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사야 43장 18~28절 출처
이사야 40장 이후의 핵심적인 내용은 유다 백성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바벨론의 포로가
될 것이지만, 70년 동안 복역을 하고 나면 포로에서 귀환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그런데 이 예언에 대해서 유다 백성들이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광야와 사막이 있는데
그 어려운 길을 어떻게 통과할 수 있겠습니까? 이 어렵고 힘든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 바로 본문 19~20절입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 곧 시랑과 및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들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나의 택한 자로 마시게 할 것임이라.’
하나님께서는 광야가 있으면 길을 내어줄 것이고,
사막이 있으면 강을 만들어서 마시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능력을 본다면 들짐승들,
곧 시랑과 타조도 와서 하나님을 존경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존재하지만 어려움을 주는 장애물은 변형시킬 것이고,
없는 것은 만드시는 창조적인 기적을 이루어
포로 된 유다 백성들이 반드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행하실 새 일입니다.
◑1. 새 일의 영적인 의미
바벨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일이 새 일이라면, 헌 일은 무엇일까요?
본문 18절의 기록을 보면 헌 일,
즉 새 일보다 중요하지 않은 옛적 일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18).’
옛적 일의 내용은 16~17절에 기록되었습니다.
‘바다 가운데 길을, 큰 물 가운데 첩경을 내고 병거와 말과 군대의 용사를 이끌어 내어서
그들로 일시에 엎드러져 일지 못하고 소멸하기를 꺼져가는 등불 같게 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다가 탈출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홍해가 갈라져서 길이 되고,
애굽 군대에게는 홍해가 다시 합쳐져서 무덤이 된 사건을 말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바벨론 포로에서의 귀환을 출애굽 사건보다 더 크게 평가하여
이를 제 2의 출애굽 사건으로 해석합니다.
제1 출애굽 때는 바다가 갈라졌지만,
제2 출애굽 때는 광야가 길을 내고 사막이 물을 냅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 나타난 모든 사건은 그 자체로서의 내용보다는
그 사건이 가리키는 영적인 의미를 예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하는 새 일의 1차적인 의미가 바벨론 포로에서의 귀환이라면,
새 일이 가리키는 보다 깊은 영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본문 22~28절이 우리에게 그 답을 줍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25).’
바벨론에서 포로로 사는 것은 죄에 얽매인 고통의 삶을,
포로에서 귀환하는 것은 죄사함의 축복을 의미합니다.
홍해를 건넌 제 1 출애굽 사건의 도구는 모세였습니다.
그리고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된 제 2 출애굽 사건의 도구는 페르시아 왕 고레스였습니다.
그러나 죄를 도말하시고 기억지 아니하시는
새 일의 바로 '여호와의 종'이신 메시야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이사야 43장 이후에는 계속해서 메시야에 관한 예언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2. 죄사함이 필요한 이유
하나님께서 택하신 유다 백성들이 죄사함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그들의 죄가 많기 때문입니다.
본문 22~24절은 유다 백성들의 죄를 열거합니다.
첫째는 기도하지 않은 죄입니다.
‘그러나 야곱아 너는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고(22).’
하나님을 부르지 않은 것은 기도생활의 실패를 의미합니다.
유다 백성의 조상은 야곱입니다.
야곱은 형의 축복을 빼앗고 아버지를 속인 찬탈자요, 사기꾼이었습니다.
그러나 형 에서가 400명의 군인을 이끌고 자신을 찾아오는 위협을 느낄 때,
얍복강가에서 무릎을 꿇고 환도뼈가 부러지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에서의 진노에서 건짐을 받고, 이후에 계속해서 번창하는 삶을 산 것입니다.
이처럼 유다 백성들의 조상인 야곱은 기도의 사람이었는데,
그 후손인 유다 백성들은 기도생활에 실패하였습니다.
이것이 유다 백성들의 첫 번째 죄였습니다.
둘째로 예배 생활의 실패입니다.
‘이스라엘아 너는 나를 괴로워하였으며(You are tired of me, :22).’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지겨워하고 지루해했습니다.
이것은 예배 생활의 실패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지겨워했다는 말씀입니다.
성도들은 예배에 성공해야 성공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예배에 실패하면 인생도 실패합니다.
불신자들은 예배와 아무 상관이 없지만,
성도들의 성공과 실패의 관건은 예배에 있습니다.
셋째로 헌신 생활의 실패입니다.
‘네 번제의 양을 내게로 가져 오지 아니하였고 네 제물로 나를 공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나는 예물로 인하여 너를 수고롭게 아니하였고 유향으로 인하여 너를 괴롭게 아니하였거늘
너는 나를 위하여 돈으로 향품을 사지 아니하며 희생의 기름으로 나를 흡족케 아니하고(23-24).’
하나님 앞에 번제의 양도 드리지 않고, 제물로 공경하지도 않으며,
향품과 기름을 드리지 않았다는 것은 헌신 생활의 실패를 의미합니다.
사실 유다 백성들은 양과 염소를 많이 가져와서 부지런히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말라기서에 보면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왜 우리가 양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고 하십니까?”라고 따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받을 제물은 눈먼 것과 병든 것, 저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제물이다.
너희 총독에게 그런 선물을 가지고 가면 그가 좋아하겠느냐?
하물며 나에게 그런 제물을 가져와서 나를 공경한다고 말하느냐?
그 제물이 나를 흡족케 하겠느냐? 너희의 제물이 죄를 대신하여 죽음을 면하게 하는데
그것을 번거로운 일로 여기느냐? 너희의 제물로 인해 너희를 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를 용서하고 축복하려는 것이다. 그런데도 눈 멀고, 병들고, 저는 제물을 가져와서
나를 공경한다고 하니 그것이 어떻게 공경이 되겠느냐?”
우리가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고 헌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어떤 마음으로 드리는가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하고, 하나님을 흡족케 하려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공경하려는 마음이 없이 불완전한 제물로 하나님을 업신여겼습니다.
이것이 헌신 생활의 실패입니다.
넷째로 경건 생활의 실패입니다.
‘네 죄 짐으로 나를 수고롭게 하며 네 죄악으로 나를 괴롭게 하였느니라(24).’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을 업신여기고,
죄악과 죄짐으로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것이 경건생활의 실패입니다.
죄가 습관이 되면 중독성 때문에 쉽게 끊지 못합니다.
마치 도박에 중독된 사람들이 손목을 끊어버리고도
계속 도박에 빠져 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기도와 예배와 헌신과 경건에 실패하면 어떤 결과를 맞게 될까요?
본문 28절에 그 결과가 나옵니다.
‘그러므로 내가 성소의 어른들로 욕을 보게 하며 야곱으로 저주를 입게 하며
이스라엘로 비방거리가 되게 하리라.’
죄로 인해 성소의 어른들, 즉 제사장들이 욕을 보게 됩니다.
백성들이 십일조를 가지고 와야 제사장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데,
십일조를 모두 떼어 먹으니 먹고 살 것이 없어서 고생을 합니다.
또한 이스라엘이 비방거리가 됩니다.
공동체 전체가 욕을 먹는 것입니다.
죄는 지어도 그만인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지으면 이와 같이 저주와 고통이 따른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아야 합니다.
◑3. 죄사함의 내용
왜 하나님은 택하신 유다 백성들의 죄를 일일이 지적하실까요?
사실 죄는 이방인들이 더 많이 짓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께서는 유독 택한 백성들의 죄를 면밀히 깨닫게 하실까요?
그 이유는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택함 받지 못한 백성들의 죄는 지적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용서할 계획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43장 전체의 내용을 읽어보시면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1).’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을 지명하여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이 백성들의 죄를 생각나게 하신 후에 그들의 죄를 사하시고,
그들을 증인으로 쓰셔서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겠다는 것이 이사야 43장의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고자 하는 새 일은 택한 백성들에게 죄사함의 선물을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고 그들을 증인으로 쓰시는 것입니다.
▲특별히 본문 25절에는 하나님께서 행하실 새 일에 대한 세 가지 중요한 원리가 나타납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죄에 대한 기록(record)을 가지고 계십니다.
요한계시록 20: 12절을 보면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
하나님께서는 최후의 심판 때에 아무렇게나 심판하지 않으시고
모든 죄악이 기록된 책을 가지고 심판하십니다.
모든 사람의 (회개 안 한) 죄는 하나님의 책에 일일이 다 기록되었습니다.
아무리 어렸을 적에 지은 죄라고 할지라도 모두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새 일을 행하십니다.
바로 택한 백성들의 죄의 기록을 전부 지워버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허물을 도말하십니다. 한 글자도 남기지 않으시고 모두 지우십니다.
우리가 과거에 지은 죄는 이미 지우셨고, 앞으로 지을 죄도
기록할 책이 없기 때문에 기록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허물을 도말하신 은혜입니다.
골로새서 2:장 14절을 보면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사람이 범죄하여 감옥에 가면 전과자가 되었습니다.
전과자가 되면 전과 기록이 남습니다.
그런데 가끔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하거나 국가에 경사가 생기면 대사를 행하여
전과기록을 모두 지워주기도 합니다. 죄에 대한 기록이 지워졌으니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우리의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기록하는 책을
모두 없애버리겠다고 약속하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헤아릴 수도 없는 많은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지워진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의 죄에 대한 원본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이 책의 사본을 가지고 우리를 괴롭히는 나쁜 존재가 있습니다. 바로 마귀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죄에 대한 사본 기록을 가지고 우리를 공격합니다.
“네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너는 십계명을 어기고 도적질했잖아?
네가 죄 지은 것을 다 아는데 어떻게 천국에 가겠다고 말하지? 천국은 어림도 없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담대하게 “사단아! 물러가라!”고 외치십시오.
하나님의 원본은 이미 도말되었으니 사본가지고 까불지 말라고 선포하십시오.
우리 죄에 대한 원본은 모두 도말되어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이미 도말해버리신 죄의 기록을 다시 끄집어내서 괴로워하거나
죄책감에 빠지지 마십시오. 죄의 사본을 가지고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마귀의 일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죄에 대한 기억(memory)을 가지고 계십니다.
‘나 여호와가 그들을 받지 아니하고 이제 그들의 죄를 기억하고 그 죄를 벌하리라(렘 14:10).’
하나님은 죄를 기억하고 벌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않는 새 일을 행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니다.
히브리서 8:장 12절에서도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 죄에 대한 원본기록을 모두 없애버리셨다고 하면서도
그 내용을 모두 기억하신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글로 기록된 원본을 도말하셨을 뿐만 아니라
머릿속에 있는 기억도 모두 지워버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잊어버리신 모든 죄를 다시는 반추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의 죄가 도말되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모두 잊으실 뿐만 아니라, 다시는 기억하지도 않으십니다.
과거의 죄악뿐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죄악까지도 모두 도말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을 통해 바로 이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택하신 자를 대적하리요! 누가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신 자를 송사하리요!
누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택하시며 부르시는 자를 정죄하리요!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셋째로,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이와 같은 새 일을 행하셨을까요?
본문 25절을 보면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도말하시는 새 일을 행하시는 근본 원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시는 세 번째 원리입니다.
본문 7절과 10절, 21절에도 이 원리가 나타나 있습니다.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7).’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로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10).’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21).’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의 죄를 사하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고,
또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증인으로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께서 너무 이기적인 것이 아니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이 창조된 본래 목적입니다.
인간은 본래 목적대로 살아야 축복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시간을 보기 위해 시계를 만들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런데 이 시계가 “나는 사람이 싫다”고 말하면서
돼지 발가락에 매달려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돼지에게는 아무 쓸모도 없는 쓰레기에 불과하고, 시계도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피조물들은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않고서는
그 존재 목적을 알 수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한 목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 목적을 따라 살 때에 우리에게도 복과 은혜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사도 바울도 빌립보서 1:장 11절에서 빌립보 교인들을 위해 중보기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성도는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고,
그 분의 증인된 삶을 살기 위해 창조되었음을 믿고
하나님의 새 일에 동참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 현재글이사야 43장 18~28절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