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슨 퍼디 선교사는 3년 선교하고 소천했지만, 아들 존 퍼디 선교사가 보이지 않게 일했습니다.
제가 인요한 박사님 보면 신기한 생각이 들어요. 선교사님의 후예로서 어떻게 저렇게 신통하고 열리고 열정이 있고 참 훌륭한 자제가 자라게 되었을까.. 신기한 생각이 듭니다.
조금 전에 강덕영 회장님이 책을 한 권 제게 주셨는데, 제가 찾던 자료가 그 책 속에 있어서 눈이 번쩍 띄었습니다.
이 책에, 충청도 영동에서 선교하다가 30살 나이에 장질부사(장티푸스)로 죽은 제이슨 퍼디 라는 선교사의 얘기가 여기에 실려 있습니다.
제가 제이슨 퍼디 선교사의 스토리는 확실히 문서로 본 적이 있는데 제이슨 퍼디 라는 이름을 잊어버렸습니다. *Jason G. Purdy, 부례선
여러 군데 뒤졌는데 못 찾았는데, 강덕영 회장님이 쓴 이 책에서 드디어 찾아서 참 기분이 좋습니다. <여명의 빛, 조선을 깨우다> 강덕영 저
제이슨 프레디가 프린스턴 대학 석사 까지 받고 26살에 한국 조선의 선교사로 왔는데
그때가 1926년 입니다.
이 분이 열심히 선교를 하다가, 그때 장티푸스가 너무 번졌던가봐요. 그래서 장티푸스 약을 가지고 지역을 돌면서 그렇게 선교를 하다가 갑자기 소나기가 와서, 행여를 보관하는 집에서 하룻 밤 지내고 가게 되었습니다.
행여는, 사람이 죽은 뒤 장사 지낼 때 메고 가는 기구인데, 그 집이 마을에서 좀 떨어진 집이었지요.
하필 그 행여가 그 전날, 장티푸스 환자를 장례 지냈던 행여였습니다. 거기서 감염이 된 거지요. 그래서 장티푸스를 앓다가 이제 조선에 선교사로 온 지 3년 만에 죽었습니다.
그의 아들이 존 퍼디가, 아버지가 죽을 때에 유복자였습니다. 그 위에 누나가 있고,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였는데, 그 젊은 선교사 부인이 얼마나 상실감이 크고 당황했겠습니까.
그래서 출산을 하고 미국으로 갔다가 해방된 뒤에 아들 존 퍼디가 목사가 되어서 한국으로 왔는데
미국 군정청에 군정청 장관이 소장 two star 이었습니다. 주1)
한국이 해방된 뒤에 북한은 소련군이 진주하고 남한은 국군이 진주해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설립 될 때까지 군정청이 다스렸습니다. 존 퍼디 선교사가 군정청 장관의 비서가 되었습니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 군정청 장관이 존 퍼디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내가 군정청 책임자로서 조선을 통치해야 겠는데 신실한 조선인을 좀 소개해 주시오. 믿을 만한 사람, 정직한 사람들 한 50명을 뽑아서 추천해주시오!'
그래서 존 퍼디는, 자기 어머니하고 의논하고 주위에 선교사들 하고 의논해서 50명을 추천했는데 그 중 48명이 진실한 크리스천 이었습니다.
그들이 군정청의 요소요소 실무에 포진을 해 가지고 한국의 공산화를 막고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로 건국 되는 일에 소리 없이 일한 것이지요.
그래서 아버지 제이슨 퍼디 선교사는 3년 만에 장티푸스로 죽었지만 그 아들 존 퍼디로 이어졌습니다. 해방이후의 한국이 독립된 뒤에, 당시에 좌우 이념 대립이 엄청났습니다.
▲그때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90%가 문맹이었습니다. 특별히 호남지역이 참 슬픈역사인 것이 천석꾼 만석꾼이 많았지요. 그건 무슨 얘기입니까? 소작인이 그만큼 많았다는 얘기지요.
그 소작인들에게 공산주의 사상은 그들에게는 마치 복음과 같았습니다. '지주를 타도하고 땅을 다 나눠준다'
거기에 아주 영웅처럼 활약한 사람이 박헌영 입니다. 충청도 예산 출신인데, 젊은 청년 시절에는 서울정동감리교회를 다닌 적이 있습니다.
그가 22살에 공산주의 이론을 접하고 그 이후 철저한 공산주의자가 되어가지고 조선노동당의 지도자가 되었지요. 아주 유능했습니다.
머리가 비상하고, 그 박헌영이 도덕성만 있었더라면 베트남의 호지명 급이 됐을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너무 권모술수가 심하고 너무 공산주의 사상 그걸 가지고 자기 야심을 채우려다가 결국 북한에 건너가서 김일성 손에 죽었지요.
그때 군정청에서 여론조사를 했습니다. '새로 세워질 나라는 공산주의-사회주의를 해야 하느냐, 민주주의-자본주의를 해야 되느냐?'
그 질문에 우리 국민 80%가 사회주의 해야 된다고 응답했습니다. 그게 정식으로 문서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박헌영의 조선 공산당 당원이 당시 1백만명이 있었습니다. 당시 북한은 소련이 점령하고 있었고, 김일성이 벌써 다 차근차근 군대 만들고 뭐 토지개혁하고, 공산화를 착착 진행하고 있는데..
당시 남한은 일반 민중의 80%가 사회주의-공산주의를 선호했으니까 그때는 1917년 소련이 공산국가로 성공하면서 칼 막스와 레닌이 선포를 했습니다. '우리는 피압박 민족들을 해방시키겠다. 특별히 동방이 중요하다.'
레닌이 조선을 찍어서, '조선을 일본에서 해방시켜야 된다!' 그러고는 상해에 있는 임시정부에 소련이 전략적으로 금을 세 수레를 보냈습니다.
지금 우리 돈으로 거의 200억 될 겁니다. 조선을 공산화 시키려는 하나의 작전으로 중국 상해 임시정부에 금을 세 수레를 보냈으니 상해 임시정부 자체가 물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해방 이후의 역사를 보면, 우리나라는 우리가 공산주의가 되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김정은 장군님!' 하고 살뻔 했었습니다.
이거는 '보이지 않는 손'의 간섭이 있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이 나라를 지키셨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 나라를 특별히 쓰시려고, 이 나라를 구별해서 이승만 박사 같은 인물.. 탁월한 영재 아닙니까.
이승만 박사는 '자유민주주의 라야 된다!' 고집스럽게 일반 여론을 다 극복하고 100만 당원을 자랑하는 박헌영 그쪽 세력을 다 이기고 대한민국에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대한민국 건국의 역사를 보면, 이거는 하나님의 간섭 없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서두에 제가 제이슨 퍼디를 언급했습니다만 그는 1926년 프린스턴 대학교 신학석사 까지 졸업하고 엘리트로서 한국에 와서 (짧게) 3년 선교 하다가 장티부스로 죽었지만 그 유복자 아들 존 퍼디가 해방 이후에 어머니와 한국에 돌아와서
미군정 장관의 비서가 되어서, 48명의 정직한 크리스천들을 추천해서 정부 각 부서에서 보이지 않게 일한 것이지요.
그런 과정을 거쳐서 이 나라가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되고 기독교가 세계에서 성공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기독교가 성공한 나라의 대표가 코리아 아닙니까!
◑1970~80년대에 길을 잃은 한국 개신교
우리 개신교 역사가 140년 정도 되는데 (1885~) 한국의 근대사와 현대사를 주도해 왔지요.
교육, 의료, 여성해방, 한글깨우침.. 근데 우리가 중간에 길을 잃었습니다.
1970년대 80년대가 한국 기독교의 최고 호황기였습니다.
정부의 인구 통계 자료를 보면 1970년에 한국의 크리스천이 390만 명이었습니다. 10년 뒤인 1980년에 810만 명입니다.
1970~80년 사이 10년간에 기독교 신자가 두 배 이상 늘어났습니다. 기업이나 경제용어로 말하면 '대호황' 이었습니다.
그때 우리 교회 지도자들이 잘못 했다.. 저는 그렇게 반성합니다. 왜냐? 당시 정치가들, 경제인들이 '잘 살아보세!' 하며 경제적인 그런 구호를 박정희 때부터 열심히 얘기할 때, 교회는 좀 달랐어야 돼요.
'바로 살아 보세!' 이렇게 외쳐야 했습니다.
잘 사는 것도 좋은데, 바른 가치관, 바른 정신, 바른 역사의식을 가지고 투철한 반공정신을 가지고 바로 사는 운동을 했어야 되는데..
그 좋은 (호황기) 시절에 교회 지도자들이 너무 순풍에 돛 달고 교회가 부흥되고 하니까 정치하는 사람, 경제 하는 사람들의 '잘 살아보세!'에 편승했습니다.
▲1970년대 그 호황기에 한국 교회가 세 가지 병이 들었다 그럽니다.
"한국교회 3대 질병"이라 말합니다.
1) 첫째는 무속화, 무당 역할을 목사가 했던 거죠. 신학적 사상적 결핍이 낳은 결과입니다.
2) 두 번째는 물량화 복음의 진리를 가지고, 바로 사는 운동을 성경으로 바로 가르쳐야 되는데 물질축복, 병 낫는 거, 물량으로 커지는 것을 추구했습니다.
교회도 자꾸 땅 사고, 집 사고, 집 짓는.. 외형으로 나간 거지요.
3) 세번째는 귀족화 무슨 목사들, 교회 지도자들이 대접 받고 그러면서 귀족화가 되어 버렸습니다.
일본교회와 한국교회 출발점이 달랐던 거는 일본 교회는 처음에 귀족들, 지식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이 파고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일본 교회는 저변에 힘이 없지요.
한국교회는 초창기에 백정, 쌍놈들, 북청 물장수, 새우 장수.. 이렇게 밑바닥으로 들어갔습니다. 바닥으로 들어가서 신분 장벽을 타파하고 바닥에서 교육을 통해서 복음을 상류층으로 전파하니까 한국교회는 선교가 성공한 거지요.
한국 교회가 바닥에서 시작해서 불길처럼 일어났는데 1970년대부터 축복 받아 가지고 잘 살게 되고 교회도 커지고 그러면서 목사들이 귀족화가 되고...
뭐 교회의 체질이, 선교 초기에 선교사들이 목숨 걸고 장티푸스로 죽어가면서 온갖 고생을 하면서 선교하던 우리 선배들의 그 정신, 목숨 걸고 투쟁하던 야인정신... 이런 게 없어진 거지요. 교회 안 울타리 안에서, 우리가 안주한 거지요.
◑1970~80년대에 민주화 운동의 변질
그 1970년 80년대 이후가 제일 위험했습니다. 1980년대 주사파 세력이 대학가 운동권에 파고든 거지요.
저 김진홍 목사도 운동권 출신 입니다만 저는 70년대 운동권이고, 그래서 순수하게 민주화 운동만 했습니다.
당시 김지하 시인, 정치인 김덕룡.. 이런 분들과 동년배입니다. 그때 우리 운동권은, 왜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도 잘하고 안보도 잘하는데 왜 헌법을 유린하고 유신헌법을 만드냐? 민주주의 해야 됩니다.. 그걸 외치다가 우리는 감옥가고 매 맞고 운동권이 되었는데...
▲운동권의 변화에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광주사태 입니다. 1980년 광주사태 (518민주화 운동) 때, 광주시 금남로를 피로 물들게 하면서 그 뒤로 운동권이 변질되었습니다.
그 운동권에 북한 주사파가 스며든 것이지요. 처음에는 멋도 모르고 있었지요. 그러다가 1980년대 중반이 되어서 보니까 후배 운동권들이 변질되어 있었습니다. '주사파'가 되어 있었습니다. *김일성주체사상
느닷없이 김일성 주체사상을 떠들고 '남조선 해방' 운운하며 그래서 우리가 후배들을 불러 가지고 중국집에서 우동을 사먹이면서
'자네들 왜 그래? 민주주의는 우리가 헌법 대로 민주주의 하자고 하는 게 운동권이지, 자네들은 좀 변질되지 않았냐?'
그때 벌써 민주노총, 전교조, 전대협이 시작되었습니다. 통일부장관 이인영은 나와 같이 감옥 살던 기장 목사의 사위입니다.
이런 후배 운동권들은 완전히 우리하고 생각이 다른 겁니다. 민주화의 목표가 다른 겁니다. 김일성주체사상이 민족의 희망이다.. 라고 생각하고 북한에 밀항선 타고 왔다 갔다 하고
또 임수경은 북한에 학생회 회비를 가지고 보내고 임수경은 북한에 가서 영웅 대접을 받고 또 북한에서 돈을 받아 온 사람도 있고 1980년대 초부터 광주사태를 분기점으로 민주화운동이 변질되었습니다.
근데 이걸 중간에 우리가 딱 차단을 했어야 되었는데.. 그걸 못 했어요.
교회는 교회 안에 머물러 있고, 우리 같은 1970년대 운동권 세대는, 뭐 거기에 신경 못 쓰고 각자 생업에 바빴고
대학생들이 저희들끼리 하다가, 북한 세력하고 손을 잡고 남한의 옛날 박헌영의 남조선 노동당 중에 살아남은 패들 하고 서로 연결이 되어 가지고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아까 박헌영을 얘기했습니다만 박헌영의 한국에서의 유일한 혈육이 박능경 스님입니다. 충청도에서 지금 스님으로 있는데, 박능경 스님하고 누가 접촉했냐면
전임 서울시장 박원순이 박능경과 서강대 국사교수 서인석과 <한국사연구회>를 만들었습니다.
박원순은 아까운 사람입니다. 시민단체를 위한 기부금도 잘 모으고 똑똑한데 사상이 병들었어요.
박원순이 대기업에 가서, 무슨 약점을 협상을 해서 그가 그당시에 기부금 700억을 모았습니다. 그래서 좌파 시민단체를 먹여살린 인물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한 푼도 쓰지 않고, 청렴하게 살았지요. 서울시장을 연임했었지요.
▲그래서 한국역사학회 자체를 좌파가 잡았어요. 주도했지요. 한국 역사를 쓰는 사람들이 주로 좌파가 포진하게 된 것입니다.
제가 6.25 때 설교 자료 뽑으려고 서점에 가서 해방이후 와 6.25 전후사 역사책을 찾다가 제가 깜짝 놀랬습니다.
한국 현대사 관련책 10권 중에 8권은 좌파적 관점에서 쓰여져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승만은 죽일 사람이고, 박정희는 매국노이고 소련은 해방군으로 들어왔고, 미국은 점령군으로 들어왔다.. 뭐 이런 소리만 써 놓은 겁니다.
'야 이거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려야 되겠구나!' '우리 목사들 재교육부터 시켜야 되겠구나!' 제가 그런 생각을 늦으나마 합니다.
◑코로나 19사태인 지금이 한국교회의 기회입니다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들에게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전염병이 내 백성 가운데에 유행하게 할 때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대하7:13~14)
13절에 '혹 전염병이 내 백성 가운데에 유행하게 할 때에' 본문에 전염병 얘기가 나오지요.
나는 코로나 19 전염병 때문에 비대면 예배를 보고 그런다고 목회자들이 걱정이 많은데 나는 현실의 사태를 그렇게 부정적으로 안 봅니다.
코로나 19사태를 계기로 어차피 우리가 회개하고 새로 출발해야 됩니다. 어차피 한국교회는 병 들었어요. 어차피 우리가 고칠 것 고치고, 정신 바짝 차리고 새 출발해야 됩니다.
그러고 옥석이 갈라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코로나 전염병 때문에 너무 부정적으로 볼 필요 없습니다.
이 일로 교회에 성도들 출석이 만약 줄게 된다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어차피 떨어질 신자는 떨어지는 겁니다.
교회는 병이 골수에 지금 파고들어 있는데 아직 모든 골수까지 완전히는 안 왔습니다.
이번 코로나 이 기회에, 우리가 자성을 하고 새출발 하면 되는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긍정적인 얘기를 합니다.
'전염병이 돌 거든..' :13 14절에 3가지 명령이 나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역사를 고쳐주시고, 땅을 고쳐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14
전염병의 이 시기를 거치면서 하나님이 땅을 고쳐 주신다는 것입니다.
가치관을 고쳐 주시고, 생각을 고쳐 주시고 이 백성들의 생각, 교회의 생각을 고쳐주시고 이 땅을 고치신 뒤에.. 통일이 이루어져서 통일한국이 세계 선교에 일등 국가로 나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1) 악한 길에서 떠나 나는 과거에 '박정희 회개하라, 군사 정부 물러가라!' 하다가 징역 살았는데 징역 살다면서 감옥에서 성경 보다가 체험 했어요.
'여호와께서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이와 같이 이르노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렘4:3~4
예레미야서를 읽다가 4:3~4절을 읽으면서 말씀이 살아서 움직이는 체험을 했습니다. 살아있는 말씀과 살아있는 내가 서로 만난 것이지요. 이 말씀을 회개의 눈물을 흘리면서 읽었습니다.
'아 내가 참 껍데기만 하나님이 종이지 가짜이었구나, 내가 위선자구나!' 내가 먼저 회개해야 되었는데, 남보고 자꾸 회개하라고 외쳤구나.. 그때 보니까 성경이 내 영혼의 거울이었습니다. 성경 들고 볼 때, 자꾸 눈물이 그 위에 떨어지니까 책장에 얼룩이 졌습니다. 눈물을 닦으면서 읽었습니다.
그때 눈물 떨어진 자국들이 있어서 이 성경책을 안 바꾸는 거지요. 지금 누덕누덕 해 가지고 있지만 그때 그 정신을 바꾸고 싶지 않아서 지금까지도 그냥 쓰고 있습니다.
'내가 먼저 회개해야 되는구나' 누구 탓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2) 스스로 낮추고 두 번째로 겸손입니다.
코로나 19가 왜 생겼습니까? 과학이면 다 되는 줄 알고 하나님 자리에 인간의 올라가려고 교만 떨다가 생긴 병 아닙니까?
코로나는 아마 금년 말, 내년 중반까지 있다가 물러나겠지만, 내 예상에, 우리가 삶의 방식을 고치지 않으면 또 찾아 올 것입니다. 이거는 또 오게 되어 있습니다.
3)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기도해서 부르짖어라! 그래서 하나님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코로나 19, 이런 위기 상황에 오히려 우리가 영적으로 쇄신되는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이럴 때 우리가 준비해야 돼요. 경제학 원리에 '불경기에서 호경기를 준비하고 호경기에서 불경기를 대비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에 1907년에 평양대부흥운동, 그때 조선 교인이 20만 명이 늘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1970년대에, 대부흥이 일어나던 시기에 그때 호경기 뒤에, 우리가 질적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그냥 교회 영업한 것이지요. 그렇죠?
목사들도 막 양산을 하고 질적이 아닌 교회가 환영받을 수 있습니까?
신앙의 세계는 깊이의 세계이고, 영혼 깊이 들어가야 되는데 그냥 그냥 확장에만 힘썼습니다. 우리가 참 회개 해야지요.
지금 우리가 그런 걸 다 돌아보면서 이 말씀을 새겨야 될 때입니다.
'너희가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부르짖으며 하나님의 얼굴을 찾으면 내가 땅을 고쳐 주고, 사람을 고쳐 주겠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을 수 있게 되기 바랍니다.
제가 여기 와서 참 은혜를 받습니다. 우리가 뿌리를 찾아야 되는데..
우리 나라와 교회가 지금 이만큼 자라도록 과거에 이 어른들이 목숨 걸고 복음을 전했는데 우리도 뿌리를 잃어버리 사는 이게 우리가 부끄러운 일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우리가 이 교파 저 교파, 너 교회 내 교회 문제가 아닙니다. 다 힘을 합쳐야 돼요. 힘을 합쳐 가지고 이 기독교의 새로운 전기를 만들어 낼 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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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1945년 9월부터 1948년 8월까지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 소속 현역 장성들이 역대 군정장관으로 취임했다.
초대 군정장관은 아놀드 소장 (Archibold V. Arnold, 재임기간 1945.9.12∼1946.1.4) 제2대는 러취 소장 (Archer L. Lerch, 재임기간 1946.1.4∼1947.9.11) 소장 제3대는 딘(William F. Dean, 재임기간 1947.11.25∼1948.8.15) 소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