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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40장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

LNCK 2021. 10. 20. 09:39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        사40:1~31          10.11.07.출처

 

이사야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39장까지 전반부는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에 대한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40~66장까지는 위로와 희망에 대한 내용이 주 내용입니다.

 

그중에서도 40장은 후반부의 서론으로서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의 ‘서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40:1절을 어떻게 시작합니까?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Comfort, comfort my people.

 

헨델은 이 이사야 40:1절 말씀에서 큰 위로와 힘을 덧입고

그 유명한 <메시야> 라는 오라토리오를 작곡했습니다.                                  주1)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점에서, 위로와 희망이 되십니까?> ←문제 제기

 

 

◑1. 첫째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2절,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의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의 노역의 때가 끝났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 때문에 70년 동안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그 노역의 때가 끝났다고 말씀하십니다.

죄 값을 다 치렀다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벌을 배나 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석방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저희가 군대생활 할 때에, 대학 때 교련수업을 이수한 사람은

두 세 달 더 빨리 제대를 시켜 주었습니다.

그때 다른 군인들은 그 사람을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릅니다.

 

하물며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심판을 받아 마땅한 우리들이

죄 용서함을 받고 죄로 인한 고통에서 해방 될 때에

얼마나 감사가 되고 위로가 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직접 바벨론에 끌려가서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함으로써 죄 값을 치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므로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러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마음에 큰 위로와 힘을 덧입게 됩니다.

 

고후1:5절에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은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For just as the sufferings of Christ flow over into our lives,

so also through Christ our comfort overflows. NIV

 

사도바울은 자기가 받은 고난을 표현할 길이 없어서

‘그리스도의 넘치는 고난’이라고 하였습니다. overflowing suffering. 

 

그런 ‘넘치는 고난’을 받은 성도에게는, 

‘넘치는 위로’ overflowing comfort가 주어집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헨델이 어떻게 24일 동안 <메시야> 작곡에 전념할 수 있었을까요?

주님의 위로가 그의 내면에 흘러넘쳤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다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멸시하고, 조롱하고,

빚쟁이들이 찾아와서 괴롭히는데 아무도 위로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나보다 더 멸시를 당하신 메시야, 침뱉음을 당하시고 조롱을 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 예수님’을 바라보니

말할 수 없는 위로, 하늘의 위로가 그 마음에 임하게 된 것입니다.

 

그 위로가 흘러넘쳐서, overflowing comfort

마침내 <오라트리오 메시야>라는 대작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넘치는 위로 overflowing comfort를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다 위로를 받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다 남모르는 마음에 고뇌와 슬픔, 눌림이 있습니다.

특히 요즘처럼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이 되면, 왠지 마음이 쏴 하면서 외로움이 몰려옵니다.

‘아!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다. 이해받고 싶다. 사랑받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때 사단이 속삭입니다. ‘이성 친구를 사귀어 봐’ ‘친구들과 몰려다니면서 좀 놀아 봐’

그러나 인간적으로 위로받고자 하다가, 그 마음이 병드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로 나아가서, 영적인 위로를 덧입어야 하겠습니다.

하늘의 위로, 참된 영혼의 위로를 덧입을 수 있길 바랍니다.

그때 우리는 헨델처럼 충만한 스피릿을 덧입고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은 위대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사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2. 둘째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이 되는 것은

여호와의 영광이 우리가운데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라 중 ◑3. 위대하신 하나님 참조

 

우리 하나님의 영광은 영원합니다.

하나님은 알파요, 오메가, 처음이요 끝이 되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시오, 지금도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 하나님은 너무나 크시고 너무나 위대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느끼지를 못합니다.

 

마치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너무나 빠른 속도로

자전과 공전을 하고 있기 때문에,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지구는 시속 몇 킬로로 돌고 있는 줄 아십니까?

시속 1666킬로로 자전하고 있습니다.

공전의 속도는 얼마인지 아십니까? 시속 108000 킬로입니다.

자동차와 비교가 됩니까?

 

비싼 자동차 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엄청나게 좋은 초고속 자가용을 날마다 타고 다닙니다.

 

소음도 전혀 없고, 진동도 없습니다. KTX도 좋다고 하지만

대전부터 속도가 250킬로 넘어가면 진동 때문에 책 보기도 힘듭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만드시고 운행하시는 지구는 완벽합니다.

지구만 있습니까? 태양계를 말하자면 한이 없습니다.

 

세상에 책들은, 별의 별 칼라 화보로 치장을 해도

한 두번 보고 나면 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습니까? 보고 또 보고 또 보아도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고 또 들어도, 항상 감동이 되잖습니까?

 

어떤 사람은 “또 수양회 갑니까?”

“엊그제 여름수양회 갔다 왔는데, 또 가을 수양회 갑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또 들어도 은혜가 있고 또 들어도 또 은혜가 있습니다.

찬236장 “주 예수 크신 사랑 늘 말해 주시오, 평생에 듣던 말씀 또 들려주시오.

평생에 듣던 말씀. 평생에 듣던 말씀 주 예수 크신 사랑 또 들려주시오”

 

저는 매주 수요일 저녁 8시에, 트리니다드 토바고에 전 베드로 선교사와

전화로 1시간씩 1대1(성경공부)을 합니다.

전베드로 선교사가 그래요. “제가 이 한 시간 1대1로 일주일을 삽니다”

 

이전에는 몰랐는데, 하나님 말씀이 그렇게 달고 힘이 된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는 옆 나라에 총리가 서거를 해서, 그 나라를 방문하고 왔다고 했습니다.

 

전베드로 선교사가 그 나라에서 상당히 높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말씀공부가 그렇게 좋다는 것입니다.

 

요1:4절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우리를 살리고 새롭게 하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공부하고 나면, 모든 어두움이 물러가고 빛으로 환해지게 됩니다.

 

이처럼 생명이신 하나님, 빛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 분은 우리의 왕으로, 목자로 오셨습니다.

그 분이 누구입니까?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

 

 

◑3. 셋째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이 되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다같이 28, 29절을 읽겠습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니’

 

우리가 영원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명철이 한이 없으신 하나님,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무능한 자에게 힘을 주시는 하나님을

굳게 믿고 의지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믿되 31절에서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라’고 말합니다.

‘앙망한다’는 것은, 원어로 ‘하나로 묶는다 bind’는 뜻입니다.            *히, 카바

‘앙망한다’는.. ‘모든 생각과 의지와 관심을 묶어서 한 곳에 집중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오직 여호와를 앙망한다는 것은 절대 딴 생각하지 않고,

한 눈 팔지 않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사랑하고 그에게 소망을 두고

그 분에 마음과 뜻과 힘을 집중시켜 쏟아 붓는 것을 말합니다.

 

사39장에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었습니까?

39:14절에 “나는 제비같이, 학같이 지저귀며, 비둘기같이 슬피 울며,

내 눈이 쇠하도록 앙망한다”고 했습니다.

 

“내 눈이 쇠하도록” 얼마나 하나님을 사모하고 바라보고 앙망했으면

눈이 희미해지기까지, 눈에 핏발이 서기까지 하나님께 집중했겠습니까?

 

그는 왕이지만, 그래서 자기를 바라보는 사람도 많고,

자신이 바라보며 즐길 것도 많았지만 다른 것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면벽하고 눈물을 흘리며 오직 여호와 하나님, 영원하시고, 땅끝까지 창조하시고,

명철이 한이 없으시고,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무능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하늘의 신령한 능력을 부어 주셔서

죽을 병에 걸린 그의 수명을 15년이나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떤 자세로 믿고 있습니까?

그냥 입으로만, 머리로만 막연하게 믿고 있지는 않습니까?

 

히스기야가 한 것처럼 제비같이 학같이 지저귀며, 비둘기같이 슬피 울며,

두 눈이 퉁퉁 붓기까지 눈물 콧물 다 쏟아가며

오직 하나님만을 향해서 매달려 보셨습니까?

 

<일용할 양식> 큐티를 할 때, 이것은 정말 오늘의 양식이니까

내가 살기 위해서 먹어야지, 이 양식 먹지 않으면 나 쓰러져, 죽어.

그런 자세로 양식을 먹어 보셨습니까?

 

예배를 드릴 때에 이 시간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기 때문에

내가 빨리 가서 마음을 준비하고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지,

내 마음을 하나님께 올려 드려야지.. 그런 자세로 예배를 드리고 계십니까?

 

정말 그렇게 해 보세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칼빈이 한 것처럼 내 심장을 드리나이다 하는 자세로,

주기철 목사님의 일사각오의 자세로 주님을 앙망해 보십시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3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 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은 인생을 살게 됩니다.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가는 것을 보셨습니까?

 

그러나 일단 독수리가 날개를 펼치는 것을 보면 어마어마하게 큽니다.

그 날개를 한번 휘저으면 창공을 박차고 올라갑니다.

 

비바람이 몰아치면, 다른 새들은, 다 처마 밑에 몸을 숨기지만

독수리는 폭풍우를 뚫고 저 높은 곳을 향해서 올라갑니다.

 

이때 다른 새들은 감탄을 하게 됩니다. “도대체 저 힘이 어디서 나올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낙심하고 있을 때, 좌절하고 있을 때,

그래서 인생의 시련의 때에 병든 병아리처럼 실의에 빠져 있는데

오직 앙망하는 자는 분연히 일어나서 날아가는 인생,

달음박질하는 인생, 도전하고 개척하는 인생을 삽니다.

 

그 힘이 어디서 나옵니까?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새 힘입니다.

 

그 힘은 인간의 힘이 아닙니다. 세상의 힘과 권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힘을 가리킵니다. 성령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새 힘은 세상이 알 수도 없고 세상이 줄 수도 없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쏟아 부어 주시는 영적인 파워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비행기를 보면 그런 생각을 합니다.

어떻게 저렇게 많은 사람과 짐을 싣고 태평양을 건너고 대서양을 건널까?

그런데 비행기가 뜨는 원리가 있습니다.

처음 이륙할 때에 엄청난 에너지를 공급받는 것입니다.

 

상당한 연료를 그때에 쓴다고 합니다.

그 에너지의 힘으로 비행기가 한번 하늘로 비상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 스무드하게 날아간다고 합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를 시작하는 첫 시간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앙망하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새 힘,

하늘의 에너지를 공급받아 보세요. 새벽 첫 시간에 양식과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힘, 하늘의 에너지, 새 힘을 덧입어 보세요.

 

그러면 아무리 현실이 어렵고 어려워도

우리는 현실을 박차고 일어나 비상할 수 있습니다.

 

일주일이 시작되는 주일날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보냅니까?

토요일 저녁 늦게까지 먹고 마시고 술 취하고 주일날은 늘어지게 잡니다.

그러니 월요일부터 몸이 무겁고 마음이 눌립니다.

하루하루 리어카를 끌고 언덕을 오르는 것처럼 힘이 듭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일날 예배를 통해서 여호와를 앙망합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새 힘을 부어 주십니다. 풍성한 하늘 에너지로 채워 주십니다.

그러면 몸도 마음도 가볍습니다.

나의 꿈은 벌써 하늘을 날고 있습니다. 창공을 나르는 비행기와 같이,

폭풍속을 뚫고 올라가는 독수리와 같이 비상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이제 우리 모임은 2040년 10만 선교사 시대를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부흥하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50년을 향해서 힘차게 날개 짓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사도행전의 역사가 재현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자잘한 현실문제에 얽매어 징징거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민족사적으로도 이 나라가 지금 세계를 향해서 비상하고 있습니다.

세계사에 주역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웅크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일어나야 합니다. 깨어나야 합니다,

세계를 향해서 힘찬 날개짓을 해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직 여호와를 앙망해야 합니다.

헛생각하지 말고, 괜히 헛된 곳에 정력을 낭비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부르짖어 기도하고,

한 양을 살리기 위해서 목숨을 걸어 보세요.

그러면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십니다. 하늘의 에너지로 채워 주십니다.

 

그때 우리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하늘을 향해서 비상하는 위대한 인생을 살 수 있을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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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헨델은 말년에 건강도 좋지 않은데다가 많은 빚까지 지게 되어서

완전히 절망가운데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헨델의 시대는 끝났다고 비아냥거렸습니다.

 

추운 겨울 어느 날, 그는 길거리를 방황하다가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찰스 제넨스라는 친구가 그에게 가사에 곡을 붙여 달라고 성가집을 보냈습니다.

 

그 책 표지에는, 이사야 40:1절 말씀이 적혀 있었습니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그 책을 열어보니, 성경의 말씀, 특히 이사야 말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버림을 받았다.

그는 자기를 불쌍히 여겨줄 사람을 찾았건만, 그럴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를 위로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 외에는..”

 

그는 그 글을 읽는 동안에 큰 위로와 감동을 받게 되었습니다.

말씀이 그를 사로잡은 것입니다.

그는 추위도, 배고픔도 잊어버리고, 24일 동안 두문불출하고,

오직 (작)곡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그 위대한 대작 오라트리오 <메시야>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위로가 임할 수 있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소망과 비전이 임하여서, 헨델처럼,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은 비상하는 인생을 살 수 있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