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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11장 해석, 메시아가 다스리는 나라

LNCK 2021. 9. 16. 08:12

 

◈메시아가 다스리는 나라         이사야11장     이사야서 설교모음      여러 설교 정리

 

※아래는 이사야 11:장의 '각 구절별 해석'입니다. 

적용 및 설교는 '이사야서 설교모음'을 클릭하세요! (초록색) 

 

 

이사야 11장은 구약에 나타난 <메시아 예언시>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장엄한 시입니다.

성서학자 빌트버거는 말하기를 “이사야 11장은 히브리시의 진주이다.

그 영상의 다양함과 적절함은 놀랍기 그지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사야 11장을 그림으로 그려본다면 참으로 아름다울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더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 안에 강림하시는 여호와의 영,

곧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것은 그림으로 그리고 싶어도 그릴 수가 없습니다.

 

저희가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본질이 무엇이며

그 사역은 또 어떠한가 살펴보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이새의 줄기’가 다스릴 나라        사11:1~9

 

▲1절,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레바논의 울창한 삼림처럼 위용을 자랑하던 세상 제국의 급속한 몰락과,  *사10장   

미미한 그루터기에서 싹을 틔우기 시작한 메시야 왕국이 극적으로 대비됩니다.

 

선지자가 '다윗'대신 '이새'란 이름을 사용한 것은,

그로부터 나올 싹이 다윗 이전의 지위, 곧 농부였던 그 아버지 이새가 상징하는

미천한 신분으로 태어날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땅에 묻힌 뿌리에서 연한 가지(네체르)가 돋아남같이,

메시야는 무너진 다윗 가문에서 미천하고 보잘것없는 인간으로 오실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그는 비천하고 멸시받는 나사렛 사람(Nazarene)으로 불리워야 했다. (마2:23).

 

그러나 그 가지는 곧 자라서 열매 맺는 장성한 나무로 발전할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의 삶 역시 그러할 것입니다.

 

‘줄기’는 ‘나무의 밑둥’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큰 나무가 잘려나가고 덩그러니 남아 있는 그루터기을 말합니다.

          (NIV, 공동번역은 stump, '줄기' 대신에 '그루터기'로 번역)

 

앞서 사6장에서, ‘그루터기-남은자’ 신앙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는 더 구체적으로, 그 남은 자, 그루터기 (본문에서는 ‘줄기’)에서

메시아가 탄생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를 바라볼 때에 도무지 소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교회는 마치 잘려나간 나무 밑둥처럼 황량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잿더미 속에 피어난 한 싹처럼

이새의 줄기에서 나온 한 싹 예수님은 우리에게 희망이 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밑둥, 그루터기, 이새의 줄기는.. 낙심하면 안 됩니다.

계속 자기 자리를 지키며, 자기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 쓸모없는 것 같은 밑둥에서.. 메시아가 나오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로 적용하면,

이름 없는 무명의 인물이, 큰 인물을 키워낸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이 모두 ‘볼품없는 밑둥’의 사명을 묵묵히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찰스 스펄전을 회심시켰던 무명의 집사 ☞ 당신은 숨은 영웅

*빌리 그래함을 전도한 친구 ☞ 뜻밖에 주어진 은혜

*바울의 눈을 뜨게 한 아나니아 ☞ 바울의 비전 형성 과정 中

 

그런데 그 ‘메시아의 새 생명’은 내속에도 있습니다.

 

몇 년 전에 강원도 고성에서 산불이 나서, 수만 헥타르의 산을 새까맣게 태워 버렸습니다.

그 땅은 소망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몇 년 후에 가보니 그 죽은듯한 나무 밑둥에서 새싹이 돋아나기 시작했습니다.

 

한 해 두 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땅에는 다시 나무가 자라고

식물이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떠나갔던 산짐승들도 돌아오고, 각종 약초들과 식물들도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생명의 힘은 그처럼 끈질기고 강한 것입니다.

예수님안에 있는 생명도 이처럼 끈질기고 강합니다.

 

지금은 아무리 내 인생이 불 난 산처럼 황량하다 할지라도 절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소망의 싹이 내 안에서 자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왜 소망의 싹이 됩니까? ↙   *11:1~3  이새의 줄기에서

 

▲2절,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이사야서는, 아하스 시대에 불신앙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지만,

그 심판 가운데서도, 소망의 메시지가 함께 선포되고 있습니다.

 

11장에는, ‘이새의 줄기에서 나오는 싹’입니다.

물론 이것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지만,

이사야 살아생전에는 (이중예언으로 볼 때) 히스기야를 예언합니다.

 

적용하면, 오늘 우리 각자도 ‘이새의 줄기에서 나오는 싹’입니다.

왜냐하면, 내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 2절이, 예수님은 물론이요 나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지혜와 총명의 신, 모략과 재능의 영,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에 대한 설명은

             ☞모략과 재능의 신 을 보십시오!

 

▲3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원문대로 읽으면 '여호와 경외를 코로 호흡한다' 입니다.

 

'코로 호흡한다'는 말은 단순히 냄새를 맡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좋은 향기를 만끽하는 것,

다시 말하면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메시야-왕은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마치 향기로운 꽃향기를 숨쉬듯이,

오로지 여호와께 대한 경외로 참된 만족과 즐거움을 삼으십니다.

 

그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으로 충만하였기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가장 큰 즐거움으로 삼고 신앙공동체를 건설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많은 왕들은 ‘여호와 경외’를 등한히 하여 거역하고 배반했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아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기초로 삼고 ‘신앙 공동체’를 건설할 것입니다.

 

메시아 왕은 사람을 외적인 모습을 보고 판단하지 않을 것이며

겉에 드러난 피상적 현상만 보고 판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지혜와 총명의 영’이 충만하기에 미래와 내부 깊은 것까지 파악하고

성령으로 판단하고, 결정할 것입니다. 절대로 오판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4절,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정직으로’ 

공의롭고 정직한 평등 사회의 구현, 그것은 이스라엘의 오랜 꿈이었습니다.

 

‘빈핍한 자...겸손한 자’

메시야의 통치가 실현될 때, 가장 기뻐할 이들은 바로 세상에서 멸시받고 억압받던

'빈핍한 자'와 '겸손한 자'입니다.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악인을 죽일 것이며’

메시야의 날은 지상의 질서가 뒤바뀌는 격변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날에 높은 자는 낮아지고 낮은 자는 높아집니다.(삼상2:8).

   

정의와 공평이 강 같이 흐르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반드시 악인들을 처단하여 제거해 버리실 것입니다.

 

▲5절,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공의로...성실로’ 

왕의 허리에 두른 띠에는

'공의'(체데크)와 '성실'(에무나)이라는 두 가지 장식이 새겨져 있습니다.

 

지도자가 누구든지, 이렇게 자기 통치 이념을 <공의로움과 진실함>으로 정한다면

가장 공정하고 사람 살기에 가장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놓을 것입니다.

 

3~5절은, 한 마디로 <예수님은 공의로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입니다.

직장에서, 사회에서, 아무리 훌륭한 지도자라도, 실수 할 때가 있습니다.

이해관계 때문에, 무고한 사람을 억울하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것으로,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십니다.

예수님은 오직 공의로, 정직으로 심판하십니다.

  

우리가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가진 자 보다 없는 자, 멸시 받는 자,

고통당하는 자를 찾아가서 도우심으로 사랑과 긍휼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공의와 긍휼의 역사를 이루시는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영’을 우리 속에 모신 성도들은

<세상을 공의로 통치하게 됩니다.>

 

물론 성도가, 예수님처럼 완벽하게, 공의로 통치할 수는 없지만,

예수님과 비슷하게, 공의로 통치하는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6절,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7절,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이리와 표범으로 상징 되는 악인들의 포악함이 복음으로 제거되고

신자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평화로운 세상이 온다는 것입니다.

 

메시야의 통치가 실현될 그날에 '분리됨'을 그 특징으로 하는 죄악 세상은 마감되고, 

적대하던 모든 세력들이 '더불어 함께 사는' 평화와 공존의 새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이 새 세상이 오기 위해서, 우선 피조물을 허무한 데 굴복케 만드는

죄로부터 자유함을 입는 새창조가 선행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롬8:19,20 ,고후5:17).

 

한편, 먼 미래에 완성될 이 새로움은

최초의 낙원 상태의 회복과 연관시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복된 세계는 미움도, 갈등도, 다툼도 없는 조화의 세계였으며,

푸르른 초장과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동산에서 이리와 표범, 곰, 사자 등의

맹수들이 어린 양과 염소, 송아지 등과 어울려 놀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말은 ‘함께’라는 것입니다. (6~7절) 

‘함께 살며’ ‘함께 누우며’ ‘함께 있어’ ‘함께 먹으며’ ‘함께 엎드리며’

 

그것은 짐승의 성질, 또는 기질로 볼 때

서로 도저히 함께 어울릴 수 없는 동물들이 함께 어울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가 함께 있고,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들이 함께 엎드리어 놀게 된다는 것입니다.

 

메시아 왕의 통치를 통하여, 이런 평화의 세상이 만들어 지게 될 것입니다.

또한 예수의 영(성령)을 모신 이들이, 추구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명하신 ‘원수를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8절,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젖 먹는 아이가...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이 복된 낙원 상태는 두 갓난 아이 - 하나는 젖을 먹고, 다른 하나는 젖을 막 뗀 - 가

독사의 구멍에 손을 넣고 장난하는 충격적인 장면에서 그 절정에 달합니다.

 

메시아 왕이 다스리는 세상에서는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그가 통치하는 세상에서는 불행과 저주가 사라지고

상함도 해함도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나라를 동경합니다.

분쟁과 다툼이 가득한 세상이 변하여 평화롭고 안전한 세상이 오기를 고대합니다.

서로 물고 뜯는 세상이 아니라 서로 위로하고, 붙들어주고,

일으켜 세워주는 세상,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가 오기를 고대합니다.

줄이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것을, 장차 먼 미래에 이루어질 나라로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보통 종말의 천년왕국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예수의 영을 내 안에 모시고, 현재적 하나님 나라를 사는,

우리 각자가, 오늘, 이루어야 할

주님이 다스리시는, 평화의 나라인 것입니다.

현재적 하나님의 나라, 지금이 천년왕국입니다.   *무천년설 입장

 

엡2:13~14절에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무시고”

 

▲9절,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나의 거룩한 산'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그것은 후반부의 '세상'과 병행하여,

하나님에 의해 구속되고 새로워진 세계를 총칭하는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65:25)

 

‘해(害)됨도 없고...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는' 우주적인 평화가 보장되기 위해서는

그 전에 먼저 여호와를 아는 지식, 곧 여호와를 참으로 경외하고(잠1:7)

온 마음으로 그를 기뻐하며(11:3) 기꺼이 그 앞에 복종하는 지식이

온 땅에 편만하게 퍼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성경에서 대단히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입니다.

애굽에서 재앙을 내리실 때, 하나님이 가지신 목적이 바로 이스라엘 뿐 아니라

애굽과 온 천하로,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출7:17, 9:14, 10:2, 14:4, 18

                                 ☞<하나님을 아는 지식> 관련글 모음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안에서는 해됨도 상함도 없게 됩니다.

물이 바다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하게 되면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 명예욕과 자기를 자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다 물 속에 잠기게 됩니다.

 

정리하면,

1. 그는 공의와 정직으로 세상을 통치하실 것입니다(3~5절).

2. 그의 통치를 통해 해함과 상함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 올 것입니다(6~9절).

3. 그의 통치로 인하여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9b절).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사야11:9

 

이 구절은 성경의 큰 원리를 다시 우리에게 재기억remind 시켜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단 모이지만, 목표는 “흩어지는 것”입니다. 행 1:8 등.

 

또한 자발적, 적극적으로 흩어지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만들어(대립, 다툼)

사람들을 온 지면에 흩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그리고 홍수 후에 흩어지라고 명하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 창 1:28, 9:1

 

그 문화 명령을 망각하고 당시 사람들은 비옥한 시날 평지에서

편안하게 안주하고 흩어짐을 면하기 위해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만약 교회가 흩어지지 않고, 모이는 성도를 수용하기위해 

건물 올리는 데만 열중한다면

현대판 바벨탑을 쌓는 것과 같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성도들 사이에 언어가 혼잡하게 되고,

같은 언어(한국말)를 쓰지만, 마음은 나눠지게 됩니다.

 

그처럼 스스로 흩어지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강제로 흩으셔서 선교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바벨탑 주위로 모이지 말고, 선교를 위해 잘 흩어질 줄 알아야 합니다.

사실 교회가 지나치게 대형화되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좋은 결말이 없었고,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아니고, 성경이 말하는 모습도 아니라고 봅니다.

 

목회자는 “교회가 크면 성공한 목회자다!”라는 의식을 버리고,

평신도들도 “교회가 크면 성공한 교회다!”라는 의식을 하루 빨리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세밀하게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흩어지라고 하는데, 사람들은 모여 있으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습이 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모여서 잘 살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사명을 위해 흩어져서 잘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큰 부흥이 일어났고, 하루에도 3천명이 더해졌던 초대교회가

핍박을 통해서 각처에 흩어졌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는 잘 보여줍니다.

우리는 모이는 것도 잘해야 하지만

선교마인드를 가지고 흩어지는 것도 잘해야 합니다.

 

 

◑깃발을 치켜세우리라          사11:10~16

 

▲10절,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이새의 뿌리’

'뿌리'(쇼레쉬)는 1절의 '싹'(호테르) 혹은 '가지' (네체르)와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이새의 뿌리 속에 감추어졌던 그분이 마침내 높은 곳에 우뚝 설 그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를 볼 것이며, 그에게 관심을 갖고 그를 경배하기 위해

몰려들 것입니다.

 

'기치'(네스)는 사람들을 소집할 목적으로 멀리서도 볼 수 있게 만든 표시

혹은 깃발을 뜻합니다.

그것은 때때로 군대의 깃발을 산 위에나 탑 위에 세우는 것을 뜻합니다.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그가 거주하시는 장소'는

말일에 세상 만민이 몰려드는 역사의 중심지요

또한 구원의 빛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구원의 중심지가 될 것이므로

당연히 영화로울 것입니다.

 

또한 이곳은 교회를 가리킨다고 보아도 틀리지 않습니다.

이 모든 일은 복음 선포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이방에 널리 전파된 신약 시대에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롬15:12)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3:14)

라는 말씀을 통하여, 자신이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높이 들릴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십자가 위에 높이 들리게 될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열방이 예수님을 찾아 나올 것입니다.

유대인보다 이방인들이 더 열심히 그리스도를 찾아 나오게 될 것입니다. (사65:1, 49:22)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사60:3)는 말씀처럼

세계 각국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을 찾아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찾아 나오는 사람들에게 제공 되어지는 안식과 평화,

그리고 평온의 상태로 인하여 영광과 존귀가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그곳은 상하고 고통 받는 심령들이 평안을 얻는 자리이며(마11:28~30)

은혜를 갈망하는 자들이 찾아와서 만족함을 얻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그 자리를 영화롭고 아름답게 만드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민을 위한 구원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전 인류에게 제시 되어진 유일한 희망과 안식의 깃발이십니다.

 

또한 오늘날, 내 삶의 현장에서,

우리 각자가 ‘작은 예수’로서

그런 예수님의 삶(십자가의 깃발)을 구현해야 하는 것입니다.

 

▲11절, 그 날에 주께서 다시 그의 손을 펴사 그의 남은 백성을 앗수르와

애굽과 바드로스와 구스와 엘람과 시날과 하맛과 바다 섬들에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

 

주께서 이전에 그의 전능한 손의 위력으로써 그의 백성들을 구출해 내셨던 것처럼, (출12:51)

이제 또 '다시' 그의 백성들을 포로 상태로부터 구원해주실 것입니다.

 

앗수르와 애굽이 먼저 거론된 것은

이들 두 나라가 이사야 시대의 주요 강대국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상 언급된 나라들은 사실상 이방 세계 전부를 가리킵니다.

선지자의 예언은 부분적으로는

복음이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에게 전파되었을 때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완전한 성취는 '모든 영적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때' (롬11:26)

비로소 이루어질 것입니다.

 

12절, 여호와께서 열방을 향하여 기치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의 쫓긴 자들을 모으시며

땅 사방에서 유다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리니

 

‘여호와께서 열방을 향하여 기호를 세우시고’

주께서 이 일을 이루어 가시는 방식이 설명됩니다.

그는 '기치'(깃발)를 세우실 것입니다.

이는 열방 중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불러 모으기 위함입니다.

 

그가 기호를 세우면 열방은 그의 백성을 석방하며 호송까지 해줄 것입니다. (49:22, 62:10)

스룹바벨과 에스라의 영도하에서의 귀환은 그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기 ‘다시 그의 손을 펴사’라는 말은

‘그의 두 번째 손을 더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래의 날에 구원하시는 그의 능력의 손을 두 번째 펼치게 될 것입니다.

첫 번째가 이집트에서의 출애굽을 위한 능력의 손길이었다면,

두 번째는 바벨론 포로의 상태에서, 또는 먼 미래의 사건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능력의 손을 펼치실 것입니다.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앗수르뿐만 아니라 이집트, 에티오피아 등

세계 각처에 흩어져서 고난을 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신28:64~68, 렘24:9~10, 암9:9)

그의 능력의 손을 펴서 이끌어내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자기 사람을 잊어버리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강력한 손을 펴셔서 회복시켜 주십니다.

 

▲13절, 에브라임의 질투는 없어지고 유다를 괴롭게 하던 자들은 끊어지며

에브라임은 유다를 질투하지 아니하며 유다는 에브라임을 괴롭게 하지 아니할 것이요

 

솔로몬 시대 이래 남북으로 나뉘어진 이스라엘이

장차 통일된 한 민족을 이룰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일은 상호간에 적대시하던 감정이 해소될 때 성취됩니다.

이 적대감은 에브라임 쪽에 더 강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8:1, 12:1, 왕상11:26, 시78:60-68)

 

이는 유다를 괴롭게 하는 자가 에브라임이라는 반복된 진술에서 드러납니다.

이에 반해 에브라임에 대한 유다의 적의(敵意)는 본절 끝에서 단 한번 나옵니다.

 

포로에서의 귀환 이후, 이런 분열상은 현저히 줄어들었습니다.

반목하던 형제들이 하나로 화친하여 함께 위대한 승리를 만들어 내게 될 것입니다.

  

나눠졌던 남북 이스라엘이, 메시아 왕 예수 안에서 그들이 서로간의 증오를 버리고

화목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민족에게도 남과 북이 서로 미워하고 적대하는 모든 요소가 사라지고

화목하는 날이 속히 오기를 고대합니다.

 

▲14절, 그들이 서쪽으로 블레셋 사람들의 어깨에 날아 앉고 함께 동방 백성을 노략하며

   에돔과 모압에 손을 대며 암몬 자손을 자기에게 복종시키리라

 

회복된 이스라엘 곧 신앙으로 일치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언제나 성공만이 따른다는 말입니다.

왜냐면 주변국들이 그들을 공격할 때,

그들은 어깨를 같이하여 단합된 힘으로 방어할 것이므로 항상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실제 전쟁을 이야기한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로 회복된 이스라엘의 우월성과 탁월함을 비유적으로 서술한 것입니다.

 

'어깨'는 바다를 향해 경사진 블레셋 해안의 별명입니다.

이스라엘은 굶주린 독수리가 높은 곳에서 먹이를 덮치듯이 블레셋을 공격할 것입니다.

여기 언급된 나라들은 이스라엘에 인접한 주변국들인데 이스라엘을 자주 괴롭혔었죠.

 

이 말씀은 서로 화목하게 된 유다와 에브라임이 힘을 합하여

주변의 나라를 정복해 나아갈 것을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포로생활 하던 초라한 사람들이

위대하게 성장하여 세상을 점령해 가므로

다윗 왕 시절의 영광을 재현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서쪽으로 사사시대 때부터 자신들을 괴롭혔던 블레셋을 정복하며

동쪽으로는 에돔과 모압, 암몬을 차례로 정복하여 옛 영화를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15절, 여호와께서 애굽 해만 gulf 을 말리시고 그의 손을 유브라데 하수 위에 흔들어

뜨거운 바람을 일으켜 그 하수를 쳐 일곱 갈래로 나누어 신을 신고 건너가게 하실 것이라

 

과거와 미래가 시적으로 혼합되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한층 강력하고도 풍부하게 표현합니다.

 

그 옛날 하나님께서 애굽의 홍해를 마르게 하사

그 백성을 구원하셨던 것처럼, 이제 여호와께서 그보다 더 놀라운 권능으로써

뜨거운 바람을 일으켜 유프라테스 강물을 말리운 다음,

손으로 그것을 내리쳐 7개의 작은 강물로 쪼개사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이

신을 신은채로 건너올 수 있게 해주실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구원을 말할 때마다

출애굽의 테마는 주선율로서 거듭 나타납니다. (40~55장, 렘16:14, 23:7).

 

16절, 그의 남아 있는 백성 곧 앗수르에서 남은 자들을 위하여 큰 길이 있게 하시되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게 하시리라

 

‘앗수르에서부터 돌아오는 대로가 있게 하시되’

'대로'(메실라)는 인공적으로 건축한 큰 길 혹은 공공 도로를 말합니다.

남은 자들이 대로를 통해서 돌아온다는 사상은

이사야서에서 자주 나옵니다. (19:23, 35:8, 49:11, 62:10).

 

본문의 요점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원수의 손에서 해방시킬 뿐만 아니라,

또한 대로를 준비하기까지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아니하셔서

돌아올 때도 전혀 어려움이 없도록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위대한 구원 사건은, 다음 장에서 노래 불러지는 찬양으로 일단락됩니다.(12장)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구원의 길을 활짝 열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흩어진 유대인들이 고향 땅으로 돌아올 때에

그 앞에 놓여 있는 장애물들을 전부 제거해 주실 것입니다.

 

이집트에 있는 나일 강의 해만(海灣 gulf)들을 말리어 길을 만드시고,

유브라데스 강의 강물을 뜨거운 바람을 일으켜 일곱 갈래로 흩어지게 하여

신을 신고도 건널 수 있을 정도로 만드실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할 때에 홍해수를 갈라지게 하여

길을 만든 것처럼 할 것입니다.

이는 남은 백성들이 메시아 왕국으로 돌아올 때,

방해되는 모든 요소들을 제거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그의 남아 있는 백성을...위하여 큰 길이 있게”하신다고 했습니다.

즉 대로 highway 를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자기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회복되는 것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도 구원의 자리에 오기를 계획하고 계십니다.

이방인의 수가 차고 나면 반드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시아 예수님을 찾아 나오게 될 것입니다. (롬11:25~26).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반드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강력한 손을 펴실 것이며, 장애물을 제거해 주실 것이며,

그 앞에 대로를 열어주실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계 만민이 십자가 깃발 아래로 모여오기를 희망하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류의 유일한 희망이심을 기억하여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메시아 왕국을 건설하십시다.

우리가 메시아 예수의 역군이 되어

그의 나라, 그의 뜻, 그의 계획을 성취하는 경륜의 도구로 사용 받으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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