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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 말라

LNCK 2021. 9. 22. 09:13

https://www.youtube.com/watch?v=2L-KhXzMxNc

◈울지 말라         눅7:11~17, 시56:8              출처

며칠 전에 제가 이 본문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읽고 난 다음에 이상하게 오랫동안 제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어요. 
'울지 말라.. 울지 말라..' 

글쎄 제가 무슨 지금 특별히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울고 있는 처지도 아닌데 
제 마음 속에 '울지 말라.. 울지 말라..' 하는 음성이 자꾸 들려요. 

나중에 생각하니까 '아 우리 교회 안에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교우들이 많이 있는데, 
(그 교우들을 생각할 때마다, 제 마음 한 구석에는 눈물이 있었어요.) 

아~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 성도들에게 울지 말라는 말씀을 주시려고
제게 이런 음성을 주셨다'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장례행렬의 관을 따라가며 울고 있는 한 여인을 보게 됩니다. 
그는 갈릴리 바닷가에 있는 가버나움 동네에서 
남쪽으로 하룻길쯤 여행하면
골짜기에 아름답게 자리잡은 '나인'성이란 동네가 나옵니다.  *'유쾌하다, 즐겁다'는 뜻
그 동네에 살고 있던 여인이었습니다.

아마 처녀 때는 아름다운 여인이었겠죠. 
마음에 드는 남자와 사랑하면서 결혼을 했어요. 얼마 후에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아마 인생에 있어서 가장 달콤한 맛을 보면서 사는 어떤 기간이 있다면
갓 결혼해서 자녀 낳고, 재롱부리는 애들을 쳐다보면서 오손도손 지내는 기간이라 생각합니다.

이 여인도 그런 시절이 있었지요. 
그래서 참 행복한 앞날이 기다리고 있다는 푸른 꿈을 꾸면서
하루하루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어느날 남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루 아침에 과부 신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요즘 세상과 달라서 그 당시에는 일단 여자가 과부가 되었다 하는 것은 
그 앞날에 엄청난 시련과 극심한 가난과 고독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며 하루하루를 보냈을까요.
그래도 유일한 희망은, 이제 자라고 있는 어린아들이었을 것입니다.

정성을 다해서 키웠습니다. 고생하는 줄도 모르고 키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죽은 아들을 놓고 '청년아!' 하고 부른 것을 보니까 ('아이야' 하지 않고)
아이가 제법 컫던.. 적어도 십대 후반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키운 엄마 입장에서는 참 대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가정에 기둥이 생겼다. 이제는 기대고 살만한 기둥이 생겼구나'
하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이 아들마저 세상을 떠나버렸습니다.
설상가상 이라는 말이 있는데, 눈 위에 서리가 또 내린다는 뜻입니다.

고난 당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설상가상'이란 말이 딱 들어맞습니다.
정말 고난은 엎친데 덮치는 격으로 불행한 일이 연속적으로 찾아오는 성향이 있습니다.

아마 눈물을 흘리고 싶어도
더 흘릴 눈물이 없을 정도로 눈물샘이 말라버린 이런 여인을 우리가 봅니다. 

▲사람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동네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속으로는 다들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여자는 무슨 죄가 많아서 팔자가 이렇게 사나운가,
남편을 먼저 보내더니.. 이제 하나 밖에 없는 아들까지 먼저 보내는구나...'

시신을 마루에 눕히고는, 머리를 반듯하게 빗긴 다음에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갈대로 만든 관에다 그 시신을 누입니다.
그리곤 두 손을 꼭 모아놓습니다.
이것이 유대나라의 입관 절차입니다.

그리고는 장례는 당일에 치룹니다. 하루 밤을 더 보내지도 않습니다.
오후 5~6시쯤에 관을 메고 나갑니다.
장례행렬의 앞쪽에는 여자들을 세웁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죽음이 들어오는 이유는 
여자가 먼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죄를 범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여자들을 앞쪽에 세운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남자들이 관을 메고 나갑니다. 
그 뒤에는 돈을 주고 불러온 호곡꾼들이 피리를 불고 곡을 하면서 따라옵니다.

장지라고 해봐야 동네에서 한 30분이면 도달할 수 있는 곳에 있습니다. 
이제 장례행렬이 동네를 지나서 성문 밖으로 빠져나갑니다.

이럴 때 예수님께서는 많은 무리를 이끄시고
나인 성을 향해서 걸어오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성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마침 장례 행렬이 성문을 빠져나오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한 번 상상해 보세요.
하나님의 아들이 많은 군중을 데리고 지금 나인 성을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편 성문 입구에서 다가오는 죽음의 행렬과 만난 것입니다. 
사탄이 마치 자기의 전리품인양, 젊은이를 관에 담고
울고 통곡하는 사람들을 이끌고 의기양양하게 죽음의 사신으로서
지금 성을 나오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 생명의 주가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들과 함께 다가오고 있습니다. 
생명과 죽음의 만남입니다. 조우입니다. 대결입니다.

여러분 이럴 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셔야 될 것 같습니까?
예수님이 생명의 주인이시라고 한다면, 
예수님이 죽음을 정복하기 위해 이땅에 오신 구주라고 한다면
이 순간을 어떻게 하실 것 같습니까?

피하실 것 같습니까? 
아니면 장례행렬이 지나가도록 길 가에 서서 기다리시겠습니까?

아마 그렇게 하셨다면, 우리는 크게 실망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면으로 대결했습니다. 
관 뒤에 따라오면서 슬피 울고 있는 과부에게 주님이 눈을 고정시키셨습니다.
과부를 보셨다고 그랬습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눅7:13

거기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주님은 그 과부를 주목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항상 먼저 보시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슬픔을 당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고통당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버림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실패한 자들, 병든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보셨다'는 말이 40회 정도 나오는데요. 
대부분 누구를 보셨냐면, 세상에서 버림 받은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 눈물 흘리는 사람들을 보셨다고 합니다. 

'주께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불쌍히) 여기시니' 하는 말씀처럼
이렇게 주님의 눈이 향하는 곳은, 머무시는 곳은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고통하는 사람들입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눅7:13

예수님은 인생의 무거운 고통을 안고 씨름하는 자들에게 대해서
민감한 반응을 보이시는 마음을 갖고 계셨습니다. 
왜냐면 예수님의 마음은 항상 사랑의 만조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닷물이 만조를 이루면, 온 세상이 바닷물로 덮히는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향한 사랑으로 만조를 이루는 가슴을 갖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고통당하는 자들을 언제나 불쌍히 바라보시고, 
그 아픔에 동참해 주셨습니다. 불쌍히 여겨주셨습니다.
 
과부가 얼마나 슬퍼할까?
과부의 마음이 얼마나 찢어질까? 
얼마나 두려워할까?
얼마나 자기 팔자를 놓고 탄식하고 있을까?

주님은 설명을 듣지 않아도 다 알고 계시고, 
그 과부의 고통, 그 과부의 아픔에, 자기 마음을 함께 감정이입 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과부를 보고 조용히 말씀하셨어요.
'울지 말라!'

▲예수님의 말씀은 빈말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눈에 눈물을 씻겨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마치 예레미야가 렘31:16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때의 음성과 같습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네 소리를 금하여 울지 말며
네 눈을 금하여 눈물을 흘리지 말라.
너희의 최후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던 그 말씀을
주님이 지금 여인하게 하시고 계십니다. 
'울지 말라! 너의 최후에 (마지막에) 소망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는 예수님께서 관에 손을 대시니까
걸어가던 행렬이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명령하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눅7:14

그 청년이 일어나서 앉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청년을 과부에게 데려가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과부의 눈물이 기쁨이 되게 하셨고
그의 슬픔이 춤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그렇게 해서 그 과부를 위로하셨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본문을 묵상하면서
아름다운 사건이라고 느끼게 되는데요,
그렇다면 이 본문에 담긴 사건과 주님의 말씀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도움을 주는 것일까요?

우리 중에는 남편을 먼저 보내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까지 잃어버리고 
슬픔에 젖어 있는 본문의 과부와 같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설령 그런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당장 그 아들을 무덤에서 일어켜 주시는 그런 일은 오늘날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본문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물론 이 본문 이야기는 근본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죽음의 사자들이 걸어나오는 그 마당에서
주님이 그들을 만나셨기 때문에
생명의 주가 되신 주님이라면, 반드시 살리셔야지
그냥 피해가실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면 왜 주님이 이런 기적을 일으키셨는가요?
온 세상 앞에 예수 그리스도만 죽음을 이기신 생명의 주인이시요
하나님 되심을 선포하는 것에 이 사건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온 세상을 향해서 주님이 '나는 죽음을 이기었노라. 나는 생명의 주가 되느니라'
하는 것을 선언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청년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일어나라' 할 때에 
죽었던 자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죽음의 사자 사탄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마 의기양양 했을 것입니다.
그 청년의 시체를 끌고서 나인 성을 나올 때는
자기만 이 세상에서 가장 힘이 있는 군주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청년아 일어나라' 하실 때 
사탄은 정말 아무 손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청년을 붙들수도 없었고, 그 청년을 죽음에 그대로 묶어둘 수도 없었습니다.

주님이 명령하시자, 청년은 죽음을 이기고 일어났습니다.
사탄은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로마서 14장 9절에 '예수님은 죽은 자와 산 자의 추가 되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할렐루야! 

계시록 1장 18절 '예수님은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요한복음 11장 25~26절에 주님은 친히 선언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할렐루야! 

그러므로 예수 믿는 성도들에게는 사실 죽음이라는 건 없습니다. 
육신의 죽음은, 영원히 사는 생명으로 옮겨가는 하나의 과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찬송가에서 부르듯이
'요단강을 건너가는' 과정입니다. 
요단강을 그저 물 속으로 들어가서 건너가는 짧은 과정입니다.

이것이 육신의 죽음이요, 우리에게는 진정한 죽음은 이미 떠났습니다.
십자가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죽음을 정복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사느니라' 
아브라함도 살았습니다. 이삭도 살았습니다. 야곱도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 안에서 영원히 삽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눅20:38
죽은 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서, 사랑하는 남편을 먼저
하나님 앞에 보낸 자가 있습니까? 
어린 자녀를 먼저 하나님 앞에 보낸 자가 있습니까?

우리는 인간으로 슬퍼할 수밖에 없지만.. 믿으십시오.
먼저 간 그들은 죽은 자가 아닙니다. 할렐루야!

주님은 죽은 자를 보시고 '죽었다'고 하신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잔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그들은 죽은 자가 아니요, 영원한 생명에 휩쌓여서
하나님 안에서 지금 살고 있습니다.
그런 자를 두고서 '죽었다'고 말하면 안 되지요.

우리도 다 그 곳으로 갈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 놀라운 생명의 주가 되심을 선언하는 것이 
바로 본문의 나인 성에서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사건의 목적이었습니다. 

우리 중에 아직도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형제 자매들, 이 자리에 계십니까? 
여러분은 죽음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남은 생을 살려고 합니까? 

여러분은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 여러분이 인생을 마음 놓고 살 수 있나요?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산 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시는 그분 앞에 여러분의 인생을 맡기세요. 
거기에 죽음을 정복하는 승리가 있습니다. 

여러분,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기적이 주는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주가 되신다는 이것 하나 뿐이겠습니까? 

아직도 세상을 우리는 수 십년 더 살아야 될지 모릅니다. 
앞으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 동안 
이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이 귀한 말씀이 주는 교훈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분명히 현실적으로 우리가 받아야 될 메시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 가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1. 첫째로, 울고 있는 과부를 눈여겨 보시던 주님은 
오늘도 <우리가 울고 있을 때, 우리를 주목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한 번도 눈물을 흘리지 않고 세상을 살아본 분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위대한 설교자 스펄전은 재밌는 말을 했어요. 
'하나님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녀를 두신 일이 있는가?'
그는 그렇게 묻고는, 
'없다! 사람은 모두 죄를 짓기 때문이다.

죄가 없는 자녀를 두신 일은 한 번 있었다.
그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죄가 없는 자녀를 두신 일은 있어도
눈물을 흘리지 않은 자녀를 두신 적은 없다.'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눈물이란, 말문이 막힐 때 터지는 것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감정에 휩쓸렸을 때,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 눈물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눈물은 그 자체가 완벽한 언어입니다.

통역도 필요 없습니다. 설명도 필요 없습니다. 
눈물 자체로 완벽한 언어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을 고해 라고 합니다. *고통의 바다
고통과 슬픔이 기다리는 먼 항해 길과 같습니다. 
어찌 눈물이 없겠습니까? 

우리 인생은 태어날 때부터 울며 태어납니다. 
그리고 죽을 때, 많은 사람들이 눈에 눈물이 고이며 숨을 거둡니다.
태어날 때 울고, 죽을 때도 우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눈물을 우리는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 한국 문화의 바닥에는 우는 것을 천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그것은 잘못입니다.
울고 싶으면 우리는 마음껏 울어야 합니다. 

슬퍼도 슬프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가장이요,
힘들어도 힘들지 않은 것처럼 처신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이 세상을 보세요. 구석구석을 보세요.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처참한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내가 아무리 평안하고 어려움이 없고, 평탄한 인생을 산다 할지라도
조금만 눈높이를 낮추어서 내 주변을 살펴보면
눈물 없이는 쳐다볼 수 없는 참혹한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는지요.

우리는 그런 슬픔을 당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같이 울어야 합니다. 

▲나라를 빼앗기고 일제 강점하에서, 고달픈 신앙 생활을 하던 우리 조상들은 
교회당에 모였다 하면 울었습니다. 
통성기도 한다고 하면, 통성기도가 아니라 그것은 통곡기도 이었습니다. 

625 사변이 터졌어요. 비참한 하루하루의 삶을 연명해 나가던 우리 부모들, 조상들은 
'교회는 우는 장소'인줄 알았어요. 
하나님 앞에 가는 것은 바로 울기 위해서 가는 곳이라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예배시간에 울음바다가 되는 일은 다반사였습니다. 
설교를 듣고 은혜 받아 우는 것보다도, 
정말로 인생에 무거운 짐이 너무너무 괴로워서 
그 슬픔과 그 한을 풀어놓을 데가 없어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울었고
찬송을 부르면서 울고, 기도하면서 울고, 서로 붙들고 울고, 
그러면서 위로를 받았고, 그러면서 주님의 손길을 체험했습니다. 

거기서 힘을 얻어서 세상을 살았습니다.
우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눈물을 귀히 여기십니다. 
우는 자를 주목 하십니다. 

우리 가운데서 남모르게 우는 사람 많을 거예요.
믿으세요! 여러분이 울고 있을 때, 주님이 여러분을 주목 하십니다. 눈여겨 보십니다. 

시편 56편 8절에 다윗이 하나님 앞에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여,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다윗은 30세가 되기도 전인 참 젊은 나이에 
10년이 넘도록 정치 망명을 하면서 
얼마나 많은 수모와 모함과 고통을 당했는지.. 
그러니까 매일 울다시피 하면서 살았어요. 

우리가 시편을 보면, 다윗의 우는 장면을 자주 봅니다. 

그런데 다윗은 어떤 믿음이 있었는가 하면
'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다. 그러므로 내가 울 때
하나님은 내 눈물을 굉장히 소중히 보신다..' 하는 믿음이 있었어요.

'사람은 내 눈물을 보지 않는다 할지라도
주님은 내 눈물을 반드시 보시고, 귀중히 여기실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어.
주여! 나의 눈물을 주님의 병에 담아 두시옵소서!
주님의 아들이 울고 있습니다.
내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시고, 보관해 주소서!
내 눈물을 잊지 마세요!'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시고, 다윗의 눈물이 변하여 후에 춤이 되게 하신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성도의 눈물을 주님께서 귀히 보십니다.
어린 아이가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장면을 보는 
부모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경우는 없습니다. 

자녀가 울고 있으면, 부모의 마음이 움직입니다. 
우리가 울고 있으면, 하나님의 마음이 움직입니다. 믿습니까? 

우리의 눈물을 보시고, 하나님의 마음이 움직입니다. 
주님의 마음이 움직입니다. 

그래서 히스기야를 우리는 잘 압니다.
그가 죽을 병에 걸려서 이제는 다시 살 수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벽을 향하여 보면서, 대성통곡하면서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그때 이사야를 통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죠. 
'히스기야에게 가서 전해라. 내가 네 기도를 들었다.
내가 네 눈물을 보았다.'

'나는 네 기도를 들었다. 그리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하나님이 우리의 눈물을 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눈물을 보십니다!

그래서 히스기야에게는, 15년을 더 살 수 있도록 생명을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눈물이 그렇게 능력이 있습니다.

눈물의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과 보좌를 움직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어야 됩니다. 

◑2. 둘째로 우리가 또 받을 메시지가 있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를 향해 '울지 말라'고 위로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부목사님 한 분이, 심방을 열심히 했어요.
그 분이 우리 교회에 부임하기 전에는, 강남이 아닌 다른 지역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지역에서 살면서, 항상 강남을 볼 때는
'강남이야말로 성공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고급 주택가이고, 
강남이야말로 참 어려운 사람이 별로 없는, 부유한 지역이다.'
이런 시각을 갖고 있었다고 해요.

그런데 우리 교회에 와서 자기가 맡은 구역을 돌아보며 심방을 다녔는데
그러면서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강남이라는 곳을 돌아보니
겉모습과는 다르게 내부적으로는 아픔이 많다는 것을 보면서
제가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가정마다 아픔이 많았습니다. 눈물이 많았습니다.
한숨이 없는 가정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놀랐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게 화려하게 보이는데
속에 들어가보니 그렇지 않더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이 몇 가지 사례를 이렇게 들었습니다. 
1천만원의 카드 빚을 갚느라, 부부가 밤낮으로 뛰어도 해결이 잘 되지 않는
가난한 가정이 강남에 수두룩 하다고 그럽니다. 

그 양옥집 지하 셋방에, 아니면 저 주택 옥상에 있는 조그만 단칸방에 살면서 
카드빚 1천만원을 갚으려고 부부가 밤새도록 뛰어도 갚을수가 없는 가난한 가정이 있는가 하면, 

경제적으로 잘 사는 가정임에도 불구하고, 자녀가 날마다 그냥 가출을 하고
부모의 애를 타게 해서, 부모의 눈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는 가정도 있고요, 

남편이 실직을 하자, 아내가 대신 일꺼리를 찾아서 동분서주 하는 정신 없는 가정도 있고요 
살만하니까 남편이 바람을 피워서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려서 
그 남편을 두고 벌써 2년이 넘도록 눈물 콧물 흘려가며 하나님 앞에 통곡하며
남편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부인도 있고요..

가지각색의 고통과 아픔이 가정마다 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을 돌아보면서 '정말 목사님, 놀랐습니다' 그래요.

▲물론 세상에서 아주 잘 되어서 잘 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예수를 안 믿어요.
예수가 필요 없다고 그들은 스스로 생각하니까 안 믿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찾아나오고, 예수를 믿어보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고통과 눈물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거든요. 

그러니까 강남에서도 특별히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에는 
눈물을 흘리고, 인생의 밑바닥에서 허덕이는 자들이
상대적으로 더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이와 같은 이웃들을 보면 
마치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것 같은 
'상한 갈대, 꺼져가는 심지와 같다'는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갈대는 강기슭에 많이 자라는 풀입니다.
다른 풀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키가 큽니다. 
그리고 한참 잎이 파랗게 뻗어나 있을 때는 정말 매력적이고, 예쁩니다. 당당합니다. 

인생을 사는 중에, 한 때는 이런 당당한 갈대와 같이 
우리의 모습이 화려할 때가 있지요.
성공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빨리 진급합니다. 
가정이 평안합니다. 젊음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나를 보고 부러워 합니다.
당당한 갈대지요.

그러나 어느 날 모르게 그 갈대가 상하고, 부러집니다. 꺾여버립니다.
여러분 가운데 '상한 갈대'와 같은 모습이 자기 신세라고 생각되는 분이 계실 거예요. 

'꺼져 가는 심지'가 뭔지, 요즘 전기불 밑에서 사는 사람은 잘 모르지요. 
그러나 연세 드신 분은 다 압니다. 기름이 점점 말라 없어지든지, 
심지가 너무 타 가지고 오래돼서 못 쓰게 되면, 등불을 켜 놔도 
불꽃이 점점점 적어집니다. 이게 문만 살짝 들여서 작은 바람만 들어와도 꺼져 버립니다.

 

등잔 위에 꺼져가는 심지.. 바로 죽음 직전을 의미합니다.
죽음 일보 직전입니다. 소망이 거의 없는 존재입니다.

한 때는 당당하고, 한 때는 모든 사람앞에서 자랑스러운 모습이었지만
이제는 꺼져 가는 심지와 같아요.
조금만 바람이 불어와도, 이제는 다시는 일어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건강이 나약해져 있든지, 사회적으로 지위가 꺼져가든지...

상한 갈대와 같은 사람들,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사람들이 
우리 중에 없잖아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지금도 눈물 흘리고 있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흐느껴 울고 있습니다. 

어쩌면 실컷 울고 싶은 곳을 찾아가고 싶은, 마음의 충동을 가지고 있을지 모릅니다. 
남자고 여자고 이것은 구별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또 하나 생각할 것은
갈대가 상해가지고 꺾이면, 사람들은 그 갈대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아무 신경도 쓰지 않고 밝고 지나갑니다. 

꺼져가는 심지에 아무도 신경 않씁니다. 
꺼지든지 말든지 그대로 방구석에 밀쳐 놓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다가, 어떻게 돼서 40대에 꺾어든지
50대에 꺾이든지 (비교적 젊은 나이에 꺾이든지)

아니면 30대 갑자기 일찍 '꺼져가는 심지' 신세가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세상이 야박한지요...
그냥 밟고 지나가거나, 그냥 무시하고 쌀쌀맞게 자기 등을 돌려버립니다.
비정하게 나를 못 본체 하고 지나가 버립니다. 이게 세상입니다.

혹시 이런 것을 요즘 직접 체험하고 계신가요?


◑주님은 어떻게 우리를 위로하시나요?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다르십니다. 마태복음 12장 20절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신다. 주님은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신다' 
상한 갈대와 가은 우리를 보시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울지 말라고요. 
내가 네 눈물을 씻겨주겠다고요...

꺼져 가는 심지와 같은 우리를 보시고, 주님은 우리 등에 당신의 손을 얹으시고
속삭여 주십니다. '울지 말라! 내가 너를 위로해주겠노라!'

그러면 정말 주님이 우리를 위로하십니까? 
우리의 눈에 눈물을 씻겨 주실 까요? 

어떤 방법으로 우리의 눈에 눈물을 씻겨 주실까요? 
과부의 아들처럼 당장 무덤에서 우리 죽은 아들을 살려주실까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우리의 눈에 눈물을 씻겨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위로 하실까요? 

성경 전부를 놓고 우리가 검토를 하면, 두 가지 답이 나옵니다.
이 세상에 살 동안, 울고 있는 우리를 주님이 울지 말라고 하시면서 
위로하시는 방법이 두 가지가 나와요. 

▲1. 히브리서 4장 16절이 답이에요.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을 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때를 따라 돕는 은혜가 있습니다.
이 말은, 내가 필요할 때마다 도와주시는 은혜가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내가 필요할 때마다 도울 수 있는 은혜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로 주님 앞에 나아가면,
항상 우리의 필요를 따라서,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주님의 손길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이 은혜를 체험하셨습니까?
분명히 주님은 우리를 주목하시고, 우리의 눈물을 소중히 여기실 뿐만 아니라
울지 말라고 하신 다음, 우리의 문제가 어디 있는가를 아시고 
때를 따라 필요한 은혜를 그때 그때 적절하게 허락해 주시면서
우리의 눈에 눈물을 씻겨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또 하나의 방법이 있어요. 로마서 8장 28절 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중요한 말씀입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심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눈에 눈물을 씻겨 주시고 위로하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는 것은 굉장히 큰 그림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금방은 모릅니다. 

자 보세요, 내가 어떤 어려운 인생의 풍랑을 만났다고 합시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요. 1년이 가도 2년이 지나도 문제 해결은 되지 않아요.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은 들어주시지 않아요. 

어떤 때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의심이 막 들 때도 있어요.
정신을 차릴 수 없어요.

자 그러면, 이럴 때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시지 않는 것일까요? 
우리의 눈물을 씻겨 주시지 않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내가 지금 정신을 차릴 수가 없고, 해답을 얻을 수 없지만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큰 그림을 하나님이 갖고 계심을 우리가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은 시간이 많이 걸릴 수도 있어요. 
어떤 때는 우리 당대에서는 보지 못하고 천국으로 갈 수도 있어요. 
우리 자녀 대에 기도 응답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아름답고 선하신 
큰 뜻을 가지시고, 큰 그림과 계획을 갖고서
우리를 다루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면 
우리의 눈에 눈물이 씻겨질 수가 있습니다. 

▲룻기에 나오미 라는 여성이 나오는데, 그 이름은 '희락'이라는 뜻입니다.
그 이름 뜻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그런 자기 이름과는 달리, 아주 팔자가 기구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래서인지 미국 부모들이 딸 이름을 '나오미'로 잘 짓지 않습니다.

나오미는 남편하고 아들 둘과 함께 흉년을 만나자마자 좀 살아보겠다고
모압 땅으로 이민 가서 거기서 10년을 살았습니다.
그 동안 아들 둘을 모압 여인과 결혼시켰어요.
한 동안은 행복한 가정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10년 짧은 기간 사이에 남편이 죽었어요. 과부가 되었지요.
얼마 지나지 않아서 큰 아들이 또 죽었어요.
그다음에 둘째 아들도 죽었어요. 10년 사이에 집안에 남자 셋이 다 죽어버렸습니다.
세상에 이런 팔자가 어디 있나요? 

다른 사람이 볼 때, 꼭 저주 받은 집안 같습니다.
그래서 나오미와, 새파란 20대 초반 아니면, 10대 후반의 며느리 둘..
이렇게 과부 셋만 고스란히 남았습니다.

여러분, 이런 가정이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룻기서를 읽어보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큰 그림이 그려지는 것을 봅니다.

나오미는 왜 그런 고통과 아픔과 눈물을 겪었을까요?
당장 하나님은 해답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오미가 나중에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이때 둘째 며느리가 따라옵니다. 룻이죠.

고향 베들레헴에서, 룻이 재혼해서 보아스 사이에 아들을 낳습니다.
그래서 오벳이 태어납니다.
오벳은 다윗 왕의 할아버지가 됩니다.

그 과부 둘(나오미, 룻)을 통해서, 다윗의 가문이 세워지고
그 가문을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태어나게 됩니다.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 만약에 나오미가 그런 끔찍한 비극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다윗 왕의 조부가 될 확률은 백만분의 일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비극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다윗 왕의 혈통을 조성하고 계셨어요.
인류를 구원하실 구원의 길을 닦고 계셨어요.

이것은 너무나 엄청난 계획이었기 때문에
나오미가 미처 잘 몰랐어요. 주변 사람들도 잘 몰랐어요. 
아무도 하나님의 큰 그림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한 뜻을 가지고, 그 계획을 이루고 계셨습니다.
이런 것을 일컬어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고 합니다. 

저는 분명히 믿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 지금 고생하고 고통 받는 분들 많습니다.
믿음이 좋음에도 불구하고 
눈물이 떠나는 날이 없는 인생을 사는 분들도 많아요.

그러나 저는 분명히 믿습니다.
1)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시든지
2) 또 어떤 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고자 하는
큰 계획을 갖고 계시든지

둘 중에 하나, 아니면 둘 다 반드시 하나님이 주시면서 
그 눈에 눈물을 시켜 주신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 좋은 예수님을 여러분은 바라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