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삼상30장 1~10 다윗의 절망과 용기

LNCK 2021. 11. 2. 12:07

[여호수아 청년부예배] 130929 다윗의 절망과 용기 (삼상 30:1~10) - 이상준 목사 - YouTube

 

◈다윗의 절망과 용기         삼상30:1~10           2013.09.29.  출처

아 드디어 다윗의 생애 9번째 시간입니다. 

삼상30:1~3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사흘 만에 시글락에 이른 때에 
아말렉 사람들이 이미 네겝과 시글락을 침노하였는데 그들이 시글락을 쳐서 불사르고
거기에 있는 젊거나 늙은 여인들은 한 사람도 죽이지 아니하고 다 사로잡아 끌고 자기 길을 갔더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성읍에 이르러 본즉 성읍이 불탔고 자기들의 아내와 자녀들이 사로잡혔는지라'

◑본문의 배경

다윗은 광야를 전전하며 사울의 추격을 가까스로 피하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되며, 하나님과 관계가 더욱 깊어졌습니다만
간혹 낙심이 되는 때도 찾아왔습니다.

삼상27:1절에 보면, 다윗이 잠시 이런 생각을 합니다.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붙잡히리니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좋으리로다

이 시점은, 다윗이 이미 사울을 죽일 수 있는 두 번의 결정적 찬스가 있었지만
사울을 죽이지 않고 무사히 풀어주었습니다.

그러고나서도 자기 혼자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도망치는 것이다. 
그러면 사울이 이스라엘 땅 안에서 나를 찾기를 그만둘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나는 그의 손에서 해방될 것이다..' 

여러분, 다윗이 원한 게 뭐예요? 자유였어요. 
이스라엘 땅에 있으면 자유가 없으니까요. 

그런데 27:1절에서 본 것처럼 기도하고 결정한 것이 아니었어요. 
두려움 가운데 결정한 것이었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결정한 것이었어요. 

다윗은 가드 왕 아기스에게 가서 보호를 받으며 
그로부터 시글락 성을 배정 받았어요. 

물론 거의 10년 방황 세월에 종지부를 찍은 사건입니다. 
1년 4개월 동안 다윗 일행은 시글락에서 정말 편안한 세월을 보냈어요. 

블레셋 지경이기 때문에, 사울이 밀고 들어올 수 없는 땅이었거든요. 
그러나 아기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무리한 군사행동을 하는 것이 
삼상27장, 28, 29장에 이어지면서 나옵니다. 

특별히 남방에 아말렉을 쳐서,
아말렉은 네게브와 시내광야와 아라비아 반도를 돌아다니면서 약탈을 일삼는 민족인데요, 

이 아말렉은 돌아다니는 유목민 족속이기 때문에 
특별히 흔적이 남지 않았어요. 
그래서 다윗은 이들을 대상으로 공격해서, 
거기서 얻은 전리품을 아기스에게 줘서 그의 환심을 샀어요. 

그리고 뭐라고 말하냐면 '내가 (아말렉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과 가서 싸웠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아기스 입장에서는 
'야~ 다윗이 이제 이스라엘과는 완전히 등을 돌렸구나. 
내가 밑에 데리고 있어도 믿을 수 있겠다.' 이런 생각을 가지도록 만든 거죠. 

어떻게 보면 다윗 입장에서 굉장히 정치적 수완을 발휘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29장에서 다윗이 결정적인 위기를 맞이하게 되죠. 
그 위기는 무엇이냐면, 블레셋 다섯 도시 연합군이 작심하고 
사울의 이스라엘과 일전을 벌이려고 출전하게 되는데요.  
   
근데 다윗이 지금 블레셋 아기스 왕의 수하에 있기 때문에 
그 전쟁에 참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만약에 이 전쟁에 다윗이 참전하게 되면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는커녕, 이스라엘로 돌아갈 수 없어요. 
그는 배신자가 됩니다. 그래서 자기 민족의 등에 칼을 꽂은 사람이 되버립니다.

만약 아기스의 수하의 장군으로,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참전하게 되면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너가게 되는 것이죠. 

그렇다고 참전을 하지 않으면,  
그동안 아기스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그 속내가 다 들통이 나게 되어 있어요.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블레셋의 다른 장수들이 
'다윗을 데려가면 우리가 안심이 안 됩니다. 
갑자기 돌아서서 우리에게 칼을 들이대면 어떡할 겁니까?'
그래서 다윗을 참전 시키지 못하게 합니다. 

다윗 입장에선 사실 쾌재를 부를만한 상황이 된 것이죠. 
지금 자신은 망명자이기 때문에 국적이 불분명한 것이에요. 

그래서 다윗이 아기스의 군대에서 슬그머니 빠지게 된 것입니다.
다윗과 그의 군사들은 아벡에서 시글락까지 80킬로 되는 길을,
3일 동안 내려와 주둔지였던 시글락에 도착했어요. 
그게 오늘 본문 삼상30장 1절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요. 시내 광야에 거주하며 약탈을 일삼는
아말렉 족속이 시글락을 침노해서 완전히 불태워 버렸어요. 
다윗과 그의 군사들이 시글락을 비운 사이에, 아말렉이 쳐들어 온 것이지요.

그리고 나서 모든 가족들은 다 포로로 사로잡아 갔습니다. 
근데 훔쳐가기만 한 것이 아니라, 집도 다 불태워 버렸어요. 

이때 다윗과 그 군사들이 얼마나 그 충격을 크게 받았는지요...
본문을 묵상하다가, 이런 메시지들이 떠올랐습니다.

◑1. 아닌 길을 계속 가면 올 것이 온다. 

'아닌데 아닌데 아닌데..' 그러면서 계속 가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당신이 아닌 길을 계속 가면, 올 것이 오게 되어 있어요. 

사실 그동안 너무나 조용했죠. 평안했죠.
삼상 27장 28장 29장 너무나 조용했고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전에 분명히 다윗에게 적극적으로 
'너는 유대 땅을 떠나면 안 된다'라고 말씀하셨어요. 

다윗이 모압 지경으로 건너가니까 선지자를 보내서 
'다시 유대 땅으로 돌아와라' 삼상22:5

하나님의 훈련 절차를 벗어나지 말라는 거예요. 
'네가 아무리 힘들더라도, 그 훈련에서 이탈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이번에는 다윗이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망명갔는데
하나님은 아무 말씀이 없으신 거예요. 노코멘트 하셨습니다.
그냥 놔두시는 것입니다.

그냥 그 훈련소를 탈영하는 것을, 하나님은 지켜만 보셨다는 거예요. 
이때 조심하셔야 돼요.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아 이제는 하나님이 나를 놓아 주시는구나. 
이제는 하나님이 나를 그냥 편안하게 갈 수 있도록 해 주시는구나!' 
착각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처음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블레셋에 가게 그냥 놔두셨어요. 

▲저는 이 장면을 묵상하면서 요나가 떠올랐습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는 길을 포기하고, 그 사명지를 떠나버렸습니다.

사표를 던졌어요. 그리고는 다시스로 가 버렸습니다.
당시에 지상낙원 이라고 불릴 만한 다시스로 가겠다고.. 
사표 던지고 휴가 떠난 식입니다. 

그래서 욥바 항구에 갔는데, 때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들어왔습니다. 
'주님이 나를 보내 주시는 거야, 응답이 왔구나!'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근데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그 배에 탈 때까지도, 아무 말씀을 안 하세요. 
사전에 좀 말려주셨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지켜보고만 계셨어요.

그러다가 큰 풍랑을 보내서, 결국 요나가 물 속에 빠지게 되고
큰 물고기에게 삼키우게 됩니다. 요나는 3일 동안 완전히 죽음 가운데 지냈어요.

▲하나님이 유대를 떠나지 말라고 하시고서는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행동했는데 
왜 그냥 다윗을 보고 계셨는가요? 

하나님은 반복해서 몇 번 말씀하시는데, 내가 반복해서 거역 하잖아요? 
불순종하잖아요? 그럼 하나님은 나중에는 그냥 놔두세요. 
언제까지? 발화점이 될 때까지! 

그리고서는 크게 얻어 터지는 것이죠. 
다윗이 지금 시글락에서, 크게 얻어터지게 된 것입니다.
시글락으로 이주한지 1년 4개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징계가 내려지게 된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기다리시는가요?
하나님이 얄궂게 나중에 우리를 더욱 괴롭히려고 하시는 건가요?
아닙니다. 그 보다는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의 기준과 하나님의 약속을 회복하기를 원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스스로 돌이킬 시간을 주신 거죠.

사랑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순종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것이죠. 

▲저를 한번 따라해 보세요. '올 것이 왔다!' 
이런 거를 딱 느낄 때가 있죠. 

하나님이 나를 늘 지켜보고 계세요. 어느 날 내 인생 가운데, 
마치 다윗이 시글락에서 약탈당한 이런 사건이 벌어지면 
우리는 비로소 깨닫습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나를 보고 계시는구나 
하나님이 말씀 하신 그것은, 하나님이 아직도 기억하고 계시는구나.  
그래서 나를 징계하시는구나!'
여러분 이럴 때는 빨리 하나님께로 돌아가셔야 돼요. 

이런 사건이 벌어졌는데도,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요. 
아예 그냥 하나님을 등지고, 예배를 거부하고, 
그러면 이제 더 큰 징계를 맞게 되는 거죠.

아닌 길을 계속해서 가면, 올 것이 오게 되어 있어요.
 아닌 길에서는 멈추세요. 돌이키세요. 

지금 당장은 아무리 평안해도, 평탄 대로인 거 같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여도 
그 시글락 성안에서 평안이 잠을 잘 지라도.. 
평안이 평안이 아닌 것이죠. 쉼이 쉼이 아닌 것입니다. 


◑2. 그동안 하나님이 지켜 주신 것입니다. 

'내 인생은 내가 지킨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니요. 하나님이 지켜주십니다. 

다윗이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졌어요. 
블레셋 지경 시글락으로의 이주는, 자기가 엄청 지혜롭게 결정했다고 생각했는데, 
자가당착에 빠진 것이죠. 

잘못된 동기로 시작하면, 반드시 잘못된 결론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첫 단추를 잘못 꿰면 줄줄이 잘못되어 가는 것이죠. 

시글락은, 두 다리를 뻗고 편하게 사는 것 외에는 
영적으로 바닥을 치던 때였어요. 

다윗이 선택한 자신의 그 훈련 시즌의 마지막 막바지(광야 생활 끝)에 이르러
시글락 이주는, 자기 인생의 최악의 악수가 되고 만것입니다. 

그러면서 깨닫는 것이죠. 
'그동안 내가 내 인생을 지켜 온 것이 아니었구나. 
(시글락에서 편안했던 지금까지의 시절) 그동안은 하나님이 나를 지켜 주신 것이구나!' 

아마도 그동안은 이런 생각을 했을 거예요.
'아 내가 정말 수완이 뛰어나다. 
나는 앞으로 정치를 해도 너무너무 잘 할 것 같다.' 

지난 1년 4개월 동안 자신이 발휘한 정치적 수완은 대단한 거였어요. 

자신의 모든 재능과, 자신의 모든 지략을 총동원해서 
자신의 힘들었던 그 상황을 반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자기를 따라다니는 사람들에게도 엄청난 지지를 받았을 것입니다. 

광야에서도 워낙 목동 출신이었기 때문에 
광야에 대한 굉장히 해박한 지식이 있었고 
그 좁은 동네를, 사울을 피해서 10년을 도망 다녔어요. 

'정말 나는 탁월한 것 같아' 이런 생각을 하는 거죠. 
'이런 상황에서 나처럼 이렇게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다윗 안에 그런 생각이 전혀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피난처에서 벗어나 
인간의 성읍 시글락에 들어 갔는데, 근데 어떻게 됩니까? 
결국에는 그게 불타버렸어요. 

자신이 자랑스러워하고, 자신이 의지하던 것이 
하루아침에 다 날아가 버렸어요. 그리고는 깨닫는 것이죠. 
'아 정말 그동안 하나님이 지켜 주셨던 것이구나!' 

사고가 나고 나서야, '그동안 사고가 날 일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하나님이 다 지켜 주셨던 것이구나!' 이걸 깨닫는 것입니다.

왜 인생은 그런지 모르겠어요. 
건강을 잃고 나서야, 건강의 소중함을 알고 
사람을 잃고 나서야, 그 사람의 존재의 소중함을 알게 되고 

내 인생 가운데 감당할 수 없는 사건 사고를 경험하고 나서야
그제서야 '아 하나님의 손길이 얼마나 놀라운 것이었는가'를 
인정하게 되는 것이죠. 

내 인생이, 내 노력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닙니다. 
그 힘든 직장생활도 '나같이 끈기 있는 사람이니까 직장 생활을 지금까지 했지' 
우리 마음 안에 그런 생각이, 나도 의식하지 못한 채 스멀스멀 올라온다는 거죠.

그래서 나는 이 직장 생활을 버텨냈을 뿐만 아니라 
여기서 인정까지 받고 있다고...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죠. 

또한 목회자들은, 교회가 부흥하고 교회가 잘 되면 
마치 내가 이 교회를 세운 것인냥, 내가 이 교회를 부흥시킨 것인냥
착각하고 오해를 하는 것이죠. 

하나님은 보고 계세요. 지켜보고 계세요. 
발화점이 될 때까지 가만히 보고 계세요. 

자신이 의지하는 것이, 다 타 버리는 그 타이밍이 올 때까지 
그냥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 사로잡혀야 합니다. 

여러분, '사로잡힌다'는 '포로가 된다'는 뜻입니다. 
포로가 된다는 것은, 포로는 곧 종이 된다는 것이에요.

다윗과 그 군사들, 그 함께 하는 사람들의 가족들을 
생포를 해서 데려간 이유는, 다 노예로 팔아 넘길 속셈이었던 것이죠.

여러분, 종이 된다는 것은, 자유인이 아니라 
철저히 순종해야 되는 사람, 그의 수하에 들어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지금 다윗 입장에서 보면, 정말 10년 동안 멋지게 도망 다녔거든요. 
사울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서, 그 동안 그렇게 멋지게 도망 다녔는데.. 
한순간에 아말렉에게 다 잡혀 갔어요. 

'네가 지켜 온 거 같으냐?'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거죠. 
그냥 사건 하나로, 그냥 한 방에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거죠. 
'네가 네 손으로 지켜 온 줄 아냐?' 

▲그러나 사실은 아말렉의 포로가 되기 이전에 
블레셋의 종노릇을 했기 때문에 
블레셋 사람의 수하에 들어갔기 때문에 
이미 이방인(아기스)의 포로가 되어있었죠. 

이미 그는 안전을 얻기 위해서 
자기 인생의 주도권을 이방인에게 내어 준 것입니다. 
전혀 다윗 답지 않은 결정을 내렸던 것입니다.

사실은 그만큼 광야의 훈련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던 것입니다.
그만큼 광야의 훈련이 너무나도 피하고 싶었던 곳이었어요. 

그래서 자진해서 이방인(아기스)의 수하에 들어가게 된 것이죠. 

여러분, 나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지금 누구에게 내 인생의 사로잡혀서 살아가고 있는가요? 
지금 나는 누구의 포로로 살아가는가요? 

사람들은 해방을 원해요. 자유를 원해요. 
'나는 자유한 인생이 되고 싶다고..' 

그러나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인간은 상대적 존재이고, 소속이 없는 자유는 없어요. 
소속이 없는 자유는 없어요! 

당신이 하나님께 온전히 수속이 되면 
죄로부터 자유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로마서 3장 에서 하는 말씀이에요. 

▲오늘 결혼한 커플들이 여기 많이 나왔는데 
내가 온전히 사랑하는 한 사람을 만나면 
다른 모든 사람들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것이에요. 

구속이 곧 자유인 것이에요. 
소속이 곧 자유인 것이에요. 

우리가 고난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하나님 손에서 벗어나면 
당신의 소속 자체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당신을 아무도 지켜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학생이 자유롭고 싶다고, 교복을 벗고 그냥 사복으로 갈아입고 
몰래 학교 밖으로 빠져 나가면, 밖에서 무슨 일을 당하든지 
학교에서 지켜 줄 수가 없어요. 

당신이 인생의 고난의 트랙을 벗어나고 싶다고, 
진짜 그 트랙에서 벗어나면 
그 당신이란 열차가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아무도 지켜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고난 속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면 
하나님이 나를 지켜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결국에 인생은 고난이냐/ 평안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느냐 / 아니냐의 문제인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고난이냐 / 평안이냐.. 가 더 중요한 거예요. 
빈들이냐 / 왕국이냐.. 가 더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오판을 내리고, 그래서 잘못된 길에 들어서고 
그래서 결국에는 올 것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고난을 피하려다가 더 큰 고난을 당하는 것이에요. 
이 시글락의 사건은, 
고난을 피하려다가, 더 큰 고난을 당한 사건이에요.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고난을 피하려다가 
더 큰 고난을 당하지 않으려면 
기준이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평안이냐/ 고난이냐.. 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인 것이죠.

고난을 피하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고난을 정면 돌파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것은, 크리스천들이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잔소리로만 생각해요. 
'어휴 하나님은 나를 이 광야 훈련에서 건져 주지도 않으면서 
그냥 여기 계속 있으라고만 하셔!' 

'사울은 죽이지도 말라고 하시고, 그럼 제가 할 수 있는 게 도대체 뭐가 있습니까?
옴짝달싹을 못 하겠네요!' 

정말 가만히 있는 거 밖에 없죠. 
그럼 이게 인생을 사는 것입니까? 

그래서 너무나 답답한 것입니다. 광야를 빨리 벗어나고 싶은 거예요. 
'나(다윗)는 이 힘든 고난의 광야에서 벗어나서 
음식도 제대로 먹고 싶고, 잠도 편하게 자고 싶고, 
샤워도 편하게 하고 싶고...' 그렇게 살고 싶은 거예요. 

▲그렇지만 광야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돌봐 주십니다.
본문의 상황을 보면, 아말렉에게 가족이 다 잡혀 갔는데도 
그 잡혀간 가족 중에 한 사람도 상하지 않았어요. 할렐루야! 

그(다윗)의 인생에 큰 과오를 깨닫게 하실 뿐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그 가족을 지켜 주시는 하나님!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다고 
아담과 하와, 그 큰아들 가인이 하나님의 대해서 억한 심정이 있었죠. 

'하나님은 우리 부모를 쫓아내신 거야' 
아니에요. 스스로 본인들이 룰을 어겼기 때문에 
레드카드를 받아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이죠.

그래서 쫓겨나는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 옷을 입혀주시는 하나님!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여놓고도
'내가 동생을 책임지는 사람이냐?'고 반항할 때에도
가인에게조차 '이마에 (보호의) 표시'를 주시는 하나님!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치시나 
다시 싸매어 주시는 하나님이 되십니다. 

사람들은 늘 부모에게 '부모님 당신 때문에 내 인생이 이렇게 힘들다'고 
또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도 '하나님 때문에 내 인생이 이렇게 힘들다'고 
하소연합니다. 

그러나 사실 부모님 때문에, 하나님 때문에 
내 인생이 지금껏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고 계시기 때문에..

광야에 처할 때, 왜 광야에 나를 내버려 두시느냐 불평하지 말고,
광야에서도 나를 돌봐 주시는 하나님 은혜에 오히려 감사하는 
그런 고백을 드리는 성숙한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훈련소에 있다고 해서, 훈련이 끝난 것이 아니에요. 
훈련소를 떠난다고 훈련이 끝나는 것도 아니에요. 

훈련이 끝나야, 훈련이 끝나는 것입니다. 
'그처럼 대책 없는 말이 어디 있냐? 난 그런 말은 듣기 싫다' 그러시겠지만 

어찌보면 이 광야 훈련을 질질 끌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나 자신 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언제 제 인생의 이 힘든 시즌이 끝나겠습니까? 
저는 이제 훈련 받을 만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이 훈련이 끝나야, 당신이 경기를 뛸 수 있는데 
지금 이 훈련의 시간을 계속 딜레이 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 입니까, 아니면 나 자신 입니까? 

우리는 고난을 피해보려고 자꾸 편법을 써요. 
자꾸 엉뚱한 짓을 하면서 
'코치(하나님)가 나를 안 보고 있겠지?' 

내 인생이 평안하다 해도 정말 평안한 것인가요? 
운동선수가 훈련을 안 하고, 나무그늘 아래서 계속 쉬고 있는 것이 
정말 평안한 것인가요? 그러다가 더 큰 패배가 오는 것이죠. 

여러분, 하나님 없는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 방종 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여유는, 여유가 아니라 게으름 이에요. 

하나님이 없는 은혜는, 은혜가 아니라 무책임 함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쉼은, 쉼이 아니라 포기 상태예요. 포기한 거예요! 
하나님의 트레이닝을 포기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내 인생에 내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부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게 계시지 않으면, 내가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내가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상실하는 것이에요. 

내가 지금 여기 광야에서 긴장하고 사는 시간이 
내게 힘든 시간이면서도, 
나를 살아 있게 만드는 시간인 것입니다. 

끊임없이 기도하고, 깨어있게 만들고 
끊임없이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들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광야에서는 주님을 간절히 부르짖게 되어 있어요. 
광야에 있으면 부르짖지 않을 수가 없어요. 
'하나님, 도와주세요. 사울이 코 앞에 와 있습니다. 
하나님, 저를 살려주세요!' 이런 탄식의 기도가 끊임없이 나올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광야는 축복의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4절~6절 까지를 볼까요? 
시글락 성이 불탄 것뿐만 아니라, 더 큰 환란이 다윗에게 닥칩니다. 

삼상30:4~6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
(다윗의 두 아내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도 사로잡혔더라)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백성들은 모두 자기 자녀들로 인해 슬픈 나머지 다윗을 돌로 쳐 죽이고자 했습니다. 
다윗은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여 용기를 냈습니다. :6

다윗과 그의 군사들이 다 통곡을 합니다. 
아주 진이 빠질 정도로, 기운이 다 없어질 정도로 통곡을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본문을 보면서 두 가지를 보았습니다.

-하나는 굉장히 슬픈 장면이죠. 
-그리고 하나는 굉장히 재밌는 장면이라고 생각이 돼요. 

5절에 보면, 다윗이 자신의 두 아내도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다윗은 그래서 마음이 굉장히 상했던 거 같아요. 

6절에 백성들은 모두 '자기 자녀들이 포로로 잡혀 감을 인해' 슬퍼했습니다.

히브리 원전을 보니까, '아들들과 딸들로 인하여' 이렇게 써 있어요. 

자매님들, '오 나의 평생에 나의 피난처가 될 그 형제'를 너무 사모하지 마세요. 

당신의 평생에 피난처는 하나님이세요.

다윗의 사람들은, 인질로 자기 가족들이 다 잡혀가도 
자식 때문에 힘들었지, 아내 때문에 힘들었다는 얘기는 성경에 없어요.

(다윗만 아내 때문에 힘들어 했어요.)


요즘 그런 이야기를 하잖아요. 이사 갈 때 아내들이 
강아지는 차에 태우고, 남편을 버려 두고 간다고요... 

여러분, 사람을 너무 의지하지 마세요. 사람을 너무 기대하지 마세요. 
본문에 다윗의 사람들, 즉 남편들이, 자기 아내로 인해서 통곡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너무 남편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의지할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근데 분위기가 이상해집니다. 남자들이 돌을 듭니다. 
다윗을 돌로 쳐서 죽이려는 겁니다.

'네가 오판을 해서 우리가 이 어려움을 당했다'는 겁니다.
'다윗, 네 책임이다!' 

당연히 다윗이 잘못 했죠. 
시글락은 안전할 거라는 생각! 
그런데 안전하지 않았어요.

아말렉을 약탈해서 아기스의 환심을 사면, 
시글락이 블레셋 진영 안에 있기 때문에 
너무나 편안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결국엔 그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어요. 

참전하지도 못할 전쟁에 
괜히 나간다고 만용을 부렸던 다윗의 모습입니다.

'네가 잘못했다. 너 때문이잖아' 
그러나 다윗의 입장에서는, 물론 자기가 잘못 판단했지만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참 리더들은 힘든 것인데, 
1백 번을 잘해도 한번 잘못하면 그것 때문에 자리에서 내려오는 일들이 많죠. 

다윗이 그 동안 버려진 인생들을 거두어서 살려 주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날마다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사울의 칼로부터 지켜주고, 그들만 지켜준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가족까지 다 지켜 줬어요. 지난 10여년의 세월 동안! 

이때 다윗이 그 배신감에, 그 절망감에 
그런 상황이 너무나 다급한 거예요. 

이제 돌로 그냥 쳐서 죽이면, 600명이 돌로 치면 그냥 맞아 죽는 거 밖에 남지 않았어요. 

그래서 6절에 다윗은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개역에는 '군급했다', 개역개정에는 '다급했다'고 표현했는데

히브리 원전에 보면 '꺾쇠로 조이다'는 뜻입니다.
물건을 놓고, 강한 쇠로 조이면 어떻게 되나요? 
그 안에서 완전히 크러쉬, 완전히 깨져버리는 거죠. 

그렇게 너무나 긴박한 상황이 다윗을 조여오는 거예요. 
그때 6절에 '다윗은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여 용기를 냈습니다'

3절에, 그의 사람(군사)들이 나오는데요,

여기 3절과 6절에서 '그의 사람들'과 vs '그의 하나님'이 대조됩니다. 

여러분 그가 하나님을 의지해서 용기를 냈습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중요한 인생 레슨이 있다고 봅니다. 

◑4. 사람은 의지할 대상이 아니라, 사랑할 대상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광야 훈련 학교에서 다윗에게 주신 마지막 레슨입니다. 

'너 앞으로 왕궁으로 들어갈 텐데, 거기 가서도 잊지 말아라. 
사람은 의지할 대상이 아니라 사랑할 대상이다. 
사람을 의지하지 마라. 너의 최측근이 너를 배신하게 되어 있다. 
너의 사람들이 너를 힘들게 할 것이다.' 

사람들에 대한 마지막 훈련을 그에게 시키고 계신 거예요. 

사람을 아예 가까이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을 너무 많이 의지하면 
결국에는 그들을 의지한 것 때문에, 네가 무너지게 될 것이다.. 라는 거예요.

'사람들은 앞으로 너를 무수히 실망시킬 것이고 
무수히 너를 배신 할 것이고 
무수히 네 마음 가운데 분노를 일으킬 것이고 
너의 인생을 혼란스럽게 만들 것이다.' 

믿었던 사람이 나를 배신할 때, 
기대했던 사람이 나를 실망시킬 때, 
사랑했던 사람이 미워질 때, 

늘 곁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주저하지 않고 떠나버릴 때 
변하지 않고 나를 사랑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변할 때..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느냐?'고 이야기하지 마세요. 
사람은 원래 다 그런 것입니다. 
사람은 원래 다 그런 거예요. 

가끔 보면, 사람들이 막 흥분하면서 이야기할 때가 있어요. 
자기가 상처를 받았다고..

'어떻게 내 아버지가 나에게 이럴 수 있느냐? 
어떻게 내 엄마가 나에게 이럴 수 있느냐? 
어떻게 내 형제가 나에게 이럴 수 있느냐?
어떻게 교회 다닌다는 사람들이 이럴 수 있느냐? 
어떻게 목사님이 나에게 이럴 수 있느냐?' 

아니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배신은, 신뢰를 저버린 것이 아니라
신뢰가 선행 되었기 때문에 배신이 따라온 것입니다. 

깊은 미움은, 사랑이 전제 되었기 때문에, 
그 사랑만큼 미워지는 거예요. 

깊은 절망과 실망은, 
높은 희망과 소망을 가졌기 때문에,
그 기대, 그 희망의 높이만큼.. 절망의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결혼하기 전에 꼭 깨달아야 되는 것이 있는데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 라는 사실이에요. 

당신이 앞으로 소망을 걸 그 형제도 
당신이 앞으로 소망을 걸 그 자매도 
모든 인간은 죄인이고.. 이걸 빨리 받아들이는 게 중요해요. 

당신이 특별히 가장 큰 죄인이에요. 이거 빨리 받아들이셔야 돼요. 

나의 믿음을 배신하지 않을 유일한 분, 
나의 소망을 꺽지 않을 유일한 분, 
내 곁을 영원토록 떠나지 않을 유일한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어요. 
이것을 깨닫는 게 중요합니다. 

왜 하나님은 다윗을 외롭게 만드셨는가요?
다윗의 인생은 철저히 외로웠어요.

부모에게 버림받고,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고 
빈들에서 어려서부터 홀로 됐었어요. 
다윗은 정말 외로운 사람이에요! 

'드디어 내 인생의 멘토가 나타났구나 생각했는데' 
그 사울이 자기 등에 칼 꽂으려고 합니다. 창을 던집니다. 

절친 요나단은 헤어지고 나서 만나지를 못했어요. 
기브아를 떠난 이후로, 사무엘을 재회도 하지 못한채, 사무엘은 죽었어요. 

처음 사랑해서 결혼했던 미갈은, 사울왕이 다른 남자에게 줘 버렸어요.
철저히 외롭게 만드시는 하나님!

이제는 자기 사람들에게까지 돌을 맞게 된 상황입니다. 
다윗이 그냥 십자가 위에서 있는 거 같아요. 

▲왜 하나님은 다윗을 이렇게 외롭게 만드십니까?
왜 하나님은 다윗만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이유가 뭘까요? 

정말 하나님만 의지하는 한 사람을 만드시려는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만 사랑하는 한 사람을 만드시려는 거예요. 

그러면 그것은 하나님께만 좋은 것이지 
다윗에게는 좋은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다윗의 인생은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운데 
하나님은 당신이 하시고 싶은 일을 위해서... 
하나님만을 위해서... 
하나님은 너무 이기적이시군요!  (아닙니다)

여러분, 인간의 이기심은 죄악이지만 
하나님의 자기 중심성은 
세상의 모든 만물의 중심을 잡으시는 무게 중심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중심이세요. 하나님은 언제나 최우선이세요. 
그 분이 만약에 자기 자리를 내려놓으면 
누가 당장 그 자리로 달려들까요? 사탄이죠. 

그러면 온 우주만물은 뒤집히는 겁니다.
세상은 깨지는 것입니다.

그분은 자기중심적 이셔야만 해요. 
그래야만 세상이 유지가 되고, 온 우주가 유지되고 
우리 각자의 인생이 유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세상을 살릴 수 있는 것이죠. 

(하나님이 이기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자기 중심적이십니다.)

▲제가 상담을 하는데, 내담자가 그런 얘기를 해요. 
자기가 너무너무 힘들다고 합니다.

제가 말해 줍니다.
'당신이 거기서 살아남으려면, 인간이기를 포기하세요!'

만약 부모에게 그 정도로 상처를 받으면, 
사랑을 고백했던 사람이, 3~5년 교제했던 사람이 저주하고 떠나가면 
사람은 무너질 수 밖에 없어요. 고통 당할 수밖에 없어요. 
그게 정상입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은 죄인이고, 하나님밖에 의지할 데가 없구나' 
이걸 딱 인정하는 순간, 다시 일어나는 겁니다.

왜요? 내가 사람을 의지했다가, 다시 사람을 짚고 일어나려고 하면 
늪처럼 빠져들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면 일어나게 돼 있어요.

다윗의 사람들 vs 다윗의 하나님 (3절, 6절)
성경의 이 표현이, 놀라운 표현이라고 생각됩니다. 

'내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던 그들이, 지금 돌을 들고 나를 쳐죽이려고 합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 
어떠한 전쟁에서도, 어떠한 위기에서도 한 번도 흩어지지 않았던 사람들! 
인생이 망한 사람들을 놀라운 전사들로, 전사 공동체로 키워낸 다윗!

그렇게 다 사람 만들고, 어떻게 전쟁의 이기는지를 가르쳐 놨더니 
이제는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겁니다. 

'내 사람들'이 나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내 하나님'은 나를 살리려고 합니다. 

▲여러분, 인생에 고난이 심해지면 어떤 생각을 하는 줄 아세요?
'하나님이 나를 죽이려고 하시는구나!
하나님 나 죽을 거 같아요. 왜 이렇게 나를 괴롭히십니까?' 

하나님이 나를 죽이려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예요. 
결국에는 사람들이 나를 죽이게 돼 있어요. 

그리고 그 사람들을 의지했던 내가, 나 자신이 
결국엔 나를 죽이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은, 나를 죽이려고 하시는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나를 살리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 정말 의지할 이는, 하나님 한 분이시구나! 
의지할 곳은 하나님 밖에 없구나!' 

남편이나 아내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고요.  
여러분, 20년을 애지중지 키운 자식이 떠나는데 
부모의 마음 가운데 상심이 크거든요. 
그렇지만 떠나보내야 돼요. 자녀를 의지하지 말고! 

내가 헌신했던 직장이 나를 배신할 때 
마음이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럽죠. 

내가 헌신했던 교회, 내가 헌신했던 조직... 의지하지 마세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세요. 

결국에는 마지막 결론, 마지막 본론만 남게 되어 있어요. 
시글락이 불타고 사람들이 돌을 들 때는 
절망할 때가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해야 될 때입니다. 

◑5. 용기란, 두려움이 없어서가 아니라 
두렵지만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6
완전히 지금 다윗이 쓰러져 있는 상태거든요. 

"용기는, 두려움이 없어서가 아니라 
두렵지만 그 일을 하는 것이다" 

이 명 문장은, 리더십의 대가 존 맥스웰이 쓴
<리더가 알아야 할 7가지 키워드>란 책이 있어요. 굉장히 좋은 책입니다. 
그 속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그 책에 보면, 1차대전 때 리켄베커 라는 인물이 있었어요. 
그는 너무나 파일럿이 되고 싶었어요. 

근데 나이도 많고, 아마 파일럿에 나이 제한이 있었겠죠. 
또한 시력도 약하고, 색약이 있어서 파일럿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탈락을 하게 됩니다. 

그랬더니 공군에 운전병으로 지원을 해요. 
열심히 운전병 일을 해서, 인정을 받아서 
따라서 결국 자기 보직을 파일럿으로 변경을 했어요. 

그리고 이 사람 리켄베커가 1차대전에 전설적인 전투기 조종사가 됩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이렇게 질문을 하죠. 
'그렇게 많은 공중전에 나가다니 정말 당신은 용감하군요.' 

그러자 리켄베커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용기란 자신이 두려워 하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없다면 용기도 없는 것이죠!" 

▲여러분, 수많은 예술가들, 수많은 패션 디자이너들, 수많은 사업가들, 
수많은 정치, 종교 등 각계 분야의 지도자들이 
일반인들보다 두려움의 게이지가 높은 사람들입니다.

다만 이 두려움에 대해서, 반응하는 태도가 다른 사람들이에요.

사람들은 두려움이 몰려오면, 움츠려지거나 포기해버립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두려움의 게이지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 이상으로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 이상으로 도전하는 거예요. 

'내가 내일 프리젠테이션 하면서 잘못하면 어떻게하지?' 
'이번 프로젝트 실수하면 어떡하지?'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더 노력하고, 더 준비하는 것입니다.
더 최선을 다해서 도전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내 안에서 극복 될 때까지, 밀고 나가는 사람들! 
그래서 세상에 굉장히 많은 프로페셔널(전문가)들은 
두려움의 게이지가 일반인들보다 높다는 걸 아셔야 돼요. 

이런 사람들은 사실은 강박증이 많고 
이런 사람들은 공황장애가 많고 
내면세계가 연약한 사람들이 굉장히 많아요. 

그러나 용기를 내서 도전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사명을 아름답게 이루어 가는 거지요. 

▲물론 우리는 인간적인 두려움을, 
노력으로 이런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해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극복하는 줄로 믿습니다. 

용기는 역설적인 것이에요. 
도저히 일어설 수 없을 때, 
이제는 정말 끝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 

내 가족 같은 사람들이 나를 죽이려고 할 때, 
그 때 하나님을 의지해서 다시 일어서는 그것이 
진정한 용기인 것입니다. 

끝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아 이제 끝났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하나님이 나를, 내 인생의 새로운 출발선에 세우시는 것입니다.

'아 내 인생이 이제 끝이구나' 라고 생각할 때는 
포기하거나 자살을 묵상할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새로운 출발선에 서야 된 때가 된 거에요.

내가 인위적으로 만든 인생의 트랙을 달리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트랙 위의 서야 될 때가 된 것입니다. 

저는 이게 정말 감사한 거 같아요. 
인생이 바닥에 떨어질 때까지.. 하나님은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지면, 하나님이 나를 새롭게 만드세요. 

내 인생의 밑바닥에 떨어질 때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때인 줄로 믿습니다. 

내 인생이 밑바닥에 떨어질 때는 
나의 한계를 경험하고 끝내는 때가 아니라 
그 한계점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새 출발을 체험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깨트리실 때는 깨져야 합니다. 
이왕이면 바싹 깨지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새로운 그릇을 만드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이제야 정신을 차렸어요. 
지난 1년 4개월 동안, 즉 삼상 27장 28장 29장 까지 
다윗이 기도했다는 내용이 한 번도 없어요. 

다윗이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표현이 한 번도 안 나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했다는 표현이 없어요.
왜요? 의지할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기도 할 필요가 없었고
밤을 새며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부르짖을 이유가 없었어요.
시글락은 두 다리 뻗고 편하게 쉬는 곳이거든요. 

스스로 휴가를 가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았죠. 
몸은 편안했지만 영의 상태는 엉망이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때로는 밑바닥으로 떨어뜨리십니다.
마치 어미 독수리가 새끼를 벼랑 아래로 떨어뜨리듯이, 그렇게 떨어뜨리세요.

그러면 추락하는 중간에 
사람은 자기 인생이 떨어지는 거를 힘들어 하거든요.
그래서 뭐라도 붙잡는 것입니다.
벼랑에 난 나뭇가지를 붙들든지, 뭐라도 붙들고 아래로 떨어지지 않으려 하죠.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까요? 
하나님은 손을 톡 쳐서, 우리를 완전 밑바닥으로 떨어뜨리십니다.
그래서 바싹 깨지게 하십니다.

왜 이렇게 하실까요? 
특별히 나를 괴롭히는 걸 좋아하셔서? 
하나님은 취향이 이상하셔서? 

아니에요. 완전히 깨어져야만

새 그릇을, 온전한 그릇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토기장이가 그릇을 열심히 빚어서 또 구워서...  
이 프로세스가 얼마나 긴 것입니까? 

그런데 건져내는 것 보다 깨뜨리는 게 더 많다고 해요. 

그러면 오늘 내가 기분이 안 좋아서, 분풀이를 하느라고 
이거 깨뜨리고 있나요? 아닙니다. 

만약에 굽는 것마다, 자기가 원하는 작품이 나온다면 
토기장이가 얼마나 편하겠어요? 
자기가 원하는 작품이 안 나오니까, 사정없이 깨트리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깨뜨리시고 다시 만드시는 과정이 
하나님께도 힘든 과정이에요. 
하나님께도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뜨리시는 것은 
더 새롭고 온전한 그릇을 만드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제가 과거에 중등부 전도사 시절에, 
정말 처음으로 전도사를 맡았을 때 너무나 힘들었어요. 

중등부 예배에 들어가 보니까 
어른들처럼 예배를 드리지 않아요. 
설교 시간이, 광고 시간보다 더 시끄러워요. 

정말 예배를 어떻게 드릴 수가 없는.. 왁자지껄한 상황이었어요.
'우리나라에 중2가 무서워서 북한이 내려오지 못한다'고 이야기하는데 
정말 어마어마한 아이들이에요. 전혀 설교를 듣지 않아요. 

그리고 처음 제가 7월 초에 전도사가 돼서 7월 말에 캠프를 갔는데 
3일 내내 밤새 중등부 학생들이 들로 산으로 노루처럼 뛰어다니는데 
새벽 네시~ 새벽 다섯시 까지 그들을 좇아다녀야 했습니다. 

저 숲에가서 담배 피는 아이들, 빨간 불이 멀리서 보입니다.
남자애들이, 여자애들이 뛰어다니고.. 
그거 잡으러 다니느라고 거의 밤에 잠을 못 자고.. 
그러니 낮에는 제정신이 아니고.. 

그때 중등부를 담당하시는 전임 전도사 님이 계셨는데, 저는 파트였고요,
그때 캠프 때 또 한 가지 황당했던 일은, 
선생님들이, 마지막 날 밤에, 두 패로 갈라져서 대판 싸웠어요. 
완전히 그냥 중등부가 엉망이었어요. 

그런데 석 달이 지나서 10월쯤이었어요.
중등부 전임 전도사님이 교사 모임 때, 
교사들이 40~50명 앉아 있는데,
'앞으로 무단 결석 3회 이상 하시는 분은 무조건 방출입니다!'

분위기가 싸해지고 급랭 되었습니다.
안 그래도 감당하기 어려운 중학생 애들을 
우리가 와서 지금 노력 봉사 해 주고 있는데 

전임 전도사님이, 앞으로 연락도 안 하고 
그냥 주일 중등부 예배에 안 오시는 분들은 
교사를 관두라는 겁니다.
내년에 열심히 하지 않을 분들은 그만두시라고... 

연말에 '지난 일년동안 수고하셨습니다'가 아니라 
'그만 나가시라'고! 
그래서 정말 교사가 절반 이상이 나갔어요. 
그리고 그 전임전도사님이 사임하시고, 제가 중등부를 전임으로 맡게 되었습니다.

제가 온누리 교회에 아무런 적이 없었고 
저는 그 전에 다른 교회에 다니다가 온 때였기 때문에
아는 사람도 없고, 인맥도 없는데 
어디서 교사를 모집합니까? 

그래서 그 다음에 250명의 말도 안되는 중학생들을 
제가 20명의 교사를 데리고 했어요. 죽는 줄 알았어요. 
너무 너무 힘들었어요. 
교사 한 명이 중학생 15명을 돌봐야 되니까요. 

그래서 제가 그런 생각을 했어요. 
'왜 전임 전도사님은 자기 성격대로 그냥 밀어붙여가지고 
후임자인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고 떠나버렸는가?' 

세월이 흘러서.. 제가 중등부를 5년 담당했거든요. 
나중에 저희 중등부 교사들이 거의 100명 가까이 늘어났어요. 

정말 헌신된 사람들이 한 사람, 두 사람씩 모여들기 시작했어요. 
'내가 정말 아이들을 위해서 헌신하고 싶습니다.' 

중등부 예배에 빠지고, 예배에 늦고, 아이들을 포기해버리는 그런 선생님들이 아니라 
정말 최선을 다하는 선생님들이 오시기 시작했어요. 

제가 세월이 지나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때 그 전도사님이 용단을 내리지 못했다면 변화는 없었겠구나! 
여전히 그 모습이었겠구나!' 

▲여러분 깨어지면 은혜입니다. 
사람들은 깨어지고 싶어 하지 않아요. 
'그냥 적당하게 분위기 좋게 가지 뭐!' 

여러분, '적당하게 분위기 좋게'가 당신의 인생을 살리는 게 아닙니다.

가족 간의 갈등이 있어요. 덮어두고 적당하게 가는 거예요. 
사람들 사이에, 공동체 안에서도 '저거 마음에 안 되는데 
지금 잘난 척만 하고, 멋진 척만 하고, 마음에 안 드는데?' 
그냥 웃으면서 '형제님, 자매님' 그리고 넘어가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다 알고 계세요. 보고 계세요. 
때로는 깨어짐이,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는 시작점이 됩니다. 

저는 <사무엘상>을 보면서 '하나님의 담금질'이라는 표현이 계속 떠오릅니다.
여러분 담금질을 어떻게 하죠? 

쇠를 달굴 때, 순도를 높이기 위해서 
뜨거운 풀무 불 속에, 즉 용광로 같은 불 속과
아주 차가운 물 속에 집어넣고, 또한 두드리는 망치질을 반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이렇게 다루시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순도를 높이기 위해서입니다. 
영적인 순도를 높이기 위해서! 

'하나님, 제 인생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충분히 강해질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여러분! 
순도가 높아져야 강도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 불순물 때문에 내 인생이 결국에는 그 길을 가다가 엎어지고 망가지고 
실패하는 일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하나님은 내 인생의 순도를 높이기 위해서 
축복과 왕궁이 아니라, 고난과 빈들의 시간으로 가게 하시는 거예요. 

사람들은 이 여정을 지나가면서 소망하는 것이 
'아 이제는 좀 그만 궁궐에 들어갔으면 좋겠다. 
내 남은 인생은 이제 계속 궁궐이었으면 좋겠다..' 

'그동안 너무나 고생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응답이 이루어져서
내 인생이 성공하고 편안해졌으면 좋겠다..'

'결혼하면 좋겠고, 돈 많이 벌면 좋겠고, 삶이 안정되면 좋겠다..'
 
여러분, 여러분이 결혼하면 이제 여러분의 인생의 빈들에서 
왕궁으로 들어가게 되나요?

결혼하고 나면 '왕궁'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과 싸우고 나면, 그것처럼 고통스러운 '빈들'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부부도 그 광야의 시간을 지나가셔야 됩니다.

제가 형제들에게도 종종 하는 말이,
조금 교제하다가 힘들어지면 그만 쉽게 포기해 버립니다.
그래서 계속 늙어가는 것입니다. 그 힘든 시간을 지나가셔야 해요...
뜨거운 불과 찬물의 시간을 견디고 통과하셔야 해요.. 뛰쳐나가지 마시고..

대학생들은, 학교 생활하면서 공부하기 힘들어서
직장에 들어가기만 하면, 왕궁생활이 시작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직장에 들어가면, 여러분의 인생이 꽃 피었나요?
3개월, 6개월 만에 사표 던지고 싶고, 도망가고 싶어집니다.

우리가 꿈꾸는 '왕궁'이, 정말 '왕궁' 입니까? 
다윗이 광야 훈련 시간이 힘들다고, 곧장 왕궁으로 건너뛰어 들어갔다면,
거기가 정말 '왕궁'이었을까요?

거기에도 수많은 정치적 모략꾼들이 있고 
반역을 일으키려는 사람들이 있고..
어쩌면 다윗은, 왕의 시절이 더 힘들었어요. 

그러나 광야에서 훈련을 충분히 받았기 때문에
그 왕궁 생활을 버티고,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이죠.

왜 하나님은 당신을 빈들에서 훈련시키시나요?
정말 당신을 미워해서? 당신을 괴롭히려고요? 

아닙니다. 다윗의 예배가 가장 빛 났을 때는 빈들입니다.

그 때가 그의 영혼이 살아있는 때입니다.

그 광야의 때에, 여러분이 살아있는 예배를 하나님 앞에 드리셔야 돼요.

 

빈 들에서 하나님 앞에 예배할 수 있는 사람만이, 왕궁에서도 예배할 수 있어요.

빈들에서 예배를 포기하는 사람은, 왕궁에 가면 그야말로 퍼져 버리는 것입니다.

 

여기 이 땅에는 왕궁도, 빈 들도 없습니다.

절대적인 축복도, 절대적인 고난도 없다는 말입니다.

내 인생의 진정한 축복은, 내가 어느 자리에 있든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승리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