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이사야26장 ‘그 날에’ 성도들이 부르는 노래

LNCK 2021. 10. 4. 12:48

 

◈‘그 날에’ 성도들이 부르는 노래       이사야26장        여러자료 정리 

 

사24~27장은, 이 내용이 요한계시록에 옮겨놓아도 똑같은 내용입니다. *이사야서의 소묵시록

미래의 ‘그 날에’ 이루어질 사건들입니다.

 

(이런 내용을 자세히 공부하면, 요한계시록 해석에 도움을 줄 것입니다.

이런 이사야서의 묵시록, 에스겔서의 묵시록에 대한 이해가 제로인 상태에서

요한계시록만 직접 해석하려 든다면.. 상당한 해석적 오류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이런 내용들을 공부하면, 신약의 요한계시록도 많은 부분 '상징적'으로 해석하게 될 것입니다.)

 

‘그 날에’ 하나님이 이루실 완전한 나라가 어떤 모습의 나라인지, 

‘그 날에’ 주님 앞에 서게 될 우리의 모습이 어떤 모습이 될 지를.. 계시해 보여줍니다.

 

이사야는 반복헤서 ‘그 날에, 그 때에’를 말씀합니다.                     주1)

매 장마다 이사야가 기록하는 핵심이 바로 ‘그 날’인데,

이것은 오늘 현실을 살게 하는 힘입니다.

 

오늘 우리가 현실을 가장 지혜롭게 잘 사는 길은 과연 무엇일까요?

지금 현실을 제대로 잘 안다고 해서, 지금 현실을 잘 사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지금의 현실을 제대로 잘 살려면,

‘그 날’을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그 날’을 지향하며 사는 것입니다.

 

만약 오늘 우리가 ‘그 날’을 목적삼지 않고 살고 있다면,

내가 아무리 잘 살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뭔가 불충분한 잘못된 삶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가 ‘그 날’을, 매 장마다 반복해서 거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서를 읽다가 '그 날에, 그 때에'가 나오면, 눈을 크게 뜨고 봐야 됩니다.

'아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 삶의 목표를 주시는 구나..' 하는 마음으로 봐야 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성城에 들어가는 의인들의 노래     1~7절

 

‘새 예루살렘 성’(사60장, 62장),

또는 ‘그 날의 시온산의 잔치’(사25장 등)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인성을 닮아, 성화된 사람이 들어갑니다.

예복을 입어야 들어갑니다.

 

사26장은, 그저 ‘구원 받은 자의 찬양’이 기록된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구원 받은 자로서, 변화된 성품’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는 자의 변화된 성품’을 노래합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타락한 비인격자에게 완전한 인격자 예수님을 보내시사

택한 자를 접붙여 완전인격의 포도나무 가지를 만드십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렇게 정녕 구원 받은 사람은, 그 증거가 드러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성화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 속에 심어진 ‘말씀의 씨’가, 그를 영적으로 점점 성숙시킵니다.

 

▲1절, 그 날에 유다 땅에서 이 노래를 부르리라.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을 성벽과 외벽으로 삼으시리로다.

 

26:1절은 26장의 표제입니다. <그 날에 유다 땅에서, 이 노래를 부르리라>

그 날은 여호와의 날, 심판의 날입니다.

 

주님이 임하셔서, 세상 모든 만물을 심판하시고, 교만한 자들을 벌하시는 날,

교만한 자들의 성읍을 훼파하시는 날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그 내용이 26장입니다.

 

계시록에는 ‘새 노래를 부른다’고 되어 있습니다.

계시록14:3,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그 외 계15:3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그 견고한 성읍은 ‘여호와께서 구원으로 성벽과 외벽을 삼음이여’

즉 여호와의 구원이 견고한 성읍입니다.      *관련글 ☞성곽과 문빗장 없는 도시에 살기

 

‘여호와께서 구원으로 성과 곽을 삼으시리로다.’

'모압'으로 전형화된 하나님의 백성의 원수가 몰락하는 날에

새로운 도성이 창건될 것인데, 1절에, 그 도성의 강함의 원천이 제시됩니다.

그것은 그 백성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입니다.  *일차적으로 '구조'라는 뜻

 

돌과 흙으로 빚은 성벽과 바깥벽만으로는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백성을 보호하지 못하죠.

오직 하나님의 '구원'이 함께할 때라야 그 도성은 난공 불락이 됩니다.  *넓게 보면 '영혼 구원'도 포함

 

'그가 성벽을 겹겹이 쌓아 우리를 구원(위기에서 구조)하셨다.'  공동번역

'주님께서 친히 성벽과 방어벽이 되셔서 우리를 구원(전쟁에서 구조)하셨다.' 새번역

 

▲2절, 너희는 문들을 열고,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나라(성도)가 들어오게 할지어다.

 

(새 예루살렘 성의) 문을 여는 목적은

의로운 나라(의롭게 된 성도)가, 그 속으로 들어오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 성 안으로 들어오라는 초청입니다.   

 

의로운 나라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들이 누리는 복이 무엇인지가

아래에 7절까지 계속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구원에 참예할 수 있는 백성들의 자질이 두 가지로 언급됩니다.

 그것은 의로움(차디크)과 신실함(에무나, 위 본문에 '신의')입니다. 

*영어로 righteous, faithful

 

'신의를 지킨다  faithful'는 말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확고하게 신실하게 유지함을 뜻하는 말이며, 즉 변치 않으며

'의로운 righteous 나라'는 그로부터 얻게되는 영적 특성입니다. (신6:25)

 

이것은 다음절에서 보다 명확하게 표현됩니다.

 

▲3절,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새 예루살렘 성의 성문으로 들어가는 의로운 나라(성도)는

심지가 견고한 자이며, 주를 의뢰하는 자입니다.          ①

 

그런 자들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십니다.

그런 성도를, 문을 열어 구원의 성으로 들어오도록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의 조건’이나, ‘행위 구원’을 뜻하지 않습니다.

구원 받은 자, 의롭게 된 성도의, 자연스런 삶의 열매, 삶으로 드러나는 증거입니다.

 

즉, 종말에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자,

그리고 현재적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자는

 

그 증거가 3~7절까지 나오는데,

첫째는, <심지가 견고하고, 주님을 신뢰하는 자>입니다.

 

정녕 구원 받은 성도는, 신앙과 믿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욥과 같은 고난을 받아도.. 그는 주님을 끝까지 신뢰합니다.

 

3절에서 말하는 평강은,

‘여호와께서 구원으로 성과 외벽으로 삼으시는 평강’입니다.

 

여기에는 교만한 자들의 압제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구원은 교만한 자들을 멸하시고 자기 백성의 보장이 되시며

피난처가 되시는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심지가 견고한'의 정반대는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태도'와,  약1:8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는 마음' 입니다.  마6:24

 

▲4절,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4절에서 또 다른 외침이 나타납니다. 이 외침은 권고의 외침입니다.  

그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십니다. 여호와를 의뢰함으로 평강을 얻은 자들에게

영원한 반석이신 여호와를 영원히 의뢰하라고 권고합니다.

 

구원 받은 자, 의롭게 된 성도의, 자연스런 삶의 열매가 나타나는데,

(즉, 하나님의 나라 또는 새 예루살렘 성은.. 그저 ‘지적 동의’로 못 들어갑니다.)

천국에 들어간 성도의 그 두 번째 증거는,

‘영원한 반석’이신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는 것입니다.    ②

 

‘영원한 반석’이

우리 일생 내내 필요하지만,

특별히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숨이 끊어질 때입니다.

 

오직 주님이 ‘영원한 반석’이 되신 성도만,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부귀영화를 내 반석으로’, ‘도와줄 사람을 내 반석으로’ 삼은 사람들은,

자기는 그 성에 들어갈 줄 알았지만, 그게 ‘값싼 은혜’이었음을,

종말 때라야 깨달을 것입니다.

 

그 성에 들어가려면, 지금부터, 오늘 현재에

‘부귀영화를 내 반석으로’, ‘도와줄 사람을 내 반석으로’ 삼지 않고,

오직 ‘주님을 내 반석으로’ 삼는 성도입니다.

 

♬굳건한 반석 되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세상에 믿던 모든 것, 끊어질 그 날 되어도..♪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의뢰하라.’

   

▲5절, 높은 데에 거주하는 자를 낮추시며,

솟은 성을 헐어 땅에 엎으시되 진토에 미치게 하셨도다.

6절, 발이 그것을 밟으리니, 곧 빈궁한 자의 발과 곤핍한 자의 걸음이리로다.

  

새 예루살렘 성에서, 성도는 5~6절의 찬송을 부릅니다.

‘여호와는, 높은데 거하는 자를 낮추시며,

높이 치솟은 성을 헐어 땅에 엎으시되, 진토에 미치게 하십니다.

우리 빈궁하고 곤핍한 자의 발이, 그것을 밟습니다!’

 

여기서, 천국에 들어가는 자를

‘빈궁한 자 the poor 와 곤핍한 자 the needy’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③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5:3

여기서 ‘가난’은 물질적 가난을 포함하여, 마음의 가난, 주님을 갈망하는 가난을 뜻합니다.

 

사도바울은, 아무 것도 없는 자이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설명했습니다. 고후6:10

☞ 가난이란 자유하는 것     오늘날 성도에게 꼭 필요한 ‘헝그리 정신’

 

‘높은데 거하는 자’는 사25:12에서 모압으로 묘사되어 있는 교만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시온으로 피하라는 초청에 응하지 않은 자들입니다.

 

그들을 진토에 미치게(내려가게) 하십니다.

그래서 빈궁한 자와 곤핍한 자가 그것을 밟으므로써,

영원한 승리를 그들에게 주십니다.

 

‘빈궁한 자와 곤핍한 자’는,

그들은 교만한 자들에 의하여 빈궁하고 곤핍하게 된 자들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의 모든 수치와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므로, 승리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는 영원히 의뢰할만하며

그는 영원히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들의 반석이 되십니다.

 

▲7절,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하게 하시도다.

 

‘그 날의 시온성의 잔치’ 또는 ‘새 예루살렘 성’

또는 '현재적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은,

주님을 믿는 자인데,

 

주님을 믿는 성도가 되었다는 증거는, 네 번째로

‘정직하다’는 것입니다. ④

온전하게 되고, 성숙하게 된 성도는.. 더욱 더 정직해 집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성도는, 그 사는 모습이 (의인의 길이 :7) 정직합니다.

그리고 주께서 의인의 길을 평탄케 하십니다.

즉, 현재적 하나님의 나라의 축복(평탄함)을 누립니다.

 

 

◑2. 여호와의 심판을 받는 악인들을 노래함  8~15절

 

▲8절,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또 주를 기억하려고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

 

‘주의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이는 하나님께서 심판관으로서 속히 임하시기를 고대한다는,

다시 말해서 의로운 심판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히 드러나기를 간절히 기다린다는 말입니다.

 

계시록에도, 심판을 기다리는 성도(순교자, 핍박 당하는 모든 성도 뜻함)들이 나옵니다.

     계6:10,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심판의 ‘그 날’에,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는, 구원받은 성도들은

주님의 심판을 간절히 사모하게 됩니다.

     사25:8, 야훼여, 당신의 재판으로 열리는 그 길만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당신의 이름을 깊이 그리워하여, 이 몸 당신을 잊지 못합니다.

 

우리는 심판자로 오실 주님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까? 그는 의로운 성도입니다.

자기가 의롭다는 확신이 있는 자만, 심판자로서 오실 주님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9절,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

 

'밤'은 여기서 고난의 때, 묵상하기 좋은 때를 가리킨다고 보기도 하나.

'아침'과 대조되는 시간의 의미로 쓰였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즉, 본문은 '밤이나 아침이나 어느 때에나 하나님을 사모합니다' 입니다.

이는 비록 '아침'이란 단어가 명시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간절히 구한다'는 뜻의 '솨하르'동사에 '(아침에) 찾는다', '(일찍 일어나) 구한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는 데서 확인됩니다.

 

‘이는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의를 배움이니이다.’

선지자가 그처럼 열심을 다해서 하나님을 구한 데에는

그 백성들이 압제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라는 소극적인 이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악한 자들이 심판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를 깨닫게 되기를 바라는

적극적인 이유도 담겨 있습니다. (시78:34)

 

주님의 심판을 사모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나는 얼마나 다시 오실 예수님을, 영혼으로 사모하고 있습니까? 사모해야 합니다.

 

육적으로 주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 영혼의 중심에서 예수님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는 사모함이 있어야 합니다.

  

내 영혼 속에서 그 사모함이 넘쳐나야 합니다. 이단들은 잘못된 종말론이지만

그들은 사모함이 넘치기 때문에, 만사를 재치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판주의 재림을, 간절히 사모한 이유는,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 거민이 의를 배우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계 거민이 배워야하는 의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10절 이하에서 설명됩니다.

악인들을 부끄럽게 하여 멸절하는 것이며

주만 의뢰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10절, 악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

정직한 자의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아니하는도다.

 

10절은 악인들의 죄악을 묘사합니다.

그들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

오히려 정직한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악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들이 진짜 은총을 입는다는 결과를 말하지 않습니다.

악인은 비록 은총을 입는다 하더라도.. 여전히 불의를 행한다는 말입니다.

 

▲11절, 여호와여 주의 손이 높이 들릴지라도, 그들이 보지 아니하오나

백성을 위하시는 주의 열성을 보면 부끄러워할 것이라. 불이 주의 대적들을 사르리이다.

 

악인들은 주의 높이 들린 손, 즉 임박한 심판이 그들의 머리 위에 준비되어 있음에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합니다.

선지자를 답답하게 만드는 것이 이것이었습니다.

 

'백성을 위하시는 주의 열성'은

하나님 자신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입니다. (9:7, 37:32)

 

심지어 그들은, 여호와의 심판의 손이 높이 들려도.. 보지 아니합니다.

즉 여호와께서 손을 드시고 그들을 심판하려고 하여도.. 그들은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위하시는 열성을 보면

악인들은 부끄러워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최후의 심판을 받을 때,

그들은 부끄러워 할 것입니다.

그제야 비로소, 주님의 의로우심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11절에서 주의 백성을 위해 열심을 베풀어 주실 것을 간구합니다.

 

8~11에서 간구의 내용은 '주의 심판'인데

간구의 목적은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우도록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은총을 베풀어도, 그들은 의를 알지 못하며,

심지어 그들을 심판하려하여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심판을 통해, 자기 백성을 위하시는 것을 보면,

즉 그들을 심판하면은 그들이 의가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하나님의 심판을 구하고 있습니다.

 

마치 출애굽 상황과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께서 심판을 내리시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고

그 구원을 통하여 애굽이 하나님 여호와와 같은 이가 없는 줄 알도록 하는 것

즉 하나님의 의를 알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거듭 심판하여도,

애굽은 거절하였고, 자기 백성을 위하시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장자를 심판하시고 홍해에서 잠재웠을 때, 즉 최후의 심판 때, 

그들은 참으로 여호와께서 누구신지를 알았습니다.

 

▲12절, 여호와여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평강을 베푸시오리니

주께서 우리의 모든 일도 우리를 위하여 이루심이니이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의로운 자들에게 초래될 궁극적인 결과는

포괄적인 안녕과 행복을 함의하는 '평강'(샬롬)입니다.

 

주의 백성을 위한 열심 즉 8~11절의 간구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1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모든 일,

즉 심판을 이루시기 때문에, 평강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13절,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여, 주 외에 다른 주들이 우리를 관할하였사오나

우리는 주만 의지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주 외에 다른 주들이 우리를 관할하였사오나’

이방 나라들의 압제에서 그 백성을 해방시켜 주신 일이

하나님의 일로서 첫 번째로 거론됩니다.

세상의 주권자들이 이스라엘을 치리하는 동안

이스라엘의 참된 왕이신 여호와는 소외된 듯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주권을 회복하시는 날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백성들의 찬송소리는 다시 울려 퍼지게 될 것입니다.

 

13절은 여호와께서 평강을 베푸시는 근거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그것은 주 외에 다른 주들이 성도들을 관할하였으나

성도들은, 오직 주만 의뢰하고, 주의 이름을 부름에 근거합니다.

 

그들이 여호와를 의뢰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 대적을 벌하여 멸하사

그 모든 기억을 멸절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었고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며, 사망하였은즉 일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14절, 그들은 죽었은즉 다시 살지 못하겠고 사망하였은즉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이는 주께서 벌하여 그들을 멸하사 그들의 모든 기억을 없이하셨음이니이다.

 

본문을 직역하면 '죽은 자들, 그들은 살지 못하겠고,

망령들, 그들은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입니다.

 

14:9~11과 마찬가지로

여기서 도 죽음이 인간의 헛된 교만을, 비웃는 최후의 조롱꾼으로 등장한다.

 

15절, 여호와여 주께서 이 나라를 더 크게 하셨고 이 나라를 더 크게 하셨나이다.

스스로 영광을 얻으시고 이 땅의 모든 경계를 확장하셨나이다

 

'나라를 더 크게 함'은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로 인구가 번성하고

그에 따라 국토의 경계가 더욱 확장됨을 뜻합니다. (9:3, 54:2,3, 미7:11)

 

한편,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가장 넓은 세력을 형성하였던

다윗과 솔로몬 시대를 회고하는 듯합니다.

  

이처럼 여호와가 그의 백성과 적들에게서 영광을 받을 때,

그것은 그들의 멸절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영토가 크게 확장될 것을 말합니다.

 

13~15절에서 말하는 내용들은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권세 아래 종으로 있었고,

애굽의 권세를 심판하시고 구원하셔서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영광스러움과 상응합니다.

여호와의 구원과 그들에게 주시는 영광을 그 언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당하는 징벌과 환난 속에서, 구원의 소망을 노래함. 16~21절  

 

▲16절, 여호와여 그들이 환난 중에 주를 앙모하였사오며

주의 징벌이 그들에게 임할 때에 그들이 간절히 주께 기도하였나이다.

 

‘백성이 환난 중에...주께 기도하였나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다시 현실로 되돌아옵니다.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를 믿는 신앙이 확실하다 할지라도

일상에서 겪는 경험적 현실 - 즉 '환난'과 '징벌' 앞에서

신자들은 거듭거듭 심각한 무력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전폭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그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기도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부르짖어 기도하라는 의미의 말씀이, 4번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환난 중에 주를 앙모하였사오며" :16

“주의 징벌이 임할 때 간절히 기도하였나이다" :16

“구로하며 부르짖음같이" :17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19

 

여기서는 자기들의 죄로 인하여 환난과 징벌이 왔다는 관점에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17절, 여호와여 잉태한 여인이 산기가 임박하여 산고를 겪으며 부르짖음 같이

우리가 주 앞에서 그와 같으니이다.

 

이스라엘을 가위 누르는 현재의 어려움이,

부르짖음으로 극대화된 임산의 고통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이런 극한 상황 속에서도 임산부가 견뎌내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이 고통의 때가 지나면, 소망했던 결과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입니다.

 

18절, 우리가 잉태하고 산고를 당하였을지라도, 바람을 낳은 것 같아서

땅에 구원을 베풀지 못하였고, 세계의 거민을 출산하지 못하였나이다.

 

‘낳은 것은 바람 같아서’

그러나 극심한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거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허망함을 선지자는 '바람을 낳음과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41:29, 전1:14)

아무것도 낳지 못하는 여인의 산고, 그것이 이스라엘의 배반적 현실이었습니다.

 

‘세계의 거민을 생산치 못하였나이다’

그들은 환난과 징벌이 임했을 때, 주를 앙모하고 간절히 주께 기도하였습니다.

마치 잉태한 여인이 산기가 임박하여, 구로하며 부르짖음 같이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잉태하고 고통하였어도.. 낳은 것은 바람 같았습니다.

그들은 땅에 구원을 베풀지 못하였고, 세계의 거민을 생산치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열국에 장자로 있었고, 세계에 구원을 베푸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기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도리어 환난과 주의 징벌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여호와의 심판 중에 있을 때의 절망적인 상황을 묘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환난 중에 아무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래 19절부터는, 그것과 대비하여 확신에 찬 소망을 노래합니다.

 

▲19절,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

 

그것은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티끌에 거하는 자들은 깨어 노래하라’고 확신있게 외치는 것입니다.

 

그 확신의 토대는,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이슬은 생명을 일으키는 이슬입니다.

곧 주님께서 사망의 티끌에 거하는 자들을 다시 소생시키기 때문입니다.

 

19절에서 영광스러운 소망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 소망은 당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소망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주의 심판의 지나야합니다.

심판이 있는 동안에, 이스라엘은 20절에 제시된 권면을 따라야합니다. 

   ☞하늘은 이슬을 내리니

 

침울한 절망의 애가가 부활의 환호로 돌변합니다.

거듭되는 환난과 징벌에 눌려 사망의 그늘 가운데 누워 있던 신실한 신자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이 부어집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죽은 신실한 성도들이

마지막 날 부활의 영광에 그리스도와 더불어 참예할 것입니다.

 

본문은 부활 교리를 가르쳐주는 구약의 몇 안 되는 구절 중의 하나입니다.

(25:8, 겔37:1-14, 호6:2)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내어 놓으리로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이 '이슬'로 비유됩니다.(시133:3, 잠19:12, 호14:5)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건기에, 밤에 흡족히 내려 땅을 적시는 이슬은

팔레스틴 땅의 농작을 위하여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습니다.

 

▲20절, 내 백성아 갈지어다.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깐 숨을지어다.

 

‘내 백성아 갈지어다...잠간 숨을지어다’

세상을 뒤엎은 대홍수로부터 노아와 그 가족들이 방주 속에 몸을 숨겼던 것처럼,

또한 애굽 땅을 뒤엎은 죽음의 천사로부터

히브리 백성들이 집으로 들어가 어린 양의 피 아래 자기 몸을 숨긴 것처럼,

 

온 땅을 뒤엎게 될 하나님의 분노 앞에서 성도들에게

'밀실에 들어가 문을 닫고 잠간 숨으라'는 권면이 주어집니다.

 

밀실에 들어가서 그것도 부족해서 문을 닫고 숨으라는 말은

대환난 날에 성도가 취해야 될 몸가짐을 언급합니다.

 

즉, 그날에 성도들은 세상과의 분주한 거래를 단절하고

하나님과의 은밀한 기도 시간을 가져야만 됩니다.

그러나 그 혹심한 심판의 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 권면의 내용은 밀실로 들어가 문을 닫고

여호와의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간 숨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실 때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심판이 지나기까지

어느 누구도 문 밖에 나가지 말아야했습니다.

 

‘밀실’이 어디입니까? 계시록 12장에 나오는 예비처입니다.

그 예비처는 광야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계12:6)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일천 이백 육십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예수님도 마지막 때에는 광야로 도망가라고 하였습니다.

(마24:15-16)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16)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이것은, 대환란의 때, 혹은 심판의 때에,

하나님이 성도를 위해 ‘어떤 피난처’를 예비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고전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여호와의 심판은 21절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21절, 보라 여호와께서 그의 처소에서 나오사, 땅의 거민의 죄악을 벌하실 것이라.

땅이 그 위에 잦았던 피를 드러내고, 그 살해당한 자를 다시는 덮지 아니하리라 

 

‘땅이 그 위에 잦았던 피를 드러내고’

그날에 땅은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합니다.

즉, 그동안 말없이 들이삼켰던 무죄한 자들의 피를 땅이 일순간에 토해냅니다.

땅을 붉게 물들였던 피가 복수를 호소하며 일제히 부르짖습니다.

(창4:10, 37:26, 레17:13, 욥16:18, 시9:12, 겔24:7, 8, 계6:10).

 

뒤따르는 구절은 순교자들의 호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앞절의 평행으로 이해됩니다.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사 땅의 거민의 죄악을 벌하실 것입니다.

여기서 그 처소는 하늘 보좌의 처소입니다.

왜냐하면 이사야서에서 여호와는, 하늘 성소에 계신 분으로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사, 자기 백성의 원수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들의 죄악은, 의인들을 죽인 사실에 있습니다.

 

그래서 ‘땅이 그 위에 잦았던 피를 드러내고

그 살해당한 자를 다시는 가리우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복수를 호소하는 피소리가 멸망의 원인임을 나타냅니다.

땅위에서 흘린 무죄한 피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본문을 통해 마지막 때에

우리가 어떻게 깨어서 무슨 노래를 해야 할지 가르쳐 주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간 성도들이 부를 노래이지만,

현재적 하나님의 나라를 살고 있는 성도들도, ‘맛보기로’ 부르는 노래입니다.

 

이 마지막 때에 우리가 한 목소리로 부를 노래는 무엇이겠습니까?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이 비유로 들었던 것처럼

우리가 한 목소리로 ‘신랑이 오신다’고 외쳐야 할 것입니다.

아니, ‘심판주가 오신다’고 노래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노래할 뿐만 아니라  1~7절,

 

-악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노래하며, 

 그 공의로운 심판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더 확장될 것입니다. 8~15절

 

-또한 혹시 성도가 범죄했다 하더라도,

 환란과 징벌 가운데서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성도는 찬양합니다. 16~21절

 

 이스라엘의 범죄(사명 못 감당 포함)와, 징벌과, 또한 회복을 통해

 열방과 이방이 주께로 돌아올 것입니다. 16~21절, 롬9~11장 

 

이것이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 또는 현재적으로 주의 임재를 기다리는 성도>가

부르는 노래의 구체적인 내용입니다.

 

계속되는 종말에 대한 설교에 여러분 마음이 어떻습니까?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해 사모함과 뜨거움이 임하고 있습니까?

사모함과 뜨거움이 없는 것은.. 재림을 기다리는 자세가 아닙니다. 9절을 다시 보세요!

 

그리고 나 자신이, 주님을 본받는 성품으로, 성장하고 있습니까?  1~7절,

 

종말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두려운 날이지만

예수 믿는 자들에게는 결코 두려운 날이 아닙니다.

오히려 노래하고 찬송하는 날입니다.

 

오직 예수 신앙과 성령 충만과 말씀으로 무장되는 자들이 된다면

그 날은 결코 두려운 날이 아닙니다.

♬저 공중에 구름이 일어나고, 큰 나팔이 울려날 때

주 오셔서 세상을 심판해도, 나의 영혼은 겁 없겠네♪

 

준비하고 사모하고 깨어있는 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주1) ‘그 날에’가 나오는 이사야서 구절

2:11, 2:17, 2:20, 3:7, 3:18, 4:1, 4:2, 5:30, 7:18, 7:20, 7:21, 7:23, 10:20, 10:27,

11:10, 11:11, 12:1, 12:4, 17:4, 17:7, 17:9, 19:16, 19:18, 19:19, 19:21, 19:23, 19:24,

20:6, 22:8, 22:12, 22:20, 22:25, 24:21, 25:9, 26:1, 27:1, 27:2, 27:12, 27:13, 28:5,

29:18, 30:23, 31:7, 5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