일까? 
말씀을 가지고 스스로의 삶에 적용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가지고, 한 주간을 치열하게 적용하며 살아내는 겁니다. 

그렇게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의 선포되는 말씀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그래야 그 말씀이,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오늘 베뢰아 교인들에게는 이 과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가 무엇이죠? 
17:12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여기 보면 '많은' 이라는 표현이 두 번이나 반복됩니다. 
먼저 '믿는 사람이 많고' 
또 '적지 아니하나' ... 많다는 거죠. 
한 마디로 다른 교회들 보다, 베뢰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믿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12절에는, 우리 성경에는 누락된 표현이 하나 있어요. 
'그러므로' 라는 헬라어 접속사입니다  *멘 운

그러니까 12절은 '그러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12절의 결과는, 앞에 11절이 원인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왜 베뢰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믿게 되었는가요?  :12

첫 번째, 그들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두 번째, 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세 번째, 그들은 날마다 그러한가 성경을 상고해서, 
한 마디로 좋은 마음의 밭이어서, 베뢰아 교회에 영적인 부흥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부흥이 일어날 때 꼭 방해하는 사탄의 역사가 있습니다. 
여러분 13절을 한 번 보십시오.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을 핍박했던 유대인들이 베뢰아까지 좇아옵니다. 

여러분 이들도 이 정도면, 참 대단한 열심입니다. 극성스럽게도 바울의 괴롭힙니다. 
자 그래서 바울이 베뢰아 교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후에 베뢰아 교회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여러분 바울이 떠나고 난 후에, 이 교회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부분을 우리가 상세히 알 수는 없습니다. 

왜냐면 바울이 베뢰아 교회에 보낸 편지가, 우리 손에 들려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바울은, 자기가 세운 교회를 떠나고 나서는, 그 교회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첫 번째 세운 교회가 빌립보교회죠. 빌립보 교회를 세우고 나서 
훗날 빌립보서를 보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를 세우고 나서도, 그 교회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게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죠.

이후에 바울은 베뢰아를 떠나 고린도로 넘어갑니다. 
거기서 고린도교회를 세우고 나서도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그게 바로 고린도전후서죠. 

그런데 바울이 왜 이렇게 세운 교회마다 편지를 보냈을까요?
그 교회들마다 문제가 터졌기 때문입니다. 
그 문제를 수습하기 위해서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베뢰아 교회에 보낸 편지는, 성경에 없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베뢰아 교회에 보낸 편지가 없는 이유는, 
다른 교회 보다 상대적으로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죠? 베뢰아 교회는, 말씀을, 정말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듣고요, 
말씀대로 그대로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그들은 정말 말씀이 그러한가 날마다 성경을 가지고 
자신의 삶 가운데 적용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자 그러니 교회가 말씀으로 든든히 세워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도, 바울이 전하는 설교에 초점을 맞추지 않습니다. 
설교를 듣는 베뢰아 교인들의 태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 베뢰아 교인들의 영적인 반응을, 우리 독자들에게 꼭 알려주고 싶었던 거죠. 
왜 베뢰아 교회가 든든하게 설 수 있었는가요? 
왜 베뢰아 교회는, 바울이 훗날 보낸 편지가 없었는가요? 

베뢰아 교인들의 말씀을 받는 태도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noble
-간절한 마음으로 eagerness
-설교말씀이 정말 그러한가 성경을 가지고 확인하는 과정을 통해  examine
그들은 들었던 말씀을 가지고 실제로 자기의 삶과 교회를 
함께 말씀대로 고치면서 세워나갔던 것입니다. 

여러분 본문 말씀은 어려운 말씀이 아닙니다. 새로운 말씀도 아니고요. 
어쩌면 진부한 해석 일 수 있고요. 들었던 말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도, 우리 교회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저는 목사로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목사는,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입니다. 

자 그런데 여러분들도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어떠한 부르심이죠? 
여러분들은 말씀을 듣는 자로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이 부르심은 놀랍고도 영광스러운 부르심 입니다. 
세상 사람 모두가 이 부르심을 받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불러 주셔야만, 말씀을 듣는 자리로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은혜 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들음에 여러분의 구원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의 성장도 이 들음의 어떠 함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죽고 사는 것이, 말씀을 듣는 것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말씀을 듣는 자로서의 부르심은,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전하는 것 뿐만 아니라, 말씀을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이것이 여러분의 신앙을 좌우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주님의 '씨뿌리는 비유'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거기서 예수님의 초점은 '씨 부르는 자'가 아닙니다. 
초점은 '씨를 받아들이는 네 종류의 땅'입니다. 

길가, 돌밭, 가시떨기 밭, 좋은 땅 ... 4종류의 땅이 나옵니다. 
씨 뿌리는 자는 동일한 씨를 뿌립니다. 

그러나 씨를 받아들이는 4종류의 땅에 따라, 결과가 다릅니다. 
그 중에 유일하게 열매를 맺는 땅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좋은 땅' 하나입니다. '좋은 땅' 하나만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의 초점은 간단하죠. 
결국에 열매를 맺는 신앙이란, 듣는 것이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씨 뿌리는 자'보다 중요한 것은, '씨를 받는 땅의 상태, 마음 밭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좋은 땅'만이 열매를 맺습니다. 

자 그래서 오늘 누가의 초점도, 바울의 설교가 아닙니다. 
오늘 누가의 초점도, 좋은 땅에 있습니다.
그 좋은 땅, 좋은 마음의 밭이, 바로 베뢰아 교인들의 마음 밭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가 이런 '베뢰아교회- 좋은 땅'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베뢰아 교인들처럼, 들은 말씀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서 
성경을 펴서 확인하는 겁니다. 
제가 전한 말씀을 성경을 가지고 여러분들이 분별하는 겁니다. 
저 역시 말씀에 오류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성경의 메세지와 같다면 
그 말씀을 따라 여러분들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내는 겁니다. 

그렇게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에 세우는 겁니다. 
그럴 때 성경의 저자 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부흥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달라진 우리의 모습을 통해 
반드시 선한 영적인 영향이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오는 새로운 분들도 그런 말씀에 선한 도전과 영향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 12절에 '그러므로'의 결과가 우리 가운데도 있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게 이런 영적인 은혜를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