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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38장 히스기야의 치유

LNCK 2021. 10. 18. 15:13

 

◈히스기야의 치유         이사야38:장              출처1,  출처2

 

히스기야의 질병과 회복에 대한 이야기는 열왕기하 20:장에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만, 열왕기와 본문이 다른점이 있다면,

열왕기서는 선지자 이사야의 역할에 강조점이 있지만

본문 이사야서는 하나님을 향한 '히스기야의 기도'에 초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추천설교   38:1~8 신령한 보험

  

38:5 네 눈물을 보았노라

 

 

◑1. 죽을 병에 걸린 히스기야        사38:1~3

 

▲1절,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니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나아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된 때는, 앗수르 군대가 쳐들어온 무렵을 의미합니다.

6절이 그 시기를 더 명백히 증거 해주고 있습니다.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겠고, 내가 또 이 성을 보호하리라 :6

 

히스기야 왕은 29년을 통치하였습니다. (왕하18:2)

그중 15년은 질병이 나은 후에 여호와의 은혜로 생명이 연장된 기간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사건은 그의 재위 14년째에 일어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때의 앗수르왕 산헤립이 유다를 공격한 때와 시기적으로 일치합니다(36:1).

 

히스기야 왕이 치명적인 병을 얻어 죽음을 선고받은 후에

여호와 앞에서 그토록 슬퍼하며 통곡한 것도, 이와 연관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그가 슬퍼한 것은 <자신의 갑작스런 죽음>보다도

오히려 그의 죽음으로 인해서, <남유다 민족이 당할 비극적인 처지>를

더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니’

히스기야가 무슨 병에 걸렸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21절의 ‘종처‘(腫處)라는 말을 근거로 할 때, 

그의 병이 염증을 동반하는 치명적인 병 (가령, 종기나 욕창 같은)

이라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을 뿐입니다.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죽음이 임박했으며 그것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히스기야에게 이 말은, 결코 변경될 수 없는 냉혹한 사형 선고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나중에 철회되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인생의 운명과 관련된 하나님의 선고에도 집행 유예는 있습니다. (출32:6~12 참조)

 

하나님의 뜻은 불변하나, 

성도의 기도는, 그것을 이루는 과정과 방법을 변경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기도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히스기야의 겸손과 기도를, 우리는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신학자들 중에는, 히스기야의 질병이 36~37장의 <앗수르 침입>의 직전이냐, 직후냐..

그 시기를 놓고, 의견이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논의 자체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큰 상관 없습니다.

 

▲2절,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러한 행동은 아합 왕이 취했던 것과 일견 비슷하게 보이나, (왕상21:4)

그 기본 정신에서는 크게 차이가 납니다.

 

아합이 그의 얼굴을 벽으로 향한 것은

나봇의 포도원을 갖지 못한 노여움에서였지만,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의존의 자세를 갖기 위해서입니다.

 

▲3절,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니

 

히스기야의 기도는 ‘의인의 간구를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구약의 확신에 부합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초점은 행동의 완전함이 아니라 동기의 순전함에 모아집니다.

 

히스기야도 인간인 한 비록 그의 행사가 다 완전하지는 못했을지라도,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게 종교개혁을 일으켰으나, 왕하18:4

앗수르의 침입 때, 금과 은을 바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던 불신앙이 있었습니다. 왕하18:14~16) 

 

그러나 그는 할 수 있는 대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순전한 양심에 따라

최대한 바르게 행하고자 하였습니다.

왕하18:1~7에 나오는 역사적인 기록과 평가를 참조하십시오.

 

 

◑2. 히스기야의 기도 응답          사38:4~8

 

▲4절, 이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선지자에게 전달됩니다.

첫 번째 (1절) 말씀과 두 번째 말씀 (4절) 사이의 시간적 간격은

그렇게 오래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왕하20:4의 평행구절에서 보듯이, 

선지자는 그가 ‘성읍 가운데까지도 이르기 전에’

여호와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즉 1절에서 이사야는, 히스기야에게 예언을 선포하고,

왕궁을 빠져나와 도시를 걸어가는 도중에,

4절의 예언의 말씀을 또다시 들었기 때문입니다. 왕하20:3~4절을 보세요.

그러니까 히스기야의 기도가, 즉각 응답되었던 것이지요.

 

▲5절, 너는 가서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오 년을 더하고

  

히스기야에게 죽음을 선고할 때는 여호와의 이름만 간단히 언급되었습니다. (1절)

그러나 지금은 여호와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이라는 독특한 명칭으로 부릅니다.

 

이는 히스기야에게 베풀어진 여호와의 은혜와 자비가

그 조상 다윗과 맺으신 언약에 기인한 것이며, 

약속을 지키시는 여호와의 변함없는 신실하심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입니다. 

 

‘다윗’은 단순한 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왕국의 연속성을 약속받은 인물로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삼하7:12~16)

물론 이 영속성이 다윗 자신이 아니라, 그의 후손과 관련된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듣고~보았다’는 말은, 여호와께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참되고 진실한 것으로

인정하셨다는 말입니다.

 

여호와는 의인의 입에서 나오는 진실한 기도를 들으시며, 

특히 의인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귀하게 보십니다.

 

▲6절,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겠고, 내가 또 이 성을 보호하리라

 

히스기야에게 주어진 약속은,

유다에 이미 진주해서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있는 앗수르 군대의 위협으로부터의

일시적인 보호뿐만 아니라

동시에 일단 퇴각한 후에도 계속해서 있을 수 있는

추가적인 모든 위협으로부터의 완전한 보호를 포괄하는 것입니다

 

이 예언은 그대로 실현되었으니, 앗수르는 결코 예루살렘 성을 정복하지 못하였습니다.

 

5~6절을 연결해서 보면,

5절에는 ‘히스기야의 개인적 문제 응답’인데

6절에는 ‘남유다 민족의 구원의 응답’을 받습니다.

 

종종 우리 각자 개인적 문제와, 그로 인한 기도의 응답은,

내가 속한 공동체의 문제까지 같이 응답, 해결되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일례로, 한나는, 자기 자녀가 없는 문제로 인해,

간절히 기도해서, 사무엘을 응답 받았습니다.

 

그 사무엘의 응답은, 나아가,

당시 사사시대의 혼란을 극복하는 ‘이스라엘 나라의 문제 응답’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내게 <개인적인 문제>를 주실 때

우리는 기도가운데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내 개인적인 문제’일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것은 ‘내 공동체 적인 문제 해결의 열쇠’일수도 있습니다.

 

히스기야, 한나처럼

‘내 개인적인 문제를 놓고 간절히 기도하며 응답 받는 것’은

나아가 ‘내 공동체의 문제의 응답’을 가져올 것입니다.

 

▲7절, 이는 여호와께로 말미암는 너를 위한 징조이니,

곧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을 그가 이루신다는 증거이니라.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으나, 일의 순서상,

이사야의 말(7절)이 주어지기 전에, 징조를 구한 히스기야의 적극적인 요청이

먼저 있었을 것입니다. (22절,  왕하20:8 참조).

 

이 점에서 히스기야의 행동은

징조 구하기를 거부한 아하스의 불신 행위와 대조를 이룹니다. 사7:12

 

▲8절, 보라 아하스의 해시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뒤로 십 도를 물러가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더니

이에 해시계에 나아갔던 해의 그림자가 십 도를 물러가니라

 

‘아하스의 해시계’는 히스기야의 선왕先王 아하스가 세운 해시계를 말합니다.

 

헤로도투스의 기록에 의하면,

일영표는 바벨론에서 최초로 만들어졌습니다.

 

이것이 앗수르에 전달되었을 것이고, 

아하스가 다메섹에 있는 디글랏 빌레셀을 방문했을 때

이에 대한 지식을 도입한 듯합니다. (왕하16:10 참조).

 

‘일영표’는 문자적으로 ‘계단들’이니, 

해가 떠오를 때와 질 때를 기준으로 해서

계단에 드리워진 그늘을 이용하여 시간을 측정하는 수단을 가리킵니다.

 

왕하20:9~10의 병행구절에 따르면, 

이사야는 히스기야에게, 그림자가 앞으로 10도, 뒤로 10도 나아가는 것 중에서

하나를 고르도록 제안했으며,

히스기야 왕은 좀 더 어렵게 보이는 후자를 선택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적이 일어나려면,

천체, 태양계의 회전이 완전히 뒤바뀌어야 합니다.         주1) 컴퓨터 계산으로 밝혀냄

  

 

◑3. 히스기야의 감사 기도      사38:9~22

 

▲9절, 유다 왕 히스기야가 병들었다가 그의 병이 나은 때에 기록한 글이 이러하니라

 

히스기야 왕의 시편(본문 9~20절)은 오직 본서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 시편을, 죽음의 병에서 회복된 후에 지었습니다.

 

9절은 이 시편의 표제입니다.

 

다윗과 마찬가지로 예술과 문학에 탁월하였던 히스기야는

성전 예배시에 관악과 성악을 복구시켰으며, (대하29:25~30)

특히 위원회를 결성하여 잠언을 수집하고

고대 문서들을 수집, 보관하는 등의 일을 추진케 한 바 있습니다. (잠25:1)

 

따라서 이러한 그가, 본 시편을 지었다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10~12절은, 히스기야가 병상에 누워 사경을 헤매는 절망적 상태>를 말합니다.

 

▲10절, 내가 말하기를 나의 중년에 스올의 문에 들어가고

나의 여생을 빼앗기게 되리라 하였도다.

 

‘내가 중년에 음부의 문에 들어가고’

‘중년’은     In the middle of my life 

다른 말로, ‘내 인생의 가장 최고의 때에’ In the prime of my life  입니다. 

 

‘내가 음부의 문에 달려간다’

‘죽는다’는 말입니다.

 

▲11절,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뵈옵지 못하리니

산 자의 땅에서 다시는 여호와를 뵈옵지 못하겠고

내가 세상의 거민 중에서 한 사람도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계속해서 히스기야는 돌연한 죽음으로 인하여

그가 상실할 수밖에 없는 두 가지를 노래하니, 

그 첫째는 ‘여호와를 뵈옵는 것’이며, 

그 둘째는 ‘사람들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뵙는다’는 것은

육신의 눈으로 그를 본다는 말이 아니라, 

성전에서 공중 예배를 드림으로써 그의 임재 하심을 경험하며

주님과 살아있는 접촉과 교제를 나눈다는 말입니다.                                         주2)

 

하나님과의 바른 교제는, 필경 사람들과의 친밀한 교제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사람과 어울리는 이러한 즐거움이야말로

히스기야가 생존세계, 곧 짧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귀하게 여겼던 것들이었는데

이제 죽음의 자리에서, 이것들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12절, 나의 거처는, 목자의 장막을 걷음 같이 나를 떠나 옮겨졌고

직공이 베를 걷어 말음 같이 내가 내 생명을 말았도다.

주께서 나를 틀에서 끊으시리니 조석간에 나를 끝내시리라

 

자기 생명의 덧없음을 상기하면서, 히스기야는 그것을 두 가지로 비유합니다.

1)목자가 장막을 걷음

풀이 마르면, 목자는 곧 장막을 걷고 새로운 곳을 찾아 이동합니다.

 

2)직공이 베를 틀에서 끊음

베가 베틀에서 완성되어진 다음에는

순식간에 직공의 손에 의해서 잘려집니다.

자기 인생의 짧고 덧없음에 대한 비유적 표현입니다.

 

<13~14절은, 병으로 인한 고통의 신음 소리를 호소>하였습니다.

 

13절, 내가 아침까지 견디었사오나, 주께서 사자 같이 나의 모든 뼈를 꺾으시오니

조석간에 나를 끝내시리라.

 

히스기야가 극한 고통 속에서도 인내로서 밤을 세웠으나, 

아침이 되어도 병세는 그대로였으며

오히려 ‘사자가 그의 뼈를 물어뜯는 것’과 같은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인해

거의 죽게 된 사람처럼 혼미한 소리를 내뱉는 뜻으로 여겨집니다.

 

 

▲14절, 나는 제비 같이, 학 같이 지저귀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내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압제를 받사오니 나의 중보가 되옵소서

 

이런 고통의 순간에서 히스기야는 신음하였는데,

그 신음 소리를, 새 소리에 비유하였습니다.

 

제비나 학의 지저귀는 소리는.. ‘날카로운 비명 소리’ 같은 것이며,

비둘기 울음소리는.. 매우 애처로운 음색을 띠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목하십시오. 히스기야는 병상에서 끙끙대며 앓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병상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해내면서도

간절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도움을 바라는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내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나이다.’

직전 구절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와 연결해서 보면,

울어서 눈이 쇠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나의 보증이 되소서’

‘보증’(아르베니) 역시 법정 용어이니, 

채무자의 압박을 경감시켜 주기 위해, 그 빛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주3)

 

히스기야는 채무자의 입장에서, 채권자이신 여호와께

자신을 위해 보증이 되어 달라고, 

즉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욥17:3참조) 

 

<15~17절은, 병이 치유함 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15절,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고 또 친히 이루셨사오니, 내가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내 영혼의 고통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신토록 방황하리이다.

 

히스기야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회복의 약속을 믿고

그것이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신뢰했습니다. 그리고 다짐했습니다.

 

‘내 영혼의 고통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신토록 방황하리이다.’

이 대목을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내가 이 고통을 생각하며, 여생을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가리라.

 

고통의 날을 기억하며 조심히 신중하게 행하며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약속이 사39장에서 무너지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16절, 주여 사람이 사는 것이 이에 있고, 내 심령의 생명도 온전히 거기에 있사오니,

원하건대 나를 치료하시며 나를 살려 주옵소서

 

본문은 개역성경처럼 간구 형태로 번역할 수도 있지만, 

여기 사용된 두 동사는 모두 히필형(사역형 능동)으로서

명령형뿐만 아니라, 미완료형으로도 번역이 가능하더고 합니다.

 

미완료형으로 번역할 경우에는, 

‘당신이 나를 치유하시며, 나를 살게 하시리이다’가 되어

두 동사 모두 기도자의 확신을 나타냅니다.

 

▲17절,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내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내 모든 죄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죽음에서 벗어난 후 히스기야는

자신의 이전 고통을 돌아보면서

그것이 자기에게 가져다준 영적인 유익을 노래합니다.

 

히스기야는 그가 주께로부터 받은 생명과 건강의 축복을

‘평안’(샬롬)이란 한 단어로 요약하여 말합니다.

 

진실로 깨닫는 자에게는 고통조차도 그를 연단, 완성시키려는

하나님의 은혜가 됩니다. (롬8:28 참조)

 

‘등 뒤에 던지다’

라는 말은 ‘사라지게 하다’,  ‘망각하다’,  ‘전혀 관심을 갖지 않다’는 뜻입니다. (느9:26 참조)

 

반대로 주께서 무언가를 기억하실 때는, 그 대상을 그의 얼굴 앞에, 

눈앞에 놓으신다고 표현합니다.                                                       주4)

 

결국 하반절은 히스기야가 자신에게 선고된 죽음의 재난을

그가 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로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18~20절은, 감사의 찬양과 신앙의 삶을 다짐>하였습니다.

 

▲18절, 스올이 주께 감사하지 못하며, 사망이 주를 찬양하지 못하며

구덩이에 들어간 자가 주의 신실을 바라지 못하되

 

본 절과 19절은 ‘죽음’과 ‘생명’을 대조시킵니다.

 

특히 본절과 관련하여, 사후 세계에 대한 이러한 비관적인 생각은

히스기야가 죽음을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의 결과로 파악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19절, 오직 산 자 곧 산 자는 오늘 내가 하는 것과 같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신실을 아버지가 그의 자녀에게 알게 하리이다

 

18절은.. 죽은 자

19절은.. 산 자로 대조되어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산 자와 죽은 자를 대조하며 삶과 죽음의 의미를 노래하였습니다.

 

‘산 자 곧 산 자’

강조적인 반복법입니다.

 

☞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

 

▲20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니

우리가 종신토록 여호와의 전에서 수금으로 나의 노래를 노래하리로다.

 

히스기야의 시편은, 그가 자신의 동료 예배자들에게

자기와 더불어 찬미할 것을 권유하는 말로 끝납니다.

 

찬미의 주제는 ‘여호와의 구원’이며, 

그 방법은 ‘악기를 사용하여 노래하는 것’이며, 

그 장소는 ‘여호와의 전’입니다.

아마도 히스기야는 성전에서 드리는 공적인 예배를 염두에 둔 듯합니다.

 

히스기야는, 노래를 마무리 하면서

하나님께 감사 찬송 드리는 일을 쉬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히스기야 처럼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과

찬양과 영광을 드리는 일을, 우리 호흡이 끝날 때까지 멈추지 않고 드리는

귀하고 복된 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21~22절은, 빠진 구절, 부록, 삽입>입니다.

   

21절, 이사야가 이르기를 한 뭉치 무화과를 가져다가 종처에 붙이면

왕이 나으리라 하였고

 

앞에서 언급하지 못했던 사항들을

이사야 선지자는 부연하니, 

그중 첫째가 치료약에 관한 것입니다.

 

선지자는 왕에게 무화과 열매를 찧어 만든 찜질약을

환처 부위에 바르도록 처방하였습니다.

 

무화과는, 종기를 빨리 곪게 하여 고름을 터뜨리는 효능이 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무화과는 오히려 종기에 해로울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약5:14에도,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기도+약을 써야 된다는 뜻입니다.

 

▲22절, 히스기야도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의 전에 올라갈 징조가 무엇이냐 하였더라

 

선지자의 처방 다음에, 징조를 구하는 히스기야의 요청이 이어집니다. (왕하20:7, 8)

‘여호와의 전에 올라간다’는 말은, 

예배드리기 위하여, 혹은 여호와를 찬미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간다는 말입니다.

 

이사야는 히스기야에게 ‘네가 삼일 만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갈 것’이라고 약속하였습니다.(왕하20:5)

 

이에 히스기야는, 그 약속을 확증할 수 있는 징조를 요구했으며, 

여호와께서는 해의 그림자가 뒤로 10도 물러가는 이적으로 응답해 주신 것입니다(8절).

그러니까 22절은, 8절 앞에 삽입해야 할 것입니다. 아마 후대에 덧붙여진듯.

 

 

......................

 

주1)

제 David Pawson 가 헤롤드 힐 선생이 쓴 글을 한번 읽어 드릴 테니 들어보세요.

그는 커티스 엔진 회사의 회장인 동시에미국 우주 계획부의 고문이었습니다.

 

요즘 한 가지 놀라운 일이 발생했는데하나님이 행하신 일입니다.

최근에 인디애나 주 그린벨트 시에 있는우리 회사의 우주 비행사와 우주 과학자들이

우주에서 해행성들의 궤적을 일일이 체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백년 후심지어 천년 후의 행성의 위치도계산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그 행성의 미래 위치를 알아야위성을 쏘아 올릴 때,

발사한 위성이 장래에 행성의 궤도에 부딪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인공위성의 수명과행성의 궤도를 잘 계산해야

장래에 충돌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컴퓨터로 수백 년씩 과거의 행성의 궤적과미래의 행성의 궤적을 계산하는데,

갑자기 컴퓨터가 멈추었어요빨간불이 켜졌는데문제가 있다는 표시이지요.

자료가 잘못 입력된 것이든지아니면 결과가 표준에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컴퓨터 수리 부서 사람을 불러 검사했는데기계는 정상이라는 것입니다.

이 연구팀의 수장이 무엇이 잘못되었느냐고 물으니연구원들은

그런데 우주의 행성이 도는 날짜가딱 하루가 맞지 않는’ 문제점을 발견했습니다.

 

과학자들은 모두 혼란에 빠졌고해답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팀원 한 명이교회 주일학교에서태양이 하늘에서 멈춘 얘기를 들은 것이 기억났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일이 있었느냐고 믿지 않았어요하지만 또 별다른 방법은 없고 하니,

그를 불러 성경에서 그 이야기를 찾아내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호수아서 10장에서 찾았습니다.

 

우주 과학자들이 컴퓨터로 과거의 행성 궤적을 계산한 결과도 하루가 빠졌고,

그런데 비슷하게 맞았지정확하게 맞지는 않았습니다.

 

컴퓨터 계산은 여호수아 때비는 시간은 23시간 20분이지, 24시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다시 성경 여호수아서를 보니거기에 하루더라 whole day’라고 했습니다.

이 작은 단어가 아주 중요하지요.

 

하지만 그들이 아직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40분의 오차가 있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으면 100년 후이면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반드시 이 문제를 찾아내야 했습니다.

아니면 장래의 행성 궤도에반드시 큰 오차가 생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후에 이 똑같은 사람이또 성경에서 태양이 뒤로 간 것을 기억하였습니다.

우주과학자 모두는 그가 미쳤다고 하였고하지만 그들은 성경에서

히스기야가 위독할 때이사야 선지자가 그를 방문하여 말하기를

그는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어요.

그러자 히스기야가 증표를 보여 달라고 하였어요.

 

이사야가 말하기를 이것이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준 증표니라.

여호와는 말씀하신 그것을 이루실 것이라.

해 그림자가 십도를 나아갈 것이니이까 혹 십도를 물러갈 것이니이까라고 물으니,

 

히스기야가 대답하기를 해 그림자가 십도 나아가기는 것은 쉬우니,

해 그림자가 십도 물러가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어요왕하20:5~11

 

이사야 선지자가 여호와께 구하니,

여호와께서 아하스의 해시계 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십도 뒤로 물러가게 하셨는데,

이 십도가 마침 40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서의 23시간 20분에 열왕기하의 40분을 더하니 바로 24시간이었습니다.

결국 그 과학자들은 과거의 우주궤도가 하루가 빠졌다는 것을프로그램에 입력했습니다.”

*이제는 행성 궤적 계산이 다 맞음

믿는 것은 당신에게 달렸습니다이것은 실제로 일어났던 일입니다.

  

 

주2) 시11:7, 17:15, 27:4, 42:2, 63:2, 84:2 참조

 

주3) 시119:122, 잠20:16, 27:13 참조

 

주4) 시90:8, 109:15, 렘16:17, 호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