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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44장 해석 이사야44:장 출처1, 출처2
본문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 볼 수 있는데,
1~8절까지는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이다’는 내용이고,
9~20절까지는 ‘하나님 이외의 우상은 무익한 것이다’는 내용이고,
21~28절까지는 ‘하나님만이 우리의 창조주시요 구속자이시다’ 내용입니다.
◑1.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이시다! 사44:1~8
▲1절,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이스라엘아, 이제 들으라 (쉐마)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아 이제 들으라” 라고 하신 것은 주1) 쉐마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함 받지 않는 자들은, 떡으로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라면, 떡으로만 살 수 없습니다.
반드시 하나님 말씀을 들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마4:4)
‘이제 들으라’
이는 바로 앞 43:장 뒷부분과의 연관성 속에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즉, 영적 무지와 맹목성으로 말미암아 심판받았지만
이제 구원을 통하여, 새 이스라엘을 재건하시겠다는 약속을 함축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말씀을 들으라고 하셨습니까?
<첫째, 하나님은 너를 지으시며, 도와줄 자라는 사실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2절)
▲2절, 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에서부터 지어 낸, 너를 도와 줄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하지 말라 주2) 여수룬
‘너를 모태에서 조성하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결정적 이유인 ‘선택’을 암시합니다.
예레미야, 바울 등도 자신들의 선지자됨 혹은 사도됨이
바로 이 선택 때문이라는 사실을 확신하였습니다(렘1:5, 갈1:15).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나도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사실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신앙이 위대한 것은, 이러한 비밀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시139:14)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 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나를 지으신 하나님은, 내가 세상에 태어났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조성하시고 도와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를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게 하기 위해서
이모저모로 가꾸어 가시고 돌보아 주십니다.
이러한 사실을.. 택함 받은 자들은 깨닫고 살아가야 합니다.
(사64:8)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유대인의 교육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하나님을 버리지 않는 한
하나님은 절대로 나를 버리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뼈저리게 교육 받습니다.
유대인들은 아이가 말 귀를 알아들을 때 쯤 되면,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아이를 팽개치며 말대꾸도 안하고 차갑게 대한다는 것입니다.
일주일이 지난 후에, 아버지는 아이를 꼭 안아주면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을 믿어서는 안 된다. 아버지도 믿지 말아라. 네가 믿을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란다”
라고 교육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의 쉐마 교육입니다.
<둘째, 성령으로 회복하실 것을 잘 들으라>는 것입니다. (3~4절)
▲3절,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
바벨론 포로에서 회복될 이스라엘, 또는 신약의 영적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누릴 복이, 3절에 아래 3가지가 나옵니다.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심
-메마른 땅에 시내가 흐름
-자기 백성에게 성령을 주심
1)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하나님은 이런 은혜의 샘물을 우리에게 주시고 싶어하시는데도
교회 안에 메마른 영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물을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사면을 두루 살피십니다.
그리고 타는 것 같은 목마름으로 주님의 은혜의 물을 간절히 구하는 사람들에게 가까이 계십니다.
주님은 이렇게 자신의 인생의 문제가 바로 충만한 은혜의 결핍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주께서 은혜를 부어주시기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러한 성령의 은혜의 생수를 부어주십니다.
2)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두 번째는 하나님이 메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강에는 발원지라는 샘이 있습니다. 발원지의 자격은 아주 엄격합니다.
반드시 샘이 있어야 하고, 물이 꼭 자체에서 솟아나되 사계절 동안 그 물이 마르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일정한 깊이를 유지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이 메마른 땅에 시내를 흐르게 하실 때에 발원지가 있습니다.
그 궁극적인 발원지는 하나님 자신이시지만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그 물의 시작으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많이 받고 성령의 충만한 사랑을 힘입어서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흘러가면서 하나님이 아무짝에 쓸모없는 그 땅을 두루 적시며
없었던 생태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거기에 물고기들이 살고 수초가 자라고 풀이 자라고 나무가 자라고
새들과 곤충이 깃들고 짐승들이 깃들어 아름다운 숲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에 광야 땅에서, 시내가 흐르고 숲이 무성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주님 앞에 주님의 사랑으로 온전히 변화될 때
미래의 그가 메마른 땅과 같은 사람들 사이를 흘러가며 어떤 놀라우 일을 만들지는
하나님 이외에 아무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메마른 교회를 보시며 “너희는 내게 은혜를 받아 시냇물처럼 흘러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용서하면, 내가 인내하면, 내가 순종하면
나뿐만 아니라 내 옆에 있는 많은 사람들도 다시 살아납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순종하고 주님 의지하고 살아가면
메마른 땅과 같이 아무 쓸모없던 사람들이 주님의 은혜를 힘입어 살아납니다.
여러분, 충만한 은혜를 받고 이렇게 메마른 교회, 메마른 가정, 메마른 이 사회를
비옥하게 하며 사는데 이바지 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3)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
세 번째는 자기 백성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겠노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나의 영'이 곧 '나의 복'입니다. 반복해서 쓰인 병행구절로 보면 됩니다.
이것이 바로 마지막 때에 자기의 백성에게 주신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 같이 자신의 메마른 영혼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며
주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께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들 가까이에 언제나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자기의 욕망을 버립니다.
여러분들이 기도해도 허공을 치는 것 같고 응답도 없는 것 같다면
그까짓 기도제목들 모두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십시오. 그리고 오직 하나를 구하십시오.
“하나님 나의 마음속에 주의 성령을, 주의 은혜를 부어주십시오.
그래서 나로 새 사람 되게 해 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성령의 은혜를 깊이 부어주셨을 때
우리는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와 같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4
▲4절, 그들이 풀 가운데에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 같이 할 것이라
‘솟아나기를’
이 표현은 물이 잘 공급되는 곳에서, 쑥쑥 자라나는 나무나 풀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데,
여기서는 성령 부음을 통하여, 새 생명들이 영적으로 자라고 번성할 것을 암시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한편, 이는 많은 후손들이 번성할 것에 관하여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케 합니다(창15장).
이스라엘 민족들이 2천 년 동안 나라 없이 떠돌아다니는 유랑 민족이었지만
그들은 절대로 여호와에 대한 신앙을 잊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이 밀라노 대주교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명해 보이라고 하자
대주교는 유대 민족이 아직까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유대 민족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이것이 유대인의 쉐마 교육입니다.
※이사야서 등 구약 예언서에는, 종말에 <이스라엘의 회복>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1차적으로 <영적 이스라엘의 회복/오늘날의 신약성도의 회복>을 뜻합니다.
그리고 2차적으로 <육적 이스라엘도 회복>될 것입니다.
4절의 말씀처럼 유대 민족은
다시 일어나 세계 경제와 정치 문화를 손에 쥐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비록 예수를 모르고 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식적으로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그들의 장점을)
우리가 배워야 할 것입니다.
<셋째, 증거자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5절)
▲5절, 한 사람은 이르기를 나는 여호와께 속하였다 할 것이며
또 한 사람은 야곱의 이름으로 자기를 부를 것이며
또 다른 사람은 자기가 여호와께 속하였음을 그의 손으로 기록하고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존귀히 여김을 받으리라.
5절에, 그 주체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 주체를 단순히 바벨론 포로로부터 귀환한 이스라엘로 볼 수도 있으나, (2차적)
문맥이 새 생명으로의 소생, 성령 등을 말하고 있음을 고려할 때
성령 부음을 통하여, 영적 야곱의 후손에 합류될,
이방인까지도 포함하는 영적 이스라엘, 곧 교회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1차적 의미)
<넷째,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다는 사실을 듣고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6-8절)
▲6절,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7절, 내가 영원한 백성을 세운 이후로 나처럼 외치며 알리며, 나에게 설명할 자가 누구냐
있거든 될 일과 장차 올 일을 그들에게 알릴지어다.
‘될 일과 장차 올 일’
미래사를 강조하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이 미래사를 알고 계시는 이유는
그가 역사의 주관자로서 역사의 진행 과정 전체를 계획하고 진전시키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만이 참신이심이 입증되고 있습니다.
▲8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겁내지 말라.
내가 예로부터 너희에게 듣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알리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나의 증인이라. 나 외에 신이 있겠느냐
과연 반석은 없나니 다른 신이 있음을 내가 알지 못하노라
‘들리지 아니하였느냐,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모세를 비롯한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께 관한 계시가 전달되었던 사실과
그 계시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이루어졌던 사실을 회상시키는 말입니다.
그 회상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유일한 참신이심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2. 하나님 이외의 우상은 무익한 것이다
그러니 우상을 만들지도 말고 섬기지 말라. 사44:9~20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우상을 섬기고, 만드는 것입니다.
십계명 중에서도 첫째와 둘째가, 다른 신을 섬기지도 말고, 만들지도 말라.. 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상을 만드는 자들이 누구냐?”> 고 묻고 계십니다. (9~11절)
이 물음은 우상이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9절,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도다 그들이 원하는 것들은 무익한 것이거늘
그것들의 증인들은 보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니 그러므로 수치를 당하리라
▲10절, 신상을 만들며 무익한 우상을 부어 만든 자가 누구냐
우상을 만든 자에 대한 책망이기 이전에, 우상 제작 자체가 하나의 아이러니임을 비꼽니다.
우상은 외형적으로는 인간이 섬기는 대상이지만, 실제적으로 인간에 의해 조작된 것입니다.
그 조작물에게 인간의 생사화복을 맡긴다는 자체가 아이러니입니다.
▲11절, 보라 그와 같은 무리들이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그 대장장이들은 사람일 뿐이라
그들이 다 모여 서서 두려워하며 함께 수치를 당할 것이니라.
‘그 장색들은 사람이라...수치를 당할 것이니라.’
곧 장색(장인)을 비롯하여 보석 세공인, 금속 세공인, 철공, 목공 등
우상 제조에 관여했던 모든 자들이 큰 수치와 두려움 가운데, 심판당할 것을 나타냅니다.
그들이 만든 신이, 그들을 도울 수 없는 것은,
그 신 자체가 연약한 인간의 소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우상이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우상은 이미 신이 아니라
한낱 사람의 종속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우상을 신으로 섬기고, 그것을 향해 복과 구원을 기대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지하고 어리석은 짓입니까?
<우상이 제조되는 과정을 밝힘으로써 그 허망함을 강조>합니다. (12~17절)
▲12절, 철공은 철로 연장을 만들고 숯불로 일하며 망치를 가지고 그것을 만들며
그의 힘센 팔로 그 일을 하나 배가 고프면 기운이 없고 물을 마시지 아니하면 피로하니라
인간들에 의해 만들어진 물건은, 결코 초자연적인 힘을 낼 수 없다는 것을
명확히 지적하기 위하여.. 쇠로 만드는 우상의 제작 과정이 자세히 설명되고 있습니다.
▲13절, 목공은 줄을 늘여 재고 붓으로 긋고 대패로 밀고 곡선자로 그어
사람의 아름다움을 따라 사람의 모양을 만들어 집에 두게 하며
그 재질이 나무인 우상의 제작 공정이 묘사됩니다.
우상 숭배자는 그런 나무를 가지고, 인간의 형상을 만들고, 그것을 신전에 안치하여
신으로 섬깁니다. 새겨진 우상 형태는 여러 가지가 있겠는데,
그 피조물 중 하나님의 형상에 가장 가까운 형상인 인간 형상에 대한 숭배는
나름대로 가장 세련된 형태라 하겠습니다.
▲14절, 그는 자기를 위하여 백향목을 베며 디르사 나무와 상수리나무를 취하며
숲의 나무들 가운데에서 자기를 위하여 한 나무를 정하며
나무를 심고 비를 맞고 자라게도 하느니라
디르사 나무는 성경에서 이곳에서만 나옵니다.
아마도 이 용어는 ‘단단하다’, ‘굳다’ 등을 뜻하는 ‘타라즈’에서 온 것 같습니다.
본 절에서는, 이 나무를 포함한 팔레스틴의 대표적 나무들이
인간이 마음대로 베거나 심고 자라게 한다는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그 같은 운명의 나무로 만든 우상의 무가치성을.. 간접 강조하고 있습니다.
▲15절, 이 나무는 사람이 땔감을 삼는 것이거늘 그가 그것을 가지고
자기 몸을 덥게도 하고 불을 피워 떡을 굽기도 하고
신상을 만들어 경배하며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리기도 하는구나
본절과 다음절은 인간에게 있어서 나무란 근본적으로 화목(火木),
곧 땔감 정도의 의미밖에 지니지 못하다는 것을 실감나게 강조합니다.
그런 나무로 인간은 자신의 생사화복을 좌우할 것으로 믿는 우상을 만듭니다.
▲16절, 그 중의 절반은 불에 사르고, 그 절반으로는 고기를 구워 먹고 배불리며
또 몸을 덥게 하여 이르기를 아하 따뜻하다 ‘내가 불을 보았구나’ 하면서
‘내가 불을 보았구나’
불기운의 위력을 느꼈다는 말로서, 쉽게 풀면 ‘야, 불기운이 대단한데’입니다.
▲17절, 그 나머지로 신상 곧 자기의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그것에게 기도하여 이르기를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하는도다.
두 종류의 장인들이 나옵니다.
즉 철공과 목공에 의해서 우상이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철공이 우상을 만들 때 철을 숯불에 불리고 메치는 과정 속에서
피곤하여 지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처럼 연약한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우상이야 말로
얼마나 무기력한 존재인가를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목공에 의해 만들어진 우상도, 목공이 사용하는 연장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어떤 나무를 선택해서 우상을 만들 때도 나무 중 일부는 땔감으로도 사용되고,
떡 굽는 일에 음식을 만드는 일이 사용되는데
우상을 만들고 남은 나무를 가지고 요리를 해서,
그 우상에게 바치며 복을 기원하는 모습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17
<인간이 무지한 자가 되면, 짐승보다도 더 무지하고 어리석은 자가 됩니다.> (18~20절)
▲18절,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함은 그들의 눈이 가려서 보지 못하며
그들의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자들이 동일한 재목을 가지고
이율배반적인 두 가지 용도에 동시에 사용하는 아이러니를 범하는 것은
한마디로 그들의 죄악과, 그로 말미암는 영적 무지 때문입니다.
우상 숭배자들은 무엇이 진리이고 거짓인지,
무엇이 실체이고 허상인지.. 전혀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렇게 우상은 신이 아니라고 말을 해주어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참 신이 되심을 분명하게 보여주었지만, 보지도 못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하나님만이 참 신이 되심을 성경 속에 그렇게 증거하고 있는데도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19절, 마음에 생각도 없고 지식도 없고 총명도 없으므로, 내가 그것의 절반을 불사르고
또한 그 숯불 위에서 떡도 굽고 고기도 구워 먹었거늘 내가 어찌 그 나머지로
가증한 물건을 만들겠으며 내가 어찌 그 나무 토막 앞에 굴복하리요 말하지 아니하니
우상숭배자의 마음에 생각도 없고, 지식도 없고, 총명도 없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짓인지 한번 쯤 생각해볼 수 있는데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없고, 총명도 사라진 그들은
우상을 만든 그 나무로 불을 피우고, 떡도 고기도 구워먹으면서도
가증스러운 우상을 만든 것에 대해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20절, 그는 재를 먹고 허탄한 마음에 미혹되어 자기의 영혼을 구원하지 못하며
나의 오른손에 거짓 것이 있지 아니하냐 하지도 못하느니라.
‘재를 먹고’
본 표현은 헛되고 무익한 것을 얻기 위하여, 애쓰는 자를 묘사할 때 사용되는데
(삼하13:19, 욥30:19, 겔28:18 참조),
비슷하게 ‘에브라임은 바람을 먹으며’(호12:1) 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허탄한 마음에 미혹되어서’
문자적인 뜻은, ‘미혹된 마음이 그를 오도하였다’입니다.
인간의 어리석은 행위는
근본적으로 그 마음이 정상적인 기능을 상실한 때문임을 보여줍니다.
롬1장은 이 부분의 주해라고 할 만큼, 예리한 설명을 담고 있습니다.
‘나의 오른손에 거짓 것이 있지 아니하냐’
여기 ‘오른손’은 인간이 힘으로 믿고 의지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주3)
미혹되었기 때문에 우상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게 한 배경에는, 악한 사탄의 미혹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상을 섬기게 한 것은, 인간의 영혼을 구원받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사탄의 계략이 있습니다.
‘나의 오른손에 거짓 것이 있지 아니하냐 하지도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사탄에게 미혹된 자는 자기 오른 손에 거짓 것이 있음에도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상 숭배자들의 마지막에 대해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골3:5-6)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만 우상이 아니라 탐심도 우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탐심은 육체를 통해서 들어온다는 사실도 깨닫기 바랍니다.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우상이 있다면 바로 ‘자신’일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곧 우상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우상에게서 멀리 떨어져 살아 갈 수 있는 길이
3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나 자신을 부인하고 나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것입니다.
둘째,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셋째, 말씀을 들으며 마음에 되새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우상은 없는지 살펴보고,
가증스러운 것들을, 내 집과 내 마음에서 쫓아내는 귀하고 복된 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만이 우리의 창조주시요 구속자이시다 사44:21~28
하나님의 택하심 받은 자들이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기억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기억하라고 하십니까? 3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내가 너를 지었고, 내가 너를 구속하였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21~22절)
▲21절,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 일을 기억하라 너는 내 종이니라 내가 너를 지었으니
너는 내 종이니라 이스라엘아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열국이 섬기는 우상의 실상을 말한 후
본절에서 선택된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위치를 재확인하심으로써
그들의 패역함을 끝내 바로잡으시는, 하나님의 일관된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22절,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 같이, 네 죄를 안개 같이 없이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회개 촉구는 현재형으로, 구속 사실은 완료형으로 되어 있는 원문은
구속이 회개 촉구에 선행함을 나타냅니다.
저자는 하나님께서 유일하신 하나님임을 강력히 변증한 후
(1~5절에서는 이스라엘의 영적 회생으로 연결시킨 반면),
여기서는 죄사함으로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이로 보아 이스라엘의 영적 회생과 그들의 죄사함은
불가분적 관련이 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자는 바벨론 포로라는 역사적 차원에 국한시키지 않고
죄사함, 영적 회생 이라는 차원을 견지하며 사53장까지 나아가고 있습니다.
본서가 말하고 있는 구속은
고레스의 구원을 통하여, 완전히 그리고 확연히 성취됩니다만
53장의 고난의 종과 그의 구속 사역이,
이사야서 저자의 진정한 관심사요 본질적 내용입니다.
2절에서 하신 말씀을 다시 재차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택한 자의 관계성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는 내 종이니라”.. 2번 거듭 강조되고 있습니다.
주인과 노예의 의미가 아니라, 주인과 종의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택한 자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사49:15~16)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택한 자의 죄와 허물이 빽빽한 구름 같을지라도, 안개처럼 사라지게 하여 주시고
구속하였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들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빽빽한 죄악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몸 찢고 온 몸의 물과 피를 다 흘리시고 죽으신 것을 절대로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벧전2:24-25)
어떤 험악하고 악한 죄를 지었더라도 예수께 나와 회개하면
주홍 같은 죄일지라도 눈처럼 희게 하여주실 것이며
진홍같이 붉은 죄일지라도 흰 양털처럼 희게 해주신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마십시다.
<둘째, 창조의 전능자 하나님을 절대로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23~27절)
우상과 대비되고 있습니다.
▲23절, 여호와께서 이 일을 행하셨으니 하늘아 노래할지어다.
땅의 깊은 곳들아 높이 부를지어다.
산들아 숲과 그 가운데의 모든 나무들아 소리내어 노래할지어다.
본절은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찬양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찬양이란 구속을 체험한 하나님의 백성의 감격의 표현입니다.
따라서 참구속의 의미를 깨달은 자만이 바른 찬양을 할 수 있습니다.
▲24절,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
‘홀로 하늘을 폈으며 땅을 베풀었고’
여기서는 역사의 시작과 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구속주가 될 뿐 아니라, 본절 이하에 나오는 놀라운 사역을 능히 이루실,
하나님의 전능하신 창조적 권능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 표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땅을 펼쳤고’
땅을 평평하게 펼쳤다는 뜻입니다.
이는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을 반영합니다.
▲25절, 헛된 말을 하는 자들의 징표를 폐하며 점 치는 자들을 미치게 하며
지혜로운 자들을 물리쳐 그들의 지식을 어리석게 하며
‘거짓말하는 자’란
‘쓸데없는 말을 하는 자’를 가리키는데,
여기에는 거짓 선지자를 비롯하여 점쟁이, 신접한 자등이 포함됩니다.
또한 ‘징조’는 표적, 이적 등을 뜻합니다.
당시 점쟁이나 신접한 자들은 그 배후에 있는 악령의 힘을 빌어
가시적인 이적들을 행하곤 했습니다.
▲26절, 그의 종의 말을 세워 주며 그의 사자들의 계획을 성취하게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거기에 사람이 살리라 하며
유다 성읍들에 대하여는 중건될 것이라 내가 그 황폐한 곳들을 복구시키리라 하며
여기 ‘종’은 단수형이지만, 집합적인 의미, 곧 복수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이는 평행구로 나온 ‘사자들’이 복수형인 사실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참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케 하신 말씀을, 이제 성취하신다는 것입니다.
▲27절, 깊음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마르라. 내가 네 강물들을 마르게 하리라 하며
-많은 학자들은, 본절을 바벨론 정복을 위해, 고레스가 유프라테스 강 지류들의
흐름을 바꿔 놓았던 사실에 대한 암시로 봅니다.
-다른 학자는, 이스라엘이 출애굽하던 당시 홍해가 갈라졌던 사건에 대한 암시로 봅니다.
-그런가 하면, 일반적인 의미의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언급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중 어느 것을 취하더라도, 하나님의 전능성, 유일한 능력의 구원자되신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 본 문맥과 합치합니다.
나를 구속하신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재차 강조하고 있습니다.
24절에서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조성하였다”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3절에서 ‘하나님이 택한 자를 구속하였을 때 모든 만상들이 찬양을 하였다’고 말씀합니다.
한 영혼을 천하보다도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영혼이 하나님의 것으로 구속되었을 때
하나님의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택함 받은 자들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나를 택하신 그분은 창조주이시고 거짓말 하는 자들과 점치는 자들은 폐하시고
스스로 자신의 지식으로 지혜롭다고 하는 자들을 어리석은 자로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그분은 자신이 한 말은,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멸망 받았지만 사람이 살리라 하면 사람이 살게 될 것이고
성읍들이 중건되리라 하면 중건될 것이고,
강물들도 마르라 하면 마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후에 바사 고레스 왕을 통하여 다 이루어질 것을
미리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주관하시고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 하나님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시고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라는 사실을
날마다 내 마음 속에 되새기고 내 자신에게 “쉐마” 하면서 살아가는 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셋째,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이방의 왕까지 세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8절)
▲28절,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내 목자라 그가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네 기초가 놓여지리라 하는 자니라
‘나의 목자’
이스라엘을 인도한 모세에게도 이 호칭이 붙여진 바 있습니다(시 77:20).
본절에서 이 호칭이 고레스에게 부여된 것은,
그가 포로 귀환을 위해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았기 때문입니다.
고레스에게 맡겨진 임무는 포로 귀환 까지만이며,
그 후의 온전한 구속은, 앞으로 임할 종의 사역, 곧 메시야의 사역에 의해 완수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8세기 말과 7세기 초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이사야 당시에는 앗수르가 지배하고 있던 시대였고, 바벨론도 약소 국가였고,
더구나 바사는 더 약소국가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약 150년 후 주전 6세기 중반에 태어날 고레스라는 인물까지 알고 계셨고,
고레스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바벨론에서 해방시키고
예루살렘 성전을 중건할 것을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이 말씀 그대로 앗수르는 바벨론에게 멸망하고
바벨론은 바사 제국에 멸망하고 고레스 원년에
이스라엘은 70년 포로 생활을 끝내고, 가나안에 돌아와 성전을 중건하였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택함 받은 자들은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섭리 속에서 살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인생은 나 혼자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살아가는 인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각자에게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섭리와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길은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말씀에 순종하며 성령의 다스림을 받을 때 나의 가는 길이 선명하게 보일 것입니다.
세상 역사를 주관하시고 택한 자의 삶을 주관하고 계신
전능자 하나님이심을 진실로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귀하고 복된 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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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쉐마” 는 히브리어인데 “들으라”는 의미입니다.
오늘날 아브라함 때부터 4,200년 동안 전해지고 있는 유대인의 쉐마 교육이
21세기 교육의 패러다임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저력이 어디서 나오느냐는 것이 오늘날 세계 교육계의 관심입니다.
그것은 유대인의 쉐마 교육에서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쉐마 교육이 무엇인가요? 아브라함 때부터 4,000년 동안 전해지고 있는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 유대인의 쉐마 교육입니다.
지금도 유대인 사회는 세대 차이가 없다고 합니다.
그들은 지금도 회당에서 예배를 드릴 때, 어린 아이와 어른들이 함께 예배를 드립니다.
그들이 세대 차이를 느끼지 않으며 살 수 있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 말씀을 가정에서부터 들으며 살아왔기 때문에
전혀 다른 느낌을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의 쉐마 교육입니다.
본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쉐마”(들으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44:1
하나님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2천 년 교회 역사를 돌아볼 때, 하나님 말씀을 수 없이 전했고, 사람들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쉐마 교육은, 회당 에서 가르치고 듣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 말씀을 가정 에서도 가르칩니다.
귀가 아프도록 마음에 새기도록 하나님 말씀을 들려줍니다.
학교 교육보다도 하나님을 알아가기에 그들은 최선을 다합니다.
이것이 유대인의 숨은 저력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의 쉐마 교육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하나님 말씀이 많이 들려지고 있습니까? 말씀의 홍수 시대입니다.
그러나 들을 때뿐입니다. 듣고 일어서면 잊어버립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이 사라진지 오래되었습니다.
가정에서도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 시간 하나님 말씀을 잘 듣고 깨달아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되새기면서 살아가는 귀하고 복된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2) 여수룬
‘이스라엘을 보라’는 뜻. 이스라엘에 대한 詩명, 또는 별명.
모세가 이스라엘 총회에 읽어 드린 노래와 축복중에 있는 명칭인데
이스라엘의 대명사로 사용되었습니다. (신32:15, 33:5,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