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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을 기억하고, 다시 생각하라 :8 이사야46:장 출처1, 출처2
66장으로 된 이사야를 3등분 하면, 1~35장, 36~39장, 40~66장입니다.
셋째 부분(40~66장)을 또 3등분을 하면
그 첫째 부분이 40~48장입니다.
이 아홉 장에는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때로부터 약 100~160년 후에 있을,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세분하여 보면
40~42장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게 될 것을 예언하고,
43~45장은 고레스를 통해서 조국으로 돌아오게 될 것을,
46~48장은 바벨론의 멸망과 더불어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될 것을 말씀합니다.
◑1. 바벨론의 우상 사46:1~7
바벨론 제국이 멸망받기 전에,
바벨론의 우상이 먼저 멸망 받는다는 사실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바벨론의 우상들은, 무능하고 허망한 것들이므로 바벨론을 지켜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1절, 벨은 엎드러졌고 느보는 구부러졌도다.
그들의 우상들은 짐승과 가축에게 실리웠으니
너희가 떠메고 다니던 그것은, 피곤한 짐승의 무거운 짐이 되었도다.
'벨은 엎드러졌고 느보는 구부러졌도다'
고대의 전쟁은 전부 신들의 대리전이었습니다.
앞으로 자기들이 바벨론에서 풀려날 것은
먼저 그들의 신들이 꺾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엎드러지다’는 ‘머리를 숙이다’와 ‘무릎을 꿇다’입니다.
‘구부러지다’는 ‘몸을 숙이다’입니다.
이 두 단어는 전쟁에서 포로가 되어서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과
(여호와) 신에게 경배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대표적인 우상은 “벨” 과 “느보” 였는데
“벨”은 가나안 명칭으로 “바알”에 해당되는데, “주 Lord”라는 뜻처럼
바벨론에서 “주된 신”으로 숭배되었습니다.
“느보”는 “벨”의 아들로서 학문, 천문학의 신으로 숭배되었습니다.
많은 우상들 중 “벨”과 “느보”의 지위가 두드러진 것처럼
바벨론의 많은 왕들이 이 우상들의 이름을 따서
“느부갓네살, 느부사라단, 나보폴라살, 나보니두스” 라고 짓기도 하였습니다.
바벨론은 고대 시대에 찬란한 문화와 문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이 곧 문학의 신인 “느보” 에게서 오는 축복이라고 믿었습니다.
▲2절, 그들(바벨론 우상)은 구부러졌고, 그들은 일제히 엎드러졌으므로
그 짐(우상)을 구하여 내지 못하고, 자기도 잡혀 갔느니라
1절에는 각각 단수로 말했다면, 이제는 복수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벨과 느보뿐만 아니라 바빌론의 모든 신들이 구부러지고 엎드러짐을 의미합니다.
‘그 짐을 구하여 내지 못하고’
바벨론이 망하자, 이 우상들도 어디론가 치워지는데,
그 수레에 태워져 끌려가는 짐더미 속에서 스스로 탈출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냥 목석이나 고철에 불과하니까요.
바벨론의 우상들은 자신을 숭배한 자들을 돕기는커녕
가축의 무거운 짐이 되어, 어디론가 끌려가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상이 무엇입니까? 짝 우(偶), 형상 상(像) 이라고 하는데
즉 어떤 형상을 내 짝으로 삼고, 그것을 섬긴다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우상이라고 해서 꼭 사람의 손으로 만든 형상만이 우상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 그 어떤 형상일지라도 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곧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 우상화
돈이 그런 우상이 될 수 있고, 자식이 우상이 될 수 있고
더욱 무서운 것은 내 자신이 우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십계명 중에서 첫째와 둘째는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신5:7~10)
<첫째, 너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3절, 야곱 집이여, 이스라엘 집의 남은 모든 자여, 나를 들을지어다.
배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품기운 너희여
1~2절에서는 벨과 느보와 같은 우상은
자기 백성들을 건져 올리지 못하는 무기력함에 대해서 증거했다면,
3~4절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짐을 대신 져주심에 대해서 대조합니다.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품기운 너희여’
본절에서 죄의 짐을 지고 죄를 사하는 분으로 계시된 하나님은,
그 섬기는 자에게 도리어 짐이 된, 이방의 신과 대조를 이룹니다.
우상은 무거운 짐이지만, 하나님은 짐을 대신 지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40장서부터 계속해서 창조에 대한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너희의 시작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를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은 우연히 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또한 택하신 것도 결코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님을 깊이 깨닫기 바랍니다.
다윗은 이러한 비밀을 깨닫고 “신묘막측” 하다고 하였습니다.
(시139:14)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둘째, 너를 끝까지 보살피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4절)
▲4절,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하나님은 동일한 자상함, 애정, 보살핌을 계속 유지하실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 예언은 혈통적 유대인뿐만 아니라
미래 세대의 영적 이스라엘 곧 교회에 포함될 성도 모두들까지도 연관됩니다.
노년이 될 때까지, 백발이 될 때까지 안아주시고 품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죽을 때까지 변함없이 지키시고, 보호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보호”도.. “창조”처럼, 계속해서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그대로 방치해 두신 하나님이 아니셨습니다.
우리 또한 택하시고 그냥 방치해두지 않으십니다.
'보호'라고 해서, 좋게만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은 때로는 회초리로 때로는 몽둥이로 치시는 분이십니다.
조경사는 나무 가지를 칠 때 나무의 모양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서
가차 없이 가지들을 잘라버립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그렇게 보호하면서, 조성해 가시는 분이심을 깨닫기 바랍니다.
우상의 거짓 신들은 죽은 신들이기 때문에,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보호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시기 때문에, 택한 자들을 이모저모로 보호해 가시는 분이십니다.
<셋째, 하나님을 우상과 절대 비교하지 말라고 강조하십니다.> (5~8절)
▲5절, 너희가 나를 누구에 비기며,
누구와 짝하며 누구와 비교하여 서로 같다 하겠느냐
‘너희가 나를 누구에 비기며’
본절의 의도는 하나님과 대조가 되는 우상 숭배의 어리석음,
우상 신뢰의 헛됨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사야서가 흔히 강조하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 같은 주장의 근거는, 바벨론의 우상들은 그 도성을 보호하지 못할뿐더러
그 자신도 돌아보지 못한다는 사실에 두고 있습니다. (1, 2절).
그렇다면 그것들을 의존하는 일은 얼마나 헛된 일인가요!
그리고 그 무력하고 허망한 우상들과 살아계시고
진실하신 하나님을 비교하는 일은 또한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요!
▲6절, 사람들이 주머니에서 금을 쏟아 내며 은을 저울에 달아 장색에게 주고
그것으로 신을 만들게 하고 그것에게 엎드려 경배하고
‘금을 쏟아 내며’
우상 숭배자들은 천하고 무가치한 신상을 만들기 위하여 아낌없이
금전을 낭비한다는 것입니다.
우상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계획과 수고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인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금과 은을 저울에 달아 장색(장인)에게 갖다 주는 이유는
우상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장색은 돈을 받고
고객이 요구하는 대로 크기와 모양을 정해 우상을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의 형태는 순전히 장색과 고객 사이에 이루어지는 흥정에 의해
결정되는 셈입니다. 이것이 우상의 본질입니다.
▲7절, 그것을 들어 어깨에 메어다가 그의 처소에 두면 그것이 서서 있고
거기서 능히 움직이지 못하며 그에게 부르짖어도 능히 응답지 못하며
고난에서 구하여 내지도 못하느니라.
‘그것을 들어 어깨에 메어다가’
우상 숭배자들은 고용한 대장장이가 제작한 우상을
그들의 어깨에 메어 신전 혹은 그것을 고정시켜 둘 자리로 옮겨갑니다.
이 같은 묘사의 목적은 의심할 나위 없이
인간의 어깨에 메여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신에게 복종을 표하는 일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어리석은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의 처소에 두면’
본절의 궁극적인 목적은 여호와와 대조시키는 것입니다.
즉 여호와께서는 피조물이 아니므로 영원하시며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반면,
인간에 의해 만들어져 그 처소를 따라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우상은
누가 옮기기 전까지는, 전혀 움직일 수도 없이 한 곳에 머물러 있으며
그를 예배하는 자들을 구하거나 그들의 소원을 들을 능력이 전혀 없음을 나타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우상은 어깨에 들려서, 자신들의 정한 위치에 세워놓고 경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상 앞에 아무리 복을 빌고 도움을 요청하고 구원을 원해도
우상은 제 자리에 선채로 움직이지를 못합니다.
7절 끝에 말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에게 부르짖어도 능히 응답지 못하며 고난에서 구하여 내지도 못하느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상은 본질상 돌이나 나무나 금속에 불과한 것이므로
스스로의 힘으로는 한 치도 움직일 수 없는 것입니다.
돌이나 나무나 금속은 사람에 의해 다른 데로 옮겨지지 않는 한
그대로 제자리에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을 의지하고 숭배하는 일처럼 우매하고 무지하고
어리석은 행동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그 어떤 우상도 우리 가정에서 내 마음 속에서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오직 예수 외에 그 어떤 것이라도 더 사랑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곧 우상이고 내가 그것을 우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무서운 실수를 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한 예로 돈은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돈이 나를 우상으로 만들어 달라고 한 적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 돈을 우상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나를 우상으로 섬겨달라고 하는 자식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자식을 우상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일부 지도자들이, 언제 성도들에게 우상처럼 섬겨달라고 한 적 없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그 지도자를,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고 섬긴다면
성도들이 그 지도자를 우상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죽자, 그의 시체도 감추어 버렸고 묘도 알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신34:5-6)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6) 벧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 묘를 아는 자 없으니라”
이러한 모세의 시체를, 사탄은 이용하기 위하여, 천사장 미가엘과 싸웠다고 하였습니다.
(유1:9)“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왜 사탄이 모세의 시체를 탐내었을까요? 모세를 우상화 시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타락케 하려고 하였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것도 조심하여야 하지만, 혹시라도 내가 우상이 되고 있지는 않는지
깊이 깨닫는 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의 영원한 왕은 하나님이시며 오직 예수이심을
다시 한 번 깊이 깨닫는 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2. 이 일을 기억하고 다시 생각하라. 사46:8~11
<첫째, 나 외에 다른 이는 없다>는 것을 기억하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8절, 너희 패역한 자들아, 이 일을 기억하고 장부가 되라. 이 일을 다시 생각하라
‘장부가 되라’
‘남자처럼 행동하라’는 의미입니다.
비슷한 표현으로 고전16: 13에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고 했는데.
‘장부가 되라. 남자처럼 행동하라’는 것은
문맥상 어리석고 무가치한 우상 숭배 행위를 과감하게 청산하는 것을 뜻합니다.
▲9절,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옛적 일을 기억하라’
과거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그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시고 또 그 예언된 바를 성취하셨던 일들을 가리킵니다.
그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과거 역사를 돌이켜 보고서
하나님이 그 행하신 일들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는 분이심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이 같이 과거의 일을 기억하라고 하시는 까닭은
오직 하나님만이 참신이심을 상기케 하기 위함입니다.
<둘째, 미래를 계획하고 계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10절)
▲10절,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처음부터 고하며” “옛적부터 보이며” 라는 말씀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해서 이 말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주어진 말씀을 그대로
이루어 가신다는 말씀입니다.
(마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6명의 선지자들에게 주어진 말씀 중에서 마지막 때에 되어 질 일들을 빼놓고
이루어지지 않는 말씀이 하나도 없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때에 되어 질 말씀도 분명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말씀 중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아브라함에게 너희 자손들이 400년 동안 이방의 객이 되어
노예로 살 것을 말씀 한 대로 이루어졌고
그 후에는 많은 재물을 가지고 나올 것이라는 말씀처럼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400년 동안 종살이 하다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이사야서를 지금 우리가 45장까지 보았지만
애굽이 멸망하고 앗수르가 멸망하고 바벨론이 멸망 할 것이라는 말씀대로
모두 다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창3:15절에서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져서
예수께서 사탄의 머리를 깨뜨리시는 말씀도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고난을, 이사야는 53장에서 아주 정확하고 분명하게 예언하셨는데
예수님은 그렇게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면서, 사탄의 머리를 깨뜨리셨습니다.
이제 성경은 장차 오실 재림 예수 그리스도를
수 없이 예언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에 <초림 예수>가 360번 기록되고 있다면
<재림 예수>는 무려 5배인 1560번을 예언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원수 마귀 사탄은 과거에 붙잡혀 살게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미래에 대한 부푼 꿈과 비전을 주시는 분이심을 깨닫기 바랍니다.
개인적인 큰 비전도 가져야겠지만, 무엇보다도 다시 오실 예수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이 될 때
종말을 계획하고 계신 하나님과 같은, 비전과 소망을 갖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계획은 구체적>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11절)
▲11절, 내가 동방에서 독수리를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모략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정녕 이룰 것이요 경영하였은즉 정녕 행하리라”
‘독수리’
여기서는 호전적인 왕, 움직임의 신속성, 황폐를 낳는 강한 세력 등에 대한 상징입니다.
성경에서 전쟁을 좋아하는 왕을 독수리에 비교하고 있는 예는 많으며(렘49:22, 겔17:3),
아마도 본 문맥에서는 고레스가 큰 힘과 용맹성으로 열방들에게 나타날 것과
마치 맹금과 같이 갑자기 그들을 덮칠 것을 암시하기 위하여, 본 용어가 사용된 듯합니다.
실제로 고레스의 군대는, 긴 창에 황금빛 찬란한 독수리 형상을 새겨 넣었습니다.
‘나의 모략을 이룰 사람’
본 절에서는 고레스가, 단지 하나님의 계획을 수행하기 위하여
부름 받은 사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강조할 목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고레스를 통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반드시 이루실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내가 말하였은즉’이라는 강조사가 동원되고 있습니다
“동방의 독수리” “나의 모략을 이룰 사람”은, 바사의 고레스 왕입니다.
44장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바벨론 제국은 바사 왕 고레스에 의해 멸망될 것이고
그 결과로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70년 포로생활에서 벗어나 해방될 것입니다.
이러한 계획을 하나님은 이미 이사야 시대에
즉 약 150년 후에 일어날 일들을 구체적으로 사람의 이름까지 말씀하시면서
계획하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정녕 이룰 것이요” “정녕 행하리라”
세상 사람들 일에는 항상 변수가 많습니다.
이러한 변수가 많으면 계획하던 일들이 취소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일에는 변수가 없습니다. 취소되는 법이 없습니다.
(민23:19)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마지막 때에 세상을 심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계획도
계시록을 보면, 너무나도 구체적으로 기록되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 때나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획하심 속에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택한 자들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종말에 이루실 하나님의 계획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은 이 세상을 불 심판으로 멸하시고 완전히 사라지게 하실 것입니다.
(벧후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그러나 하나님은, 택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사43:1~2)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이 놀랍고 방대한 계획을 기억하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마지막 때가
창세 이래로 찾아볼 수 없는 대환난의 날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레스를 보내서
자유와 해방의 기쁨을 주신 것을 기억하고 생각하라고 하신 것처럼
오늘날 예수를 믿는 자들도, 진정한 자유와 기쁨의 날을 기억하고 생각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 날은 반드시 속히 올 것입니다.
계시록에 기록된 예언들은 상징적인 사건이 아니라
반드시 마지막 때에 속히 이루어질 일들임을 깨닫기 바랍니다.
계시록에는 “장차 속히 될 일” 이라는 말씀이 8번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장차”입니다. 반드시 이 땅에 현실적으로 일어날 마지막 재앙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이 구체적인 계획으로 그들을 보호하시고 지켜주실 것입니다.
우리들이 해야 할 것은 그 날을 잊지 말고 생각하며
깨어서 기도하며 준비하고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벧전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마25장에 미련한 다섯 처녀처럼 “믿습니다”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되고,
성령 충만으로 준비하고 말씀으로, 기도로 준비하는 지혜로운 다섯 처녀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3.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사46:12~13
▲12절, 마음이 완악하여 의에서 멀리 떠난 너희여 나를 들으라
‘나를 들으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우매한 결과, 죄를 짓고 포로로 잡혀 갔지만
포로의 징벌 속에서도 징벌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관심의 집중을 요구하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선택받은 이스라엘 민족들은 하나님의 크신 기적과 은혜와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은 늘 하나님을 떠나 있었습니다.
율법을 통한 하나님의 가르침,
선지자들을 통해서 주어진 경고와, 때로는 가혹한 징계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깨닫게 하였지만, 그들의 죄와 악은 여전하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내 모습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왜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들이 이런 모습을 버리지 못할까요?
본문에서 두 가지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입니다. ↑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완악한 마음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난 존재입니다.
이 완악한 마음을 바꾸어야만 하는데 그것이 도를 닦는 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많은 지식을 갖는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으로 거듭나서 오직 예수의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13절, 내가 나의 의를 가깝게 할 것인즉 상거가 멀지 아니하니,
나의 구원이 지체치 아니할 것이라
내가 나의 영광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을 시온에 베풀리라.
하나님께서는 한 인물을 들어서, 자신의 계획을 실천하실 터인데
그 인물이 행할 일의 내용을
본절은 ‘나의 의’, ‘나의 구원’, ‘나의 영광’ 등의 용어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개역 성경을 볼 경우 ‘나의 의’와 ‘나의 구원’만이 평행구로 사용된 것처럼 여겨지나,
원문 성경을 보면 ‘나의 영광’과 ‘나의 구원’도 평행구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항은,
‘나의 구원’과 ‘나의 의’가 갖는 관계입니다.
<구원을 가져다주는 의>에 대하여, 가장 잘 언급하고 있는 곳은 롬3:21이하입니다.
로마서는 하나님 자신의 의로우심과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는 칭의적 의를 동시에 설명합니다.
이같이 로마서와 연관성 속에서 살필 때,
본절의 의는, 인간에게 전가되는 <구원의 의>뿐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는 <하나님 자신의 의>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죄인을 의롭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의를 손상하지 않는 것은
오직 한 가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는 구속에 근거할 때만 가능합니다.
<동방에서 일으킬 한 인물>과
지금까지 논한 하나님의 구원(및 영광)을 낳을 <하나님의 의>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11절에서 살펴보았듯이, 동방의 인물은 역사적 인물인 고레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고레스를, 그 궁극적 인물의 예표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지 몽매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고레스를 통해, 포로 귀환의 장도(長途)에 오르게 하실 뿐 아니라
보다 궁극적으로는 고레스로 예표된 그리스도를 보내실 것을,
본절은 멀리서 조망하고 있습니다.
◑적용
본문의 해석에 주력했습니다.
본문 내용을 파악하신 후, 적용 및 설교는 따로 만드셔야 합니다.
.......................................
주1) 설교문 서론에 나오는 한시
桐千年老恒藏曲 동천년노항장곡
(오동나무는 천년이 되어도 항상 곡조를 간직하고)
梅一生寒不賣香 매일생한불매향
(매화는 일생동안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月到千虧餘本質 월도천휴여본질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그 본질이 남아 있고)
柳經百別又新枝 유경백별우신지
(버드나무는 100번을 꺾여도 새 가지가 올라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