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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53장 해석

LNCK 2021. 11. 4. 15:34

 

 

◈고난당하신 여호와의 종    이사야53:장        여러 설교 정리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약 700년 후에 이 땅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을 너무나도 상세하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마치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보고,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경 66권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을 이렇게 실감나게 기록하고

있는 곳이 본문 말씀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

이렇게 상세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증거 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에 충만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러한 십자가의 사건이 이루어진 것을 본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 시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생생하게 전해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고 있다는 크리스천들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까?

 

본문 말씀을 통해 예수에 대한 고난과 대속함을 다시 한 번 깊이 깨닫고

세상 속에 십자가의 예수를 전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앞선 52장에서 황폐한 이스라엘에 평화의 좋은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 소식은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식은 듣는 이로 하여금 침묵하게 만들었습니다.

소식을 접한 이들을 침묵하게 된 이유는

이전에는 들어보지 못한 소식이었고,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보고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52:장 15절입니다.

‘그가 나라들을 놀라게 할 것이며 왕들은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그들에게 전파되지 아니한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현재 이스라엘은 힘없이 바벨론에 끌려간 상황입니다.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바벨론의 권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혹독한 고통의 상황에서 깊은 숨 조차 쉬지 못하는 억울하고 답답한 때입니다.

 

그래서 기다린 메시야는 자연스럽게 영웅의 모습으로 그려졌습니다.

가장 낮고 천하던 우리를 가장 높이 들어 올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줄 힘 있는 메시야의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만국의 왕들이 경배하고 무릎 꿇는 상황에서 우쭐거리며 메시야와 걷는 것은

상상만 해도 지금의 고통을 반감시켜주는 쾌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다르게 그들에게 나타난 메시야는

아주 볼품없는 초라함 그 자체였습니다. 본문 2~3절을 보세요.

 

계속해서, 능력의 메시야를 기대하며 큰 착각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사야 선지자는 전혀 다른 메시야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 4~6절을 보세요.

 

이스라엘이 회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지난날들의 죄에 대한 분명한 해결이 선행되어야 했습니다.                  주1)

 

그리하여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죄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는 메시야임을

이사야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죄에 대한 철저한 처벌, 분명한 심판, 확실한 징계는 마땅히 우리가 받아야하건만

하나님은 그 모든 책임을 메시야에게 짊어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메시야 되신 주님은 그 책임을 묵묵히 감당하셨습니다. 본문 7~8절입니다.

 

.....................................

 

▲1절,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우리’에 대해서는

1) 이사야 선지자 자신 

2) 52:15의 ‘열방들’ 혹은 이방인들,

3) 이스라엘 백성, 특히 선지자를 포함한 이스라엘의 경건한 무리들

마지막 견해가 가장 나을 것으로 봅니다. (포괄적으로 보면, 셋 다 입니다.)

 

왜냐면 이들 ‘우리’는, 수난 받는 메시야에 대해,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하며,

또 저들의 고백은 거의 회개에 가까운데,

이것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후 새로운 깨달음을 받은

사람들의 심리 상태와 거의 유사합니다.

 

1절의 말씀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메시아에 대해서 전했건만, 믿는 자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팔(능력)이, 예수께 분명하게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믿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도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된 말씀이 분명하게 이루어졌고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셨음에도,

인간들은 믿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52 :14절 ~ 53 :12절까지 “그” 라는 단어가 33번 나오고 있습니다.

53장의 예수 그리스도(그)에 대한 고난을 깨달을 수 있는 자는,

하나님의 택하심 받은 자들만이 깨닫게 될 것입니다.

 

▲2절,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를  (11:1)

연상케 하는 구절이며, 

특히 ‘마른 땅'이란 구세주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처해 있던

비천한 상황을 가리킵니다.

 

그는 연한 순처럼 성장했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처럼 흠모할 만한 모습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지역의 나사렛이란 작은 마을에서

목수의 아들로서 나약한 집안에서 조용하게 성장하셨습니다.

특히 예수에게는 세상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고 호감을 줄만한 모습도 없었습니다.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아름다운 것이 없다는 것은

가난한 집안에서 성장한 예수는,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처럼,

옷도 남루했고, 체격도 못 먹고 자라서 마른 몸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가 그를 메시아로 볼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도 인간들의 평가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그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한 사람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은

눈에 보이는 외적인 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내적으로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평가하실 때 절대로 외모를 보시지 않습니다.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삼상16:7)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외모를 보고 판단하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우리 또한 예수를 모르면,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고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는

큰 실수를 범하는 자들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3절,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본절에서 저자는 ‘종’의 비하(卑下)를 좀 더 상세히 묘사합니다.

  

‘질고를 아는’

문자적인 뜻은 ‘병을 잘 아는’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그가 육체적으로 허약하여

이런 저런 질병에 계속 걸렸다는 것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병’은 ‘죄’를 묘사하는 비유적 술어입니다.

즉 죄로 인한 영적인 병이 더 1차적 의미라고 봅니다.

 

저자는 이미 육체적 질병을 비유로, 유다의 죄악 상태를 드러낸 바 있습니다.(1:5, 6)

따라서 성취될 구원은, 궁극적으로 죄로부터의 구원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멸시를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3절)

만약에 예수가 제사장 집 자손으로나 왕족의 자제로 태어났다면

세상 사람들은 예수를 멸시 천대하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천대와 멸시 속에서 간고를 많이 겪었다고 하였습니다.

“간고를 많이 겪었다”는 것은 가난 속에서 많은 고통을 겪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자란 나사렛에서도 배척을 당하셨고,

형제 친척에게도 천대를 받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질고를 아는 자였습니다.

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자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께 얼굴을 가리웠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에게 얼굴을 돌리는 행위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문둥병 환자에게 보이는 행동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를

문둥병 환자 보듯이 얼굴을 돌렸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하나님의 특별한 택하심 받은 자들도 오직 예수 신앙이 되지 못하면

예수를 귀히 여기지 아니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솔직히 예수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고 계십니까?

내 삶 속에서 예수가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 되십니까?

 

무게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 인생의 삶을 100kg 이라고 생각했을 때, 예수님이 몇 kg 정도 되십니까?

돈에 대한 것은 70kg 정도이고, 예수님은 30kg 정도 되십니까?

반대가 되시기 바랍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귀하게 여기지 아니하는지 아십니까?

세상 것이 더 귀하고 소중하게 여기니깐 그러는 것입니다.

 

예수를 귀하게 여기지 아니하면, 우리들도

예수를 멸시하고 천대하고 있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나의 하나뿐인 생명보다도

더 귀한 분이 예수라는 사실을 깨닫고 살아가는 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왜 이런 멸시와 천대를 당하셨습니까?> (4~6절)

 

▲4절,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우리의 질고를 지고’

‘종’이 짊어진 질고와 수난은

그 자신의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대속(대리) 개념입니다.

의로운 한 분이 질고와 허물과 죄악이 가득한 자들을 대신하셨다는 것입니다. (롬 5:17~19).

 

이것은 그 ‘수난자’가 자기 백성을 죄의 결과뿐 아니라

죄 자체에서부터 구원하셨다는 것을 함의합니다.  含意

왜냐하면 죄와 그 결과는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수난자’께서는 우리의 고난에 동참하신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안고 있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질고 때문에 십자가의 고난을 담당하셨습니다. 

질고는 병으로 고통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에게 병은 두 가지입니다.

육체의 질병이 있는가 하면 영적 질병도 있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 병을 다 치료함 받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육체의 질병은 크고 영적 질병은 소홀하게 다루는데

오히려 육체의 질병보다, 영적 질병이 더 무서운 병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육체의 질병은 약을 먹고 병원에서 수술하면 고칠 수 있는 병이지만

영적 질병은 병원에서 절대로 고칠 수 없는 병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육체의 병도, 영적인 병도, 모두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병 때문에 죽으신 예수를,

사람들은 예수가 하나님께 벌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육체의 병이든 영적인 병이든

모두 예수께 치료함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출15:26)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막16:17-18)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나의 병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을 때

그 어떤 병도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본절은 ‘종’이 고난 받은 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입니다.

 

여기서 ‘허물’이란 단순한 세상 법에 대한 위반을 포함해서,

하나님의 법에 대한 위반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로 대변되는 우리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불변적인 법에 대해서 범죄하였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그의 진노와 그 법의 저주 아래 놓여 있었습니다.

죄들은 영원한 사망을 지불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상황에서, 인간이 지불할 사망이란 요구가 ‘종’에게 떨어졌던 것입니다.

 

이런 문맥에서 볼 때 여기 ‘찔리다’, ‘상하다’등은, 단순한 상처가 아니라

죽음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하는데, 

사실 히브리어에서 이 두 단어는, 격렬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시사하는 용어들입니다.

 

‘평화’

이것은 단지 외적인 안녕과 조화뿐 아니라 그 이상의 것, 

곧 하나님과의 평화를 뜻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십자가에서 못에 찔리시고 창에 찔리신 것은.. 나의 허물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은 허물투성인 존재입니다. 허물없는 인간은 이 세상에 단 한명도 없습니다.

인간들은 상대방의 허물을 가지고 놀리고 비판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그런 허물을 없애 주시려고, 십자가에서 온 몸의 물과 피를 흘리셨습니다.

 

아브라함 같은 믿음의 조상에게도 아내를 이방 왕에게 파는 허물이 있었고,

노아에게도 홍수 후에 술에 취한 허물이 있었고,

모세에게도 사람을 살인하는 허물이 있었습니다.

 

베드로에게도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는 허물이 있었고

사도 요한에게도 자기만 살겠다고 벌거벗은 몸으로 도망치는 허물이 있었고,

사도 바울에게는 예수 믿는 자들을 죽이는 허물이 있었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의 허물도 있었습니다.

남편을 다섯 이나 바꾸어가며 살아온 사마리아 여인의 허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러한 모든 자들의 허물을 십자가의 보혈로 덮어주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어떤 허물이 있으십니까?

그 허물 때문에 내가 더 이상 예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담대히 예수 안으로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나의 허물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모두 덮어 버렸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담대하게 십자가에 나오셔서 나의 허물이었던 죄를 고백하시면

예수의 피가 나의 허물을 씻어주시고, 영적인 새로운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예수의 상함으로 우리의 죄악이 사함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이미 만신창이가 되셨습니다.

빌라도 뜰에서 채찍에 맞으셨는데 당시에 채찍 끝에는 쇠 갈고리가 달려있어서

맞으면 살점이 뜯겨져 나왔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밤새도록 끌려 다니시면서 재판을 받은 예수님은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1.5km 정도 되는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셨는데

지칠 대로 지친 예수님은 수 없이 쓰러지셨고, 결국에는 구경 나온 사람에게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하였는데 그 사람이 구레네 시몬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상할 대로 상하셨습니다.

머리에서도 굵은 가시로 만든 가시관 때문에 피가 흐르고 계셨고

등에는 채찍으로 맞아 찢겨진 살을 통해 피가 흐르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상한 몸보다 더욱 예수님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상한 마음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저지른 죄가 얼마나 무섭고 큰 죄인지도 모르고 행하는 자들을 보시고

예수님의 마음을 상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외치신 일곱 마디 중 첫 번째로 외치신 말씀이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이었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예수님이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렸습니다.

 

이 세상 속에서 진정한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세상의 것들로 내가 진정한 평화를 누리며 살 수 있다고 생각 하신다면

너무나도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속에서

인간들이 진정한 평화를 누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들에게 참 평안을 주시기 위해서

그 모든 징계를 감당하신 것입니다.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세상이 주지 못한 평안이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으심으로써

예수 믿는 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예수를 믿고 살아가고 있는 자라면

예수님이 주신 평안 속에 거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진정한 평안은 세상 어느 곳에도 찾을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안에서 만이 참 평안과 안식이 있음을 깨닫기 바랍니다.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심으로써,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4절에서 우리의 질고에 대해서 하신 말씀을 다시 반복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최고 무서운 것은 병입니다. 병에 대한 자유함을 가지고 산다면

가장 행복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육신의 질병도 무섭지만 더욱 무서운 것이

악한 영들에게 붙잡혀 살아가는 영적 질병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육신의 질병은 그래도 눈으로 볼 수 있고 내가 느낄 수 있지만

영적 질병은 내가 느끼지 못한다는 무서운 병인 것입니다.

 

오늘날 육신의 질병보다, 영적 질병에 걸린 자들이 더 많습니다.

육신이 병들면 우리는 병원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병원에서도 고치지 못할 병들이 오늘날 현대 사회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병원에서조차 병명을 모르는 병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누구에게 와야 합니까? 예수께 오셔서 고침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말씀을 의지하고 예수께 나와야 합니다.

 

(렘8:22)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 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찌 됨인고”

 

만병을 치료하시는 예수님의 피 묻은 손에 안수만 받기만 하면

그 어떤 병도 치료받는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문제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예수가 진실로 나를 위해 채찍에 맞으시고

징계를 당하셨다는 사실을 진실로 믿을 때, 하나님의 기적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 치유사역에 관한 소고

 

▲6절,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1) 우리가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다는 것은, 

우리가 죄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며

우리가 스스로 구원할 상태에 있지 못하다는 전적 부패 교리의 근거가 됩니다.

 

2) 본장에서 지금까지는 나타나지 않던 ‘여호와’가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의 죄악을 ‘종’에게 담당시킨 분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하나님의 주권 교리의 근거가 됩니다.

 

3) 여호와께서 우리의 죄악을 그분에게 담당시킴으로써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기에 필요한 것을 이루어 놓으셨다는 구원 교리 등

이상 3가지 중요한 교리가, 본 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6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뜻도 모르고

각기 제멋대로 세상 속에서 죄를 지으며 살아왔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든 죄악을 예수께 담당시키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누구든지 이러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을 깨달았다면

예수께 나오라는 것입니다. 어떤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예수께 나오라는 것입니다.

 

나오면 그 허물, 그 죄악, 그 아픔, 그 고통을 싸매시고,

세상이 주지 못한 평강을 주시고 치료하여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반복합니다.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호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7절,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본절은 고난에 대한 종의 태도를 요약해줍니다.

먼저 ‘곤욕을 당하여’는 좀 더 풀어 보면, ‘그가 자신을 곤욕당하도록 내맡기셨다’입니다.

이것은 종이 고난을 자원하여 받은 것을 가리킵니다.

 

또한 ‘그 입을 열지 않았다’는 것은

고통을 감수하고 참아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종은 고난을 자원하였을 뿐 아니라, 끝까지 인내하셨는데, 

저자는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과, 털 깎는 자 앞의 양의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8절,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곤욕’은 ‘강압’, ‘구금’이 그 문자적인 뜻인데, 

따라서 어떤 학자는 이 단어를 ‘감옥’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신약에 비추어 볼 때 ‘체포’라고 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아무튼 ‘종’은 법적인 과정을 밟아 사형 언도를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혹자는 이 같은 결과가 단순한 오판 때문이었다고 말합니다.

종종 무죄한 피고가 부당히 고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같은 결과는, 사람들이 악했기 때문입니다.

‘종’은 빛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죄로 저주 아래 있던 이 땅은, 그를 영접하지 않았고, 오히려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9절,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그리스도께서 범죄자로 낙인 찍혀 참혹한 죽음을 당하신 후

부자의 묘실에 장례된 것을 연상케 합니다. (마27:32~61)

 

이사야 선지자는, 약 700년 후에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실 때 모습을

실제로 보고 기록한 것처럼 명확히 말하고 있습니다.

수치와 천대와 멸시와 핍박을 받으실 것을 정확하게 기록한 것처럼

그 고난을 감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도, 너무나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의 예언처럼 그대로 행하셨습니다. 거짓 증인들의 심문 앞에

예수님은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했습니다.

 

거짓된 세력 앞에 자신의 의를 주장하지도 않으셨고, 변명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거짓된 세력 앞에 저항하지도 않으셨고, 악한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자신의 온유함을 지키셨습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악인으로 취급하였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의 육체를 부자의 묘에 안치케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예언대로 예수님의 시신은, 아리마대 사람 부자 요셉의 새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여러분 ! 아무리 세상이 나를 욕을 하고 비웃고 비방한다 할지라도

같이 더러운 입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때로는 억울하고 분통이 나지만

참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시고, 다 들으시고 계십니다.

(잠24:1) “너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

 

하나님은 반드시 의롭게 사는 자들이, 큰소리 치고 사는 날들이 오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비웃고 비방하고 핍박하고 십자가에 죽였던 그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AD 70년에 로마에 멸망하여 2천년 동안 나라가 없이 떠도는 방랑의 민족이 되었습니다.

 

<예수를 핍박하던 거짓 세력들은 망하였지만

예수님은 왕성케 되리라는 말씀이 10절~12절 까지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앞서 52:장 13~15절에서 말씀하셨던

‘세상이 놀래는 일’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10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하나님께서 그를 즐겨 고난당하게 하신 이유가 바로 이 구절에 담겨 있습니다.

 

속건 제물은 부채를 갚거나 또는 부과된 죄값을 만족시켜서

죄인을 자유롭게 놓아주는 목적으로 드려졌습니다. (레5:15)

 

이제 우리는 ‘종’의 비참한 죽음과 처참한 고난의 의미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의 죽음, 즉 그의 생명의 피를 쏟아 부음은

속죄를 위해 계획되고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한 희생이었습니다.

 

한편 ‘종’의 죽음이 희생 제물이었다는 말은, 

그 ‘종’이 제사장의 일을 수행하셨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종은 다른 제사장과는 달리 기꺼이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쳤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모세 율법의 제사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유일 무이한 제사로서 다른 제사의 원형이며 실체입니다.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 9:26).

 

‘그 씨를 보게 되며’

여기 ‘씨‘란 말할 것도 없이 그의 영적 후손을 가리킵니다. (시22:30).

유대 사회에서 많은 자손은 가장 큰 축복 중의 하나였습니다.

물론 살아 생전 누리는 축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종’은 죽음으로써, 또 죽어서 그 축복을 누리십니다.

 

‘그 날은 길 것이요’

이제 종 메시야는 죽음에서 일어나 승천하시고

다시 재림하신 후 영원히 그의 나라를 다스릴 것입니다. (호6:2, 롬6:9)

 

첫째는 예수께서 속건 제물이 되셨다는 것입니다.(10절)

“속죄제”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모든 경우에 일반적으로 드려지는 제사이고,

“속건제”는 하나님의 거룩한 물건이나 이웃의 정당한 권리를 침해했을 때에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러므로 “속죄제”는 죄 용서 목적을 하는 속죄의 성격이 강한 반면에

“속건제”는 권리를 침해당한 피해자의 만족을 목적으로 하는 배상의 성격이 강합니다.

 

예수님은 앞에서 자신을 속죄 제물로 드림으로 온 인류의 구속을 이루셨고,

동시에 속건 제물로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던 것입니다. 

 

그 결과로 예수 그리스도는 많은 씨를 보게 될 것이며, 예수의 날은 영원할 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게 성취하실 것입니다.

 

곧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고

하나님의 구속사를 이루는 완성이었습니다.

 

예수의 죽으심으로 이 땅에 진정한 예수의 몸된 교회가 탄생하였고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이 교회 안에서 마음 놓고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날은 이 땅에 예수님이 오시는 날까지 계속 될 것이며

이 땅에 예수님이 다시 오시므로 하나님의 뜻이 완전하게 성취될 것입니다.

 

▲11절,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자기 지식으로’

이는 ‘그(종)의 지식으로‘(by his knowledge,  KJV,  RSV), 

혹은 ‘그(종)에 관한 지식으로‘(by knowledge of him) 등 두 가지로 해석됩니다.

 

어떤 해석을 취하든 본문 이해에는 별무리가 없으나,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라는 50:4내용 등을 고려하건대, 

첫 번째 견해를 더 지지하고자 합니다.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이것은, 종이 많은 사람들을 의롭게 하시는 근거가 됩니다.

한마디로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셨다는 말입니다.

 

죄악을 짊어짐으로써, 종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완전한 의를 베푸십니다.

이렇게 주어진 ‘의’는 ‘법정적 칭의’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둘째로 예수께서 사람을 의롭게 하실 것입니다.(11절)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한다” 라는 말씀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예수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계십니까?

아무리 학식이 있고 지식이 있다 할지라도

예수를 모르고서는 의로워 질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에 대해서 다른 것은 몰라도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는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이 지식 만큼이라도

온전히 믿는다면 우리는 의로워질 수 있습니다.

 

(롬5:9)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왜 이 시대에 의로운 자들을 보기 힘듭니까?

예수의 피로 내가 구원받았고 죄사함 받았다는 사실을 잊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히3: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날마다 예수를 깊이 더 깊이 알아가는 귀한 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12절,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본장은 종의 사역에 관한 하나님의 결론적인 선포로 끝맺고 있는데, 

종이 위대한 승리자로서 전리품을 나누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그 승리는 바로 종 자신의 전부를 다 바쳐 얻은 결과였으며, 

이로 인해 범죄자들에게 구원의 빛을 비추셨습니다.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엡4:8)

 

셋째로 예수께서 승리의 분깃을 얻으셨습니다.(12절)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승리하셨습니다. 사탄의 머리를 부수시고

완전하게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 소리치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승리는 예수님으로만 끝나지 않고

우리와도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어떤 자들과 함께 승리의 분깃을 나누시겠다고 하셨습니까? 

 

1) 존귀한 자와 함께 승리의 기쁨을 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존귀한 자가 되고 싶으십니까? 존귀한 자가 곧 의로운 자입니다.

하나님은 의롭지 않는 자를 존귀한 자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2) 강한 자와 함께 승리의 기쁨을 누리시겠다고 하였습니다.

믿음의 싸움에서 지면 안됩니다. 반드시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 마다 반드시 이기는 자가 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영적 싸움에서 절대로 양보는 없습니다. 반드시 원수 마귀와 싸워 이겨야 합니다.

(히10:38)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님이 누구를 위하여 이런 고난과 수모와 천대와 멸시를 당하셨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누구 때문입니까?

너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에 이 고통, 이 아픔, 이 슬픔을 감당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단순한 죽으심이 아니었습니다.

12절 말씀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영혼까지 버리시며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또한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철저한 죄인으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6시간 동안 매달리셨는데

낮 12시가 되자 온 땅이 캄캄해졌습니다.

하나님이 예수께 완전하게 외면하신 시간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외치셨습니다.

 

(마27:46)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창세 이래로 하나님과 떨어져 본 적이 없으신 예수님이

인간의 한 범죄자로 완전하게 심판을 받으신 것입니다.

완전한 한 인간으로 인류의 모든 죄를 감당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완전하게 승리하시고 3일 만에 부활 승천하신 것입니다.

 

12절 끝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53장의 결론적인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승리하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셔서 지금도 죄인들을 위하여 중보기도 하고 계십니다.

 

(딤전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여러분! 지금도 나를 위해 중보기도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바로 알아 가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하신 예수를 모르고서는

절대로 예수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십자가의 소리가 작아지고 있고

십자가의 색깔이 변색되어져 가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갈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만이 우리의 능력이요, 우리의 자랑이며,

우리의 승리임을 깨닫는 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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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회복은 쌓아온 잘못된 것의 해결이 전재가 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습니다.

2차 대전 후에 프랑스는 나치에 부역했던 이들에게 철저한 처벌을 내렸습니다.

200만 명의 부역자를 기소하였고, 99만 명이 재판을 받았으며,

6,700명이 사형, 26,000여명이 징역형을 받았습니다.

법적으로 처벌되지 않은 사람들도 가혹한 여론의 뭇매를 받았습니다.

 

가혹하다는 의견 앞에서도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다면

내일의 범죄에 희망을 주는 것’이라고 하며 강행하였고,

그 결과 프랑스인들은 프랑스가 다시 외세에 지배를 받을 지라도

민족의 반역자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