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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수르가 애굽과 구스를 친다 이사야20장 여러 설교 정리
◑적용
▲1. 성경에는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히6:19)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닻’(anchor)이라는 것은 배를 항구에 정박시켜 놓을 때,
배가 바다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못하도록 배를 고정시켜 주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 인생은 마치 망망한 바다에서 항해하는 배와 같습니다.
특히 폭풍이 일어날 때
파도와 폭풍우로 인하여 요동치고 파선할 위험에 노출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생의 동요와 두려움이 엄습했을 때,
우리의 삶을 안전하게 지켜줄 어떤 닻, 즉 안전장치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소망'인 것입니다.
자신이 바라는 소망, 즉 희망은 험난한 세파를 살아가는 우리 인생들에게는
마치 인생 전체를 안전하게 붙들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나의 소망, 희망을 어디에 두느냐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안전한 곳(하나님, 히6:19)에 희망의 닻줄을 걸어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바람이 불고 파도가 휘몰아 칠 때,
뿌리 채 뽑힐 수 있는 허망한 곳(사람)에, 자기 인생의 닻을 내리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조선말기 나라는 대원군을 중심으로 청나라에 의존하려는
안동가문의 중심의 수구파와
고종과 명성왕후를 중심으로 문호개방정책에 따라
일본을 비롯한 구미제국과 통상관계를 수립하려는 개화파로 양분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청나라가 청일전쟁에서 패배하므로 수구파의 기대는 무너졌으며,
또 한편 일본이 조선을 침탈하는 야욕으로 인하여 개화파의 기대도 빗나갔던 것입니다.
청나라와 일본, 모두 혼란과 기울어져가는 조선의 국운을 도와줄만한
진정한 존재는 못되었던 것입니다.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에 희망을 걸고 의지하려는 것은
미래를 위태하게 만드는 위험한 발상인 것입니다.
▲2. 이사야가 대언(예언)하는 자세
하나님께서 이러한 격랑의 시대 속에서 이사야에게
어떤 방식으로 말씀을 전하게 하셨는지 주목해야 합니다.
그는 말씀을 또 다른 폭력의 명분으로 삼지 않습니다.
‘너네들 이렇게 하면 다 죽는다’거나,
‘그것 봐 내 말이 맞지? (까불다가 다 죽었지?)’라는 식의 태도 또한 취하지 않습니다.
이사야는 사랑과 인내와 자기희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본문을 적용하며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하는 질문은,
우리가 ‘자기 생각을 입증’하거나 ‘자기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타인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하지 않는가.. 하는 '대언자의 자세' 입니다.
▲3. 원수들을 향해서도 성실하게 대언
우리가 내게 소중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불편한 일도 어느 정도 감수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모욕도 대신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본문의 명령을 통해 '이사야의 사랑과 희생의 범위를 확장'하십니다.
즉 자기 고국의 한계를 넘어서, 구스와 애굽을 위해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예언도 쉬운 게 아니었습니다. 3년 동안 옷을 벗고 다니는 고역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과거에 애굽의 노예로 고통 받았던 역사적 상처가 있습니다.
그는 자기 민족의 원수들를 위해서도, 옷을 벗는 부끄러움을 무릎 쓰고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말씀하셨기에,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 수치를 감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랑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물어보십니다.
내 사람, 내 가족, 내 지인, 내 직장의 테두리를 벗어서
이제 우리 사랑과 우리 관심의 범위를 확장해야 합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님은 우리 삶의 범위가, 내가 알지 못하는 자들과
원수에게까지 확장되길 원하십니다.
▲4. 액션이 필요합니다.
: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종 이사야가 삼 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며
애굽과 구스에 대하여 징조와 예표가 되었느니라
진정한 하나님의 종으로 살려면, 단지 마음을 먹는 것 이상이 필요합니다.
구체적인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이사야는 3년이란 오랜 기간 동안 변함없이 타인을 위해 수치를 감당했습니다.
그는 자기 메시지의 진실성을 3년 동안의 자기희생으로 증명합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이 정도까지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고통스러웠겠지만,
한 마디로 십자가를 실제로 지는 액션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한 마음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분기점에 선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했음에도 순종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이 터무니 없는 것 같아서, 부당한 것 같아서,
안 지켜도 이해해주실 것 같아서, 못 들은 척 넘길 수 있을 것 같아서,
여러 핑계로 합리화하며 우리는 말씀을 '그대로' 지키지 않으려 합니다.
‘내 기준'이라는 필터를 거친 말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깁니다.
그러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본문을 통해 이사야라는 모범을 보여주십니다.
그는 그대로 했기에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있었습니다.
종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주인의 명령입니다.
그 명령을 그대로 지킬 때, 내 삶에 기적이 시작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증거를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 될 것입니다.
◑절별 해석
본문 말씀은 앗수르의 사르곤(Sargon, 722~705BC)왕의 군대가
블레셋 도시 중에 하나인 아스돗을 쳐서 점령할 때, :1
예루살렘에도 위기의식이 고조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로부터 이사야 선지자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마치 전쟁 포로들처럼 벗은 몸과 벗은 발로
3년동안 예루살렘 거리를 돌아다니도록 한 것입니다.
이것은 애굽과 구스가 앗수르에게 패망하여
포로로 끌려가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행동이었습니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에게
어리석게 애굽의 도움을 구하러 쫓아다니지 말고
또한 블레셋과 합세하여 헛된 희망 속에 살아가지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외형적인 것과 조건에만 현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애굽은 외형적으로는 강대국처럼 보여, 진정한 도움이 될 것처럼 판단되었지만,
그러나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은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나라였습니다.
우리들도 정치나 외교적인 것에서 뿐 아니라, 우리 개인적인 문제에서,
진정한 도움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에게 희망을 걸고 무엇을 의지해야 할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1절, 앗수르의 사르곤 왕이 다르단을 아스돗으로 보내매
그가 와서 (블레셋의) 아스돗을 쳐서 취하던 해니라
우리는 우리 앞에 펼쳐지는 징조와 예표를 보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앗수르 군대는 아람와 북이스라엘을 정복한 후에
그 여세를 몰아 블레셋의 도시 아스돗을 쳐서 점령할 때였습니다.
앗수르의 세력이 이미 아람과 북왕국 이스라엘을 함락시키고
계속해서 남쪽으로 강력한 군사력으로 진격을 하고 있던 시대였습니다.
유대의 왕과 백성들은 크게 위협을 느끼고 당황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친앗수르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무리와,
남쪽에 있는 강대국 애굽의 손을 빌리자는 친애굽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력으로 양분 되어 싸우고 있었습니다.
▲2절, 그 때에 여호와께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갈지어다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지니라 하시매
그가 그대로 하여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니라.
'그 때에'
그때가 어느 때인지, 1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앗수르의 사르곤 왕이 다르단을 아스돗으로 보내매 그가 와서 아스돗을 쳐서 취하던 해니라' :1
본문은 ‘유다 왕 누구의 몇 년째’라는 식의 표현 대신에
이스라엘이 아닌 주변국가의 정세를 들며 당시 상황을 설명합니다.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메시지의 1차 독자가 애굽과 구스의 백성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애굽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지니라’
'베’는 애통하거나 회계하는 표시로 몸에 걸치는 의복의 일종인데,
일반적으로 선지자들의 예복으로 여겨졌습니다. (왕하1:8, 슥13:4, 마3,4 히11:37)
고귀한 신분을 가진 선지자가, 더구나 그는 왕족입니다. 귀족보다 더한 신분이었죠.
그런 그가 마치 노예처럼 벌거벗은 몸으로 거리를 활보함은
세인들의 눈에 놀라움을 넘어서 의미심장한 사건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입니다.
의복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였던 동방에서는
이 옷(겉옷)을 벗는 자체만으로도 벌거벗은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삼하6:20)
이는 유다 사람들이 의지하려는 애굽과 구스가, 앗수르 왕에게 패배하여
포로로 끌려가는 현상을 징조와 예표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3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종 이사야가 3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며
애굽과 구스에 대하여 징조와 예표가 되었느니라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는 선지자의 행위를 예표와 징조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미래에 있을 애굽과 구스의 불행을 미리 보여주기 때문이다.
또한 남유다가, 애굽과 구스에 도움을 청하면 안 된다는 예표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전개되는 작은 징조와 예표만 보고도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마치 베드로가 닭울음소리만 듣고도 자신을 돌아보고 주님의 말씀을 깨달아
통회 자복하였던 것처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깨닫지 못하는 멸망하는 짐승 같은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시49:20)
발람이 타고 가던 나귀가 칼을 빼들고 길을 막는 하나님의 천사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길에서 벗어나 곁길로 가고, 무서워 떨며 담 벽에 붙어
발람의 발을 상하게 했습니다. 그러자 발람은
평상시에 안 하던 짓을 하는 나귀를 채찍으로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민22:21~34)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 탐욕의 길을 걷고 있기에 하나님의 사자가
칼을 빼든 것임에도 깨닫지 못하고 애매히 나귀새끼만 때린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 앞에 펼쳐지는 징조, 현상, 또는 어떤 사건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삼년 동안 하나님의 종이 벗은 몸으로 다니는데도
왜 그런지, 하나님이 무엇을 요구하는 것인지 생각해 보지 못한다는 것은
멸망하는 짐승인 것입니다.
▲4절, 이와 같이 <애굽의 포로와 구스의 사로잡힌 자>가 앗수르 왕에게 끌려갈 때에
젊은 자나 늙은 자가 다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볼기까지 드러내어 애굽의 수치를 보이리니
이사야가 온몸으로 보여준 행위 예언은
아스돗이 점령된 지 약 30년 후에 사실로 이루어졌습니다.
앗수르 왕 에살핫돈은 애굽을 공격하여 멤피스를 점령했으며, (B.C. 681년)
그의 아들 앗술바니팔에 의해 애굽은 재차 유린되었습니다. (B.C. 669년)
나이의 노소를 불문하고 붙잡혀간 수많은 '애굽의 포로와 구스의 사로잡힌 자'들은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끌려가야 했으며,
심지어 엉덩이가 드러나는 치욕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구스와 애굽’은 기원전 716년에 애굽을 정복한 구스 왕조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애굽과 구스를 같이 취급하는 것입니다.
▲5절, 그들이 바라던 구스와 자랑하던 애굽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놀라고 부끄러워할 것이라
여기서 '그들'은 애굽과 구스를 의지하던 유대인 및 팔레스틴 거민들을 가리킵니다.
애굽과 구스의 포로됨의 소식은, 그들에게 놀라움과 부끄러움을 안겨다 줍니다.
놀라움은 그토록 강대하게 보이던 애굽과 구스가 몰락했다는 사실에 대한 것이요,
부끄러움은 그런한 나라를 그들이 바라고,
(애굽이 블레셋을 도와주리라고) 자랑했다는 자신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것입니다.
여기 ‘그들’이란 앗수르의 공격을 받은 아스돗 사람들, 즉 블레셋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구스가 자신들의 ‘희망’으로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무엇에게 기대를 걸고 희망을 갖느냐는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희망을 걸어 둘 수 없는 것에, 희망의 닻줄을 묶어두는 것은 불행의 시작인 것입니다.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되리라” (시146:3~4)
사실 도움과 자랑은 오직 여호와로만 삼아야 합니다.
“그날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남은 자에게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시며
아름다운 화관이 되실 것이라”(사28:5)
그렇습니다. 애초부터 애굽은 의지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앗수르의 대신 랍사게가 말한 대로
애굽은 “상한 갈대 지팡이”에 불과한 존재인 것입니다. (왕하18:21)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깨달아야 합니다.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사31:1)
여러분! 우리가 어렵고 힘들 때, 위기를 만났을 때
무엇에 희망을 걸고 의지해야 할지를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신자들이 의지하고 희망을 걸 것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권력, 경제적 능력, 인간적 조건은 우리의 의지의 대상이 안 되며
희망의 닻줄을 걸만한 것이 안 되는 것입니다.
오직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만이 진정한 우리의 희망이요 의지가 되는 것입니다.
▲6절, 그 날에 이 해변 주민(블레셋)이 말하기를, 우리가 믿던 나라
곧 우리가 앗수르 왕에게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달려가서 도움을 구하던 나라가
이같이 되었은즉 우리가 어찌 능히 피하리요 하리라
‘이 해변 거민이 말하기를’
블레셋을 위시해서,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나라들을 가리킨다. (23:2, 6, 습2:5)
여기에 유다가 포함됨을 물론입니다.
‘우리가 어찌 능히 피하리요’
하나님 대신 믿고 의지하던 모든 것이 끊어질 때 느껴지는 암울한 절망의 표현으로
본장은 마감됩니다. (왕하 10:4 참조)
그러나 행간 속에 숨어 하나님의 백성에게 던지는 선지자의 물음은 이것입니다.
'왜 하나님으로 피난처를 삼지 않느냐? 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느냐?'
인간은 무엇에게 희망을 걸고 믿고 달려가야 할지, 바르게 깨닫고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가(블레셋 사람들이) 어찌 능히 피하리요?” :6
우리가 의지해서는 안 될 것, 희망을 걸어서는 안 될 것에 희망을 걸면
결국에는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세상적 힘을 의지하는 것이 왜 절망으로 끝나는 것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사야31:3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들의 말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펴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
그런데 사실, 현실적 문제에 부딪혔을 때,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은.. 대단히 힘들뿐더러.. 거의 불가능하기까지 합니다.
내가 사는 길은.. 힘있는 사람(본문에서는 애굽)을 의지하는 길이요,
하나님만 의지하는 길은.. 내가 죽는 길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현실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한다는 뜻은,
바꾸어 말하면, <내가 죽음을 선택>하는 길입니다.
죽고, 망하고, 패하는 길을 선택했는데.. 신기하게 그게 사는 길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했던 말과, 성경이 신기하게 똑같습니다.
생즉필사, 사즉필생 生卽必死 死卽必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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