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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11:19~26 킹덤 파이오니어 Kingdom Pioneer

LNCK 2021. 10. 3. 21:27

https://www.youtube.com/watch?v=sTIqzc-e9wI  

킹덤 파이오니어 Kingdom Pioneer    행11:19~26    2021.10.03.출처, 녹취

서론 / 교회의 위기는, 외부가 아니라, 내부로부터 왔었습니다.     주1)

◑한반도의 복음화도 핍박으로 인해 일어났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와 비슷하게요.

(출처 동영상의 9분 50초부터 녹취 시작)

대한민국의 역사에서도 1907년 평양에서 대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변화되었고, 구습을 벗고 새생명으로 살아 가게 되었어요. 
평양의 거리마다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장로회 신학대학교의 원조도 평양신학교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자발적으로 이 한반도 전체에 걸쳐서 복음을 전하러 확산 되었는가? 
당시에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릴 정도로 평양에 많은 교회들이 세워지고 
많은 학교들이 세워졌지만 
자발적으로 그들에게 '저 제주도 이르기까지, 저 부산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가야 한다'.. 라는 
그런 사명에 투철하게 되었는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때 원치 않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공산당이 일어나고, 한국 전쟁이 일어나고.. 
여러가지 원치 않는 이 나라의 많은 이들에게 아픔을 주었던 역사가 일어났고 
섭리적으로 볼 때, 결과적으로 복음이, 남한과 제주도에까지 확산되는 결과가 일어났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십대의 나이에 혈혈단신 남쪽으로 내려온 분들도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환경속에서 이산가족이 되면서 남쪽으로 내려와 교회를 세우고 
북에서 내려온 많은 피난민들이 세운 교회가, 
분단 후 한국교회의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핍박으로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흩어질 수밖에 없는 것을 통해서도 역사하신 하나님이, 
이 민족의 역사를 통해서도, 우리가 다 헤아리기 어려운 섭리로 
복음이 확산되게 하셨다는 것이죠. 

때로 우리가 하나님의 지상명령에, 
그리고 이 하나님의 계획에 온전히 순종하지 않을 때는 
때로는 원치 않는 사회적 환경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이끌어 가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본 선교에 헌신한 결과 서서히 드러나는 열매들

제(이재훈 목사)가 미국에서 목회할 때, 하용조 목사님께서 제 위임예배 때 오셔서 
설교해 주셨을 때, 
설교하시는 가운데 한 문장을 말씀하셨는데 
내 마음 속에 오랫동안 남아 있는 문장이 있습니다. 이런 문장입니다. 

"교회의 능력은 싯팅 커페스티, 즉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여서 앉을 수 있느냐가 아니라 
샌딩 커페스티, 즉 얼마나 많은 사람을 세상으로, 선교지로 파송할 수 있느냐의 능력이다." 

그렇다! Sitting capacity가 아니라 Sending capacity이다!
그날 설교 가운데 하신 이 말씀이, 아직도 제 마음 속에 생생이 남아 있습니다. 

온누리교회가 지난 36년동안 많은 선교사님들을 파송하고, 지원하고 
온 교회가 함께 선교적 사역에 동참한 것, 
그것이 교회 참된 능력이었고 
하나님께서 온누리교회를 사용하신 이유입니다. 

▲최근 일본의 한 신학교 교수님이 
세계적인 선교 운동인 '로잔 운동'에 올린 한 페이퍼(소 논문)를 제게 보내 왔습니다. 

'지난 세월 동안, 많은 교회, 많은 선교단체가 일본을 복음화 하려고 노력해봤는데 
그 결과로는 '선교사들의 무덤'이라는 오명만 가지게 되었다. 

하용조 목사님께서 일본 두란노, 일본 CGN, 그리고 비전교회, 
그리고 '러브 소나타'를 통해서  *러브 소나타 : 일본 새신자 초청 전도집회

전방위적으로 해마다 수백명의 한국 성도들이 아웃리치를 와서 
일본 교회를 방문하고, 헌금 해 주고, 기도 해 주고, 격려해 주었던 그 결과 
예수님을 믿게 된 회심자의 숫자 뿐만 아니라 

 

지금 일본 교회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붙어 있는 이 (성령의) 불은 
온누리교회를 통하여 붙여주신 것이다. 

가장 일본으로부터 많은 침략과 그리고 수치와 상처를 받았던 한민족이 
그러한 아픔과 수치를 주었던 일본을 사랑하고 축복하고 용서하고 
일본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가장 열심을 낸 결과가 
지금 일본 교회를 살리고 있다'는 아티클을 

세계적인 잡지에 올리기 전에 제게 보내 왔어요. 

이런 코로나 팬데믹 속에, 저희 조차도 '지금은 무엇인가를 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일본 성도들은 '그래도 해야 한다. 모일 수 있는 만큼 모여서라도 전도 해야 된다.' 
그렇게 부르짖고 있는 것은 

바로 하용조 목사님이 목숨을 걸고 투석하는 가운데서도 
일본의 도시마다 다니며 복음을 전하며,
연약한 건강이지만 헌신하였던 그 기억이 
일본 목사님들의 마음속에 아직도 자리 잡고 있는 거예요. 

'교회의 능력은 Sitting Capacity가 아니라 Sending Capacity 이다!'
그것이 하목사님의 목회철학이요, 우리가 가야할 소중한 정신인 것입니다. 

바로 킹덤 파이오니어 Kingdom Pioneer 의 정신이에요.    *설교 제목

파이오니어는 개척자입니다.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만드는 자입니다. 
지도를 따라가는 사람이 아니라, 지도를 만드는 사람인 것입니다.
누군가 지도를 만들었기에, 그 지도를 따라갈 수 있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선교사들의 무덤이라는 일본에, 선교가, 전도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파이오니어!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개척자이기를 원하셨습니다.
킹덤 파이오니어  Kingdom Pioneer 이기를 기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충분히 흩어지기를 실패했을 때 
하나님은 핍박을 통해서도 흩어지도록 하셨습니다.

때로 우리가 원치 않을지라도 
원치 않는 상황을 통해서도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이루어 가신다는 것! 
그 놀라우신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는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흩어져 복음을 전한 성도들의 모습 속에 나타난 
내부적인 장벽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흩어진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이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행11:19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성경에 이 구절을 기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잘 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부족한 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들은 베니게(페니키아), 구브로(키프로스), 안디옥 등 이방 도시에까지 흩어졌지만 
그곳의 유대 사람에게만 말씀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안디옥 도시는 인구 50만 명의 국제 도시였습니다. 
주전 300년에 알렉산더 대제의 장군 중 하나인 셀레우코스 니카토르 라는 헬라인이
안디옥 도시를 세웠습니다. 그 후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모여 들었어요. 

수만명의 유대인들이 이주했고, 그리고 페르시아인, 인디아, 심지어 중국에서도 왔고 

나중에 로마제국에 편입된 뒤로는 라틴(로마)민족 까지 합세해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 이어서 세 번째로 큰 국제도시가 되었습니다. 

그 인종의 다양성으로는, 당시 가장 다인종 사회를 구성한 도시가 안디옥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다인종이 살고 있는 도시(안디옥)로 흩어진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이 
그곳의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언어와 문화의 차이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10년 ~ 20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그 나라의 언어와 문화에 익숙해지고 나서도
여전히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고 있었다면 
그것은 모순이요, 그것은 파이오니어(개척자, 선구자)의 모습이 아닌 것이죠. 

▲이런 현상은 사실 세계적으로 많은 인종들이 섞여 사는 도시의 교회에서도
똑같이 나타납니다.

미국에도 가보면 아프리칸 처치, 스페니쉬 처치, 코리안 처치.. 다 인종들끼리 모입니다. 

말이 통하니까 사실 어쩔 수 없이 민족 공동체가 형성이 되죠. 

그런데 이중언어, 삼중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도 
동일인종들 끼리만 모여서 교회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성경적인 교회는 아닙니다.

2000년대 초반에, 미국의 <Christianity Today> 라는 기독교 잡지에서 
1면에 탑 기사가 이런 제목이었습니다. 

'모든 성경적인 교회는 반드시 멀티 애쓰니 처치이어야 한다. Multi-ethnic Church
다민족교회 이어야 된다.' 

그것은 당시의 미국 전체의 교회들의 모습을 꼬집는 말이었어요.
백인은 백인끼리, 흑인은 흑인끼리, 아시안은 아시안들 끼리 
중국인은 중국인들끼리, 한국인은 한국인들끼리.. 

그래서 많은 이민교회들이 '한인 교회' 라는 이름을 붙였죠.

당시 미국에서 목회하던 제가, 그 잡지의 글을 읽고 충격을 받았죠.
그래서 제가 당시에 목회하던 교회의 성도들에게 비전을 선포할 때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한인교회의 사명은 한인 이라는 타이틀을 떼는 것입니다. 
이민 온지 수십 년이 되었는데도, 한인 교회로 존재 하려고 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흩어진 성도들이 안디옥까지 이르렀음에도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하고 있는 모습과 다름이 없습니다." 

저 멀리 선교지까지 선교여행을 다녀오면서도 
바로 자신의 이웃에 있는 이웃에게는, 복음으로 다가가지 않는 모습은 모순인 것이죠. 

▲우리나라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우리나라는 현재 법적으로 250만 명의 외국인이 이주민이 살고 있습니다.
(불법이민자를 포함하면, 이미 300백만 명이 됐을 겁니다) 

한국인의 인구감소 및 출산률 저하로 인해서 
이주민의 숫자는 더 급증할 것이고 
이주민 뿐만 아니라 많은 유학생들이 지금 우리나라로 유학오고 있습니다.

국내 대학들은 많은 학생 수의 감소로 인해
이제 외국인 유학생들에게 점점 더 문호를 넓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외국인 유학생들의 숫자가 점점 많아지고 있어요. 
이미 수만명의 중국유학생들이 들어와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또한 난민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하여 
이 나라에 와 있는 외국인 이주자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게 아마 완전히 10~20년이 되면 400만이 될지, 500만이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나라 인구 감소율이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나라이기 때문에 
영국의 어느 학자의 말에 의하면 
지구상에서 가장 먼저 소멸되는 나라가 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렇기에 더 많은 이주민들을 받지 않으면 경제 사회가 붕괴될 것입니다. 
지금 농어촌에 가 보십시오. 농사짓고 어촌 일하는 사람들은 다 이주민들입니다. 
사회에 노동력을 지탱하고 있는 사람들이 외국인 이주자들입니다. 

이제 우리나라는 더이상 단일민족이 아닙니다. 
우리나라가 단일민족, 단일민족을 부르짖는 것은 
유대인들이 흩어져서 더 유대민족, 유대민족을 부르짖는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이제 우리나라는 다민족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 교회들이 
한국인들만, 우리끼리만 모이는 교회로 고집하고 있다면
바로 안디옥에서 유대인들끼리만 복음을 전하고 교제했던... 그러한 모습과 같습니다. 

▲온누리교회는 파이어니어 (개척 정신의) 교회였습니다.
초창기부터 '온누리 미션' 이름으로 외국인 이주자들 예배가 많이 있었습니다.

미얀마 예배, 러시아어 예배, 인도네시아어 예배 등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우리 교회와 별개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젠 '온누리 교회 전체가 다민족 교회다' 라는 의식을 가지고 
다른 민족들을 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익숙한 한국말로 편하게 예배하고,

여기는 우리나라니까 우리 교회의 언어는 당연히 우리 말이겠지..' 라고 생각하지만 

우리나라 말에 익숙하지 않은, 심지어 탈북민에 이르기까지 
그들을 어떻게 우리가 품느냐가 
사도행전적 교회가 되느냐/ 안 되느냐 를 결정짓는 것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교회 내부의 문제로 갈등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온누리 교회는 그럴 시간이 없었어요.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헌신한 교회로 존재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또 다른 시대가 찾아 오고 있어요. 
그것은 인구의 4분의 1 이상이 외국 이주자들이 되는 다문화 다민족 시대에 
온누리교회는 어떤 모습을 가질 것인가요? 

그저 '우리들만의 교회'가 된다면 
해외에 가 있는 교회들이, 한인교회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다름없는 
그런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목회했던 교회의 장로님들이 
참 선교적으로 열려 있었어요. 제가 많이 배웠어요. 
선교여행도 많이 다녔고요, 
목회 일정을 많이 비우고 선교지를 방문할 수 있도록 
저를 오히려 등 떠밀면서 '선교지를 많이 방문해야 된다'고 그렇게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원치 않는 선교여행도 많이 갔었어요. 참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그 장로님들이 예배당을 지으면서 중요한 결정을 했어요. 
'이제 우리들은 우리끼리 모여서 한국음식 먹고, 함께 교제하는 것을 포기해야 된다.
왜냐하면 외국인들이 올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한인교회를 가 보면, 식당에서 나는 냄새가 교회 전체에 그냥 배어있어요. 
우리들은 못 느낍니다.

우리가 마치 다른 나라 사람의 집에 가면, 그 특유한 냄새가 나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런데 많은 한인교회들이 모여서 예배 마치면 
함께 음식 해 먹는 것을 너무나 중요하게 여깁니다.

어떤 목사님은 '설교는 못 해도 음식은 못 하면 안 된다' 그런 철학을 가지고 
밥 먹이는 일에 열중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밥을 제공하지 말고, 교회에서 밥을 해 먹지 말자. 
간단하게 커피나 스낵으로 끝내자. 미국식으로 끝내자. 
왜냐면 외국인들이 올 수 있어야 된다!' 

그런 결정을 한 결과, 많은 커뮤니티 기관에서 
즉 소방서, 학교 교사들, 그 외 많은 시민단체 모임들이 이용하는 교회가 되었어요.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교회가 되었어요. 

장로님들의 결정을 제가 참 존중하게 되었어요. 
'이게 올바른 안목이구나, 
이게 킹덤 파이오니아의 결정이구나' *하나님 나라의 개척자


◑오늘 본문에 보면, 그 소수의 사람들이 창의적인 결정을 했던 모습이 나옵니다. 

그것은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은 소수의 성도들이 
안디옥에 있는 그리스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행11:20~21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헬라(그리스)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이것을 성경말씀에 기록한 것은, 바람직한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것입니다.
'이 일은 꼭 필요했던 것이고, 이래야 된다'.. 라고 말씀하시기 위해서예요.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했던 예루살렘교회 성도들 가운데
구브로와 구레네 출신,  
물론 그들이 자기 출신지(키프로스, 키레네 Lybia)에서 

이방 세계를 이해한 유대인들이 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어쨌든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나타났다는 것, 
그로 인하여 안디옥교회가 태어나게 되었어요. 

사도행전의 새로운 터닝포인트가 일어난 것입니다. 

만약 안디옥교회가 출생하지 않았더라면 
바울의 모든 전도사역의 거점이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역사는, 안디옥교회의 역사라고 할만큼 
안디옥교회가 복음이 온 세상에, 이방 세계에 전해지는 일에 쓰임받은 교회입니다. 

만일 이렇게 그리스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일이 일어나지 않고, 
그래서 안디옥교회가 탄생 하지 않았다면 
사도 바울의 사역의 근거도 없었을 거예요. 

이 안디옥교회는 예루살렘 교회가 창립기념으로 개척한 교회가 아닙니다. 
무명의 소수의 성도들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입니다.

이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사도행전의 역사를 이루어 가셨습니다. 
너무나 중요한 사건이지요.

이때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교회에는, 주의 능력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는 교회는 
하나님께서 그 능력과 자원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 속에 교회가 헌금 수입이 줄고 어렵다고 
해외 선교 지원부터 줄이는 교회는.. 제일 먼저 사라질 거예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최우선으로 여기고 행하는 교회는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안디옥교회에 주의 손이 함께 하셔서 많은 믿는 이들의 증가한 것처럼
그러한 교회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축복하십니다.

온누리교회에 지난 36년동안에 왜 다른 교회와 같은 문제가 없었겠습니까? 
왜 어려움이 없겠습니까? 

많은 문제와 도전들을 이길 수 있었던 힘은 오직 한 가지였어요. 
복음을 전하는 교회의 비전을 포기하지 않은 거예요. 

◑이때 예루살렘교회에 이 소식이 들려졌을 때,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파송합니다.

 

행11:22~24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바나바는 구브로(키프로스) 출신의 유대인입니다.

그래서 다민족에 대한 이해도가 깊었던 사람이기에 그를 파송한 거지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갔더라면 어쩌면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율법에 묶여 있는 그들의 전통, 고정관념, 전통 때문에

이방인들을 교회에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어려웠을거예요.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해질 때, 무엇을 허용해야 하고, 무엇을 고수해야 되는지

분별 할 줄 아는 사람이 바나바 였습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그들 이방인들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격려했다'고 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과 함께 동역할 사울을 다소로부터 데려왔다는 거예요. 바울이죠.

사도 바울을 사역으로 이끌어 준 사람이 바나바 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멋진 모습입니까!

자신보다 더 사역을 잘 할 사람을 찾아서 세우는 모습!

그리고 그와 동역하는 모습!

 

물론 바나바와 바울이 나중에 2차전도여행 때 마가를 놓고 서로 나눠지는 일이 있었지만

적어도 안디옥교회 목회 시절에, 그들은 이상적인 팀웍을 이루었고

주님이 임재하시는 하나됨을 이루었고,

 

그들이 말씀을 전할 뿐 만 아니라, 그들의 성숙한 관계를 통해서도

안디옥 성도들이 참된 교회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온누리교회가 지난 36년동안 우리 김진구 장로님, 김영길 장로님  두 분의 장로님으로부터 시작하여

보이지 않는 중요한 전통이 뭔 지 아십니까?

'나보다 이 사역을 더 잘 할 수 있는 분이라면, 기꺼이 그분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그분이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는 전통입니다.

 

바울이 바나바와 바울을 세워 함께 동역하고

이제 바나바는 바울을 세운 이후에, 사도행전의 역사는 바울의 역사 같아요.

바울이 메인 무대에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바울이 바나바가, 바울이 마음껏 은사를 발휘하고 지도자로서 일할 수 있도록

협력하고 도왔기 때문이죠. 이것이 복음에 합당한 관계, 복음에 합당한 사역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할 뿐만 아니라, 복음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들려질 뿐만 아니라, 함께 하는 동역자들의 관계를 통해서도

복음은 보여지는 것입니다.

복음은 말이 아니라, 삶으로 전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 바나바와 바울을 통해 양육 받은 성도들은

이 두 사람간의 성숙한 복음안에서의 교제, 복음안에서의 동역을 바라보며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모습이 있었어요.

 

그 결과, 11:26절에 '안디옥에서 제자들은 처음으로 그리스도의 사람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명칭은 교인들 스스로가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 사람들이 '당신들은 그리스도의 사람들이구나!' 라고 불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교회의 모습입니다.

 

▲교회는 언제나 현재의 모습에서 파악하려고 하면 길을 잃어버립니다.

종말의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에

주님의 복음을 증거하는 파이오니어 (개척자) 로서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선교는 교회 한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교회 전체를 존재하게 하는 원리입니다.

불은 타올라야 불이듯이, 교회는 선교적 이어야 교회인 것입니다.

 

유명한 신학자이자 인도에서 수십년간 사역한 선교학자 레슬리 뉴비긴은

자기 책 <교회란 무엇인가?> 라는 책에서

교회가 그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을 나열합니다.

 

그중 두 가지만 말씀 드리면,

1) 첫째로, 교회와 선교회를 서로 다른 종류의 공동체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시각이라는 거죠.

 

'교회'는 예배드리고, 성도를 양육하고, 심방하고 돌보는 공동체이고,

'선교회'는 복음 전파에 전념하여 믿는 사람을 교회로 넘겨주는 단체라고 생각하는

이런 분리된 생각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현상이요, 교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거예요.

 

온누리교회의 지난 36년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우리가 '러브 소나타'로 행하고

여러 공동체 별로 선교사님을 후원하고 하면서

마치 선교 단체 처럼 움직였지 않습니까?

 

때로 어떤 성도들은 온누리교회는 교회입니까, 선교단체 합니까? 혼동할 정도로

그렇게 융합되어 있는 모습이.. 올바르게 교회가 이제까지 존재해 왔다는 증거입니다.

 

2) 두 번째로, 교회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선교의 의무는 교회의 내부적인 필요가 다 채워진 다음에

남은 여력으로 행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많은 교회들이 그렇습니다. 교회 내부의 필요가 채워지면 그제야 선교하려 합니다.

그래서 교회 재정이 어려워지면, 먼저 선교지 지원을 끊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는 가장 먼저 소멸될 것입니다.

가장 먼저 굳어지고, 가장 먼저 전통의 포로가 되고, 가장 먼저 내부적 다툼과 분열이 일어날 것입니다.

 

온누리교회의 역사에서도, 때로 많은 채무를 질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 프로젝트로 채무가 많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도 선교사역이 위축되게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선교사님을 파송하고, 후원하고, 선교에 전념하는 것에 위축되지 않도록 한 것이

지난 36년동안 하나님께서 온누리교회 함께 하신 것이라고 저는 간증할 수 있어요.

앞서 섬겼던 장로님들에게도 동일한 간증이 있을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 유일한 능력이요. 자산입니다.

인간적으로 판단해서, 내부적으로 우리의 필요가 다 채워지고 남은 여력으로 하려고 하면..

여력이란 게 남지 않습니다. 항상 남지 않아요.

 

그러나 성도들의 공동체와 돌봄을 게을리 해야 된다는 뜻도 아니지요.

동시적 이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이 모습,

예루살렘 교회 중심의 그 교회를 뛰어 넘어서

이제 안디옥교회에서 여러 민족, 이방을 향하여 나가는 안디옥교회,

 

안디옥 교회는 이방인 선교사역에 열심을 냈지만,

그 교회 성도들은 당시 사회로부터 '그리스도의 사람들'이라 불리우는

그러한 성숙한 신앙 인격과 평가를 받았던 것이 동시적으로 일어났던 거예요.

 

'저 교회는 선교는 열심히 하는데 성도들의 삶은 엉망이야' .. 이런 평가를 들으면

선교를 잘못한 거예요.

 

'저 교회 성도들은 성숙하고 괜찮은데, 선교를 거의 안 해!' 그것도 잘못된 거예요.

이 선교와 성숙은, 둘이 함께 존재해야 되는 거예요.

그것이 안디옥교회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교회 창립 36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 성도님들에게 좀 설교 내용이 길었습니다.

킹덤 파이오니어 Kingdom Pioneer 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는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선교적 파이오니어, 즉 개척자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대부분의 한국교회가, 우리나라에 많이 살고 있는 이주민들을

그저 이주민으로만 생각하는 거예요.

예루살렘 교회 같은 모습입니다.

 

이제는 이전보다 더 그들을 품고, 우리의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대한민국의 일원으로 생각하고, 온누리교인으로 생각하고

그들을 축복하는 노력을 더 기울여야 됩니다.

 

제 생각에는 값 순(구역)마다, 이주민들을 다 그냥 순원으로 보냈으면 좋겠어요. 강제적으로!

말이 안 통해도 좋아요. 말 배운다고 생각하고..

그럴 정도로 파격적으로 우리가 그들을 품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굳어집니다.

과거의 전통과, 익숙했던 우리의 관습이 곧 우리의 적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하고, 우리 사회가 우리를 보고 '그리스도의 사람들'이라 부를 수 있는

온누리교회가 될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난 36년간의 온누리교회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복음을 온 세상에 증거하는 안디옥교회 처럼 사용하시니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안에는, 예루살렘교회 처럼,

과거와 전통과 경험에 안주하려는 모습이 여전히 있사오니

주님, 저희들을 깨워 주시고 다시 한 번 하나님 나라의 선교에

온전히 헌신한 킹덤 파이오니어 로서 쓰임 받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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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 교회 위기는 외부로부터 오지 않았습니다. 
외부의 핍박은 도리어 교회를 순결하게 했고 
성도들의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했습니다. 

초기 사도들이 유대주의자들에 의하여 핍박을 받았을 때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도들을 옥에 두었을 때, 제자들은 더욱더 기도했습니다. 
그때 옥문이 열리고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로마 제국의 극심만 핍박 속에, 성도들의 숫자는 도리어 증가했습니다. 
어떠한 핍박도 초대교회를 무너뜨릴 수 없었습니다.

▲중국에서 교회를 핍박하고 교회를 문 닫게 한 그 기간 동안 
중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어떠한 정부의 정책,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무신론자들의 공격, 
그리고 세상의 어떤 사상과 이념도.. 교회를 무력화시키기 못했습니다. 

지난 2천년 동안 성경을 무너뜨리려는 수많은 세속 사상가들의 공격과 비평이 있었지만 
성경 66권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늘까지 우리에게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외부의 환경과 핍박은, 결코 교회를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도리어 교회를 위태롭게 하고, 교회를 교회의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한 것은 
내부로부터 스스로 만들어내는 어떤 장벽이었습니다. 

전통에 대한 고정관념, 과거의 경험과 습관에 묶이는 것,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에 묶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해석과 주장에 묶이는 모습들... 

사도행전으로 말하자면,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주의에 묶여있는 모습, 
오랜 역사를 통하여 그들에게 익숙해 왔던 율법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로막았고 
하나님의 비전을 가로막았고, 하나님 나라에 장벽이 되었던 것입니다. 


◑교회 내부 스스로 만드는 두 가지 장벽이 존재합니다. 

-첫째는 역사가 흐르면서, 역사가 오래되면서 생기는 장벽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역사의 시간의 흐름과 상관없이 
교회 성도들의 크기, 사이즈의 성장에 따라 생기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역사가 오래되었던/ 짧던 상관없이.. 크기에 의하여 생기는 문제가 있고 
-사이즈가 크든 작든 간에, 역사가 오래되면서 생기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사이즈의 성장에 따라 생기는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 있었습니다. 
초기에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의 첫 번째 문제는 
구제 명단에 자꾸 (일부 교인 이름이) 누락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의 수가 많아지면서, 그 많은 숫자, 사이즈의 성장에 따른 
행정력이 뒷받침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였죠. 
그래서 집사 제도가 생긴 것입니다. 
사이즈에 따른 문제는, 적절한 제도에 따라서 해결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역사가 오래되면서 생기는 문제는 
우리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채 점점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제도의 개선만 가지고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왜냐면 사람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 쌓여져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통 등
자기도 모르게 자기가 갇혀 있는지도 모르고 
자신들은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열심히 헌신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봉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교회 스스로가 쌓여서 만들어내는 장벽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과거의 경험과 전통과 습관에 묶이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역사에 있어서, 초기 사도행전의 역사에 가장 큰 걸림돌은 
앞서 말한대로 외부의 핍박에 아니라 
초기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이 가지고 있었던 율법중심적인 세계관, 
선민의식, 유대인 중심의 문화의식 등이었습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이방인 경우에 
그들도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고 
율법을 유대인들과 동일하게 지켜야 한다고 말했죠. 

심지어는 사도 베드로도, 환상을 통해 하나님께서 
레위기 율법에 먹지 말라고 한 그 동물을 먹으라고 하셨을 때 
'저는 먹을 수 없습니다' 라고 하나님께 반기를 들었던 모습을 통해서 볼 때 

초기 사도행전에 나타난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는 
가장 먼저 믿은 그 사도들 안에 존재하는 '율법 중심적인 세계관'이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율법주의'라고 말하고 
다음 주부터 우리가 살펴볼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이 그토록 심하게 꾸짖으며 고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온 것이 아니지요. 
먼저 택함을 받아 성도가 된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내부의 장벽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교회의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의 모습에서도 그러한 조짐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초대교회는 그 장벽을 뛰어넘어 
교회의 생명력이 더 충만하게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스데반 집사의 순교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핍박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사방으로 흩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매우 충격적이고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서로 사랑하며 모이기를 힘쓰며, 서로 말씀을 나누며 
또 자기 재물을 자기 것이라 여기지 아니하고 서로의 필요를 채워 주었던 
그 이상적인 공동체를 경험했던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이 
흩어져야만 했다는 것은.. 매우 큰 충격입니다.

자기들이 원치 않은 일입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핍박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그들은 
키프로스(구브로)와 안디옥에 이르기까지 흩어져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볼 때 
이들이 흩어짐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결과를 통해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되돌아볼 수 있습니다. 

'왜 이런 핍박을 하나님이 허락하셨을까?' 
이들에게 주어진 이 핍박을 통해, 이들은 흩어졌고 
흩어진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이, 이방 세계에까지 말씀을 전하는 통로가 되어서 
하나님의 복음이 온 세상에 확산되는 열매를 맺게 되었다는 거죠. 

그들의 흩어짐은, 원치 않은 흩어짐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핍박을 통해서도 
그들이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할 수 있도록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중요한 명령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명령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는, 서로의 만남이 너무 좋아서 
서로의 교재가 너무 훌륭했고,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평등을 경험했고 
자유를 경험했고, 그리고 따뜻한 사랑을 경험했기에 
그들은 모이기를 힘썼지만, 흩어질 수 없었던 거예요. 

어쩌면 오늘 이 시대에 우리들이 
그 시대에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이었다면, 
우리도 동일하게 흩어지기 어려웠을 겁니다. 

저희 온누리 교회 역사를 통해서도 보면, 
공동체를 재편하고, 순을 새롭게 재편성 하기만해도 
오랫동안 정들었던 분들과 헤어지는 것이 얼마나 힘듭니까! 
그래서 많은 갈등과 이견이 표출되기도 합니다.

하물며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이 서로 사랑을 나누었던 그 강력한 공동체가 
핍박으로 흩어져야만 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충격이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로 이 사건을 볼 때 
자발적으로 흩어지지 못했던.. 
스스로 이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했던 예루살렘 교회에 주어진 이 핍박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복음이 이방으로 확산되는 통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원치 않는 곳으로 
우리를 흩으심으로써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