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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 20:1~23 이런 친구 네게 있는가?

LNCK 2021. 10. 1. 16:10


◈이런 친구 네게 있는가?     사무엘상 20:1~23, 요15:13~15        2021.09.12.출처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는 게, 우리가 생각하는 단순한 우정인가요?
아니면 그 이상인가요?

그 단순한 우정 이상이라면 무엇 때문인가요? 
이걸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됩니다.

무슨 뜻이냐면, 이런 관계는 그냥 사람이 좋아가지고 생기는 게 아니라는 말이죠. 
내가 보기에 좀 좋아보이는 사람이 있어서, 누구를 이렇게 좋아할 수는 없단 말이에요.

또 그 사람이 좀 좋은 사람이라고 해서, 그렇게 내 생명까지 퍼서 줄 정도로 
관계가 좋아지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좋아지는 인간적인 사랑 가지고는 
성경에 등장할만한 소재가 안 됩니다.

그럼 뭐 때문에 성경은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을
영원한 우정, 우리가 기억해야 할 그런 관계로 
우리에게 소개가 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이런 관계가 신앙안에서 반드시 뿌리내려야 할 
신앙의 그루터기 와도 같고, 뿌리와도 같기 때문에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면 
이런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를, 우리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이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신앙이 제대로 된 신앙이냐/ 아니냐, 
제대로 믿는 신앙이냐/ 아니냐를 판별하려면 
우리에게 이런 진실한 친구 관계가 있냐/ 없느냐로 판별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가 무슨 거창한 일을 하느냐, 
무슨 대단한 사역을 하느냐, 
무슨 직분을 맡았느냐... 이걸로 우리 신앙의 진위가 판별 되는 게 아닙니다.

세상은 그런 외적인 기준으로 자꾸 우리를 속입니다.
무슨 일을 많이 시키고 
무슨 일을 부지런히 하게 하고 
뭘 자꾸 하게 만드는 행위 중심의 신앙을 우리에게 강요하지만 

그래 가지고서는 우리가 외적 종교적 행위가 두꺼워질 뿐이고 
마치 군살이 굳어지듯 우리의 마음은 점점 더 두꺼워져서 
감동만 점점 더 잃어가는.. 그런 형식적이고 절차적인 종교인이 아니라 

정말 내 생명을 주어도 아깝지 않고 (요나단처럼)
내 생명을 주더라도, 그를 더 사랑하고자 하는 그런 열정을 가진 신앙인을 만드는.. 
그런 관계의 뿌리가 어디서부터 비롯되는가?

이걸 우리가 놓치면 우리 신랑은 헛된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예수 안 믿어도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간혹 있는데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런 진정한 인간관계를 경험도 못 해보고 
뿌리도 한번 없이, 부평초처럼 이리저리 떠다니는.. 

이 교회 저 교회로 그냥 왔다 갔다 하다가 
그냥 마음에 드는 설교 몇 편 듣다가 
우리 인생을 끝내고 말것이란 말입니까?

우리 신앙의 목적이 뭔가요?
요나단은 다윗을 왜 사랑했느냐 말이에요. 

아버지가 그렇게 미워하는 자인데... 
그는 내 자리를 뻔하게 뺏어갈 자인데... 

그걸 다 알면서도 어떻게 다윗을 그렇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자기 목숨보다도 더 사랑할 수 있었던 걸까요?

▲그게 참다운 신앙이기 때문에 그래요. 
여러분, 참다운 신앙이란, 
'내'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말해요.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뭐라고 말했습니까?
요3: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세례요한의 고백하는 그 고백이나 
지금 요나단의 고백이 똑같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은 왕이 되어야 하겠고 
나는 그 다음 왕이 되어도 그만, 안 돼도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는 흥해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이게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란 말입니다.
이게 그리스도인들을 부르신 이유란 말입니다.

한 사람씩 불러서 다 성공시켜 주려고 부른 게 아닙니다.
 
요나단이 뭐라 그럽니까? 
'네가 무슨 말을 하든지 내가 그 부탁을 들어 줄 것이고, 
나는 네가 왕이 되게 할 것이라'고 말해요. 

'너의 성취를 위해서 나는 존재하는 사람이다' 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내 생명이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의 성공을 이루어 드리고자 하는 이 열망!'

이게 그리스도인의 본질이란 말입니다. 
이게 교회의 본질이란 말입니다.

'너를 이루겠다!' (너를 도와서 성공시키겠다) 
자식을 지극히 사랑하는 부모는 그런 생각을 당연히 하지요. 

과거에는 부모들이 집 팔고, 논 팔고 해서 자녀들을 대학에 보냈습니다.
'나를 다 소진하더라도 자녀의 꿈을 이루어 주겠다' 
많지는 않지만, 자녀를 위해서 그렇게 희생하겠다는 부모가 제법 있었습니다. 

진정 그리스도인이란 뭐냐? 
교회란 뭐냐? 
나를 (내 꿈을) 이루고자 하는 게.. 교회가 아니란 말입니다.

오늘날 어쩌다가 이 지경에 왔는지 모르지만 
어쩌다가 그리스도인들이 이 지경까지 와버렸는지 모르지만 

'나는 너를 이루기 위해서 존재하는 존재다'  *요나단의 자세
이게 그리스도인의 출발점이란 말입니다.

이 출발점 조차 분명히 서 있지 않은 채 
교회 문턱만 닳도록 왔다 갔다 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몇 천 명이 모인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요나단은, 구약에서 예수님의 그림자 같은 존재였습니다.
아니 가만히 있으면 자기가 왕이 되는데 
그거 뭐하러 적을, 새끼호랑이를 키워 가지고 
그 발톱에 죽을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 

그게 여러분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헤세드)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란 
요나단이 다윗에게 보여줬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오늘 내게는 그런 성경적 사랑, 요나단의 사랑이 있나요?
그렇다면 당신은 진정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만약 없다면... 무슨 직분을 가졌다 하더라도... 모래성 일수도 있습니다.
그저 기독교를 머리속으로, 이론으로만 이해하고 있는 신자입니다.

▲제 (조정민 목사)가 뉘늦은 나이에 신학교를 들어갔습니다.  
뭐 육십세가 다 돼서 목사 안수를 받는다.. 
뭐 육십 셋에 교회를 개척한다.. 
그런 짓 한다고 욕을 제게 바가지로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어요.

그들은 저를 걱정해 준다고 하는 말이었어요.
'불을 보듯 뻔한 실수, 그 실패하는 길을 왜 가느냐?'는 거예요.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란 
불을 보듯이 뻔한 실패, 실수를 
그걸 보면서도 가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거 정확히 한번 우리가 정리하고 넘어갑시다. 

1) 그리스도인이란, 첫째, (세상적으로) 실패하기 위해서 가는 길이란 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성공하기 위해서 가는 길이 아니에요. 

그따위 성공은 이 땅에 살 동안만 주어지는 잠깐의 성공이고, 
(십자가의 길은) 우리가 이 땅에서 실패하는 길인데, 

실상은 영원히 성공하는 길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 실패를 예상하고 가는 길입니다.

목회로 성공한다?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도적들이에요. 

큰 목표로 성공했다? 
강도들이에요.

목회는  (십자가의 길은) 뻔히 실패하러 가는 길입니다.

가장 효율적으로 살아야 될 사람들을 
가장 비효율적으로 살게 하는 게.. 목회란 말이에요. 

세상 성공을 지향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성공이, 성도의 삶의 기준이 아니라고 말하는 게, 성경의 메시지란 말입니다.

2)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자기 부인의 길'이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신앙생활은 자기를 부인하는 길입니다.

요나단이, 자기가 부인되지 않았다면 
다윗을 어떻게 그렇게 대우해 줄 수 있었을까요.

먼저 자기가 부인 되어야, 다윗을 세워 줄 수가 있었습니다.

왜 오늘 이 시대의 교회가 이렇게 존경을 못 받고 있나요?
예수님 때문이 아니라, 우리 때문에 욕 먹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각자의 꿈이 있어요. 
내가 성공하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그 야망적인 꿈 가지고는, 절대로 진정한 크리스천이 못 됩니다.

일례로, 왜 신혼부부의 결혼이 실패하는가요?
결혼을 통해서, 신랑 신부 각자가 자기 꿈은 이루려고 하니까요.

그 자기 꿈을 이루는데, 배우자는 무한 희생해 주기를 내심 바랍니다.

어떤 인간이 정신 나갔기에, 배우자의 꿈까지 이루어주겠습니까?
자기 꿈을 이루기도 힘들어서 정신이 혼미한데요.

결혼 전에, 사랑에 눈이 잠깐 멀었을 때나 상대를 위해주지,
결혼하고 나서 제 정신 차리면, 다 본래 자기 본모습으로 돌아갑니다.

 

즉 '자기 부인'의 반대인, '자아 실현' '자기 왕됨'의 자리로 되돌아갑니다.
그래서 자아와 자아가 서로 맞부딪히면서, 신혼의 이혼이 증가하는 것입니다.

신랑 신부 둘 다 '자기 부인'이 안 된 결과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성경적인 가정이란 
내 꿈을 서로 접어야 그래야 가능한 거죠. 
(결혼을 할 때, 나를) 실패하러 간다고 생각하면 된단 말이에요.  *자기부인
그러면 하나님이 결코 실패 안 하게 하십니다. 오히려 결혼이 성공하게 하십니다.

마16:25~26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여러분 '자기의 영원한 생명, 영원한 목숨이 가장 중요하다'고,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시는데...
오늘날 우리는 '자기 부인'의 길을 거부하고, 오히려 '자기 강화'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눅14:26~27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 말씀에 의거하면, 요나단이 자기 아버지를 미워하는게 이해가 됩니다. 
기독교 신앙은 감정적인 게 아닙니다. 혈육의 정도 초월합니다.

다윗이 인간적으로 좋아서, 나한테 잘해줘서.. 요나단이 그를 사랑한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요나단이 다윗을 선대한 게 아닙니다.

요나단은, 다윗은 하나님이 택한 사람이라는 것, 
하나님과 다윗과 함께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선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나단은 결국
다윗의 편에 선 것처럼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편에 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아버지 사울을 떠나서
다윗도 함께 하시는 것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에 
그래서 어리석은 선택이 아니란 말입니다.

아버지 사울이 볼 때는, 자기 아들이 가장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있지만 
요나단은, 다윗과 함께 하는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에 
다윗을 끝까지 사랑했다는 말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정말 늘 하나님 편에 서 있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들과 함께하기를 축복합니다. 요나단처럼요!

 

나한테 잘해 주는 사람 편이 아닙니다.

나한테 잘 못 해줘도 돼요.

나한테 잘해 주는 사람은.. 다 이유가 있어요.

어쩌면 내 간을 빼 먹으려고 잘 해주는 지도 모르죠.

 

제가 아는 분은, 전직 대통령을 오래동안 가까이 모신 분인데, 

자기 평생에 충성한 사람(전직 대통령)하고는, 나중에 같이 나란히 찍은 사진 한 장이 없는..

그런 사람도 보았습니다. 진짜 그 대통령에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충성한 분이죠.

 

후에 그가 국회의원에 출마하려는데, 그 전직 대통령과 같이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어서

선거 때 자신을 알리고 홍보하는데.. 애를 먹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제는 전직 대통령이 돌아가셔서, 같이 사진 찍기가 불가능했나 봅니다)

 

몇 십년을 그 분을 따라다녔는데, 자기는 그 옆에서 사진 한 장을 안 찍었어요.  
그런데 늘 옆에 와서 사진 찍는 사람들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간 빼먹을 사람들만 와서 사진을 찍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아예 옆에서 같이 사진도 못 찍게

얼굴도 안 보이시잖아요. 얼마나 다행인지요!

만약 얼굴을 보여주시면, 맨날 그 옆에서 사진 찍어서 자기를 자랑할 사람들이.. 줄을 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등한시하고요...

 

▲여러분에겐 어떤 친구가 있습니까?

결국 우리는 그런 요나단과 같은 친구는 없다는 걸 압니다.

 

길은 하나예요.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친구가 될 수 있을 뿐입니다.

 

요나단 같은 친구를 기대할 수 없을지라도

내가 그런 친구가 누구에게 되어 줄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런 요나단 같은 친구가 내게 되어 주시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오늘 나에겐, 예수님이 바로 요나단 같은 친구이십니다.

 

요나단이란 이름의 뜻, '여호와께서 주신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란 말입니다.

 

내가 진정 예수님을 만나면, 변화되어서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하면 저 친구를 이루어 주게 할까?' 

즉 내가 요나단이 되어서, 다윗을 성공시키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게 십자가의 길이요, 예수님이 먼저 그 본을 보여주셔서,

내가 그걸 보고 내 마음에 크게 감동받았으니까요! 그래서 자연히 본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남을 밟고 올라간다거나, 내가 그와 경쟁해서 뭘 성취하겠다는 생각은..

예수 안 믿는 사람의 생각입니다.

 

아니 그 사람은 꿈도 안 꾸지만, 이 땅에 잠시 목숨을 가지고 살아가는 동안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주기 위해서, 우리는

그가 필요 없다는데도.. 그냥 가서 그렇게 공을 들인 단 말이에요.

 

'너한테 지금 돈이 필요한 게 아니야! 너한테는 영생이 필요해!

너한테는 지금 쾌락이 필요한 게 아니라, 진정한 기쁨이 필요해!

너한테는 지금 성적인 욕망이 필요한 게 아니라, 주님의 사랑이 필요해!'

이런 얘기를 우리가, 듣기 싫어해도 해 준다는 말입니다.

 

그게 먼저 우리가 요나단(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그 분이 우리에게 먼저 찾아 오셨기 때문에

그 분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내가 그에게 요나단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15:13~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요15:13~15

 

여러분께는 진정한 친구가 없습니까?

괜찮습니다. 예수님을 요나단 같은 친구로 만나십시오.

 

친구가 여럿이면 좋지만 꼭 그럴 필요 없습니다. 친구들 그거 다 가짜입니다.

제가 세상 친구들을 거의 다 끊었습니다.

동창들 만나 봤자, 그들의 긴 얘기를 딱 한 줄로 정리할 수 있어요.

'자기 자랑 아니면 남의 욕' 얘기입니다.

새겨 들을 말은 하나도 없어요.

 

어떤 친구는 자기가 무슨 불륜을 저질러 놓고는, 그걸 로맨스처럼 얘기를 합니다.

듣느라 시간만 아까워요.

 

저는 여러분들이 단 한 분의 친구를 제대로 만나게 되길 바랍니다.

이 친구를 Jesus 제대로 만나면 내 인생이 바뀝니다.

 

이 친구분을 더 깊이 알아가는 데 게으르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쓰고 있는 시간에 1/100만 가지고도 이 분과 친하게 교제하면

자기 인생이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왜 예수 믿는데도 내가 안 달라지느냐?

이 친구분하고 통 시간을 같이 안 보내니까 그렇습니다.

 

본문에 요나단이 다윗에게 그렇게 부탁을 해요.

'나를 기억하라, 네 자비로움 으로 나를 기억해 달라' ↙

 

삼상20:14~15 '너는 내가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의 인자하심(헤세드)을 내게 베풀어서

나를 죽지 않게 할 뿐 아니라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 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함(헤세드)을 내 집에서 영원히 끊어 버리지 말라 하고'

 

지금 왕자가 신하에게 그런 부탁을 하는 거예요.

그러고는 요나단은 자기 아버지를 배반하고, 아버지의 적인 친구 편에 서요. 반역이죠.

 

여러분, 우리 크리스천은 어떤 의미로는, 세상에 반역하기 위해 사는 사람이에요.

이런 요나단과 같은 의미의 반역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친구들도 우리처럼 반역하기로 원하죠. *요나단의 반역

 

그리고 그 친구가 세상으로부터 독립 하기를 원해요.

기억하십시오. 크리스천은 첫째 실패 하러 가는 길입니다.  *세상적 관점으로는 실패의 길

두 번째, 자기부정 하러 가는 길입니다.

세 번째, 누군가를 독립 시키러 가는 길입니다.   *신 앞에서 단독자

 

여러분, 자녀를 키우는 목적이 뭐예요?

자립할 줄 아는 아들 딸 만드는 거 아니에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이 뭔데요?

그리스도와 함께 홀로서기가 가능한 친구를 만드는 것,

그리스도와 함께 홀로 살아갈 수 있는 남편과 아내가 되는 것,

그리스도와 함께 홀로서기가 평생 가능한 아들, 딸이 되는 것!

 

목사에게 의존하고, 부모 신앙에 의존하고, 구역 식구에게 의존하는 신앙인이 되지 마십시오!

자유인이 되십시오!  또 의존하려고 해도, 의존 자체가 성립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즉 홀로서게 되면, 아내도 진정한 친구요,

남편도 진정한 친구요,

자식도 주안에서 요나단 같은 친구가 될 줄로 믿으십시오.

그 때 서로 진정한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이 어려운 세상, 힘든 세상, 목마른 세상, 고달픈 세상에

언제까지 사람들에게 묶여서, 매여서 사시겠습니까? (홀로 영적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사람을 사귀는 목적은, 그 사람을 주님 앞에서 독립시키기 위한 것이란 걸 기억하십시오.

이용해 먹는 것도 아니요, 내 맘대로 부려먹는 것도 아니요,

그 사람이 영적으로 홀로 서기가 되도록 돕는 게 사랑이란 말입니다.  

오늘 이 본문을, 설교문을 집에 가서 한 번 더 읽어 보십시오.

그러면서 '나는 남은 생애,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 건가?' 생각해 보세요.

 

그 분께서 우리에게 요나단 같은 친구가 되어 주셨기 때문에

'나는 이제 누구에게 그런 요나단이 될 것인가?'

 

욕심 많아서 되는 거 하나도 없어요.

단 한 사람이라도, 그 사람에게 나는 요나단이 돼야 되겠다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그게 바로 내가 바로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라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가 누구에게, 요나단 같은 친구가 되어주지 못한다면,

나는 신앙 연수가 어떻든지, 자기 직분이 어떻든지에 상관 없이

아주 피상적이고 초등학교 수준의 유치한 신앙인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누구에게 요나단이 될 것인가를

깊이 묵상하는 한 주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