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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47장 회개치 않는 자에게 임할 심판

LNCK 2021. 10. 28. 15:40

 

◈회개치 않는 자에게 임할 심판        이사야 47:장               출처 

 

 

앞서 살펴본 이사야 46장은 바벨론 종교의 멸망을 예언하였습니다.

바벨론 신인 ‘벨’과 ‘느보’가 엎드러져서

아무런 구원의 능력도 베풀지 못할 것이라는 메시지입니다.

이어서 오늘 본문인 이사야 47장에는 바벨론에 임할 무서운 심판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사야서를 계속 강해하면서 한 가지 이상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왜 이사야 선지자는 그 당시 강대국이었던 앗수르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을 하지 않고,

앗수르에서 해방되기를 원했던 작은 나라인 바벨론에 관해서

많은 예언을 했을까 하는 점입니다.

 

실제로 유다 왕국을 위협하던 나라는 앗수르였지 바벨론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는 유다가 바벨론의 포로가 될 것이고,

후에 포로에서 해방될 것이라는 사실을 출애굽 사건보다 더 큰 사건으로 생각할 만큼

예언의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왜 이사야 선지자는 바벨론에 관해 그와 같이 예언한 것일까요?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으로 바벨론에 관해 다루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바벨론이란 이름이 260번이나 등장합니다.

 

예루살렘 다음으로 중요한 도성이 바벨론입니다.

예루살렘은 시온성, 혹은 다윗성이라고 불리는 하나님의 도성입니다.

 

이에 반해 바벨론은 하나님께 대적하는 마귀의 도성, 불순종과 불신앙의 도성을 상징합니다.

바로 예루살렘이 하나님 나라의 상징인 반면에, 바벨론이 마귀 왕국의 상징이기 때문에

이사야 선지자가 이를 중요하게 다루는 것입니다.

 

▲바벨론은 지리적으로 보면 오늘날 이라크의 수도인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80km 떨어진 유프라테스 강변에 세워진 나라입니다.

 

한때 이라크의 대통령이었던 사담 후세인은 스스로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화신이라고 일컬으며 고대 바벨론 도성을 재건하려고 애썼지만,

결국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여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오늘날까지도 계속해서 그 이름이 언급될 정도로 유명한 바벨론 도성이

성경 전체에서 차지하는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1. 바벨론에 대한 성경의 증거

 

바벨론이라는 이름은 창세기 10~11장을 통해 처음으로 성경에 등장합니다.

대홍수 사건 이후에 살아남은 노아에게는 셈과 함과 야벳이라는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세 아들 중에서 아비의 수치를 가리지 않고 소문을 냈던 함은

노아에게 저주를 받았습니다.

 

함에게는 아들 구스가 있었고, 구스는 니므롯을 낳았습니다.

다시 말해 니므롯은 함의 손자입니다.

니므롯이라는 이름에는 ‘반역자’, 또는 ‘반항자’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영걸이요, 특이한 사냥꾼이라고 일컬어졌습니다.

한 번 사냥을 나서기만 하면 큰 짐승 몇 마리 정도는 그냥 잡아오는

특출한 사냥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한 도시를 만들었습니다.

이 도시의 이름이 ‘바벨’입니다. ‘바벨’은 ‘혼란’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니므롯이 세운 바벨에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반역했습니다.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 11:4).

 

이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기 위해서

계획했던 탑이 바로 유명한 바벨탑입니다.

 

그러나 이 시도는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그 때부터 인류의 언어를 혼란하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까 건축이 진행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도 외국에 많이 나가보셨겠지만, 외국 사람들과는 서로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서로 바라보면서 웃기만 했던 기억들이 있을 것입니다.

 

제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한 친구는 자신의 가방에 큰 글자로

‘한자와 중국어와 독일어와 영어를 본국으로 추방하자’고 써서 다니기도 했습니다.

아마 언어공부가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이와 같은 언어혼란이 시작된 곳이 바로 바벨입니다.

이 바벨은 그 도성의 창시자인 니므롯의 이름처럼 하나님께 반역하는

정치적인 도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반역은 정치적인 영역에서만 그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바벨론의 전설을 살펴보면

니므롯에게는 ‘세미라미스’라는 아내가 있었습니다.

 

니므롯이 전쟁에서 죽자,

세미라미스는 자기 남편과 같은 아들을 낳기 위해 창녀 노릇을 했습니다.

결국 세미라미스는 담무스라는 아들을 낳았고,

그녀는 담무스가 자신의 남편인 니므롯이 다시 아이로 태어났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신처럼 섬김을 받았습니다.

에스겔서에 보면 유다의 여인들이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하더라는 구절도

등장할 정도입니다. (겔 8:14)

 

바벨론 종교에서는 니므롯과 세미라미스와 그 아들인 담무스를

바벨론의 종교의 삼위일체로 인정합니다.

니므롯과 세미라미스와 담무스가 바벨론 이방 종교의 기원이 되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바벨론의 모든 종교 시스템이 발전되었습니다.

 

그런데 A.D 313년에 로마의 황제였던 콘스탄틴이 밀라노 칙령을 발표했습니다.

이는 로마제국이 핍박하던 기독교를 이제부터 합법적 종교로 인정하겠다는 칙령입니다.

그래서 바벨론 사제들은 기독교로 귀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치 스님이 승복을 벗고 머리를 기른 후에 목사가 된 것처럼,

바벨론 종교의 모든 신전들에 십자가가 걸리게 되었고,

바벨론 종교는 약간의 여과를 거친 후에 기독교와 융합되었습니다.

 

세미라미스가 죽지 않고 하늘에 승천했다는 교리를 따라서

성모 마리아 ‘몽소승천’의 교리가 나오게 되었고,

각종 성화와 성상을 걸어놓고

바벨론 신의 이름들을 기독교식으로 바꿔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같은 모든 행습들은 성경이 아닌 바벨론 종교에 그 기원을 둡니다.

이처럼 바벨론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정치세력으로서만이 아니라

종교와 문화세력으로 그 지경을 넓혔습니다.

 

창세기에서 바벨탑이 무너져 버린 이후에 한동안 사라졌던

바벨론의 이름이 다시 등장한 곳이 바로 이사야 39장입니다.

 

이사야 39장은 히스기야 왕이 죽을병에 걸렸다가 살아난 기적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 당시 신생국가 작은 나라였던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은

히스기야에게 사신을 보내서, 왕이 어떻게 죽을병에서 살아나게 되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히스기야 왕은 우쭐한 마음에 궁중의 보물과 무기고를 모두 열어서

바벨론의 사신에게 자랑하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와 같은 왕의 망령된 행동을 책망했습니다.

“왕이 보여준 모든 보물과 무기는 바벨론으로 옮겨질 것입니다.

왕의 자손들은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서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될 것입니다.”

 

결국 이사야의 예언대로 유다 왕국은 주전 587년 바벨론 느부갓네살에 의해 멸망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사로잡혔습니다.

 

여기서 바벨론의 역할은,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유다를 징계하는 회초리요, 막대기였죠.

 

그러나 바벨론은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고, 교만에 빠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맡기신 책임과 권세를 남용하자,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여

바벨론의 종교와 국가가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한 것입니다. (사 46~47장)

 

바벨론의 이름이 또 다시 등장한 곳은 신약성경 요한계시록 17~18장입니다.

요한계시록 18장은 정치적인 악의 근원지로서 바벨론을 묘사합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 반역하는 악의 세력으로 등장한 바벨론은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서 비참한 결말을 맞이합니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계14: 8).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계 18:2).

바벨론의 결말은 다섯 글자입니다. “무너졌도다!”

 

 

◑2. 이사야가 본 바벨론의 죄악

 

이사야 선지자가 본 바벨론의 죄악은 무엇일까요?

이사야 47:장 1~4절에는 바벨론의 멸망에 대한 예언이 확실하게 기록되었습니다.

“처녀 딸 바벨론이여 내려 티끌에 앉으라 딸 갈대아여 보좌가 없어졌으니 땅에 앉으라

네가 다시는 곱고 아리땁다 칭함을 받지 못할 것임이니라”(1).

 

왕의 처녀 딸인 공주는 보좌에 앉아 있었지만,

나라가 망하게 되는 순간에 보좌에서 내려와 땅의 티끌 위에 앉게 되고,

화장도 하지 못하여 곱고 아리땁다는 칭찬도 받지 못할 비참한 신세가 될 것입니다.

 

또한 이사야 47:장 5절에는 “딸 갈대아여 잠잠히 앉으라 흑암으로 들어가라

네가 다시는 열국의 주모라 칭함을 받지 못하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바벨론은 갈대아라고도 불리는데, 왜냐면 그들이 쓰는 언어가 갈대아어이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은 ‘열국의 주모’, 즉 ‘열방들의 여왕(the queen of the nations)’이라고 불렸지만,

그만 부끄러운 존재가 되어 흑암으로 들어가야 하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바벨론이 이와 같은 결말을 맞이한 이유는 네 가지 죄악 때문입니다.

 

첫째로 바벨론이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고 학대했기 때문입니다.

“전에 내가 내 백성을 노함으로 내 기업을 욕되게 하여 그들을 네 손에 붙였거늘

네가 그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고 늙은이에게 네 멍에를 심히 무겁게 메우며 말하기를

내가 영영히 주모가 되리라 하고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지도 아니하며

그 종말도 생각지 아니하였도다”(사 47:6).

 

바벨론은 공주병에 걸려서 “나는 영원히 여왕으로 남을 것

(I will continue forever--the eternal queen!)”이라고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은 결국 멸망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징계하던 도구로 사용됐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를 남용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학대했기 때문입니다.

 

권세는 남용하면 안 됩니다. 요한계시록 17:장 6절에도

“땅의 음녀와 가증한 것들의 어미인 큰 바벨론이 성도들과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했다”

고 기록되었습니다.

 

바벨론은 예수의 증인들을 죽이고 교회를 핍박하며 피를 흘렸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고 교회를 핍박한 것이 바벨론의 첫 번째 죄악입니다.

 

둘째로 바벨론은 하나님을 대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

나는 과부로 지내지도 아니하며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도 모르리라 하는 자여

너는 이제 들을찌어다

한날에 홀연히 자녀를 잃으며 과부가 되는 이 두 일이 네게 임할 것이라”(8).

 

이 바벨론은 사치하는 공주처럼, 거울 앞에 앉아 화장을 하면서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고 큰소리쳤습니다. 공주병의 극치입니다.

그리고 나는 과부가 되는 일도 없고 내 자녀를 잃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향해 “너는 한 날에 과부가 될 뿐만 아니라

네 자녀도 잃을 것이라”고 엄중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라고 말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인간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물질적으로 번영하고 정치적으로 안정된 바벨론은 교만해져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을 서슴지 않고 말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태도입니다. 바벨론의 죄악은 이중적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까지 대적한 이중 죄악이 바벨론의 근본 죄악입니다.

 

셋째로 바벨론은 마귀적이고 미신적인 갖가지 행습의 근원이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9절 후반부를 보면

“네가 무수한 사술과 많은 진언을 베풀찌라도 이 일이 온전히 네게 임하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또한 12-13절에도 “이제 너는 젊어서부터 힘쓰던 진언과 많은 사술을 가지고 서서

시험하여 보라 혹시 유익을 얻을 수 있을는지, 혹시 원수를 이길 수 있을는지,

네가 많은 모략을 인하여 피곤케 되었도다

하늘을 살피는 자와 별을 보는 자와 월삭에 예고하는 자들로 일어나

네게 임할 그 일에서 너를 구원케 하여 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바벨론은 온갖 미신의 근원지입니다. 요즘에도 많이 유행하는 점성술,

하늘의 별을 보고 운명을 점치는 점성술이 발전된 곳이 바로 바벨론입니다.

 

우리 한국에는 점성술이 없을까요? 신문에 매일 연재되는 ‘띠로 보는 오늘의 운세’

같은 것들이 바로 점성술입니다. 여러분은 오늘의 운세 같은 것들은 쳐다보지도 마십시오.

어떻게 띠 하나로 사람의 운명을 점칠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은 운세들은 모두 이방종교에서 기원되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사람의 운명을 예언한다는 점쟁이나 예언자들을 보면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미래를 잘 알면 어느 곳이 땅 값이 오르는지,

어느 곳의 아파트 시세가 오르는지를 예언해서 투자하면 금방 부자가 될 수 있을텐데

왜 거지처럼 복채나 얻어먹고 사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얼마나 모순입니까?

 

점쟁이들은 미래를 아는 존재가 왜 거지처럼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대학에 다닐 때,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한 안 모 씨가

한국일보에 심령과학 칼럼을 연재했습니다.

 

그 때는 제가 예수님을 믿기 전인데, 제가 거기에 얼마나 심취했는지

고시 공부하는 학생들을 불러 모아놓고 심령과학을 이야기해주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 번은 안 모 씨가 살고 있는 삼청동의 집에도 찾아간 적도 있습니다.

 

그 사람의 집에는 큰 드럼통이 있었는데,

거기에 물을 담고 주문을 외우면 온갖 병이 낫는 물로 변한다는

소문이 떠돌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유명했던지 그 물을 얻기 위해 제주도에 사는 사람들까지 찾아올 정도였습니다.

저도 그 물을 얻어서 마셔봤는데 병이 낫기는커녕 귀신만 더 들어온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쓸데없는 관상이나 손금을 보겠다고 쫓아다니지 마십시오.

잠깐은 신기할지 몰라도 그런 것에는 악령들이 임하기 때문에 아무런 유익도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재앙과 파멸을 초래할 뿐입니다.

 

바벨론은 이런 거짓된 악령의 종교, 신비종교의 근원지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네 번째로 바벨론은 무신론적인 불신앙 사상을 가졌습니다.

10~11절을 보면 “네가 네 악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나를 보는 자가 없다 하나니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니라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으므로 재앙이 네게 임하리라”

 

‘나를 보는 자가 없다’는 말은 하나님에 대한 실질적인 부정입니다.

나를 판단할 자도, 심판할 자도 없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태도를 무신론적 불신앙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무신론적 불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인간이 하늘의 달과 별을 만들었습니까? 태양의 온도를 조절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걸어 다니는 이 땅을 인간이 만들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땅을 걸어 다니면서

어떻게 무신론자라고 자칭할 수 있습니까?

 

성경은 이들을 향해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고 말씀합니다(시 53:1).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무신론자들은 어리석은 바보들입니다.

 

 

◑3.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본문 14절에는 “보라 그들은 초개 같아서 불에 타리니

그 불꽃의 세력에서 스스로 구원치 못할 것이라 이 불은 더웁게 할 숯불이 아니요

그 앞에 앉을 만한 불도 아니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바벨론을 심판하는 불은 몸을 덥히는 숯불이나 그 앞에 앉아 있을만한 원적외선

사우나 불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유명한 스펄전 목사님은 본문 14절을 본문으로 설교를 했는데,

이 설교를 통해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는 세 가지 형태로 심판이 임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면서도 회개하지 않는 자들은

초개가 불에 타는 것처럼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초개는 지푸라기입니다.

지푸라기는 조그만 성냥불만 대도 금방 불이 붙어서 타버리고 재도 남지 않습니다.

 

세상 권세와 물질과 지식을 자랑하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은

불타버린 초개의 신세가 될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분들은 겁을 준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이것은 제 말이 아닙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둘째로 이 불 심판에는 무서운 고통이 동반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물과 불로 사람을 심판하십니다. 그런데 노아 시대에 이미 물로 심판하시고

무지개를 하늘에 주셔서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남은 것은 불 심판 뿐입니다.

 

이 불 심판은 물 심판보다 훨씬 무섭습니다.

사람이 물에 빠져 죽으면 형체라도 남아서 누군지 알아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불에 타 죽은 사람은 육안으로 식별할 수도 없습니다.

 

제가 대전에서 불에 타서 사망한 분의 심방을 가 본 적이 있는데

그 시신이 누구인지 도저히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비참했습니다.

 

불에 타 죽는 심판은 가장 무서운 심판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회개치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 불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셋째로 지옥에는 조금의 위로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농담처럼 “나는 천국에 안 갈거야. 천국에는 친구도 없고 부모님도 안 계시거든.

내가 지옥에 가야 우리 부모님과 친구들을 만날 수 있으니까

나는 지옥에 가고 천국에 가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천만에 말씀입니다. 지옥에 가보세요. 친구들이 저주할 것입니다.

“하필이면 너하고 고등학교 동창이 되는 바람에

술 먹고 방탕하게 지내다가 이곳까지 왔구나!”

 

단골 술집 주인들도 저주할 것입니다.

“저 인간이 우리 가게에 와서 술을 팔아주는 바람에

내가 계속 그 짓을 하다가 여기 와서 망하게 되었구나!”

 

함께 사업하는 친구들도 저주할 것입니다. “내가 당신과 같이 사업하느라고

교회도 안 나오다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소. 모두 당신 때문이오!”

 

가족도, 친구도, 애인도, 그 누구도 위로가 될 수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그 곳은 하나님께서 외면하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마치는 말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명령은 분명합니다.

“바벨론 가운데서 도망하여 나와서 각기 생명을 구원하고(Flee from Babylon! Run for your lives!)

그의 죄악으로 인하여 끊침을 보지 말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보수의 때니 그에게 보복하시리라”(렘 51:6).

 

우리는 바벨론에서 도망쳐 나와야합니다.

도망치되 슬슬 걸어서 나오지 말고 뛰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실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뛰어나와야 합니다.

뒤도 돌아보면 안 됩니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고, 이방 종교의 술수, 진언, 미신에 빠져 있으며,

무신론의 마수에 걸린 사람은 심판 받을 바벨론 시민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아직 구원의 소망은 있습니다.

우리가 숨 쉬고 살아가는 동안에는 구원의 소망이 있습니다.

아직은 야곱이 보았던 천국의 사닥다리가 우리 앞에 놓여있고,

사도 바울 또한 고린도후서 6:장 2절을 통해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선포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직은 입술로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기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통해 ‘내가 바벨론 도성의 시민이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오늘 회개하여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

바벨론 성에서 시온 성으로 속히 옮겨 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피영민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