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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35장 회복하시는 하나님

LNCK 2021. 10. 15. 09:28

 

 

◈회복하시는 하나님           이사야35장            출처

 

<이사야서의 간략 개요>
66장이 긴 것 같지만, 이렇게 명확히 나눠지는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1~12장, 유다와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예언

13~23장,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예언

24~27장, 이사야서의 소묵시록

28~35장, 예루살렘에 대한 경고 (화와 복의 노래)
36~39장, 히스기야의 앗수르 격퇴 역사 기록

40~66장, 회복과 축복

 

이사야서는 구약으로 시작해서 신약으로 마치며

그 주제는 ‘인간의 죄’로 시작해서

‘의의 왕이 오심’으로 끝납니다.

 

본문 35장은 직전 34장과 연결이 됩니다.

34장은 마지막에 일어날 심판에 대해서 다루고 있고,

35장은 메시아가 다스리는 나라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그러니까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하나님을 외면하는 사람들을 심판하시고,

하나님을 의뢰하는 사람들에게는 구원과 영생을 주실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이사야 34:8절에도 그 날은 “여호와의 보수할 날” 이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35:4절에서도 ‘하나님이 오셔서 보복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보복은, 악인에게는 심판의 날이지만 (34장)

성도들에게는 구속의 날이요, 회복의 날입니다. (35장)

 

▲1절,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34장과 본문 35장은 마치 <지옥 대 낙원>처럼 극과 극의 대조를 이룹니다.

그것은 특히 땅의 변화에서 현저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 새롭게 회복되어지는 세상에

놀라운 변화가 있을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는 메마른 땅이 기뻐하고,

사막 같은 불모지대에 아름다운 백합화가 피어 즐거워하며 노래를 부를 것이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2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원수들을 대표하는 에돔은 황무한 땅으로 변하는 반면에, (34장)

‘광야와 메마른 땅‘(사막)은 백합화 꽃피는 소망스럽고

기쁜 낙원으로 화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사막’은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 생활을 끝내고

유다 땅으로 귀환하는 길에 경유하게 되는 시리아 사막을 가르킨다고 해석할 수도 있으나,

메시아 왕국(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열망하는 본장의 문맥상

이는 성도들이 환란을 당하며 살아가는, 죄 많은 이 세상을 암시합니다.

 

‘백합화’로 번역된 ‘하바찰레트’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는 불분명한데,

아마도 그것은 풍부한 강우 뒤에 즉시 만개하여

온 땅을 융단처럼 수놓은 작은 꽃들을 가리킬 것입니다. (Oswalt).

     *거기엔 무궁화 꽃도 포함됩니다. ☞윤치호와 무궁화

 

▲2절,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레바논, 갈멜, 사론은, 비옥함과 아름다움으로 유명한데,

특히 ‘레바논’은 향기로운 백향목으로,

‘갈멜’(이스르엘 평원)은 웅장한 상수리나무로,

그리고 ‘사론’은 꽃들과 비옥한 목초지로 이름이 나 있습니다. (33:9 참조)

 

‘그것들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그것들’은, 개역에 무슨 꽃들이나 들판을 지칭하는 것처럼 보이나

원래 뜻은 내 백성들입니다.  *70인역, 공동번역, 새번역 등

즉 '내 백성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입니다.

 

자연을 보수하신 후에, 인간의 회복이 예언됩니다.

그들이 이러한 모든 하나님의 영광의 아름다움을 볼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회복의 역사는,

세상 마지막 때에도 아름답게 이루어질 것이지만

오늘날에도 이러한 하나님의 회복은, 회심한 자에게, 개인적으로도 나타납니다.

  

개인의 생활 환경을 변화시켜 주시고, 각 개인의 마음까지도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다시 회복하시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하나님의 영광으로

온 세상이 다시 아름다워지기를 원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새롭게 회복하시는 하나님은, 인간들도 새롭게 회복하여

하나님의 나라에서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하게 하실 것입니다.

 

▲3절,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이러한 영광스러운 변화로의 전망과 더불어

현실에서 좌절하고 절망한 백성들에게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가 주어집니다.

 

주님이 회복시키시는 날에는,

소년이라도 자빠지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되,

여호와를 앙망하는 주의 백성은, 독수리의 날개침 같이, 위로 올라갈 것입니다.

 

‘떨리는 무릎’은 성경에 종종 나오는 표현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겁을 내고 약해지는 것을 ‘무릎이 약하다’고 표현합니다.

 

'이에 (벨사살) 왕의 즐기던 빛이 변하고 그 생각이 번민하여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듯하고

그 무릎이 서로 부딪힌지라' 단5:6, 그 외 나훔2:10, 시18:36.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거늘' 욥4:4

 

‘여호와의 그 날’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손과 무릎을 강하게 하실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히12:11~13절에는,

성도가 징계(연단)를 받은 후에, 손과 무릎이 강해질 것을 말씀합니다.

즉, ‘여호와의 그 날’은

성도가 징계를 받은 후에.. 회복된 날을 뜻하기도 합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히12:11~13)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참고로, 평소에 이 약한 무릎이 강하게 되는 길은 ‘기도하는 무릎’이 될 때입니다.         주1)

 

▲4절,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하나님이 너무 멀리 계셔서, 그에게 아무리 가까이 가고자 하여도

닿지 못한다고 탄식하는 자들에게 들려지는 대답입니다.

 

이 말씀 속에서 ‘여호와의 오심’이 강조되고 있는데

그의 오심은 그가 이루고자 하시는 두 가지 목적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곧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했던 원수들에 대한 공의로운 보응과 복수,

그리고 그의 백성에 대한 구원입니다. (살후1:6, 7참조)

 

4절에서 겁내는 자에게 4가지로 약속하고 계십니다. 

  

첫째로 너는 굳세게 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가지라는 것입니다.

    (수1:6)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수1:9)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둘째로 두려워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믿고 의지한다면 무엇이 두려울 게 있겠습니까?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예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43:1~2)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물속에서도, 불 속에도 우리를 지켜주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두려움이 있는 자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즉 두려움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나를 위해 독생자 예수까지도

보내주신 아버지라는 사실을 온전히 믿는다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시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셋째로 보복하고 갚아주실 것입니다. 

    (계18:20)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를 인하여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신원하시는 심판을 그에게 하셨음이라 하더라”

  

하나님은 자신의 택함 받은 자들이 당했던 그 억울함과 핍박을

반드시 갚아주실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진노는 철장 같은 권세로 내려칠 것이며,

포도주 틀을 밟는 것처럼 피바다를 이룰 것입니다.

    (사34:3) “그 살륙 당한 자는 내어던진바 되며 그 사체의 악취가 솟아오르고

    그 피에 산들이 녹을 것이며”

  

넷째로 구원하여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오직 예수 신앙을 가지고

성령님을 온전히 의지한 자는 절대로 버리지 아니하시고 구원하여 주실 것입니다.

    (요10: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사49:15)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아니할 것이라”

  

▲5절,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하나님의 구원 약속이 성취되어질 때입니다.

 

‘소경의 눈이... 귀가 열릴 것이며’

인간의 여러 신체 기능 중에서 특히 ‘눈’과 ‘귀’는

육체적인 상태와 아울러, 영적인 상태를 암시하는 말로 자주 사용됩니다.

 

여기 언급된 육체적 치유가, 영적 치유를 비유함과 아울러

장차 여호와의 오심으로 인해 실현되어질

전인격적이고도 총체적인 구원의 외적인 측면을 나타냅니다.

 

‘저는 자는.. 노래하리니’

절름발이와 벙어리의 경우에 그 치유의 완전함이 더욱 강조되고 있습니다.

즉 절름발이는 완전히 치유되어, 마치 사슴처럼 뛸 수 있을 정도가 될 것이며,

벙어리는 혀를 움직이는 정도가 아니라

여호와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를 수 있을 정도까지 될 것입니다.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사막에서 시내가 흐른다’는 표현은,

이사야서의 후반부(특히 40~55장)에서 현저하게 나타나는데,

 

건조한 땅으로 뒤덮인 이스라엘에서

‘물’이 생명과 구원의 상징으로 여겨진다는 것은 쉽게 이해됩니다.

 

▲6절,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1~2절에 새로운 세상이 회복될 것을 말씀하셨지만

다시 한 번 구체적으로, 사람과 세상이 새롭게 회복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소경이 없고, 귀머거리가 없고, 저는 자가 없고, 벙어리가 없다는 것은

육적인 장애를 가진 자들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그 날’에는 모두가 영적인 자들로 새롭게 태어날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날에는 땅도 새롭게 회복 될 것입니다.

땅에서 일어나는 큰 변화는 물의 풍성함입니다.

에덴동산에서도 네 개의 강물이 흐르고 있었던 것처럼

새롭게 회복되는 땅에도 물이 풍성할 것입니다.

      ☞갈멜산 제단의 복음적 해석 中 ◑2. 생명수를 흘려내시는 예수 그리스도

 

▲7절,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뜨거운 사막’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솨라브’는

많은 학자들에 의해 ‘낮은 대기층에서 불균등한 빛의 굴절 현상으로 인해 발생하는 신기루’

같은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렇다면 불볕 내리쬐는 사막에서 목이 갈한 이들을

헛된 환영으로 유도하는 이 가짜 오아시스가

물이 가득 고여 있는 진짜 ‘못’(아감)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시랑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의 부들이 날 것이며’

여호와께서 시온을 위해, 에돔에게 보수하시는 심판(34:8)를 통해

에돔 궁궐이 ‘시랑의 굴’로 변한다고 했는데,

 

그것처럼 과거에 황폐한 남유다가

이제는 풀과 갈대와 부들이 자라나는

윤택한 초장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43:19, 20)

 

▲8절,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

 

‘거기에 대로가 있어’

8~10절은 하나님께 구속받은 자들이 ‘시온으로 돌아오는’ 대로에 대해서 말합니다.

 

본디 길을 찾을 수 있는 광야에, ‘공공도로’(대로, 마슬룰)가 놓여 진다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이적적인 일인데,

이 일은 사막이 낙원으로 변함과 동시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본문은 ‘통행 가능과 불가능’이란 측면에서, 34:10과 예리한 대조를 이룹니다.

(‘대로’에 대하여는 11:16을 참조하세요)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바 되리니’

그 길이 ‘거룩한 길’인 것은

그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거룩함을 덧입는 성도들이라는데 기인한 것입니다.

 

그 길은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해서만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럴진대 ‘깨끗하지 못한 자’ 곧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과

또 이스라엘 자녀 중에서 구속받지 못한 자들은 그 길을 지나지 못합니다.

 

‘우매한 행인은 그 길을 범치 못할 것이며’

본문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1)그 길이 너무도 정확하기 때문에, 심지어 ‘바보’라도 실수함 없이 갈 수 있습니다.

 

2)하나님의 진리를 고의적으로 거부하는 사람(바보)은, 그 길을 결코 가지 못합니다.

이 경우, 그 의미는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지 못한다’는 말과 같게 될 것입니다. 

 

▲9절,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10절,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은

전절의 ‘구속함을 얻은 자’에 평행하는 말로서 동의어입니다.

 

‘구속’(가알 또는 고엘)은

‘되사다’, ‘친족의 권리를 행사하다’는 뜻을 가집니다.

법정 용어로서, 친족에 대해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의무를 이행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학정 밑에서

구속하신 행위와 관련하여 자신을 ‘고엘’로서 소개하신 이래,

깊은 종교적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습니다.

 

‘구속’은, 바벨론에서의 귀환이란 소망스러운  주제를  다루고  있는 

본서의 후반부에서 집중적으로  나옵니다. (41:14, 43:14, 60:16, 63:16).

 

‘속량하다’

‘몸값을 지불하고 풀어주다’는 뜻을 가진 말로서, 

역시 초태생의 구별과 연관된 법정 용어였으나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키신 하나님의 행위를 묘사하는 말로 전용轉用되었습니다.

 

‘구속하다’와 ‘속량하다’, 이 두 말은

렘31:11에서도 같이 나오는데

거기에서도 ‘속량받고 구속함을 얻는 자들’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시온에 이르러’

하나님의 성이 있는 시온은, 이 대로의 최종 도착지일 뿐 아니라

모든 성도의 삶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곳에만 하나님의 백성이 갈망하는 참된 안식이 있으며

사라지지 않는 기쁨이 있습니다.

 

길(Gill)은 말합니다.

"묘사된 ‘대로‘는 ‘밑에 있는 시온’ 즉 교회로 향할 뿐 아니라

‘위에 있는 시온’ 즉 천국으로도 향합니다.

이 길을 걷는 모든 구속된 성도는, 그곳에 도달할 것입니다.

 

죽음의 순간에, 그들의 영혼은 그 주인인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부활의 순간에, 그들의 육체는 흙무덤에서 돌아와

마침내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마주서게 될 것입니다."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이는 그 얼굴이 항상 희락이 넘칠 것을 가리키니,

즉 시온에 이르는 성도의 마음이, 이와 같을 것입니다.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

현대의 대부분의 학자들은 본문을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을 따라잡고, 슬픔과 탄식이 달아날 것이다’

 

그럴진대 시온의 백성들, 곧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속량 받고

구속함을 입은 성도들의 삶은 얼마나 복된 것인가요!

 

.........................................

 

주1)

성경에 간절히 기도한다는 표현이 ~ ‘무릎을 꿇고’이다.

우리는 육체로 무릎을 꿇어야 하지만, 무엇보다 마음의 무릎을 꿇어야 한다.

성경의 인물들도, 간절히 기도한 모습을 보이는데...

 

스데반도 순교 직전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했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행7:60

 

바울도 성도들을 위하여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했다.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엡3:14~15

 

엘리야도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나 보다.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왕상 18:42

 

다니엘도 온갖 반대에 맞서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하루 세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단6:10

 

병고침 등 간절한 소원을 가진 사람들도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했다.

    나병환자 하나가 예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하며 막1:40

    그러나 그 여자는 나아와서, 예수께 무릎을 꿇고 간청하였다. 주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마15:25

 

예수님도 십자가를 앞두시고 동산에서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셨다.

    저희를 떠나 돌 던질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눅2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