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36~39장은 히스기야 시대의 역사적인 상황을 배경으로 하며,
이전의 본문들과 달리 산문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은 열왕기하 18:13 ~ 20:19절까지의 말씀과 광범위하게 일치합니다.
오늘의 이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늘 경솔하게 들었던 유다 백성들에게,
그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졌음을 확인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실제로 열왕기하에 기록된 여러 정황들이
이사야 서에서는 생략되는 것들을 많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앗수르 군대를 물러가게 하기 위해, 성전과 왕궁 곳간의 은을 다 주고,
성전 문의 금을 비롯한 모든 금을 벗겨 앗수르에 갖다바친 이야기가
이사야 서에는 생략되어 있고,
열왕기에는 예루살렘으로 파견되었던 랍사게 외에도
다르단과 랍사리스를 보낸 것으로 나옵니다만
이사야 서에는 유다 방언으로 말했던 랍사게만 온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36~39장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이뤄진다는
명제를 확인하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당시 유다의 정치권력자들은 하나님을 제사 의식 적인 영역에만 가둬두려 했습니다.
히스기야의 아버지 아하스는
아람과 북이스라엘을 견제하고자 친앗수르 정책을 폈으며,
히스기야는 팽창하던 앗수르를 견제하려고 친이집트 정책을 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그 어떤 나라도 의지해서는 안된다는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양자를 다 비판했습니다.
특히 이집트는 유다가 의지해야 할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자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의 말을 듣지 않았던 히스기야는 이집트를 의지하며,
앗수르를 배반했습니다(왕하18:7).
그의 배반으로, 아시리아의 왕 산헤립이 군사를 일으킵니다.
유다가 의지하던 이집트는 ‘가만히 앉은 라합’(사31:7)이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맥없이 가만히 있었습니다.
강국이라는 이름만 있었지 유다를 도와줄 여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미 북이스라엘을 포함하여 주변 모든 나라를 정복한 산헤립은
무서운 속도로 히스기야를 새장 안에 든 새처럼 가둬버립니다.
유대 산지와 해안 평야 지대 사이의 셰펠라 지역, 여러 전략적 요충지를 점령하고,
그중 최남단의 라기스에 머무르며, 혹시 모를 이집트의 도발에 대비하면서
예루살렘으로 랍사게를 보냅니다.
랍사게는 예루살렘의 윗못 수도 곁 세탁자의 밭 큰 길에 서서
앗수르 왕 산헤립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2
◑적용 / 사탄의 기만 전략 (설교)
본문을 자세히 읽어 보면, 앗수르의 군대장관 랍사게는
아주 사단적인 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그는 말로써 이스라엘을 제압하고자 하였습니다.
본문 말씀에 보면 순 말싸움입니다.
칼이나 활을 쓰는 장면은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사단은 정말 말을 잘합니다. 기가 막힌 말쟁이입니다.
그런데 그 말 뒤에는 무서운 독과 파괴력이 숨어 있습니다.
그는 주로 무슨 말로 공격했습니까?
첫째로, 두려움을 주는 말을 했습니다.
36:8~9,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 주 앗수르 왕과 내기하라.
내가 네게 말 이천 필을 주어도 너는 그 탈 자를 능히 내지 못하리라.
그런즉 네가 어찌 내 주의 종 가운데 극히 작은 총독 한 사람인들 물리칠 수 있으랴
어찌 애굽을 믿고 병거와 기병을 얻으려 하느냐”
랍사게는 유다의 전력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깔보았습니다.
너희들은 말 이천 필을 주어도 탈 사람이 없어서 전쟁을 못하지 않느냐?
우리 중에 가장 작은 총독과도 싸울 사람이 너희들에게는 없지 않느냐?
이스라엘을 무시해도 보통 무시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로 하면 “전차 2천대 줄께 한 번 공격해 봐. 너희는 운전할 줄도 모르잖아”
그런 식입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에 히스기야는 얼마나 비참했겠습니까?
자신들에게는 내 놓을 만한 장수도 없었습니다. 변변한 무기도 없습니다.
12절에서는 “자기 대변을 먹으며 자기 소변을 마실 놈들아” 하면서 멸시했습니다.
기를 팍팍 죽였습니다.
이제 예루살렘 성을 포위해서 식량보급로를 차단하면, 실제로 먹을 것이 없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의 대변과 소변을 먹고 연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고도의 심리전입니다.
사단은 항상 우리 마음에 두려움을 심어서 꼼짝달싹 못하게 합니다.
비교의식, 열등감, 무력감을 심어서 비참하게 만듭니다.
“내가 잘 하는 것이 뭐가 있는가”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지 않는가?”
이렇게 스스로 자괴감에 빠져서 자포자기 하게 합니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단의 말을 귀담아 듣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어야 하겠습니다.
딤후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나는 할 수 없고 나는 자랑할 것이 없지만,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분명하게 외쳐야 합니다.
다윗은 기를 죽이는 골리앗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우리의 자랑거리가 무엇입니까?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은, 말 2천필, 그리고 수많은 총독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나아가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둘째로, 랍사게는 비웃었습니다.
8절,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 주 앗수르 왕과 내기하라.
내가 네게 말 이천 필을 주어도 너는 그 탈 자를 능히 내지 못하리라.”
10절, “내가 이제 올라와서 이 땅을 멸하는 것이 여호와의 뜻이 없음이겠느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올라가 그 땅을 쳐서 멸하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왜 사탄에게 놀림을 당하고 비웃음을 당하는 것입니까?
저 세상에 내가 믿는 하나님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로부터 악한 세력들로부터 비웃음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믿는 예수, 내가 의지하는 성령님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어떻게 보여주어야 합니까? 우리의 믿음 있는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어떤 고난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보여주어야 하고,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도 기도하는 자세와 타협하지 않는
신앙의 정조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런 믿음을 보여주지 못할 때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악한 영들로부터 비웃음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고
강한 믿음으로 악한 세력들의 비웃음을 물리치시기를 바랍니다.
웃기는 것은, 지금 이사야 선지자가 하는 말을,
랍사게가 그대로 똑같이 하고 있습니다.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6
바꾸어 말하면, 남유다는, 앗수르의 침입 앞에서, 애굽을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랍사게(마귀 세력)에게 조롱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을 때,
그가 풍랑이 치는 데도, 배 밑창에서 잠을 자고 있을 때,
선장으로부터 ‘너희 신께 기도하라’고 야단을 맞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않을 때,
이렇게 세상 사람들로부터, 설교를 듣게 되며, 수치를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에게 수치를 당할 때는,
철저히 회개하고, 다시는 수치를 당하는 일이 없도록, 확실히 믿어야 하겠습니다.
셋째로, 랍사게는 하나님께 대한 불신을 심었습니다.
14~16절, “너희는 히스기야에게 미혹되지 말라 그가 능히 너희를 건지지 못할 것이니라.
히스기야가 너희에게 여호와를 신뢰하게 하려는 것을 따르지 말라.
그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반드시 우리를 건지시리니,
이 성이 앗수르 왕의 손에 넘어가지 아니하리라 할지라도 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라”
18절에 보면 “히스기야 왕에게 속지 말라 열국의 신들 중에
자기의 땅을 앗수르의 손에서 건진 자가 있느냐?” 하면서 불신을 심었습니다.
사단의 전략은, 항상 하나님께 대해서 불신을 심어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파괴시키고 이간질합니다.
에덴동산에서도 그랬잖습니까?
“하나님이 정말 동산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선악과를 따 먹으면 하나님 같이 될까봐서 따 먹지 말라고 한 거야”
우리가 이런 사단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의심스럽게 보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있다면 왜 앗수르가 쳐들어오도록 놔 두셨을까?”
“히스기야가 그렇게 열심히 종교개혁을 했는데, 왜 상황은 더 안 좋게 돌아갈까?”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의심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이때 사단의 전략에 말려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더 굳게 붙들어야 하겠습니다. 롬8:35~39
무슨 일이 있어도, 세상이 반쪽이 나는 한이 있어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결코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상황이 힘들수록 오히려 더 굳게 하나님의 사랑을 붙들어야 하겠습니다.
넷째로, 랍사게는 거짓 구원으로 유혹했습니다.
16~17절, “너희는 내게 항복하고 내게로 나아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각각 자기의 포도와 자기의 무화과를 먹을 것이며
각각 자기의 우물물을 마실 것이요. 내가 와서 너희를 너희 본토와 같이
곡식과 포도주와 떡과 포도원이 있는 땅에 옮기기까지 하리라”
랍사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항복하고 나오기만 하면
포도와 떡과 무화과와 물을 얼마든지 공급해 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사단의 특징은 거짓말을 잘 한다는 것입니다.
요8:44절에 보면 “사단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라”고 했습니다.
에덴동산에서도 “선악과를 따 먹으면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같이 된다”는
말도 안되는 거짓말로 아담을 속였습니다.
우리는 사단의 정체가 ‘거짓의 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상에서 랍사게가 얼마나 간교한 말로서 이스라엘을 공격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항상 사단의 공격을 받아왔습니다.
에덴동산에서부터 지금까지 사단은 항상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우는 사자와 같이 굶주린 사자와 같이 먹이감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사단의 계략을 파하고 승리할 수 있습니까?
히스기야가 좋은 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 장(37장)에 나옵니다.
요즘은 보안을 중요시 하기 때문에, 중요한 건물은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습니다.
은행에 금고는 어마어마하게 두꺼운 문으로 2중, 3중 보안장치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큰 자물쇠나 금고도 거기에 맞는 열쇠가 있으면
열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인생의 장벽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문제를 푸는 열쇠가 반드시 있습니다.
그 열쇠를 누가 쥐고 있습니까? 우리 하나님이 쥐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문제해결의 열쇠를
우리가 건네받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사탄의 공격을 받을 때는, 옷을 찢고 회개해야 합니다.
(사36:21-22) “그러나 그들이 잠잠하여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왕이 그들에게 명하여 대답지 말라 하였음이었더라.
때에 힐기야의 아들 궁내대신 엘리아김과 서기관 셉나와 아삽의 아들 사관 요아가
그 옷을 찢고 히스기야에게 나아가서 랍사게의 말을 고하니라”
랍사게의 모욕적인 말에도 남유다의 사신들은 논쟁을 피했습니다.
사신들은 이미 히스기야 왕에게서 논쟁을 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던 것입니다.
남유다의 사신들은 히스기야 왕에게 옷을 찢고 나아갔습니다.
옷을 찢었다는 것은 회개를 의미합니다.
사신들의 말을 들은 히스기야 왕도 37:1절에서 옷을 찢고 굵은 베 옷을 입고
하나님께 기도한 모습이 나옵니다.
남유다의 사신들과 히스기야 왕은 자신들이 지금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자신들의 무지함과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애굽을 의지한 것에 대해 회개를 하였습니다.
(욜2: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여러분! 무너져 가는 이 시대를 바라보고 우리들이 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뿐입니다.
기도를 하되 마음을 찢는 회개 기도를 해야 할 것입니다.
이 땅에 종교 지도자들부터 하나님께 눈물 뿌리며
애통한 마음으로 회개 기도를 해야 할 것입니다. 너의 죄가 아니라
바로 나의 죄 때문에 이 시대가 무너져 가고 있다는 것을 통감해야 할 것입니다.
남유다의 히스기야 왕과 지도자들의 회개 기도로
풍전등화 같은 나라의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벧전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만물의 마지막 때에 살아가고 있는 성도 여러분!
정신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하나님이 명령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곧 마지막 때에 기도하지 아니하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악이 난무한 세상 속에서 어떻게 우리가 태평하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조금만 움직여도 죄악 투성인 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회개하지 아니하고 마지막을 준비할 수 있겠습니까?
남유다 지도자들은 옷을 찢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다면
우리는 마음을 찢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무너져 가는 이 시대 속에서 구원받는 자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앗수르의 사신 랍사게의 모욕적이고 건방진 행동 앞에서도
남유다의 사신들은 비굴하였지만 잘 참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나약함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입니다.
나라의 국력이 약하면 이런 수모를 당할 수 있다는 것을 깊이 느꼈을 것입니다.
영적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지 못하고 있으면 사탄의 공격 앞에
수모와 천대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충만하게 무장해야만 합니다.
더구나 이 세상은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무너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준비할 수가 없습니다.
남유다는 자신들의 국가가 무너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히스기야 시대에 앗수르의 위기를 넘긴 후
그들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나태한 신앙을 가지고 말았습니다.
그 후 약 100년 이 지난 B.C 598년에 바벨론에게 멸망 받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무너져 가는 세상을 보고 태평하게 바라보고만 있지 말고
나부터 먼저 준비하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에 순종하면서 준비하시고, 기도로 준비하시고,
악한 영들과 영적으로 싸울 준비를 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훗날에 하나님 보좌 앞에서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자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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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히스기야 왕 십사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올라와서,
유다의 모든 견고한 성을 쳐서 취하니라
사르곤 2세의 뒤를 이은 앗수르의 왕이 된 산헤립(B.C. 705-681)은
그의 비문에서 ‘유다의 성읍 46개를 취하고 히스기야를 새장 속의 한 마리 새처럼’
예루살렘을 봉쇄했다고 의기양양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히스기야 왕 14년(B.C. 701년)에 일어났습니다.
본문과 동일한 사건을 보도하고 있는 왕하18:13-16에 따르면,
산헤립은 평화를 조건으로 하여 그 대가로 은 3백 달란트와 금 30달란트라는
막대한 양의 공물을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히스기야는 성전과 왕궁의 곳간을 털고
심지어 성전 문과 기둥에 입혀진 금까지 벗겨 앗수르에게 바쳤습니다.
그러나 산헤립은 언약을 지키지 않았습니다(33:1 이하 참조).
그는 퇴각하는 척하다가, 다시 예루살렘을 공격하면서
도성의 항복을 요구하였습니다. 그것이 본문 상황입니다.
▲2절, 앗수르 왕이 라기스에서부터 랍사게를 예루살렘으로 보내되 대군을 거느리고
히스기야 왕에게로 가게 하매 그가 윗못 수도 곁 세탁자의 밭 큰 길에 서매
‘라기스’는 예루살렘에서 남서쪽 약 40킬로에 위치한 성읍(대하11:5-9)으로,
당시 앗수르 군의 주력 부대가 위치한 곳입니다(대하32:9).
이곳에서 산헤립은 히스기야의 항복을 독촉하기 위하여
대군과 더불어 랍사게를 예루살렘으로 파견하였습니다.
‘랍사게'는 고유 명사가 아니라 ‘왕의 술잔을 시중드는 사람'을 뜻하는 직책명인데,
왕과 매우 가까운 관계에 있는 고위 관료를 가리킵니다. (느1:11 참조)
왕하18:17에 의하면, 그 외에 ‘다르단’(군대장관, 20:1)과
‘랍사리스’(고위 관리)등도 같이 파견되었으나, 본문에서는 생략되었습니다.
▲3절, 힐기야의 아들 왕궁 맡은 자 엘리아김과 서기관 셉나와 아삽의 아들 사관 요아가
그에게 나아가니라.
앗수르의 사신들에 맞서 히스기야 진영에서도 역시 3명의 사절들이 파견되었습니다.
‘궁내 대신’은 문자적으로는 ‘집 위에 있는 사람’으로서,
왕 다음 가는 권력의 서열에 위치한, 오늘날의 ‘총리’에 해당되는 직책입니다(22:15).
‘서기관’은 국내외의 정치적 협약이나 사건들을 기록하고
또한 대외적인 공문서 처리와 서신 연락 사무를 총괄하는 고위 관료인데,
바벨론 포로 이후에는 전문적인 율법 교사를 일컫는 말로 변했습니다.
(왕하12:10, 22:3, 8, 렘36:12, 20, 37:15, 20)
‘사관’은 나라 안의 고위 관리를 가리킵니다. (삼하8:16, 20:24, 왕상4:3, 대상18:15)
흥미로운 것은, 사22:15과 연관하여 보세요.
이는 셉나와 엘리야김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보여줍니다.
▲4절, 랍사게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제 히스기야에게 말하라
대왕 앗수르 왕이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믿는 바 그 믿는 것이 무엇이냐
앗수르의 왕의 사신인 랍사게의 도전적인 연설이 소개됩니다. (4-20절).
그의 연설은, 외교 언어인 아람어 대신에, 유다 방언으로 진행되는데(11절)
이는 명백히 유다 백성들을 분열, 선동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기 기록된 것들은 그가 말한 그대로를 정확히 옮긴 것이라기보다는
아마도 유능한 역사가에 의해 효과적으로 요약, 정리된 듯합니다.
‘네가 믿는 바 그 믿는 것이 무엇이냐?’
앗수르의 막강한 무력 앞에서도 항복하기를 거부하는 유다의 완강함에 대하여
놀라움과 경멸을 드러내면서 묻는 말입니다.
여기서 핵심적인 단어는 ‘의뢰합니다’(바타흐)는 말인데,
이 단어는 5, 6, 7, 9절에서도 연속적으로 나옵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거듭 경고했던 바와 같이
유다는 앗수르의 위협에 직면하여 애굽을 크게 의뢰하였습니다.(30, 31장 참조).
랍사게는, 애굽을 의뢰하는 유다의 이러한 불안감을 꿰뚫어 보고 있으며
그것이 근거 없는 헛된 자만심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지시키기 위해 계속 말합니다.
▲5절, 내가 말하노니, 네가 족히 싸울 계략과 용맹이 있노라 함은
입술에 붙은 말뿐이니라. 네가 이제 누구를 믿고 나를 반역하느냐
‘모략’과 ‘용맹’은 왕이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자질들로서, 항상 거론됩니다. (11:2)
‘모략’은 ‘전쟁을 계획하고 전략을 입안하는 힘’을 가리키며,
‘용맹’은 ‘계획되고 입안된 이 모든 것들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능력’
혹은 ‘군대를 이끌고 나가 싸울 수 있는 영웅적인 힘’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랍사게는, 히스기야 왕이 갖추고 있다고 자부하는 이 두 가지를
‘입술에 붙은 말’, 곧 전쟁할 때 아무 쓸모도 없는 말재주로 치부해버립니다.
그가 이렇게까지 호언할 수 있는 것은,
여러 경로를 통해서 유다의 실정을 인지하고 있으며
유다가 무엇을 의지하고 있는 것까지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입술에 붙은 말뿐이니라.’
랍사게는 입만 가지고 싸우려는 남유다의 모습을 비웃고 있습니다.
랍사게는, 유다 사신들에게, 전쟁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훈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예수를 믿는 자들 중에는 입으로만 신앙생활 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닙니다.
악한 영들과 싸움이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엡6:10-12)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우리의 싸움은 보이지 않는 악한 영들의 세력들과 싸움입니다.
남유다가 입으로 앗수르 군대 18만 대군을 물리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도 악한 영들을 우리의 입으로 물리칠 수 없습니다.
▲6절, 보라 네가 애굽을 믿는도다. 그것은 상한 갈대 지팡이와 같은 것이라.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손이 찔리리니,
애굽 왕 바로는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
한때 애굽은,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나라로서
앗수르 제국에 필적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따라서 히스기야와 그 백성들은, 이전에 아하스 왕이
아람-북이스라엘 연합군의 공격을 맞아, 앗수르에게 도움을 청했던 것처럼,
이제 앗수르의 침략을 당하여, 애굽에게 도움의 손을 내민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애굽은, 유다가 바라는 든든한 지팡이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은 상한 갈대 지팡이와 같은 것이라.’
‘애굽 - 갈대 지팡이‘의 비유는, 겔29:6, 7에서도 나옵니다.
그것은 파피루스 갈대와 골풀이 풍부한 애굽을 비유하는 표현으로 적절합니다.
‘상한 갈대’는 사람이 그것에 의존하여 몸을 기댈 때, 지탱하지 못할 뿐 아니라
완전히 부러져서 도리어 상처를 입게 됩니다.
앞서 이사야 선지자도, 애굽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선포했습니다.
(사30:3) “그러므로 바로의 세력이 너희의 수치가 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함이 너희의 수욕이 될 것이라”
약 1백년 후에 바벨론의 침입 때도, 남유다는 애굽을 의지하려 하였습니다.
그때 에스겔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겔29:6~7) “애굽의 모든 거민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애굽은 본래 이스라엘 족속에게 갈대 지팡이라
그들이 너를 손으로 잡은즉 네가 부러져서 그들의 모든 어깨를 찢었고
그들이 너를 의지한즉 네가 부러져서 그들의 모든 허리로 흔들리게 하였느니라”
웃기는 것은, 지금 이사야 선지자가 하는 말을,
랍사게가 그대로 똑같이 하고 있습니다.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남유다는, 앗수르의 침입 앞에서, 애굽을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랍사게(마귀 세력)에게 조롱을 당하고 있습니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을 때,
그가 풍랑이 치는 데도, 배 밑창에서 잠을 자고 있을 때,
선장으로부터 ‘너희 신께 기도하라’고 야단을 맞았던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않을 때,
이렇게 세상 사람들로부터, 설교를 듣게 되며, 수치를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7절, 혹시 네가 내게 이르기를,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노라 하리라마는
그는 그의 산당과 제단을 히스기야가 제하여 버리고 유다와 예루살렘에 명령하기를
너희는 이 제단 앞에서만 예배하라 하던 그 신이 아니냐 하셨느니라.
랍사게의 말은, 히스기야 왕의 종교 개혁과 연관된 것입니다(왕하18:4).
잘 알려진 대로, 히스기야는 유다에 있는 모든 산당들을 다 헐어버리고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예배할 수 있도록 개혁 조처를 단행하였습니다.
우상 숭배와 다신론적 사고에 물든 이교도 랍사게의 눈에
이것은 신들의 수효를 제한하는, 일대 실수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앗수르인들은 신들을 숭배하는 제단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것에 부속되는 힘도 더해지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예배 장소를 한 곳으로 감소시킨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은,
결정적으로 나라의 힘을 약화시키고 신들을 격노하게 만들 뿐이라고
그들은 확신하였습니다.
▲8절,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 주 앗수르 왕과 내기하라.
내가 네게 말 이천 필을 주어도 너는 그 탈 자를 능히 내지 못하리라
랍사게는 앞에서 유다가 군사적, 종교적으로 의지하는 두 대상인
애굽과,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조롱하고 부인한 뒤에,
여기서 전쟁의 승패를 가늠할 수 있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인
군사력의 문제를 거론합니다.
그가 유대인들에게 환기시키려고 애쓰는 것처럼
앗수르의 군사력과 유다의 군사력은 애당초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5:28 참조).
이처럼 비교할 수 없는 우위를 점한 랍사게로서, 유다 사절들에게
협상과 굴복을 권유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습니다.
본문의 ‘내기하라’는 말은
전쟁하겠다는 헛된 생각을 버리고, 앗수르 왕에게 서약하라는 항복 요청입니다.
▲9절, 그런즉 네가 어찌 내 주의 종 가운데 극히 작은 총독 한 사람인들 물리칠 수 있으랴
어찌 애굽을 믿고 병거와 기병을 얻으려 하느냐
이 같은 경멸적인 비교에 근거하여 랍사게는 두 가지를 주장합니다.
1) 히스기야는 앗수르 왕과는 상대가 안 될 뿐더러
심지어 그 밑에 있는 장군들 가운데, 가장 못난 자도 물리치지 못합니다.
2) 히스기야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진대,
그가 취할 수 있는 방도는 다른 나라, 곧 애굽에 의존하는 길뿐이나
그럴지라도 사정은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10절, 내가 이제 올라와서 이 땅을 멸하는 것이 여호와의 뜻이 없음이겠느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올라가 그 땅을 쳐서 멸하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한술 더 떠서 랍사게는, 자신들이 유다를 치러 온 것은
하나님의 재가(裁可)를 받아서 된 일이라고 강변합니다.
이 말은 분명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과 일치하는 점이 있습니다.
(5:26이하, 7:18이하, 8:7, 8, 10:5, 6 등)
이 점에 대해서 어떤 학자들은, 이사야의 예언이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서 앗수르인들의 귀에 들어갔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에는 개연성이 부족합니다.)
고대의 전쟁 기록에서, 정복자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며,
정복된 나라의 신들이, 자신의 편이 되었으므로
이러한 승리가 가능한 것으로 전공(戰功)을 자랑합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그의 말은 수호신의 권위를 내세움으로써
유대인들을 더욱더 공포에 떨게 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말인 듯합니다.
▲11절, 이에 엘리아김과 셉나와 요아가 랍사게에게 이르되
우리가 아람 방언을 아오니 청하건대 그 방언으로 당신의 종들에게 말하고
성 위에 있는 백성이 듣는 데에서 우리에게 유다 방언으로 말하지 마소서 하니
유다의 사신들은, 랍사게에게 ‘당신의 종들’ 이라면서, 비굴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랍사게의 주장은, 히스기야의 사신들을 크게 당혹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을 격동하여
유다를 침공하도록 하였다는 앗수르측의 선전이
백성들에게 미칠 심리적 충격과 그 파급 효과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랍사게에게
백성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유다 방언으로 말하지 말고
당시 국제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외교 언어인 아람 방언으로 말해줄 것을
비굴한 태도로 요청한 것입니다.
아람어는, 당시 식자층과 궁중에서 널리 사용되는 고급 언어를 뜻합니다.
▲12절, 랍사게가 이르되 내 주께서 이 일을 네 주와 네게만 말하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냐
너희와 함께 자기의 대변을 먹으며 자기의 소변을 마실 성 위에 앉은 사람들에게도
하라고 보내신 것이 아니냐 하더라.
랍사게는 유다 사절들의 요청을 일축하면서
자신의 의도를 한층 공공연하게 드러내 보입니다.
‘자기 대변을 먹으며.. 자기 소변을 마시리라’
포위 기간 중에 극심한 기근에 시달릴 것을 위협하는 말입니다.
▲13절, 이에 랍사게가 일어서서 유다 방언으로 크게 외쳐 이르되
너희는 대왕 앗수르 왕의 말씀을 들으라.
어떤 이들은 ‘일어서서 크게 외쳤다’는 말을
‘자신의 말을 보다 효과적으로 제시하기 위해, 성벽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혹은 ‘백성들의 눈에 보다 더 잘 보이는, 높은 위치에 섰다’는 식으로 설명합니다.
▲14절, 왕의 말씀에 너희는 히스기야에게 미혹되지 말라.
그가 능히 너희를 건지지 못할 것이니라.
히스기야와 산헤립의 대조는
랍사게가 이들에게 붙이고 있는 칭호에서 우선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산헤립에 대하여는 ‘대왕’(13절)이라고 부르는 반면에,
히스기야에게는 아무런 호칭도 붙이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히스기야를 ‘잘못된 길로 백성을 유혹하고 속이는 자’,
‘그 백성을 능히 구원하지도 못하는 무능력한 자’로 규정합니다.
▲15절, 히스기야가 너희에게 여호와를 신뢰하게 하려는 것을 따르지 말라.
그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반드시 우리를 건지시리니
이 성이 앗수르 왕의 손에 넘어가지 아니하리라 할지라도
랍사게가 히스기야를 이처럼 ‘백성을 미혹하는 자’,
‘백성을 구원 못하는 무능한 자’로 비난하는 까닭은
히스기야와 그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의 지도자 히스기야에 대해 등을 돌리고
그 입에서 나오는 어떠한 말에도 귀를 기울이지 말도록 회유합니다.
▲16절, 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라. 앗수르 왕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내게 항복하고 내게로 나아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각각 자기의 포도와
자기의 무화과를 먹을 것이며, 각각 자기의 우물 물을 마실 것이요.
만일 본문을,
각자 상대방에게 축복을 빌어주는 마음의 상태가 됨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랍사게의 입을 통해 들려진 앗수르의 왕의 말은
일견 지극히 자애로운 초청처럼 들리지만
실은 무조건적이고 완전한 항복을 권유하는 말입니다.
‘그리하면 너희가...먹을 것이며...마실 것이요’
본문은 12절의 ‘자기의 대변을 먹으며 자신의 소변을 마실 것’이란 말과 대조됩니다.
이런 대조를 통해서 앗수르 왕의 사신은
유다 백성들이 앗수르 왕에게 항복하여 무기를 던지고 손을 들고 나온다면
그들이 어떤 대접을 받게 될 것인지를, 선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거짓 회유입니다. 맨 아래 설교에서 자세히 설명합니다.
‘각자 자기의 포도와 자기의 무화과를 먹는’ 축복은
성경에서 이상적인 번영을 나타내는 말로 즐겨 사용되고 있습니다. (왕상4:25, 미4:4, 슥3:10 참조)
▲17절, 내가 와서 너희를 너희 본토와 같이
곡식과 포도주와 떡과 포도원이 있는 땅에 옮기기까지 하리라
현란하고 교묘한 언어로 채색되어 있지만, 거짓말입니다.
즉 앗수르 왕이 애굽 원정을 마치고 고국으로 귀환할 때,
유다 백성들은 본토에서 추방되어, 낯선 땅으로 강제로 옮겨질 것입니다.
반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피정복민들을 멀리 있는 다른 지방으로 강제로 이주시키는
정책은 앗수르 제국의 주요한 식민 정책 중의 하나였습니다.
▲18절, 혹시 히스기야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건지시리라 할지라도
속지 말라 열국의 신들 중에 자기의 땅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진 자가 있느냐
이제까지 앗수르와 싸워 무릎 꿇지 않은 나라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고대인들은 한 나라의 존립 여부가, 그 나라의 수호신의 능력 여하에 좌우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게 군사적으로 패배하는 것은
곧 그 나라의 신이, 상대 나라의 신보다 약함을 시인하는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19절, 하맛과 아르밧의 신들이 어디 있느냐 스발와임의 신들이 어디 있느냐
그들이 사마리아를 내 손에서 건졌느냐
산헤립은 이전에 앗수르가 거두었던 혁혁한 전공을 상기시킵니다.
하맛과 아르밧은, 수리아(아람)의 성읍들입니다.
▲20절, 이 열방의 신들 중에 어떤 신이, 자기의 나라를 내 손에서 건져냈기에
여호와가 능히 예루살렘을 내 손에서 건지겠느냐 하셨느니라 하니라
본문에서 앗수르 왕의 사신의 연설은 정점에 이릅니다.
그 요점은 정복 전쟁의 역사가 보여주는 것처럼,
유다보다 지리적으로 더 넓고 신들의 숫자도 더 많은 강력한 국가들도
다 앗수르에게 백기를 들었거든
하물며 하나의 신밖에 갖지 못한 약소국 유다가
어찌 앗수르를 막아낼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가 알지 못한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으니,
그것은 주 여호와는 다른 신들과는 전혀 같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은 인간의 탐심에 의해 나무나 돌로 지음받은 신이 아니라
당신의 형상에 따라 흙으로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이시며,
말씀 한마디로 온 우주를 창조하셨습니다.
오직 그분만이 참되며 유일하고 영존하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21절, 그러나 그들이 잠잠하여 한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왕이 그들에게 명령하여 대답하지 말라 하였음이었더라.
그들은 ‘대답지 말라’는 히스기야 왕의 명령을 따라 침묵을 지켰습니다.
직전에 그들의 불필요한 말 한마디 때문에, 상황이 더 악화된 것과 비교해볼 때
이는 분명히 지혜로운 일입니다(11절).
▲22절, 그 때에 힐기야의 아들 왕궁 맡은 자 엘리아김과 서기관 셉나와 아삽의 아들
사관 요아가 자기의 옷을 찢고 히스기야에게 나아가서 랍사게의 말을 그에게 전하니라
세 명의 사신들은 비록 와의 명령에 따라 침묵했지만
하나님에 대란 이교도의 비난에 대해 제대로 대꾸하지 못한
그들의 내면의 상처와 끓는 분노를 자신들의 옷을 찢는 행위로서 표시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지극히 혐오스러운 일을 당할 때, 흔히 자기 옷을 찢음으로써
그 기가 찬 감정을 나타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