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잔이 넘치나이다」
정연희 씨가 쓴 실화소설「내 잔이 넘치나이다」에 나오는 실존인물 맹의순 이야기.
그의 짧은 인생은, 시편 23편에 나오는 선한 목자를 닮은 삶이었다.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드렸던 맹의순
맹의순은 평양 장대현교회 맹관호 장로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들 가족은 공산치하를 떠나 서울로 피난 와서 새 삶을 꾸리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부터 그들 가족에게 심상치 않은 고난이 시작된다.
먼저 첫째 아들인, 맹의순의 형은.. 아무 이유도 없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얼마 있지 않아서 맹의순의 누나도.. 병명도 모르는 채로 세상을 떠난다.
거기에다 사랑하는 맹의순의 어머니도.. 충격을 받으셨는지, 세상을 떠난다.
맹의순은 연희대학 신학과를 다니던 중,
거기를 졸업하면 목사 안수를 못 받는다는 말을 듣고서,
목사가 되기 위해, 조선신학교로 학교를 옮겼다.
그는 남대문교회 전도사로서, 그리고 부평의 어느 군대병원의 조력자로서
사역을 하고 있었다.
▲625의 혼란 중에 맹의순의 기구한 인생역경이 펼쳐지다.
그러던 중 1950년 625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는 군대병원에서 근무하다가, 아버지를 만나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그의 아버지는, ‘너는 속히 남쪽으로 피난가라’고 그에게 말한다.
그렇지만 맹의순은 차마 아버지를 남겨두고, 자기만 피난을 떠날 수 없었다.
그래서 머뭇거리다가, 결국 피난을 가야 되겠다고 결심하고, 혼자 피난길에 오른다.
(그 후 맹관호 장로는 얼마 있다가 납북 인사로 북으로 끌려갔다고 한다.
맹의순은 자기 아버지 형편도 그 당시에는 잘 몰랐다고 한다.)
어쨌든 남쪽으로 혼자 피난 가다가, 인민군에게 붙잡히게 된다.
그는 여러 고문을 다 당하면서 뭔가 캐내려 했지만,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사실 뭐가 나올 게 없었다.
그러던 중 옛날에 만주에서 학교에 같이 다니던 동창생(아마 인민군)을 만나서
그의 도움으로 풀려나서 부역(인민군 돕는 일)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기회를 봐서, 인민군이 북으로 퇴각할 때, 그 부대를 탈출하게 된다.
그렇게 탈출하는 과정에서, 맹의순은 이제 유엔군에게 붙잡힌다.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보내지다
유엔군은 한국어도 잘 못하고 하니까,
무조건 전장에서 잡은 사람은, 포로로 규정하고,
그래서 맹의순을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보내버렸다.
처음에는 인민군 포로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포로들 사이에 좌우가 갈라져 있을 때, 맹의순은 그 가운데 서서
좌우의 평화를 도모하는 사도였다.
나중에 중공군들이 포로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들어오자,
그는 중공군 막사에 가서, 중공군 포로 중 환자를 돌보기 시작한다.
나중에 맹의순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 기록을 보면,
그가 얼마나 기도의 사람이었는지
‘그의 기도는 겟세마네 기도 같았다’고 주위에서 증언하였다.
당시 27세 밖에 안 된 맹의순은
얼마나 진실하고 온전하게 살았던지
포로수용소 안에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를 전하는 메신저였다.
▲석방 노력을 거부하다.
그가 중공군 포로들을 본격적으로 섬기기 시작했을 때,
그때 밖에서 맹의순이 거기에 무고하게 갇혀 있는 것을 알고,
그가 군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자료를 만들어, 유엔사령부에 보낸다.
그를 석방시키려고 외부 사람들이 백방으로 노력한 것이다.
그러자 맹의순은 그의 친구들에게 (편지를 써서) 이렇게 말한다.
내 본심을 말하면, 내가 괜히 위선 떠는 것처럼 들리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사실 나는 여기 포로수용소가 참 좋다.
무엇보다 여기에서 내가 할 일이 참 많다.
내가 그 어른과 같다는 말은 아니지만, 내 마음에 이런 기도가 있다.
그러면서 그는 아시시의 ‘성 프랜시스의 기도문’을 인용해서 말했다.
주여, 지옥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면서.. 제가 어찌 천국을 즐기겠습니까!
주여, 저주 받은 자를 불쌍히 여기시어 천국에 들여보내 주시든지..
아니면 저를 지옥으로 보내어, 고통 받는 저들을 위로하게 하옵소서!
그러나 물론 이곳은 지옥이 아닐쎄.
나를 필요로 하는 이곳에, 내가 있는 것이 얼마나 마음 편한지 모르겠네.
아니, 저 철조망 밖에 삶을 내가 두려워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네.
그러니 나를 그만 놔두게, 여기서 이 분들을 섬기도록!
자기는 석방을 안 하겠다고, 그는 자기 의지를 표명한다.
그렇지만 주변에서 그를 애쓰고 수고해서 석방을 시키려고 노력했는데,
석방 명령이 떨어진 하루 전 날,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1주기 추도예배
어떤 병으로 죽었는지 자세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1주기 추도예배 때,
그가 모시고 있었던 남대문교회 목사를 필두로,
그와 함께 붙잡혀 있었던 박재훈 목사 등이 참석했고,
그 추도예배(아마 남대문교회당)에는, 멀리 거제도에서 도착한 편지가 있었는데,
한 쪽에는 중국말로 써진 편지, 또 한쪽에는 우리말로 번역해 놓은 편지였다.
그 편지를 추도식 때 읽기 시작했다.(↓)
나중에 그의 시신도 찾지 못했다고 한다.
아마 포로들이 죽으면, 아무 구덩이에다 둘둘 말아서 던졌다고 한다.
당시 포로들의 삶이 그랬다고 한다.
▲중공군 포로들의 증언(추도식에 보내온 편지)에 의하면, 그의 마지막은 이렇게 기록되고 있다.
그 분은 움직이지 못하는 환자들을 골고루 만져주고 주물러 주면서 기도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분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의 기도를 듣고 있으면
고통으로 잠 못 이루던 사람도, 편안한 잠에 들었습니다.
그 분은 항상 우리들의 얼굴을 씻어주고 손을 닦아주고, 발도 씻어주었습니다.
넉넉지 않은 수건을 언제나 깨끗이 빨아서 갖고 다니시면서
언제나 우리를 씻어 주셨습니다.
선생님 손에는 신비한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염치 없이,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하면서
선생님이 우리를 씻겨 주시는 것을 바랬습니다.
더러운 몸을 닦아 주시면서도 그 분은 노래하셨습니다.
눈을 감고 들으면,
하늘의 천사가 노래하는 소리 같았습니다.
우리는 선생님에게서 사랑의 신이 계시다는 것을 보고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선생님은 마지막 환자를 씻기시고, 우리말(중국말)로 외셨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도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그렇게 다 외우신 다음, 그 분은 다시 한 번 말씀하셨습니다.
“주여, 내 잔이 넘치나이다!”
그 말씀이 끝나면, 우리 모두 따라 외었습니다.
“주여, 내 잔이 넘치나이다!”
선생님은 마지막 환자를 씻기시고 나서 물통을 들고 일어서시다가
바닥에 쓰러지셨습니다.
의사들이 달려와서 그 분을 모시고 갔습니다.
우리들은 선생님이 믿었던 예수님께 간절히 기도했지만,
날이 밝아서, 하나님이 데려가셨다는 사실을 듣고는
우리 모두 통곡했습니다.
하지만, 맹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예수 안에 있어야 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맹 선생님은 지금 예수 안에 있겠지만, 우리는 지금 통곡하고 있습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중공군 병동 환자 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