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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38장 1~8 운명을 바꾸는 기도

LNCK 2021. 10. 22. 11:32

https://www.youtube.com/watch?v=r1JZA3bpEks

◈운명을 바꾸는 기도         사38:1~8               2017.10.16.출처        

사38:1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니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나아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

 

오늘 히스기야 왕이 병들어 죽게 된 상황을 보게 됩니다. 
'그때' 라고 하는 시점이 혼란스럽습니다.   *38:1

정확히 추적 해 보면, 사37장에서 읽었던 산헤립의 침공 시기보다도 
본문의 이 시기가 조금 더 앞선 시기입니다. *같은 년도이지만,  약간 앞섬, 히스기야 14년 

본분의 이 상황이 지금 앗수르 왕 산헤립의 침공을 받은 것입니다.                          주1)
그 즈음에 지금 일어난 상황이에요. 히스기야 재위 14년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은 지금 침공을 받고 있는 상황이지만 
함락이 아직 안 된 상황이어서 
어떻게 보면 히스기야 왕은 지금 최대 인생의 위기를 만난 것입니다. 

-죽을 병에 걸렸거니와
-나라도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그런 상황입니다. 

▲어떻게 보면 히스기야로서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직면한 것입니다. 
그는 그동안 잊혀졌던 유월절을 다시 재정비하고   *대하30:1 
종교개혁을 위해서 나름대로 큰 노력을 기울였던 왕입니다. 

그는 아버지 아하스 와는 달리, 어머니 아비야의 영향을 받은 탓에 
그 어머니의 신앙으로 좋은 신앙을 배웠고 
그리고 아버지가 무너뜨려 놓은 종교적 타락과 부패를 일소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어요.   *대하31:1, 왕하18: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좋은 정치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잘 아는 대로, 그는 앗수르의 침공 때문에 
애굽에 사신을 보내기도 했고        *사36:6
그렇지만 그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신앙을 벗어난 건 아니에요. 

▲어쨌든 그러나 그는 본문에서 죽을 병에 걸린 것입니다. 
이때 이사야를 통해서 자기가 죽게 되었다는 통보를 받게 됩니다. 
얼마나 마음이 힘든 상황이겠어요? 

여러분 왕이, 개인적인 질병도 무섭고 힘든 일이지만 
지금 나라도 어렵고, 풍전등화 상황인데 
'하나님께서 도대체 내게 왜 이러시나?' 하는 생각이 왜 안들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믿음의 사람에게도 이런 위기가 닥친다는 것입니다. 
안팎에 어려움이 가중될 때가 있어요. 

'아니 내가 하나님을 믿는데.. 잘 믿어 보겠다고 하고..
여러 가지 종교적 타락의 상황을 바로잡겠다고 그렇게 애를 쓰는데.. 
왜 이렇게 내게 병이 오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어려움이 닥치면 
해석할 수 없는 하나님,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을 느끼게 됩니다. 

:2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자 이런 죽게 된 상황을 만났는데, 히스기야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아멘, 기꺼이 죽겠습니다!' 그러셨습니까? 

근데 히스기야는 벽을 향하여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보통 사람도 아니라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너는 죽는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러면 보통 신앙인 같으면 '나는 끝났구나' 그렇게 체념하고 
그냥 누워서 담담히 죽음을 기다린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벽을 향하여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어떤 일을 통보했다고 
그게 끝이 아니라는 것을 오늘 보게 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밀당이 가능합니다.

끝은, 우리가 기도를 멈추는 게 끝이지, 
기도할 수 있는 동안은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기도해야 하느냐? 
기도가 반드시 매번 기적을 일으키는 건 아니에요. 

기도를 하는데도 병들 수 있고, 
기도를 하는데도 사업이 망할 수도 있고, 
기도를 하는데도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를 멈추는 게, 
기도를 포기하는 게.. 끝이지, 
기도하는 동안에는, 죽음조차도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이런 믿음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네가 죽을 것이다!'
그런데도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는 거예요. 

▲이와 반대로 북이스라엘에 아하시야 왕이 나옵니다.
북이스라엘의 아하시야 왕이 침대에서 떨어졌어요. 
근데 이게 시름시름 아프다가 죽을 병이 된 거예요. 

왕하1:2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는 그의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매 
사자를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이 병이 낫겠나 물어 보라 하니라'

그는 자기가 죽을 것인지, 살 것인지를 
블레셋 땅의 에그론에 있는 바알세붑에게 물어보라고 말합니다.

그때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임했습니다.
왕하1:3~4 '여호와의 사자가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이르되 
너는 일어나 올라가서 사마리아 왕의 사자를 만나 그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엘리야가 이에 가니라'

'이스라엘 땅에 물어볼 데가 없어서, 바알세붑에게 가서 묻느냐?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이렇게 예언합니다.
히스기야와 얼마나 큰 대조를 보입니까.

히스기야는 지금 이사야 선지자에게 매달리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 매달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위 사람들에게 '기도해 주세요' 라고 부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심을 다해서 매달려야 될뿐, 기도로 그 앞에 나아가야 될 분은 
하나님 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했다는 것은.. 사람은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래서 '벽을 쳐다본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결단이고, 대단히 중요한 태도입니다. 

 

그래요, 믿음은 관점이요, 태도입니다. (관념이 아닙니다)
당장 상황이 바뀌지 않더라도 
내가 '믿음'이라는 신앙과 태도를 지키는 한 
그 상황은 역전 될 수 있고, 바뀔 수도 있습니다. 
이게 믿음입니다. 기도하며 포기하지 않는 것이죠. 

여러분들이 상황이 바뀌어서 - 믿게 되었습니까? 
아니면 믿어서 - 상황이 바뀌는 것을 보셨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현재 이 상황이 바꿔어지면 믿겠다' 그럽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 주면 믿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을 가지면, 그 문제는 해결될 수 있는 여지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해결해 주십시오, 그러면 믿을게요'
하나님이 뭐 할 일이 없어서, 여러분하고 그런 흥정이나 게임을 하겠습니까. 

아니요. 우리가 '믿음'이라는 자세를 가지고 나아가면 
우리 안에는 그런 놀라운 상황의 역전이 경험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요. 그게 믿음이 주는 능력이에요. 

▲히스기야가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했는데.. 성경은 어떻게 말합니까? 

3절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니'

'히스기야' 라는 이름이, '여호와는 강하시다' 라는 뜻이에요. 
그런 강하신 하나님, 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그는 지금 기도합니다. 

'내가 주님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했습니다. 
하나님 목전에서 선한 일을 행했던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3

'제가 지금까지 살았던 것처럼 기억해 주십시오.
제가 전심으로 진심으로 지금까지 주님을 의지하고 살아왔습니다!' 

사실일까요? 
아닐 거예요. 

그는, 어떤 때는 앗수르의 위협 앞에서 애굽을 의지하고 사신을 보낸 적도 있고 
그렇게 잘못한 적도 한 때 있었어요. 실수 한 적이 있습니다. 넘어졌던 적이 있어요. 

그러나 그는 그래도 하나님을 놓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에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누구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한 번도 저는 실수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없어요. 

그럴 때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 제가 비록 넘어지고 실수한 적도 있지만 
하나님을 전심으로 붙들고자하는 제 중심은 주님이 아시지 않습니까?' 
이게 이제 간구하는 기도의 근거예요. 
'내 중심은 주님을 향해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심히 통곡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는데 장사 없습니다. 이 눈물 앞에는 장사가 없어요. 

애를 아무리 혼 낼 때라도, 울면 어떻게 합니까? 
울고 있는 데도 때리는 사람은.. 그건 진짜 아버지가 아니에요. 

울고 있는데 아내에게 폭언하는 자는.. 남편도 아닙니다. 
하나님도 눈물에 약하십니다. 

그래서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라고 말씀합니다.  *시편 56:8 

왜냐면 눈물이란 영혼을 씻는 세척제이기 때문에 그래요.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우리 영혼이 씻겨 나간다는 것입니다. 

눈물은 우리의 영혼이 흘리는 피입니다.
육신의 피는 붉은 색이지만, 영혼이 흘리는 피는 눈물색입니다.
그 눈물을 하나님께서는 보신다는 거죠. '네 눈물을 보았노라'  :5

:5 '너는 가서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오 년을 더하고'

참 대단하죠. 히스기야가 그렇게 기도하는 걸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행을 카운트에서 
그 선행을 기준으로 지금 히스기야에게 수명을 15년을 더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돌이킨 삶의 중심을 보셨고 
그가 흘린 눈물을 통해서, 그 영혼이 정결케 되는 것을 보셨다는 것이 중요하지, 
'그가 지금까지 뭘 해 왔는지'를 근거로 해서, 그걸 보상해주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은 반대급부가 아닙니다. 
기도 응답은 반대급부가 아니에요. 
'네가 요만큼 했으니까, 내가 요만큼 기도를 들어 줄게!' 가 아닙니다.
그건 일반 종교에서 하는 얘기에요. 

'지성이면 감천이다' 그건 여러분 천지신명에게 하는 얘기예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표현입니다. 

'내가 죽도록 하면, 그 정도는 보상해 주시겠지..'가 아니에요. 
'지성이면 감천이다' 라는 게 우리의 신앙이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온전히 인정하는 것이 신앙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인격적 관계가 우선입니다. 그 바탕에서 기도응답이 나오는 거죠.

저는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수명을 15년을 더하셨다는 것
여기에 너무 여러분들이 헷갈리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병만 들면 '히스기야에게 15년을 더해 주셨듯이 내게도 15년을 더 해주십시오' 하는데, 
30년을 더 주실 수도 있고, 뭐 그냥 데려가실 수도 있습니다.

근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그 눈물을 보고 계신다는 것, 
우리의 중심을 보고 계신다는 것,
우리의 영혼을 통째로 들여다 보고 계신다는 것 - 그게 중요한 거예요.

히스기야는, 나라의 위기에 처한 상황도 있고, 
그래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죠, 
그래서 기도로 매달린 거예요. 15년 더 받았습니다. 

:6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겠고 내가 또 이 성을 보호하리라'

그가 하나님께 전심으로 매달렸더니, 수명을 더 연장받은 것에 플러스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지 않는다.. 는 보장까지 받은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께 전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했더니 
하나님께서 나머지 필요한 것은 다 채워주셨다.. 
이런 고백과 간증이 있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마6:33 참조

 

◑시간을 다스리는 능력

7~8절 '이는 여호와께로 말미암는 너를 위한 징조이니 

곧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을 그가 이루신다는 증거이니라
보라 아하스의 해시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뒤로 십 도를 물러가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더니 
이에 해시계에 나아갔던 해의 그림자가 십 도를 물러가니라'

이런 얘기를 읽으면 여러분 처음에는 
'성경에 뭐 이런 황당한 얘기를 써 놨을까? 차라리 안 쓰면 좋았을 텐데..' 

아니요,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는 책이에요. 

여호수아도 아모리 족속과 전쟁할 때,
'기브온에 해를 머물게 했고, 아얄론 골짜기에 달을 머물게 하셨다' 했습니다. 수10:12

저는 이 사건이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시간의 주인이시고, 시간을 초월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시간도 멈출 수 있는 분입니다. 

▲제(조정민 목사)가 53세에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때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 나이에 신학교에 입학하니까 다들 저를 조롱합니다..' (너무 늦었다고)
'너 신학교 졸업하고 나서 (2~3년 인턴하고) 목사안수 받으면 
아침에 안수 받고, 그 날 저녁에 은퇴 해야 된다..' 라고 말한 분들도 있었죠.

그때 저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시간이 멈추게 해 주십시오!' 

제가 4년간 신학공부(M. Div.) 하고 돌아왔습니다.  *고든 콘웰
수 십 명의 사람들이 저보고 '더 얼굴이 젊어져서 돌아왔다'는 거예요. 
떠날 때보다 제 얼굴이 훨씬 젊어졌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랬어요. 4년의 시간은 흐르지 않았습니다. 
제게 시간은 거꾸로 간 것 같아요. 
53세에 신학 공부 떠났다가 마치 50세에 한국에 돌아온 것 같아요.

저는 여러분들이 그 사실을 믿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시간은 주관적이에요.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시간이 얼마나 빠르게 흘러갑니까. 
끔찍한 사람하고 같이 있으면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흘러갑니까. 

물론 우리는 객관적인 시간을 살아갈 수가 있지요. 
그래서 우리는 크로놀로지 라는 걸 만듭니다. 
그런 시간을 크로노스 라고 그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을 우리는 카이로스 라고 말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크로노스의 시간을 살지만, 카이로스의 시간을 깨닫고 
그 시간에 접속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게 '영원의 시간'이에요. 

그 시간은, 여러분, 세상의 시간과 다릅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기 건물로 이사온 지 이제 한 달 남짓 지났잖아요. 
근데 여기서 지금 한 10년쯤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 시간에 속지 마십시오. 나이에 속지 마십시오. 
나이는 숫자일 뿐 이라면서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 여러분들이 나이에 당하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하루를 살아도, 영원을 사는 사람이 있고 
백세를 살아도, 살다간 흔적조차 없는 사람 있지 않습니까.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벧후3:8

저는 여러분들이 영원의 시간 속에 접속되면 
인생 전체가 하나님께 기억되고, 열납되는 생애가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의 생애는 
50년 100년 살면 뭐 합니까? 
'살다가 죽었더라' '애 낳고 죽었더라' 그게 끝이죠 뭐. 
'삼시 새끼 먹고 죽었더라' 그가 생전에 뭘 했는데요? 

그러면 짐승도 먹고 살다가 죽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뭘 하다가 죽었는데요?

저는 오늘 이렇게 하나님이 시간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이렇게 우리에게 기록으로 남겨 주신 것을 감사히 여깁니다. 

'시간을 초월할 수 있다'는 거예요.
물리적 법칙으로는 불가능한 얘기죠. 

우리의 과거 전체는, 우리 삶 속에 녹아 있는 시간들이에요. 
미래는, 우리의 삶 속에 이미 녹아 들어오는, 흘러 들어오는 시간입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 수많은 고난들이 해석될 수 있도록 하는 
믿음을 가지고 살기 시작하면 
시간조차도.. 저는 여러분들이 해석되는 시간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고난을 면제 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질병을 면제 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반대급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고난과 질병과 죽음을 해석하는 능력입니다. 
해석하는 능력이 주어지면, 우리는 더 이상 불안해 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오면, 우리 안에 있던 그런 염려와 불안이 떠나가는 것을 경험하고 
그 상황의 역전을 이루는 발판이 되는 것이죠. 

내 안에 있는 두려움과 염려와 걱정이 사라지면 
우리는 관계의 본질이 변하는 것을 경험합니다. 

불신으로 맺은 관계가 아니라 
신뢰로 맺은 관계의 역전, 그게 기적의 발판이라는 것을 믿으십시오. 

그 기적의 발판을 통해서 (주님과) 관계가 변하면,
상황과 처지와 형편도 함께 변하는 것을 경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기적의 원천이 되는 것이고, 씨앗이 되는 것이죠. 

▲오늘 본문에 히스기야가 벽을 마주하고 앉았더니, 벽에 문이 뚫렸습니다. 
앞으로 15년 동안 그 문 속으로 걸어 들어갈 것입니다. 

그가 마주 벽을 마주하지 않았다면,
벽을 벽으로만 마주하고 살았다면 
그에게는 15년이 없는 시간이 되었겠지요. 

우리가 이 이야기를 읽고, 그냥 웃고 지나가는 사람은 
평생 벽만 쳐다보고 살다 가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벽을 보고 마주 앉아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사람은 
벽 안에 문이 열리는 것을 볼 것이고 
벽속으로 뚫린 문으로 걸어 들어가서 
전혀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하나님이 주시는 그런 시간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여러분이 '믿음의 시간'을 갖게 되기를 바라고 
문이 열리기를 바라고, 믿음의 길이 뚫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

 

 

주1) 앗수르 산헤립의 1차 협박과 2차 협박

 

이사야 36장과 37장은 동일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같은 사건이 두 장에 걸쳐 기록되었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통치하던 시대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두 번에 걸쳐 예루살렘을 침공했습니다.

 

1차 침공 때는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성전과 왕궁의 은금을 벗겨 산헤립에게 조공을 바친 후에

조약을 맺고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왕하18:13~15) *히스기야 14년.

 

그러나 약탈자들과 맺은 조약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산헤립은 이 조약을 파기하고 곧 바로  2차 침공을 감행했습니다.  *왕하18:17

이사야서 36~38장 상황은 2차 침공 이후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1차 침공2차 침공이 같은 해에 일어난 사건이므로, 굳이 나눌 필요가 없겠습니다.

연속선상의 한 사건으로 봐도 무방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1차 협박2차 협박의 구분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36장에 기록된 바처럼 유다의 견고한 성읍은

모두 산헤립에게 정복당하고 예루살렘만

풍전등화처럼 남아 있는 상황을 맞게 되었습니다.

 

1차 협박 : 랍사게를 통해서 전달, 사36:4~10

산헤립은 군대장관인 랍사게를 통해 히스기야 왕을 협박했습니다.

이사야 36:4 ‘랍사게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제 히스기야에게 고하라

대왕 앗수르 왕이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의뢰하니 무엇을 의뢰하느냐’

 

“앗수르 왕의 공격을 당해낸 열방의 신들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므로 여호와도 앗수르 왕의 공격을 당해낼 재간이 없을 것이다!

여호와 신이나 열방의 신이나 다를 바가 없다!

오직 앗수르 왕의 말을 듣고 앗수르 왕에게 항복해라!

그러면 앗수르 제국의 노예가 되어 먹고 마시는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이것이 랍사게의 1차 협박입니다.

 

랍사게의 1차 협박을 들은 히스기야 왕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본문 1절을 보면 히스기야가 그 소리를 듣고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37:1

 

랍사게의 1차 협박으로 인해 히스기야가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1차 응답을 주셨습니다.

본문 37:6~7절이 하나님의 1차 응답입니다.

 

‘이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주에게 이렇게 고하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들은바 앗수르 왕의 종들이

나를 능욕한 말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보라

내가 신을 그의 속에 두리니 그가 풍성을 듣고 그 고토로 돌아갈 것이며

또 내가 그를 그 고토에서 칼에 죽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본래 산헤립은 라기스에 진을 치고 랍사게를 보내서 예루살렘을 협박했는데,

부득이하게 랍사게를 전쟁터에 남겨 놓고

립나로 돌아와서 다른 전쟁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구스 왕 디르하가가 쳐들어온다는 소식도 듣게 되었습니다.

앗수르 왕 산헤립의 계획이 자꾸 꼬였습니다.

 

사람의 인생이 자꾸 꼬이고 복잡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는 역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꼬이고 복잡해지면

하나님의 권징이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렇게 복잡한 가운데서도 앗수르 왕은 히스기야 왕을 계속 협박합니다.

 

▲2차 협박은, 산헤립이 사자들에게 편지를 보내서 이루어졌습니다. 사37:10~13

“내가 구스 왕과 전쟁한다고 해서 너희를 포기할 줄 아느냐?

너희는 우리의 노는 군대만으로도 충분히 함락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여호와가 너희를 구원하리라는 히스기야의 말을 믿지 마라!

내 손에서 자신들의 백성을 건진 신이 아직까지 없느니라!”

 

산헤립의 2차 협박을 받은 히스기야는 아예 여호와의 전에 가서

산헤립의 편지를 펴놓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2차 응답이 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히스기야 왕에게

“산헤립이 감히 나를 훼방하고 능욕하였으니

내가 그의 코에 갈고리를 꿰고 입에 자갈을 매어서 오던 길로 돌아가게 하겠다” 37:29

 

이처럼 이사야 36장과 37장에는

앗수르의 1차 협박,

히스기야 왕의 1차 기도,

하나님의 1차 응답,

 

그리고 앗수르의 2차 협박,

히스기야 왕의 2차 기도,

하나님의 2차 응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