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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소서 사64장 1~7 <이사야서>설교모음 출처
보통 이사야서를 예언서 또는 선지서라고 하지만
이사야 64장은 예언이 아니고 기도입니다. 그리고 이 기도의 핵심은 '부흥'입니다.
본문 1절 전반에는 ‘원컨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강하게 임하셔서 지상에 있는 교회를 축복해 주시라는 기도입니다.
저는 주께서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는 역사인 부흥을 보길 간절히 원합니다.
부흥은 21세기 우리 한국교회에 대단히 중요한 주제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부흥이 일어난지 무려 50년의 세월이 지났기 때문입니다.
부흥을 체험한 분들은 이제 다 늙어 은퇴하시고 돌아가신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데 젊은 세대는 부흥을 아직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대에 다시 부흥이 일어나야겠습니다. 주1)
◑1. 부흥이 아닌 것
참된 부흥이란 무엇인가를 알아보기 전에
먼저 부흥이 아닌 것은 어떤 것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첫째, 개혁(reformation)은 부흥(revival)과 다릅니다.
개혁이란 교회에 교리적, 윤리적, 제도적으로 성경과 어긋난 것을 고쳐서
성경과 일치시키고자 하는 운동입니다.
마르틴 루터와 존 칼빈이 주도한 개신교의 종교개혁이 대표적인 것입니다.
로마가톨릭의 구원론이 잘못됐으므로 성경에 맞추어 바르게 고치고,
교회관이 잘못됐으므로 성경적인 교회관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개신교의 종교개혁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으면 고쳐서 바른 윤리를 확립하자고 해서
기독교 실천윤리라는 개혁운동도 일어납니다.
또한 교회가 제도적으로 문제가 있으면 그 제도를 고치자는 것도 개혁입니다.
예를 들어 유아세례가 문제가 있으니 신자의 침례로 하고
또 국가가 국교를 만들어 한 가지 종교를 강요하는 국가교회 제도가 문제가 있으니
자유교회로 하자고 해서 침례교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하지만 개혁과 부흥은 다릅니다.
▲둘째, 부흥회가 곧 부흥은 아닙니다. 부흥회는 미국식 기독교의 영향입니다.
19세기 중반 미국에 찰스 피니 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원래 법률가였던 그는 기도하다가 성령을 받고 유명한 부흥사가 되었습니다.
그의 저서 가운데 ‘부흥에 관한 강좌(Lectures on revival)’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부흥이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즉, 부흥은 사람이 어떤 특별한 방법이나 수단을 쓰면 일어나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가 쓰는 이 방법을 가리켜 ‘새로운 부흥의 기술(New Measures)’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방법에 따르면 부흥회를 하려할 때 먼저 광고를 냅니다.
그리고 유명한 설교자와 가수를 초청하여 여러 날 동안 지속적인 집회를 갖습니다.
강사의 설교가 끝나면 ‘천부여 의지 없어서’, ‘인애하신 구세주여’와 같이
사람의 감성을 움직이는 찬송을 합니다. 이런 감성적인 찬송을 부른 후에
“여러분 중에 오늘 예수 믿기 원하는 분은 앞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라고 초청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앞으로 나와 ‘고민하는 의자(anxious bench)’라는 데 앉아 고민을 합니다.
그때 상담자가 그들에게 가서 “왜 고민 하십니까”라고하면
“저의 죄 때문입니다”라며 회개합니다.
그리고 “죄를 사하시는 예수님을 믿으시렵니까?”라고하면
“예, 믿겠습니다”라며 영접합니다.
그러면 영접기도를 하고 이름을 적어 교회에 등록시킵니다.
이렇게 해서 부흥회의 기술이 발전했고 교회는 숫자적으로 증가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침례교회도 이런 부흥의 기술들을 많이 활용 했습니다.
저는 이런 부흥의 기술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도 이런 부흥의 기술을 쓰는 것이고
부흥회는 이런 기술을 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흥회를 여러 번 하면서 느끼는 저의 솔직한 심정은 부흥회를 하면
기분도 좋고 은혜도 받지만 부흥회가 곧 부흥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부흥회는 사람이 하는 것이지만 부흥은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셋째, 소규모 회심이 부흥은 아닙니다.
부흥이란 대규모 회심이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사도 베드로가 한 번 설교하니까
삼천 명이 회개하고 교회가 증가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예상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라
깜작 놀라게 교회가 부흥되는 것이 부흥입니다.
물론 한두 명 회개하고 예수 믿는 것도 하늘의 천군 천사가 노래할 정도로
놀랍고 반가우며 고마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통 한두 명의 회심을 부흥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1630년에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근처의 커크오쇼츠(Kirk o'Shotts)라는 동네에서
월요일 밤에 성찬식을 가졌습니다.
야외에서 온 동네 사람들이 연합으로 함께 예배드리고 주의 만찬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리빙스톤(Livingston)이라는 젊은 목사님이 설교자로 초청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앞에는 목회를 오래한 목사님들뿐만 아니라
시장님과 국회의원도 앉아 있었고, 리빙스톤은 떨려 설교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집회에서 살짝 빠져나와 도망갔습니다.
그러자 성령님이 “내가 너를 설교자로 세웠는데 너는 어찌하여 믿음 없이 도망을 가느냐?”
며 책망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집회장소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에스겔 36장 25절 전반,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라는 본문을 가지고 약 40분 동안 설교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은혜 받은 표정을 안 하고 40분이 지나갔습니다.
그때 마침 하늘에서 비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부스럭거리며 우비를 꺼내 입고 옷을 벗어 머리를 가리는 등
앞에서 설교자가 볼 때 난리가 난 것처럼 부산스러웠습니다.
그때 리빙스톤의 입에서 원고에 없는 한 마디가 튀어나왔습니다.
“여러분, 빗방울이 이처럼 몇 방울만 떨어져도 몸을 가리느라고 야단이시군요.
그런데 마지막 심판의 날 하늘에서 진노의 불이 떨어 질 때에는 무엇으로 가리시겠습니까?
여러분을 심판에서 보호해 줄 구속자가 없으시다면
무엇으로 진노의 불을 가리시렵니까?”라고 강하게 물었습니다.
강대상에서 설교할 때 가장 보기 싫은 것 중 하나가
설교를 듣는 청중이 부스럭거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리빙스톤이 한 마디 한 건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사람마다 벌벌 떨기 시작했고 이 한 번의 설교로 최소 500명 이상 구원을 받았으며
그 이후로도 그 동네는 부흥이 한동안 지속되었다는 역사적 기록이 있습니다.
이처럼 부흥은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 성령이 강하게 임재하셔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17세기에 벤자민 키츠(Benjamin Keach)라고 하는 유명한 침례교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엘리어스 키츠(Elias Keach)라는 믿음 없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엘리어스가 미국에 갔는데 옷이 없어 목사님이신 아버지 옷을 입고 돌아다녔습니다.
그러자 미국에 이민 온 영국 사람들이 그에게 와서 설교를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설교한 원고를 몇 개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을 보고 설교했습니다.
그러므로 사실 본인의 설교가 아니라 아버지 설교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설교를 하는 도중에 그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벌벌 떨고 “우리 아버지가 목사님이신데 나는 예수님을 믿지도 않고
아버지 설교를 갖고 와서 하다가 이렇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나는 이 시간부터 예수님을 믿기로 하겠습니다”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필라델피아 교회 근처에 큰 부흥이 일어났고
1707년에 미국 최초의 지방회인 필라델피아 지방회(Philadelphia Association)가 만들어졌습니다.
여기서 만들어 낸 필라델피아 신앙고백서(Philadelphia Confession)가
미국침례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서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종교적인 기술을 써서 교회 성도가 조금 늘어났다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성령이 주권적으로 임하여 교회에 부흥이 일어나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참된 부흥이란 무엇인가?
본문 사63:1, 2절이 참된 부흥이란 무엇인가를 그림처럼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1, 2절에는 ‘원컨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의 앞에서 산들로 진동하기를 불이 섶을 사르며 불이 물을 끓임 같게 하사
주의 대적으로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 열방으로 주의 앞에서 떨게 하옵소서’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가른다는 것은 찢는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하늘 문을 한 손으로 잡아서 여시면 되는데
문을 열 시간이 없어 두 손으로 하늘을 잡아 찢으시고 강림하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처럼 강력하고 갑작스럽게 임재 하셔서
산이 진동하고 산에 큰 불이 일어나며 대적들이 주의 앞에서 벌벌 떨게 되고
열방이 주의 소문을 듣고 주 앞에 나오게 되는 것이 부흥입니다.
시내산에 하나님께서 임하실 때 실제로 이러했고,
오순절 날 성령이 강림하실 때도 영적으로 이러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본 자도 없고 볼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눈에 안 보이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임재하셨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기독교를 비판하고 주를 대적하던 자들에게 여호와께서 임재하시면
‘여기 하나님께서 계시도다’하고 돌이켜 주의 이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열방이 부흥의 소문을 듣고 떨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부흥이 일어나면 대적들이 부들부들 떨고 주의 이름을 알게 되며,
온 나라는 물론 세계 만방에 소문이 다 퍼져
열방이 주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흥은 위대하고 전염성이 있는 것인데
이러한 참된 부흥은 여러 가지 현상을 동반합니다.
▲첫째, 죄를 깨닫고 고백하게 됩니다.
죄를 가볍게 여기던 것을 아주 심각하게 생각하고 죄로 인해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5~6절에는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이미 오랬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
가을에 나뭇잎이 떨어져 바람 부는 대로 날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죄악을 견딜 수 없고 죄악이 하라는 대로 끌려가는 것입니다.
저는 장례식장에서 술에 취한 어떤 분을 만났습니다.
그분과 얘기를 나누다 그 분이 어려서 병이 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고쳐주셔서 예수님을 믿고 어느 유명한 교회의 안수집사가 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주일마다 차량봉사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술을 못 끊어서 장례식장에서도 술에 취해
심지어는 빈소를 제대로 못 찾을 정도였습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거역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강하게 임재 하시면 “아버지, 안수집사인 제가 오늘도 술을 마셨습니다”라며
죄를 통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신 것을
사람들이 죄를 진실로 깨닫고 뉘우치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둘째,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감(presence of God)을 느끼게 합니다.
참된 부흥이 일어나면 예배당에 앉아 있을 땐 물론이거니와
예배당 근처에만 와도 하나님의 임재감이 느껴집니다.
오관석 목사님 교회가 한창 공주 태성에서 부흥 될 때에
어느 농부가 농사를 짓다가 보니 그 예배당에 불이 났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을 끄려고 양동이에 물을 담아 가지고 가까이 가 보니까
불이 아니어서 다시 멀리 갔는데 거기서 보니또 불이 붙어있더라고 합니다.
이것은 워낙 뜨겁게 기도해서 성령의 불이 붙은 것입니다.
김충기 목사님께서 반조원에서 부흥을 일으키실 때도
사람들이 예배당에만 앉으면 방언이 터지고
성령의 신령한 역사가 일어나는 강력한 성령의 임재감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와 민족에게 재물이 없고 건강이 안 좋은 게 비극이 아니라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감을 교회들이 상실해 가고 있는 것이 비극입니다.
그리고 이 비극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부흥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소서”라고 기도하며 나아가는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셋째, 영적인 활동(spiritual exercise)이 왕성해집니다.
사람들이 기도하기 시작하고 성경을 간절히 읽기 시작합니다.
주일 낮 예배에 나와 앉아주는 것만도 고마운 줄 알라는 자세로 예배에 앉아계시던 분들이
새벽기도와 금요철야에 나옵니다.
전에는 성경을 봐도 이해가 안 되던 것이 이해가 되고 깨달아지며 재밌어집니다.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봉사하게 되고
내가 가진 것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 것인 줄 깨달아 정성껏 물질로 봉헌하게 됩니다.
▲넷째, 사회에 대각성(Great Awakening)을 일으킵니다.
교회에 부흥이 일어나게 되면 사회가 변하게 되고 대각성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실제로 20세기 초 웨일즈의 로스라고 하는 동네에 부흥이 일어나니
축구 경기가 유명한 그 동네에서 1년 동안 축구경기를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하고 성경 읽는 것이 너무 재미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윗세대는 이런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젊은 세대는 이런 부흥을 대규모로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시대가 지나가기 전에 부흥을 보길 원합니다.
◑3. 왜 부흥이 필요한가?
본문 10~11절에는 ‘주의 거룩한 성읍들이 광야가 되었으며
시온이 광야가 되었으며 예루살렘이 황폐하였나이다
우리 열조가 주를 찬송하던 우리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전이 불에 탔으며
우리의 즐거워하던 곳이 다 황무하였나이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한국교회는 아직 황폐하고 황무한 광야와 같은 지경은 아닙니다.
그런데 유럽교회는 황폐하고 황무합니다.
영국 사람들은 평생에 세 차례 교회에 나간다고 합니다.
‘해치(hatch)’는 사람이 태어난다는 말인데
사람이 태어나서 팔일 째에 유아세례를 받으려고 한번 교회에 나가는 걸 의미합니다.
‘매치(match)’는 짝을 짓는다는 말인데 사람이 결혼할 때 한번 교회에 나가는 걸 의미합니다.
그리고 ‘디스패치(dispatch)’는 파송한다는 말인데
사람이 죽어서 시신이 되어 천국 파송 예배가 드려지는 걸 의미합니다.
지금 영국은 감리교, 침례교, 장로교인들을 다 합쳐도 회교도들 숫자보다도 적습니다.
이처럼 영국이 더 이상 기독교 국가라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한국에서도 불교 인구가 43%로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는데
지난 10년간 불교는 4% 증가했습니다.
그리고 천주교도 74%나 증가했으나
가장 전도적인 기독교는 1.6% 감소했습니다.
이것이 황폐의 전조입니다. 기독교가 광야로 몰렸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자기들과 다른 게 뭐냐고 묻습니다.
우리는 기독교를 비판하는 세상 사람들을 나쁘다고 하기 전에
기독교인이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줘야 됩니다.
즉, 우리는 너희하고 똑같은 죄인이지만 우리 교회에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여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씻으시며 구원하시고
이 구원의 복음을 세상에 전하기를 원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줘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냥 지금처럼 있으면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시다고
세상 사람들이 인정하질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시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주께서 하늘을 가르시고 강림하셔야 됩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이러한 부흥이 일어나도록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마치는 말
이사야 선지자는 본문 7절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우리로 소멸되게 하셨음이니이다”라며 탄식하고 있습니다.
저는 부흥을 보길 원합니다. 그런데 저 혼자만의 기도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함께 주의 이름을 부릅시다.
우리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원컨대 주여,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영혼을 성령으로 채우시고,
우리의 예배 가운데 강하게 임재하여 주옵시며,
원수로 하여금 우리와 주님이 함께 계시다는 걸 보게 하시고,
열방으로 하여금 주님의 임재를 보고 떨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우리 교회가 부흥으로 소문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고 온 세계 만방이 한국의 교회가 부흥된 것을 보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피영민 목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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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한국의 개신교인 숫자는 감소하고 있습니다.
2008년 2월에 발표된 통계청의 공식 자료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개신교인 숫자는 1.6% 감소하였습니다.
신도시나 개발지역에서 소폭 증가가 있었을 뿐이며 전반적으로 감소했습니다.
서울에서 5% 감소했고, 인천에서는 10% 감소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개신교에 대한 사회의 평판은 점점 악화되고 있습니다.
반면에 천주교는 지난 10년간 74% 이상 성장했습니다.
이처럼 한국의 개신교는 그 숫자상으로 뿐만 아니라
영향력으로도 감소를 면치 못하고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20세기에 나온 교회 성장학 책들에서 부흥의 표본은 예외 없이 한국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부흥의 표본이 아니라 오히려 그 수가 감소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21세기 한국 교회는 심각한 감소현상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부흥의 전기를 맞이해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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