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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예루살렘 이사야62장 10.11.28.설교스크랩 출처2
※계21:9~10에서 '새 예루살렘'을,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말합니다.
본문 사62:4에서 예루살렘을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이어지는 5절에도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즉, 본문 사62장은, 예루살렘을 '신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62장을, 계21장과 연관지어, '새 예루살렘'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습니다.
'새 예루살렘'이란, 새 이름을 가진, 새롭게 회복된 예루살렘입니다.
본문 사62장에서 ‘(새) 예루살렘’을 ‘회복된 성도’로 설명합니다.
그들은 새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2
본문에 '새 예루살렘'이란 말은 없지만,
'새 이름'에 근거해서 '새 예루살렘'으로 제목을 잡아봅니다.
계시록 21~22장의 ‘새 예루살렘’도 같은 맥락(신부, 성도)에서 설명되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장차 주님의 재림 때,
주님이 이루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새 예루살렘’이란 도성과
이중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1. 교회는 새 이름으로 불린다 사62:1~5
자식은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는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효도란 무엇을 해드리는 것보다
부모님에게 기쁨을 드리면 진정한 효도인 것처럼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면서 제일 근본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쁨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마음은 원해도, 육신이 따라가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우리의 부족함을
메시야이신 예수를 통해서 이루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1절, 나는 시온의 공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나는...잠잠하지 아니하며’
본절의 화자(話者)를 누구로 보느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구구합니다.
먼저는 저자인 이사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 경우 본절이 의미하는 바는,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그 영광이 온 땅에 드러나기까지
이사야는 그의 수고와 중보 기도를 중단하지 않겠다는 것이 됩니다.
한편 하나님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 경우 본절은 구속사역을 성취하기까지는
그의 백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각오가 됩니다. (둘 다 됩니다.)
이외에도 유대인, 신약교회 성도 등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1차, 2차, 3차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1차적으로 하나님(예수님)이라고 해도,
우리 각자가 주님을 내 마음에 모셨으니,
우리는 주님과 똑같은 사명을 수행하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본장의 전반적 흐름을 고려할 때, 본 화자는
1차적으로 이사야 선지자를,
더 나아가서는 위대한 중보자이신 메시야를 가리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영적 회복을 맛볼 때까지
그 백성과 하나님을 향한 그의 중보 사역을 중단하지 않겠다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특히 하나님을 향해 중보 기도를 드린다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침묵 및 그의 백성의 불평이 전제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즉, 오랜 포로생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원이 시행되지 않자
백성들은 불평을 하고, 그 불평을 들은 이사야가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는 대목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경우를 사64:12, 시28:1 등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사57:11, 65:6등에서는 오랜 침묵을 깨고
응답을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
‘구원이 횃불같이 나타나도록’
앞의 ‘공의가 빛같이’의 동의적 평행구입니다.
‘횃불’, ‘빛’ 따위는 그 특징이 그 주위를 향해 빛을 발산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이제 이스라엘에게 비롯된 구원이
마치 아침태양이 가까운 언덕, 들, 그리고 더 높은 산을 향해 그 빛을 펼쳐 나가듯이
온 세상을 향해 그 영향력을 펼쳐 나갈 것을 의미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습니다.
저자는 나타날 구원이 이스라엘뿐 아니라,
온 열방에도 미칠 것을 암시하는 셈입니다.
1절에 나오는 “나는”은, 곧 메시야이신 예수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시온에 공의를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같이” 는
같은 의미의 말씀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즉 예수님은, 예루살렘(즉, 성도들)의 구원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고 쉬지도 아니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예루살렘은 교회(성도)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온 몸의 물과 피를 흘리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성령으로 이 땅에 오신 후
오늘날 지금까지 예수의 영은 잠시도 쉬지 아니하시고 잠잠치 아니하시고
교회를 통해서 구원의 횃불을 밝히고 계십니다.
그러한 일들을 누구를 통해 이루고 계십니까?
‘그리스도인’이라는 새 이름을 받은 자들을 통해
지금도 예수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일을 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결국 성령님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
▲2절, 열방이 네 공의를, 열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
‘새 이름’은 종말론적 의미를 지닌 용어입니다.
성경은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한 후 그곳에서 살게 될 자들을 언급할 때
바로 이 호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계2:17, 3:12).
여기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이 회복된 상황을 표현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현재, 수치와 가난, 압제의 상황 속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나 메시야의 시대가 도래하면
번영과 영광으로 삶의 상황이 바뀌게 될 것인데
바로 그와 같은 상황을, 새 이름을 얻을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열방이 네 공의를, 열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온 세상이 새 이름을 가진 자들에게서, 공의와 영광을 볼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영광이 무엇이라고 지난 시간(61장)에 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롬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새 이름'을 받은 자들이라면
오직 예수의 의를, 예수의 영광을 세상에 비추어야 할 것입니다.
<오직 예수의 의를 나타내고, 예수의 영광을 세상에 비추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약속을 살펴보십시다.>
첫째는 하나님으로부터 상급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3절)
▲3절,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면류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면류관’
원문직역은 ‘여호와의 손안에 있는 영광의 면류관’입니다.
본문은 해석하기 힘든 구절로 알려졌는데
그 이유는 면류관이란 머리에 쓰는 것이 상식인데
여기서는 그 면류관이 손안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면류관’을 축제 혹은 결혼식 따위 때에 손에 들고 행진하던 화환,
꽃다발 등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절은 면류관 자체보다, 하나님 손안에 있다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음을 가리킵니다(신 33:3).
그리고 후 문맥은, 하나님이 다시는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고
보호하실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 구절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게 될 이스라엘을 강조하는 구절로 봅니다.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면류관과 왕관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61:3절에서도 면류관을 약속하신 하나님은 거듭해서
반드시 예수를 위해 산 자들에게 상급이 있다는 사실을
면류관과 왕관으로 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이러한 상급에 대한 약속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고난 속에서도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계2:10)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딤후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이 땅에 모든 것은 세상 끝 날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들입니다.
여러분! 세상 것에 마음 너무 뺏기지 말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는 헵시바와 뿔라라 칭함을 받을 것입니다. (4절)
▲4절,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쀼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바가 될 것임이라
‘헵시바’(헤프치 바)
문자적인 뜻은 ‘나의 기쁨은 그녀 안에 있다’입니다.
말하자면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루살렘이 그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은, 자신의 무엇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총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한편 히스기야 왕의 아내가 ‘헵시바’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사실에(왕하21:1) 착안하여,
히스기야 왕은 메시야의 모형으로 언급되기도 합니다(32:1 참조).
‘뿔라’(베울라)
문자적인 뜻은 ‘결혼한 자, 결혼한 부인’입니다.
그러나 이 용어는 결혼했다가 이혼 당한,
말하자면 버림을 받은 여인에게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여기서는 한번 버림을 받았으나, 다시 용서함 받은 이스라엘의 신분을 암시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근동에서는 한 왕이 다른 왕으로부터 왕권, 곧 통치권을 받았으면
그는 그 왕국과 혼인 관계에 들어갔다고 흔히 말합니다.
또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그의 교회를 신부로 비유하곤 합니다. (요3:29, 계21, 2, 9).
저자는 다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지 않을 이스라엘의 운명을
바로 이 결혼 이미지를 통해 묘사하고 있습니다.
“헵시바”는 “나의 기쁨이 그녀에게 있다” 라는 의미이고
“뿔라”는 “결혼한 여자” 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새 이름을 가진 자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기쁨이 될 것이고
또한 그들은 예수님의 신부의 자격을 갖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여러분 마음 속에 이러한 하나님의 기쁨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이러한 기쁨을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로 인해 구원받은 자는 이러한 구원의 기쁨이 충만하여야 합니다.
예수의 피 값으로 내가 구원받았다면, 이 놀라운 기쁨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요15:11)
이 기쁨을 가지고 있는 자는 신랑 예수를 기다리며
신부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 약속이 이루어지는 날이 언제 입니까?
예수께서 재림하신 후에 어린 양 혼인 잔치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수님 재림은 계시록 19장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였습니다. 19:9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이 놀라운 기쁨의 자리에 반드시
함께하는 복을 받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셋째로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는 것입니다.(5절)
▲5절,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같이’
한번 버림을 받은 여인과 같은 이스라엘과 재결합하는 이미지가 소개되는 문맥에서
본 비유는 좀 낯설게 느껴집니다.
일반적으로 청년이 과부나 한번 결혼했던 여인과 결혼하는 경우는 쉽지 않습니다.
물론 왕실이 또 다른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을 때에는
그 정략적인 목적 때문에 그 같은 경우가 흔히 생기기는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한번 버림을 받았던 이스라엘과 재결합하는 사실을
청년과 처녀의 재결합 이미지로 묘사하는 저변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완전히 사하셨다는 뜻을 보이십니다.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취하겠고’의 히브리어 ‘바알’이 ‘결혼한다’는 뜻 외에
‘다스리다’, ‘관할하다’(26:13)는 뜻도 있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네 자녀들이 네게 거하겠고’로 해석합니다. (사해사본, 벌게이트역, 70인역, 탈굼역)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결국 그 기쁨이 우리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그 기쁨을 인간의 최대의 기쁨인 결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2. 새 예루살렘이여, 쉬지 말고 기도하라. 사62:6~9
▲6절,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숫군을 세우고,
그들로 종일종야에 잠잠치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파수꾼을 세우고’
‘파수꾼’이란 대적의 침입을 살피거나 소식을 가지고 오는 전령을 확인하기 위하여
성벽 망대를 지키던 자입니다(52:7, 8).
여기서는 그 백성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임무를 맡았던 자들을 가리킵니다(겔3:17, 33:7).
‘잠잠치 않게 하였느니라’
이것은 시간을 알리기 위해, 그리고 자신들이 임무에 충실하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동방의 파수꾼들이 망대를 순회할 때마다 큰소리를 지르던 관습을 연상케 합니다.
여기서는 백성을 가르칠 책임이 있는 자들,
특히 종교 지도자들이, 그들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다는 뜻을 나타냅니다.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문자적인 뜻은 ‘여호와를 기억하게 만드는 자들’입니다.
고대 동방국가의 왕들에게, 마치 오늘날의 의전비서관 처럼
‘기억나게 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이 기억나게 하는 자는 왕이 백성들에게 약속한 것을 기록해 놓습니다.
예를 들어 왕이 백성들에게 가서 '민원을 들어주겠다' 라고 약속하면
'기억나게 하는 자'(remembrancer)가 그걸 기록해 둡니다.
그리고 나중에 왕에게, 그 기록을 다시 생각나도록 자꾸 되풀이해주는 것입니다.
왕이 약속한 것을 기록해 놓았다가 “폐하, 오늘 이 약속을 지키셔야 하는 날입니다”라며
왕에게 그 약속을 깨우쳐 실현하게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새 이름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필수적으로 해야 할 것은 기도입니다.
예루살렘 성벽에 파수꾼을 세우고 그들을 밤이 새도록 지키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파수꾼은 선지자들을 의미하는데
선지자들을 통해 영적인 파수꾼 역할을 감당하도록 하였다는 것입니다.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라는 말씀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신다는 것입니다.
▲7절,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이것은 1차적으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포로로부터 돌아와
이전의 특권을 회복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그 완전한 성취는 주의 재림 때에야 되어진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본 예언은 영적 예루살렘인 신약 교회에도 적용됩니다.
신약 시대 성도들 중 지도적 위치에 있는 자들은
교회가 우주적인 존경과 기쁨의 대상이 될 재림의 날을 준비하며,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이 그랬듯이 끊임없이 인내하며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눅18:1, 7참조)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 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쉬지 못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도 새 이름을 받은 자들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 는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닙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어둠의 악한 영들과 싸움인데
어떻게 기도하지 아니하고 이길 수 있겠습니까?
(엡6:11-12)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고 하였는데
오늘날 바쁜 세상 속에서 기도하는 생활은 점점 작아지고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때에는 더욱 정신 차리고 기도하라고 하였는데 (벧전4:7)
우리는 기도 생활을 소홀히 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이 보기 힘들고 곳곳에서
교회의 타락과 성도들의 타락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주의 종들이 기도로 파수꾼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고
성도들이 기도로 무장하지 아니했기 때문에
악한 사탄의 공격을 방어하지 못하고 무너지고 있는 것입니다.
(막9:29)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이사야 59장에서 “왜 기도가 응답되지 않습니까?” 라는 설교할 때
기도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기억나십니까?
여러분! 기도는 우리가 악한 영들과 싸울 수 있는 무기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시는데
어떻게 악한 영들이 우리를 괴롭힐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기도할 때
먼저 철저히 나의 죄를 회개하고 기도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59:1)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그리고 형식과 외식된 신앙을 버리고 온전히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 무슨 기도든지 응답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마21: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반대로 죄를 회개하지 아니한 기도는 응답을 받을 수 없을 것이고,
형식과 외식된 신앙을 버리지 아니하고 하는 기도도
응답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8~9절에는 올바른 기도에 대한 응답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어떤 약속입니까? “하나님의 오른손 능력의 팔” 이 의미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 아래 풍요와 안정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8절, 여호와께서 그 오른손, 그 능력의 팔로 맹세하시되
내가 다시는 네 곡식을 네 원수들에게 식물로 주지 아니하겠고
너의 수고하여 얻은 포도주를 이방인으로 마시지 않게 할 것인즉
‘여호와께서...그 능력의 팔로 맹세하시되’
고대에는 맹세의 방법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는데
하늘을 행해 손을 드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었습니다. (신32:40)
하나님은 그 맹세를 드릴 상대가 없는 분이므로
하나님의 맹세의 경우 그 자신에게 드려졌습니다. (45:23)
여기서 하나님은 그의 오른손을 들고 맹세하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특히 여기서의 오른손은, 그의 백성을 이방의 압제에서 구원하실 권능을 나타냅니다.
이제 그의 강력한 오른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후
하나님은 결코 그 백성을 이방에게 다시 넘겨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네 곡식을...식물로 주지 아니하겠고’
여기 곡식은 문자적으로 ‘옥수수’, ‘곡물’을 뜻합니다.
오늘날 옥수수는 동물의 먹이로 많이 사용되지만,
당시 팔레스틴에서의 옥수수란 중요한 식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님은 단지 옥수수뿐 아니라, 이스라엘이 취하던 모든 양식이
앞으로는 결코 이방의 손에 들어가지 않으리라고 약속하고 계신 셈입니다.
그러나 이 약속 후에도 이방은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그들의 양식을 탈취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 약속은 종말론적 성격을 띤 약속으로, 2중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제 주의 재림 이후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룩될 때
그 백성은 결코 사단의 위험이나 공격으로 인해 탈취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9절, 오직 추수한 자가 그것을 먹고 나 여호와를 찬송할 것이요
거둔 자가 그것을 나의 성소 뜰에서 마시리라 하셨느니라
‘추수한 자가 그것을 먹고’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수고한 것을 즐기게 된다는 말씀인데,
이 같은 결과는 안전의 상태가 조성되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자신의 수고한 것을 먹는다는 것만큼
안정 속에서 누리는 자유와 번영을 강력히 암시하는 표현도 드뭅니다.
‘나의 성소 뜰에서 마시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규례를 따라 성전에서 먹고 마시곤 하였는데 (레6:16, 신12:17, 18, 14:23)
그때 그들이 보여 준 가장 큰 특징은 기쁨이었습니다.
그들로 기쁨을 느끼게 한 것은, 그 모든 축복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자각이었습니다.
본 구절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모든 축복의 결과가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인식하고, 기쁨으로 낙을 누리게 될 것을 암시합니다.
기도가 응답되어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할 것인지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찬송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성소에 거하며 살으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성전이 중심이 되는 삶을 살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도 응답을 받은 자들이 이런 삶을 살고 있습니까?
물론 작으나마 살아가는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 반대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3. 새 예루살렘이여, 앞으로 나아가라 사62:10~12
새 이름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나아가라고 하는지 5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성문으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10절, 성문으로 나아가라. 나아가라.
백성의 길을 예비하라 대로를 수축하고 수축하라. 돌을 제하라 만민을 위하여 기를 들라
이사야와 종교 지도자들이 중보기도한 내용은
1차적으로 바벨론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포로 귀환이었습니다.
이제 그 귀환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성취될 것인데
그 성취를 묘사하고 있는 곳이 바로 본절입니다.
‘기를 들라’
이것은 한 군대가 행진을 재개할 때를 연상케 합니다.
행진 중 어느 곳에 쉬다가 충분한 휴식 후 행진을 재개할 경우
깃발은 높이 쳐들어서 행렬을 재정비하라는 신호를 내곤 합니다.
그와 유사하게 오랜 포로 생활로 이곳 저곳에 흩어졌던 이스라엘은
정한 지도자를 앞세우고 전열을 정비하듯 한데 모여 본국으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이 성문은 예루살렘 성문을 의미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문으로 나아가라는 외침 이후에
대로를 수축하고 돌을 제거하라는 명령이 있는 것으로 보아
바벨론의 성문을 가리키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바벨론 성문은 세상의 성문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사61장에서 주 여호와의 신이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새 이름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갇힌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 것에 붙잡혀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세상 것에 미혹 받으며 살아서는 안 됩니다.
이제 담대하게 십자가 예수 앞으로 나와서 그리스도인답게 당당하게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요16:33)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둘째로 백성의 길을 예비하라는 것입니다. (10절)
그리스도인들은 나만 구원받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 나처럼 예수를 모르고 영생의 구원을 모르고 살아가는 자들을 위해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수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우리가 예수를 전하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10:14)
이 땅에 구원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셋째로 대로를 수축하라는 것입니다. (10절 ↑)
복음을 전하였으면 이제 그들이 진리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잘 다듬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였으면
이제 예수에 대해서 알아가야 할 것입니다.
(엡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구원받은 것으로 만족하여서는 안 됩니다. 예수로 구원받은 자는 이제 더욱
예수에 대해 알아가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도록 하여야 합니다.
넷째로 돌을 제하라고 하였습니다. (10절 ↑)
대로를 수축하는 것이 예수를 지식적으로 알아가는 것이라면
돌을 제하는 것은 영적으로 예수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를 영접한 그들의 심령 속에 있는 장애물들을 제거하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
(막16:17-18)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말씀으로, 기도로.. 그들의 돌밭 같은 심령을 갈아서 옥토로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다섯째로 만민을 위하여 기를 들라고 하였습니다. (10절 ↑)
결론적으로 우리를 택하신 것은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막16:15)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이러한 다섯 가지에 순종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약속이 다시 주어지고 있습니다.
▲11절,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반포하시되 너희는 딸 시온에게 이르라
보라 네 구원이 임하느니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 하셨느니라.
‘네 구원이 임하느니라’
여기 ‘구원’은 1차적으로 바벨론 포로로부터의 귀환을 뜻합니다.
그러나 문맥적으로 그리고 보다 먼 조망에서 볼 때는 메시야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유력한 역본들은 본 ‘구원’을 ‘구세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70인역, 벌게이트역).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
여기 ‘그’란 바로 메시야를 가리키며
‘상급이 그에게 있고’란 구원이 그 손안에 있다는 것을 뜻하는데
이것은 메시야께서 구속 사역을 완수하실 것을 암시합니다.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
여기에서 보응은 나쁜 의미가 아니라 상급에 대해 반드시 주실 것이라는 강조로 봅니다.
(딤후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여러분! 지금 있는 자리에서 더 앞으로 나아가는 귀하고 복된 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12절, 사람들이 너를 일컬어 거룩한 백성이라, 여호와의 구속하신 자라 하겠고
또 너를 일컬어 찾은바 된 자요 버리지 아니한 성읍이라 하리라.
4절에 이어 다시 한번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
반복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 같은 결과는 메시야의 구속 사역에 근거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여기 ‘여호와의 구속 하신 자’란 ‘대속적 피에 의해 그 죄를 씻음 받고
죽음에서 해방된 자'란 뜻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 이름만큼 아름다운 이름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그리스도인 이라는 새 이름을 받은 자들에게
하나님은 다시 한 번 너희들이 어떤 자인지 강조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너를 일컬어 거룩한 백성이라, 여호와의 구속하신 자라 하겠고
또 너를 일컬어 찾은바 된 자요 버리지 아니한 성읍이라 하리라” :12
여러분!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으로부터만 새 이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도 “거룩한 백성이라” 칭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만이 하나님께 구속된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만이 하나님이 지금도 찾고 계시고,
그런 자는 절대로 버리지 아니한 사람이 아니라 성읍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거룩함을 이루는 거대한 성읍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거룩함은 우리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안에서 예수로 충만할 때 거룩한 의가 충만하게 되어갈 것입니다.
(롬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새 이름을 받은 그리스도인 여러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나를 통해 더욱 빛나고 횃불같이 타오르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