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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 23:1~29 종에게 일러 주옵소서

LNCK 2021. 10. 14. 07:14

◈종에게 일러 주옵소서      삼상23:1~29       2021.10.10.출처


우리는 실제로 광야에 머물거나 광야를 전전하지 않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 삶의 상황은, 광야를 헤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 왜 이런 광야로 인도하셨는지, 또 이 광야와 같은 곳에서 
어떻게 두려움을 이기고 살아가야 할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주의 음성을 듣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는 실제로 광야에 가본 분도 계시겠지만 
안 가본 분들이 더 많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광야에 잠시 발만 한 두 번 들여다 놓았을 뿐이지 
광야를 이렇게 살아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광야에서 지내 본 사람들의 얘기를 들으면 
'정말 한번 꼭 가서 한 며칠이라도 거기서 지내 보라'는 거예요. 

'왜 그러십니까?' 그랬더니, 누가 이렇게 얘기를 하더라고요. 
광야 깊은 곳에 들어가면 사운드 제로 존이 있다는 거예요. 
사운드제로 라는 것은, 정말 아무 소리도 안 들린다는 것입니다. 
낮이고 밤이고 아무 소리 하나 들 수 없는 곳이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는 자기 숨소리, 자기 발걸음 소리만 들리는 곳이 있다는 거예요. 
그런 곳에서 비로소 우리의 온 감각기관이 살아나기 시작을 해서 
극도로 예민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고 
때로는 신비한 경험들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누군가 말했어요. 광야에서는
'인생에 한 번도 질문하지 않은  것들이.. 
내가 한 번도 인생에서 깊이 생각하고 질문하지 않은 것들을 묻게 되고,
또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그런 신비한 경험들을 통해서 체험하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뭐 현실속에서, 어떤 문제를 가지고 집중적으로 고민하거나 생각하거나 질문하지 않아요. 
괴로운 질문이 있으면 잊어버리고 자지, 그 질문을 파고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말 광야 깊숙이 들어가면, 주위에 아무것도 없으면 
아니 주위에 만나서 대화할 어떤 사람도 없으면 

우리는 비로소 위를 바라보게 되고, 
위로부터 오는 음성을 듣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사람들이 광야로 반드시 인도를 받는 이유 예요. 

 

▲우리가 다윗에게 관심을 갖는 이유

성경에는 3대 광야 인물이 나옵니다. 
모세는 시내 광야를 전전했어요.
40년을 광야에서 지내게 됩니다. 

다윗도 십 수 년, 보통 13년 정도로 보지만, 그렇게 광야를 전전하게 됩니다. 

예수님도 성령세례를 받으시고는 성령에 이끌려서 광야로 가서 
40일간 금식하십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역을 앞두고, 광야로 가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오늘 본문의 이 다윗의 광야 이야기,
마치 비디오를 다시 돌려 보듯이 계속 되풀이해서 보고 듣는 얘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다윗에게 빠져드는 까닭은 
그의 광야에서의 체험, 그가 광야에서 목숨이 경각에 달렸던 그 시간 시간, 순간 순간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어떻게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었는가.. 에 대한 궁금증 때문입니다.

그가 나중에 왕이 되었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닙니다. 

저는 우리가 다윗에게 이렇게 친근감을 갖는 이유는 
그야말로 우리처럼 어려움을 겪었고 
우리보다 더 어려운 현실을 살았고 
어쩌면 누구보다도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뎌냈기 때문에
우리가 다윗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죠. 

그는 안전하기 위해서 적국으로 피신했던 사람이에요. 
블레셋에 갔다가 가드의 아기스왕 앞에서 침을 질질 흘리고 

미친 체하면서 목숨을 건져 나왔고 

또 갈 곳이 없어서 외가(증조모 룻) 쪽으로 친족이 되는 모압 땅에 넘어가서 
모압 왕에게 자기 부모님을 위탁하고 돌아오기도 했어요. 

근데 갓 선지자를 통해서, 모압에서 유다 땅으로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아니 거기(유대)에 가면 죽는데, 붙잡히면 끝인데.. 
근데 하나님께서는 위험한 지역으로 다시 들어가라는 거예요. 

그는 순종하고 이제 유대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오늘 유대 땅으로 돌아와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관한 얘기예요.


◑본문 설명 / 자기 위기의 상황에서 남을 도와준 다윗

삼상23:1~3 '사람들이 다윗에게 전하여 이르되 
보소서 블레셋 사람이 그일라를 쳐서 그 타작 마당을 탈취하더이다 하니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들을 치리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하시니

 

다윗의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치는 일이리이까 한지라'

다윗은 유대 땅에 들어와서 소식을 듣게 되는데 
그건 그일라에 있는 타작마당에, 블레셋 사람들이 침입했다는 거예요. 
추수할 무렵에 노략하러 온 것입니다.

성경에 '타작마당' 얘기가 간혹 나옵니다.                          주1)  
룻과 보아스가 만난 곳도 타작마당이지요.
  

그래서 다윗이 그 소식을 듣고서 '그일라를 구해야 되지 않겠나?' 이런 생각이 든 거예요.

다윗은 지금 제 코가 석 자예요. 지금 쫓겨다니는 신분, 지명수배자 입니다.

온 나라에 현상수배범으로 포스터가 걸린 거나 마찬가지인데

지금 여기 숨어있기도 어려운데, 뛰쳐나가서 블레셋 하고 전쟁을 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리고 '그일라'는 블레셋과 헤브론 사이에 있는 경계 지역이라서

만약에 사울이 와서 급습을 하면, 블레셋과 사울의 중간에 갇혀서 진퇴양난이 됩니다.

 

그런데 다윗은 '지금 내가 어떤 형편인가?'를 살피지 않고

블레셋에 침략을 받아서,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 이 현실이 가슴이 아프단 말입니다.

 

▲여러분, 이게 신앙인이고, 이게 그리스도인 이에요.

내 코가 석자나 빠졌지만, 그러나 내 문제보다도 이웃의 문제에 더 관심을 갖는 것!

이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에요.

 

'넌 왜 네 일이나 제대로 챙기지, 남의 일에 왜 그렇게 관심을 갖냐?'

라고 우리가 비난하기 어렵습니다.

 

그건 예수님에 대한 저주와 마찬가지예요. '너는 십자가에서 너나 내려와 봐라!

너 자신이나 구원해 봐라. 뭐 인류를 구원하겠다고 나설 게 뭐 있냐?' 이런 말과 똑같죠.

 

남을 구원하기 위해서 내 구원을 포기하는 것! - 그게 십자가 예요.

내가 십자가에서 내려오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전부 '십자가를 면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한단 말이예요.

그건 예수님을 본 받는 삶과는 전혀 반대이지요.

 

남을 구원하기 위해서 내 구원을 포기 하는 것 - 이게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란 말입니다.

 

내 기도하러 왔다가, 남을 위해 기도해 주다가,

정작 내 기도는 잊어버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일들이 있어야

이게 그리스도인의 기도란 말입니다.

 

다윗이 지금 누구, 남 걱정 할 때입니까?

근데 왜 하나님께서 그를 이제 그일라 쪽으로 인도하셨을까요?

 

이미 기름부어 세운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백성들의 고통이 현장에 있으라는 거예요.

 

'너는 백성들이 지금 어떤 형편을 겪고 있는지 보라!'

 

사실은 현직 왕이 관심을 가져야 되는데..

백성들이 이렇게 고통을 받는데.. 서울 왕은 아무 관심이 없어요. 

 

왕이 지금 전국민 동원령을 내려서라도 블레셋 하고 싸워야지,

지금 다윗 잡는 일에만 온 힘을 다 쏟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근데 그때 사울 왕이나 지금 세상의 왕들이나 뭐 다 마찬가지에요.

근데 그런 왕 뽑느라고 너무 정신 뺏기지 마세요. 누구를 뽑아도 마찬가지입니다. 큰 차이 없어요.

 

저는 그 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밖에는 세상에 희망이 없다고 믿습니다.

진정한 공인은, 내 걱정 보다, 남의 걱정을 더 많이 하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뭐 정치인들이나 경제인들 가운데 그런 사람이 없다는 건 아닙니다.

뭐 기업보국 .. 자기 기업을 잘 운영해서 나라를 섬기겠다는 분들도 계시죠.

정말 정치 잘 해서 백성들을 섬기겠다는 분들도, 일부는 있습니다. 드문 게 탈이죠.

 

▲어쨌거나 지금 다윗은 침략 당한 그일라를 보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냥 보고 있을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제가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하나님한테 물었어요.

 

그러자 하나님은 '내려가라. 네 손에 블레셋을 내가 붙이겠다'

그 음성을 듣고 다윗은 내려가는 거죠.

 

그랬더니 다윗의 부하들이 뭐라 그래요?

'아니 지금 다윗 당신 미쳤소? 지금 사울을 감당해내기도 힘에 겨운데

뭣하러 또 블레셋 하고 싸운단 말입니까?'

 

아니 그리고 블레셋은 정규군이에요. 무장을 제대로 갖춘 군인들이라고요.

근데 다윗과 그 부하들에게는 제대로 된 무장이 없습니다.

다윗 자기 혼자만, 골리앗에게서 빼앗은 칼 하나 차고 있을 뿐인데

그러니 블레셋과 어떻게 전투가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그일라에 내려가서 싸우자고 하는 다윗이 이상한 사람이지

지금은 전투할 때가 아니라는 다윗 부하들이 정상적인 판단을 하고 있는 거라고요.

 

여러분, 우리가 하는 신앙생활이란 게 바로 이런 것입니다.

상식적인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게 도대체 비정상적인 사람들이다!' 라는 거에요.

 

'제 일이나 걱정을 하지, 왜 남의 일을 가지고 저렇게 걱정을 하나?'

그런 사람들이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다윗이 한 번 더 하나님께 묻습니다.

 

삼상23:4~5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그들을 크게 쳐서 죽이고

그들의 가축을 끌어 오니라 다윗이 이와 같이 그일라 주민을 구원하니라'

 

다윗이 하나님께 다시 물었어요.

왜냐면 하나님께 재차 묻고 그 뜻을 확인함으로써 
그와 함께하는 6백 명의 식구들이, 한마음으로 움직이기 위해서 

그는 하나님께 다시 물었던 것입니다.

 

안 싸우기 위해서 물은 게 아니라

싸우고자 하는데, 어떻게 하면 한 마음이 되어서 싸울 것인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그렇게 재차 물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동일한 대답을 주실 것이라고 그는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승리하고 타작마당에서 뺏앗긴 것을 다 뺏어오고

블레셋 사람들의 가축들까지 다 뺏어가지고 승리하고 돌아왔어요.

 

'그일라 주민을 구원하니라' :5

여기서 '구원'은 영혼구원을 뜻하는 게 아니고, 전쟁에서의 구원을 뜻합니다.

'구원'이란 단어의 뜻에, 원래 그런 광범위한 뜻이 들어있습니다.

 

이 '구원'은 사사들에게 주어졌던 임무이에요.

다윗이 지금 사사로서 세워진 것과 마찬가지죠.

 

현직 왕 사울이 지금 왕의 노릇을 제대로 안 하니까

다윗에게 왕의 책임과 직임을 감당하도록 허락하신 거란 말입니다.

 

다윗은 지금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실질적인 왕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이 시대를 살면서, '나는 아무 직함이 없습니다. 아무 직책이 없습니다.'

그런 소리 하면 안 돼요.

 

우리는 직함이 있어야 일하는 사람도 아니고

직책이 주어져야 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기도하고

주님이 감동주시는 마음을 따라 일하는 사람입니다.

 

매일 기도할 때, 하나님이 감동주시는 일이면.. 그냥 순종해서 하십시오. 

내게 아무 직함이 없으면, 그 직함 있는 사람 밑에 가서 그를 도와주면 되는 겁니다.

 

이 세상이 쓰레기 투성이인데, 이 쓰레기를 누가 버렸냐고 세미나만 할 겁니까?

뭔가 지구 한 귀퉁이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하면서 

쓰레기를 치워나가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그렇게 길지 않습니다.

정말 눈 한번 깜짝할 시간이면 10년~ 20년이 휙 지나가요.

 

그렇게 시간이 화살처럼 빨리 날아가지만

그러나 주님께 예민하게 깨어 있는 사람은, 세월이 빠르다고 당황만 하지 않습니다.

 

그 분의 뜻을 따라 살기로 결정한 사람은

세상이 흘러가는 스피드와 다른 스피드를 살기 시작하게 됩니다.

그걸 '카이로스의 시간을 사는 삶이다' 그렇게 말합니다.

 

크로노스는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흘러가는 시간이라면

우리는 이미 영원으로 옮겨진 시간을 살기 때문에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기 때문에)

그렇게 바쁠 것도 없고, 조급할 것도 없어요.

 

그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면, 스피드가 문제가 아니라

디렉션, 즉 방향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방향이 맞는 삶을 택했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아요.

언제나 천국에 갈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고,

실제로 이땅에서 천국을 살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내 목숨을 내줘야 되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이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인가/ 아닌가?'를

어떤 일을 착수하는 판단기준으로 삼았지,

 

'이게 위험한가/ 아닌가?'

'내가 능력이 되나/ 안 되나?'

이런 걸 기준으로 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때로 정신 나간 사람 같지만

믿음은 우리에게 기적을 허락하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일라에서 블레셋을 물리친 것은 기적입니다.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니까.. 일상에서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본문에 다윗이 재차 하나님께 '물었는데'

광야는 사실 아무데도 물을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우리가 광야의 삶을 산다고 할 때,

물을 곳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어요.

 

그래서 관계로 인도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과 관계 맺는 방식,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훈련하는 곳이란 말이에요.

 

모세가 먼저 광야에서 그 훈련을 받더니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해서 40년간 광야를 전전하면서

그 백성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훈련,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께 답을 얻는 훈련을

40년간 받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한 가지 방식 - 사람을 보내주십니다!

 

근데 다윗이 하나님께 어떻게 물었는지를 6절에 이렇게 설명합니다.

삼상23:6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이 그일라 다윗에게로 도망할 때에

손에 에봇을 가지고 내려왔더라'

 

아비아달이 놉에서 혼자 살아서 다윗에게로 도망 왔습니다.

도엑의 밀고로 놉의 제사장 85명을 사울이 다 죽여버렸습니다. 다윗의 도피를 도와준 일을 빌미로!

 

그때 아비아달이 도망 올 때, 에봇을 가지고 왔단 말이에요.

지금 다윗이 하나님께 여쭤 보고 답을 얻었다.. 라고 하는 방식은

에봇으로 묻는 방식이었어요.

 

에봇은 제사장이 입는 조끼 같은 겉옷인데,

그 가슴에는 판결흉패가 있어요.

 

여기에 우림과 둠밈 이라는 반짝반짝 빛나는 돌이 있는데

그걸로 이제 하나님의 뜻을 묻는 거예요.

(이를 테면 우림이 나오면 Yes, 둠밈이 나오면 No .. 이런 거죠)

 

지금으로 보면 엄청 간단한 방식이죠.

그것만 가지고 물어 보면 하나님의 뜻이 Yes, No 라는 답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그 대신 한 번에 하나씩만 물어야 돼요.

 

그 때는 제사장에게 가서 우림과 둠밈 으로 하나님의 뜻을 물었지만,

지금 우리는 성경과 성령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확인케 하시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게 우리가 성경을 읽는 이유예요.

하나님의 뜻이 성경에 배치되지 않아야 돼요.

 

성령의 음성이라고 하는 것도

성경에 합당할 때, 성령의 음성으로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이죠.

 

어쨌든 매사에 하나님께 묻지 않고는 하루도 견딜 수 없는 광야의 삶 속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져 갔습니다.

하나님과 어떻게 동행해야 하는지를 배워 나갔습니다.

 

하나님께 묻고 답을 얻는 삶.. 의 일상적인 훈련이 계속되었습니다.

본문은 지금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광야 생활을 시작하면 누구나 다 하겠지만

광야를 빨리 졸업하는 방법은, 그 음성을 제대로 듣고 분별하고 순종하는 훈련이 끝나면..

광야 시기는 끝나는 것입니다. 그게 안 되면 아무 소용 없습니다.

 

우리의 종교생활 기간이 오래 길어봐야, 아무 도움 안 됩니다.

오히려 뭐 지체하는 기간만 늘어나는 거죠.

 

아비아달 덕분에 다윗은 지금

하나님의 뜻을 묻고 답을 얻는 것에 수월해 졌습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인도하는 한 가지 방식이

이렇게 아비아달을 보내주심으로 되어졌습니다. 조금 뒤에 요나단도 또 보내주십니다.

다윗이 제 발로 찾아 간 게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때로는 사람도 보내 주십니다.

내가 애를 쓰고 찾아가서 사람을 만나는 것 보다

하나님이 보내 주시는 사람을 만나는 게 훨씬 빠릅니다.

 

결혼도 그래요. 내가 좋은 배우자를 찾는다고 평생 돌아다녀 보십시오.

그렇지 헤매지 않고 딱 한 번 만에 만나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하나님이 보내 주시면, 한 눈에 알아보는 것입니다. 

 

 

◑자기를 배신하는 사람들도 이해한 다윗

 

삼상23:6 '다윗이 그일라에 온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알리매 

사울이 이르되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넘기셨도다 그가 문과 문 빗장이 있는 성읍에 들어갔으니 갇혔도다
사울이 모든 백성을 군사로 불러모으고 그일라로 내려가서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려 하더니'

 

다윗이 그일라에 있다고 사울에게 직보(직접 보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죠.

사울은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넘겨주셨다' 이게 여러분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그런데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로 살아가면서도

일이 잠시 잘 풀리면

'하나님이 내게 복을 주셨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사울처럼 이런 착각을 하는 거예요.  참 웃지 못할 현실이죠.

 

지금 사울이 하나님께 축복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전부 거기에 줄을 서 가지고

다윗을 찾아서 죽이는데 같이 협력하는, 우매한 대중들도 있습니다.

 

:9~10 '다윗은 사울이 자기를 해하려 하는 음모를 알고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에봇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고
다윗이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사울이 나 때문에 이 성읍을 멸하려고 

그일라로 내려오기를 꾀한다 함을 주의 종이 분명히 들었나이다'

 

11 그일라 사람들이 나를 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 주의 종이 들은 대로 사울이 내려 오겠나이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주의 종에게 일러 주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가 내려오리라 하신지라

 

12 다윗이 이르되 그일라 사람들이 나와 내 사람들을 사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들이 너를 넘기리라 하신지라

 

다윗이 그일라 주민들을 블레셋의 노략으로부터 구해주었습니다.

뺏긴 것도 다 되찾아 주었습니다.

 

12절에 '그일라 사람들'은, 원문을 보면 '그일라의 지도자들'입니다.

그런데도 그일라의 지도자들이 배은망덕하게

다윗을, 사울에게 넘기겠다는.. 하나님의 응답이 나왔습니다.

 

이때 다윗은, 그일라의 지도자들을 불러다가 윽박지르면서

'너희들은 이 순간부터 내 편에 서야 된다. 성문을 걸어 잠그고

사울 왕과 일사 결전, 항전을 준비해 달라.  
내가 여러분의 목숨을 구해 주지 않았느냐, 그러니 이제부터 내 편에 서야 한다!'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어요.

 

그는 그일라 주민들에게 피해가 되지 않게

자신이 소리없이 피하는 게, 그 백성들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잘 알았어요.

 

다윗은 얼마 전에, 놉에 들렀다가

제사장 아비아달 이외에 모든 사람들이 학살당한 걸 이미 경험한 사람이에요.

 

다윗은, 자기를 배신 하는 걸 충분히 이해 하는 사람으로 성숙했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나를 배신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야!'

이 정도로 이해하면, 배신의 상처를 받는 일은 없습니다.

 

다윗은 이미 배신의 상처를 받지 않을 정도로

성숙한 사람이 되었다는 얘기예요.

 

우리 가운데 배신 때문에 속이 부들부들 떨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저들에게 어떻게 했는데?'

그래서 심지어 하나님한테도 배신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봉사했는데.. 이럴 수가?'

 

이 문제를 하나님은 반드시 다루실 때가 있습니다.

내가 배신을 넘어서지 않으면, 십자가를 못 집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 가는 건, 배신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배신 당하기 위해서, 이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자녀들 키울 때 어떻습니까?

'내가 배신 당할거야!' 이런 느낌을 갖고는 안 키웠겠지만

자녀들 다 키우고 나서 보면, 배신감을 잠시 조금이라도 느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녀들에게 그런 느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조금 서운한 마음이야 있겠지만

아이들이 잘 자라 준 것에 감사하고..

그래서 (서운함보다) 몇 배나 더 큰.. 자녀를 축복해 주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능력입니다.

1만 달란트 빚을 탕감받은 자가, 내게 1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보고서

'너 배은망덕한 배신자여' 운운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다윗이 찬송시를 짓는데, 이렇습니다.

시편 146:3~5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광야는 그런 경험을 하는 곳입니다.

사람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아무 기대를 갖지 않는 것입니다.

 

요2:23~24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사람을 결코 의지하지 않았다.. 그런 뜻입니다.

이유는, 사람을 속속들이 다 아시니까요!

 

사람에게 너무 기대감을 갖지 마십시오.

기대가 크면 실망이 비례해서 큰 법입니다.

 

사람에게 상처 받았다는 사람은, 그에게 뭔가 기대감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연약함을) 아시므로' 즉 기대감이 없으셨으므로

사람들로부터 상처 받으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 사람 때문에 실망하고 낙담하고

배신감에 분노하고 벌벌 떠냐 말이에요.

광야를 통과한 성숙한 성도는, 오히려 그를 불쌍히 여길 따름이에요.

 

그래서 다윗은 그일라 주민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일라의 지도자들을 불쌍히 여겨서, 조용히 그곳을 떠나기로 결정한 거예요.

 

 

◑하나님이 위로의 음성으로 도와 주십니다

 

:13~14 '다윗과 그의 사람 육백 명 가량이 일어나 그일라를 떠나서 갈 수 있는 곳으로 갔더니

다윗이 그일라에서 피한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말하매 사울이 가기를 그치니라
다윗이 광야의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광야 산골에도 머물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

 

'갈 수 있는 곳으로 갔더니'

방황이 계속 되었다는 뜻입니다.

광야의 요새, 십 광야 산골 등 숨을 만한 곳이면 어디든지 가서 머물렀습니다.

얼마나 피곤했을까요!

 

:15~18 '다윗이 사울이 자기의 생명을 빼앗으려고 나온 것을 보았으므로 그가 십 광야 수풀에 있었더니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에게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하니라
두 사람이 여호와 앞에서 언약하고 다윗은 수풀에 머물고 요나단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아니 여기가 어딘데, 십 광야 수풀까지 요나단이 다윗을 찾아 온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런 위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저는 이 본문 말씀을 읽으면서, 제가 신학교 다닐 때

그냥 입이 돌아가고 그냥 처참한 절망 가운데 처해 있을 때

'정말 내가 가는 이 길이 맞나?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듣고 내가 신학교에 왔나?

내 나이 지금 50대 중반에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제가 그렇게 처참하게 무너지기 직전에, 하나님께서는 어느 날 한 사람을 제게 보내주셨습니다.

나하고 한 번도 추어탕 같이 먹어 본 적도 없는데

무슨 일인지 그는 냉동 추어탕을 10인분을 사서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분이 뉴욕에 왔다가, 비행기가 결항이 되니까

당시 제가 살던 보스톤까지 차를 렌트해 가지고

그 한밤 중에 추어탕 10인분을 가지고 우리 집으로 들이닥친 거예요.

(본문의 요나단의 방문을 읽다가, 제 과거의 고마운 경험이 오버랩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위로가 필요할 때,

하나님은 때로는 이런 위로를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소망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서 요나단은 두 가지 얘기를 합니다.

1) 절대로 내 아버지 사울이 너를 못 잡는다. 너는 붙잡히지 않는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

2) 반드시 너는 다음 왕이 될 것이다.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이다.

 

이거 여러분, 인간의 소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요나단이 대언한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저와 여러분들이 '두려워하지 말라'하는 하나님의 이 음성

한 마디만 분명히 들어도..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넉넉히 이길 수 있다고 믿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먼 길, 위험한 길을 어떻게 떠났겠어요?

창세기 15:1절에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요나단이 다윗에게 한 마디, 하나님의 음성을 대언해 주었던 것처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의 음성 한 마디!' 들으면, 그것으로 족한 줄 믿습니다.

 

어떤 두려운 상황 속에서도,

어떤 사면초가의 불안 속에서도

하나님의 음성 한 마디면.. 능히 이길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와 말씀으로, 하나님의 음성 듣는 일을 사모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위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도 말씀을 주셨습니다.

 

렘42:10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는 너희가 두려워하는 바벨론의 왕을 겁내지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를 구원하며 그의 손에서 너희를 건지리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무나 무서운 바벨론 왕인데.. 그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거예요.

저는 여러분들이 정말 두려워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마지막 시대를 이렇게 살아라고 말씀하십니다.

마24:6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세상 뉴스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은 모두 불안의 소식, 위기의 소식들입니다.

이런 불안과 위기의 뉴스의 홍수의 시대에, 우리가 덩달아 불안해하지 않고

어떻게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음성,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길뿐입니다!

 

다윗에게만 요나단을 보내주신 것을 부러워하지 마시고,

아브라함에게만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신 것을 질투하지 마시고

여러분, 성경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세상 얘기만 들으니까, 우리가 불안하고 덩달아 초조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이기신 만 왕의 왕의 말씀을 들으면, 성도는 세상이 두렵지 않습니다.

 

▲19절 이하에 보면, 십 고을 사람들이 다윗의 은신처를 사울에게 밀고합니다.

그래서 다시 사울은, 다윗을 추격합니다. 

 

이제 사울에게, 다윗은 '가시 거리'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일촉즉발의 순간까지 갑니다.

 

:26 사울이 산 이쪽으로 가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산 저쪽으로 가며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급히 피하려 하였으니

이는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고 잡으려 함이었더라'

 

그때 하나님은 또 기적을 베풀어 주십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침공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다윗 추격을 멈추고

더 급한 불을 끄러 나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7~29 '전령이 사울에게 와서 이르되 급히 오소서 블레셋 사람들이 땅을 침노하나이다
이에 사울이 다윗 뒤쫓기를 그치고 돌아와 블레셋 사람들을 치러 갔으므로 

그 곳을 셀라하마느곳이라 칭하니라
다윗이 거기서 올라가서 엔게디 요새에 머무니라'

 

지금 사울이 전 군대를 이끌고, 수도를 비우고, 국경을 비우고

다윗 잡는데 올인 하고 있으니까,

하나님의 역사이지만, 블레셋이 지금 그 틈새를 노려서 침략해 온 것입니다.

 

그래서 가시거리에 들어왔던 다윗 잡는 일을, 중간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안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어려움은 반드시 우리에게 찾아 올 거예요. 파도처럼 밀려올 거예요.

성도라고 면제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걱정,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면, 머리카락 하나도 상치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왕궁에 있는 사울과 함께 하지 않으시고

광양에 있는 다윗과 함께 해 주셨습니다.

 

모든 권력과 추종 세력을 다 가진 사울과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고

광야를 전전하고 있는 이 다윗과 동행해 주십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는 세상 사람들과 하나님은 함께 하시지 않고,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교회와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을 좇아 가지 않습니다. 세상을 본 받지 않습니다.

세상에게 배우겠다고 목매달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두렵지 않습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세상같지만, 여러분 세상은, 세상의 방식대로 끝날 것입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들은,

세상에 살 동안에도 하나님의 영광과 빛과 능력을 드러내는 삶을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펼쳐 나가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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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타작마당은 중요한 곳입니다. 왜냐면 일손이 부족하기 때문에 
추수기가 되면 마을전체 사람들이 같이 수확을 했어요. 
그래서 그 추수한 곡식을 타작마당에 쌓는 곳이죠. 

밭이나 경작지에서 꽤 가까운 곳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꽤 넓은 곳이었어요. 
여기에다가 차곡차곡 이제 추수한 그 곡식들이 쌓는 거죠.

그렇게 쌓아놓고 나면, 꼭 블레셋이 와서 한 순간에 약탈해 가는 거예요. 
그래서 1년 동안 애써 농사지은 것을 다 빼앗기는 것 아닙니까.
정말 기가 막힌 노릇이죠. 

그래서 사사기에 보면, 이런 약탈자들이 두려워서
기드온은 타작마당에서 타작을 못 하고 
포도즙 짜는 틀에 가서 숨어서 타작하는 걸 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